♣복음말씀의 향기♣ No3947
8월12일[연중 제19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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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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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13xerVjlbXI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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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전 세를 받으셔야 할 주님께서 성전 세를 바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세와 관련해서 베드로 사도에게 아주 특별하고 기이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오늘 보여주시는 기적은 대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독특한 이적 사화는 아마도 후대에 가필(加筆)된 것으로 추정됩니다만,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제정해놓은 편협하고 제한된 제도나 관습으로부터 철저하게 자유로운 분이심을 강조하는 기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유다 지도층 인사들은 목숨을 걸고 성전 세를 징수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성전 세가 어떤 사람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구린 관례나 시궁창 냄새 나는 악습을 완전 개무시하는 한 표현이 지니고 있는 돈주머니에서 성전 제를 내지 말고 물고기 속의 돈으로 성전 세를 바치라는 말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는 세금 징수에 목숨거는 유다인들에게 큰 엿을 하나 먹이신 것입니다.
카파르나움 세금 징수원은 예수님께 성전세를 요구했는데, 사실 이것처럼 천부당만부당한 일이 다시 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은 이스라엘의 주님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드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도 애지중지하는 성전의 주인이십니다.
그렇다면 백성들이 바치는 성전세를 수령하실 분은 사제나 랍비들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성전세 징수원은 기가 막히게도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께 성전세를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는지,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서글프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셨던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명하신 것이 갈릴래아 호수에 가서 낚시를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세를 바치셔야 할 분이 아니라 성전세를 받으셔야 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굳이 까칠한 유다인들의 비유를 건드릴 필요가 없으니 베드로 사도에게 꽤 웃기는 방법으로 돈을 마련해 성전세를 바치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다시 한번 예수님의 지극한 겸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왕 중에도 한참 아래쪽의 왕인 세상의 왕에게 겸손하게 세금을 바칩니다. 큰 나라 전체를 다스리는 황제가 한 고을을 다스리는 영주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부여해주신 권한을 단 한 번도 남용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겸손하게 하느님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바로 그것만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따라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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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k5xHBD65Qj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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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천국을 살려면: 무분별의 지혜>
몇 년 전에 아이들과 물놀이를 가서 한참 물을 뿌리며 노는데 구석에 앉아있던 고등학교 남학생들로 보이는 아이 중 한 무리에 물이 조금 튀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하나는 기분이 매우 나쁘다는 듯 저를 째려봤습니다.
물놀이 시설에서 물속에 앉아서 얼굴에 물이 조금 튀었다고 해서 그렇게 기분 나빠 할 것이면 물 밖에 앉아있던가 물놀이를 오지 말아야 할 텐데 굳이 거기 앉아서 당연히 튀는 물에 기분 나빠하는 아이들이 마냥 신기하기만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있는 어른에게 무례하기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저의 분별심을 잠시 접고 아이들의 자존심을 상해주지 않기 위해 정중하게 미안하다고
사과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이는 학교 선생님처럼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심각한 자세로 돌아앉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행복하지 않은 것을 남 탓을 하려고 항상 준비되어 있습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심이 극도로 치솟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분별심을 없애주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셔야 한다는 것도 옳지 않다고 여깁니다. 또 성전세를 내는 것도 어쩌면 자존심 상해 하십니다. 예수님은 임금의 아들이 궁궐에서 세금 내며 살 필요가 없는 것처럼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당신도 성전에서 세금을 바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라고 명하십니다.
당신이 가진 돈을 주시지 않고 물고기를 잡아 주라고 하시는 것은 하느님께 바치는 것은 주님께서 어떻게든 채워주신다는 뜻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한화로 2만 원 정도 하는 한 스타테르 동전을 문 물고기가 베드로가 던진 낚시에 잡힐 확률은 실제로 없다고 보아도 무관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음을 모르는데 뭐를 판단하니? 너의 판단을 멈추어라!”
사람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분별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이들은 분별심이 없습니다. 부모가 다 알아서 분별해주기 때문입니다. 분별심은 ‘나’가 자신을 지키려고 선을 긋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어린아이가 독사굴에 손을 넣고 맹수와 함께 뛰노는 곳입니다. 나를 지켜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적을 때 분별심이 커지고 그 자아 때문에 사람은 고통 속에서 삽니다. 그러다 회개하지 못하면 천국 무분별의 세계에서는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뮤지컬 ‘레 미제라블’에서는 장 발장과 자베르 경감의 관계가 이야기의 중심입니다. 장 발장은 빵 한 덩어리를 훔친 혐의로 19년 동안 감옥에서 복역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 알듯이 주교님의 무분별한 자비심으로 회개하여 신분 세탁하고 존경받는 시장이자 공장 소유주가 됩니다.
자베르 경감은 법과 사람은 변할 수 없다는 생각을 깊이 믿는 완고하고 냉혹한 경찰관입니다. 그는 가석방을 위반한 장발장을 자신의 도덕적 의무로 재판에 회부하기로 결심합니다. 이때 1832년 파리 봉기 동안 장발장은 혁명가들에게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은 자베르를 죽일 기회를 얻습니다. 이미 옳고 그름의 세상에서 발을 뗀 장발장은 복수하는 대신 이렇게 말하며 그를 풀어줍니다.
“당신은 자유롭고 조건이 없습니다. 거래나 청원도 없습니다. 내가 당신을 비난할 것은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의무를 다한 것입니다. 더는 없습니다.”
이 자비로운 행동은 자베르의 세계관을 완전히 깨뜨립니다. 그는 장발장의 친절함과 그가 받은 자비와 법과 정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조화시킬 수 없습니다. 자베르의 입장에서는 죄수가 그러한 연민을 보일 수 있고 자비가 법을 초월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법에 대한 의무와 그가 받은 자비 사이의 내부 갈등에 대처할 수 없었던 자베르 경감은 궁극적으로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센 강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합니다.
나를 품고 계신 분이 정의 자체이신 분입니다. 그분의 정의는 언제나 옳습니다. 그러니 나의 분별심을 그분께 봉헌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어린이처럼 판단할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어 자비심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천국입니다. 나를 지옥으로 만드는 자아가 하느님의 품 안에서는 할 일이 없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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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가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따라서 구원받기 위해서입니다. 루가복음 19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자캐오는 구원받았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구원받았음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캐오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자캐오는 행위로써 구원받았습니다. 구원은 믿음과 그 믿음을 드러내는 행위로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죽음 이후 심판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이 땅에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늘어나고, 신자가 늘어나지만, 세상이 변하지 않는 것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대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없는 구원을 바라는 건 아닐까요? 우리는 재물과 명예 그리고 권력을 구원의 선물로 생각하는 건 아닐까요? 우리는 세상에서 성공하고, 건강하게 지내고, 원하는 게 채워지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요?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내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믿음으로 하느님께서 변하기를 바라는 건 아닐까요?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구원은 명예, 재물, 권력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마치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채우면 채울수록 더 갈증이 나기 마련입니다. 그것들을 채우기 위해서는 양심을 버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것들을 채우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버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던 아합왕이 그랬습니다. 충실한 부하 우리아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다윗이 그랬습니다. 동생 아벨을 죽였던 카인이 그랬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낙원에서 쫓겨났던 아담이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보다, 나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게 쉽다.”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은 세상의 방법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제자들은 몹시 슬퍼하였습니다. 왜일까요? 제자들은 죽음을 통한 구원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명예와 재물 그리고 권력을 줄 거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은 변하였습니다. 그리고 기꺼이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밀알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와 죽음이 없는 구원은 허상입니다. 믿음을 사랑으로 드러내지 않는 구원은 풀잎 끝에 맺힌 이슬과 같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께 우리도 십자가와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를 청하며 예전에 읽었던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며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도록/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놓아/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행복한 한 주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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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7,22-27: 성전 세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24절) 유대인들은 모두가 똑같이 이 성전 세를 반 세켈을 바쳤다.(탈출 30,13 참조) 여기서 반 세켈을 내는 것은 자신을 바치는 것을 상징하며 세켈은 구원받은 사람을 상징한다. 주님께서도 성전 세를 내라는 요구를 받으신다. 성전 세를 바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서약한 우리가 하느님의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 복음에서 한 세금 징수원이 베드로에게 와서 예수께서 성전 세를 냈는지를 물었을 때 베드로는 내겠다고 대답하고 예수께 그 상황을 보고하였다. 베드로의 말을 들으신 예수께서는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므로 다른 사람은 세금을 내어도 우리는 세금을 면제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어떻게 아들이 아버지의 집을 위한 세금을 낼 수 있겠는가 하고 반문하셨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세금을 내야 한다고 하신다. 그것은 자신의 의무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인 것으로서 신앙인은 타인에게 표양을 보여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세금 낼 돈은 어디서 구할 것인가? 복음에서 보면 낚시를 해서 첫 번째 잡히는 물고기의 입을 벌리면 은전이 들어있을 테니 그것으로 예수님과 베드로의 세금을 내라고 하셨다. 물고기는 교회의 모습이다. 이 물고기는 한때, 불신앙과 미신의 물속 깊은 곳에 사로잡혀 세속적 쾌락이라는 폭풍과 불행에 싸여 있었다. 이제 물고기는 말씀의 가르침이라는 사도들의 낚싯바늘과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1베드 2,9) 주시는 말씀의 낚시 그물에 의해 하느님께로 높이 올려진다. 물고기 입에서 동전을 취하여 세금으로 내도록 하셨다.
예수께서는 땅에서도 동전을 취하실 수도 있었지만, 호수에서 기적을 이루신다. 우리는 모두 삶의 씁쓸한 혼돈으로부터 건져진 물고기이다. 우리는 사도들의 낚시 그물에 잡혀 온 물고기와 같다. 이 물고기들의 입에는 그리스도의 고귀한 동전이 물려있다. 이 동전은 우리 영혼의 빛과 육신의 빚을 갚는 데 사용되었다. 유대인들과 다른 민족들의 빚, 가난한 사람들과 부자들의 빚을 갚았다고 할 수 있다. 똑같이 세금을 내라고 했기 때문이다.(탈출 3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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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오늘부터 두 주간 동안 평일에는 에제키엘서를 읽습니다. 에제키엘은 대략 예루살렘이 완전히 함락되기 오 년 전쯤부터 예언 활동을 시작하여, 멸망하고 십오 년쯤 지난 때까지 활동합니다. 그는 멸망 전에 사람들이 설마 예루살렘이 파괴되지는 않으리라고 믿던 때에 멸망을 선포하고, 멸망한 뒤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 구원을 선포하여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거스르는 예언자였습니다.
처음 그가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았던 때는, 이미 바빌론이 한 번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여호야킨 임금을 비롯하여 꽤 많은 사람을 바빌론으로 끌고 간 때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상황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합니다. 그들은 지금의 상황이 다만 일시적인 어려움일 뿐이라고, 유배 간 이들이 곧 돌아오리라고 생각합니다.
사제였던 에제키엘은 사회의 지도층에 속하고, 그래서 그도 유배를 가서 “칼데아인들의 땅”(에제 1,3)에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칼데아인들의 땅’에서 주님의 말씀이 에제키엘에게 내리고, 그는 거기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오늘 독서의 네 생물들에게는 날개가 있고, 또 바퀴가 있습니다.(1,15.21절 참조) 하느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만 머물러 계시는 것이 아니라 날개와 바퀴가 달린 어좌를 타시고, 어디라도 계시며 어디에서도 당신 말씀을 내리십니다. ‘칼데아인들의 땅’에 가서 살고 있어도, 하느님께서는 거기에서도 당신 백성과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허물어질 때가 머지 않았습니다. 왜 성전이 무너져야 할까요? 성전 파괴는, 하느님을 성전 안에만 가두어 두는 사람들의 생각을 허물어뜨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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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그들이 갈릴래아에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슬퍼하였다. 그들이 카파르나움으로 갔을 때,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다.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는 집에 들어갔더니 예수님께서 먼저,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 하고 물으셨다. 베드로가 ‘남들에게서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마태 17,22-27)
1)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계시하셨다는 증언입니다. <성전 세를 내신 일은 부수적인 일이고, 성전 세를 내는 일을 계기로 삼아서 당신의 신원을 드러내신 일입니다.>
‘성전 세 규정’은 탈출기 30장에 있습니다.
“인구 조사를 받는 이는 누구나 성소 세켈로 반 세켈을 내야 한다. 한 세켈은 스무 게라이다. 그 반 세켈은 주님에게 올리는 예물이다. 인구 조사를 받는 스무 살 이상의 남자는 누구나 주님에게 예물을 올려야 한다. 너희 목숨에 대한 속죄로 주님에게 이 예물을 바칠 때, 부자라고 반 세켈보다 더 많이 내도 안 되고, 가난한 이라고 이보다 덜 내도 안 된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서 속전을 받아, 만남의 천막 예식 비용으로 쓰도록 내주어라. 이것이 주님 앞에서 너희 목숨에 대한 속죄의 기념이 될 것이다."(탈출 30,13-16)
성전 세는 로마제국과는 상관없이 유대교에서 자체적으로 징수하던 세금이었습니다. 당시에 성전 세는 일 년에 한 번씩 거두었고, 그 돈은 성전 유지와 관리를 위한 비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성전 세를 내지 않느냐는 질문에 베드로 사도가 ‘내십니다.’ 라고 대답한 것은, 예수님께서 평소에 성전 세를 내셨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계시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를 비롯해서 사도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이미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본 사도들은,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자신들의 믿음을 고백했습니다.(마태 14,33) 또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 사도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의 말을 했습니다.(마태 16,15-16) 그래서 ‘성전 세를 내신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계시하셨음을 기록한 것은, 복음서를 읽는 독자들을(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믿는 믿음은, 사실은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고 믿는 믿음입니다.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 하느님과 성자 하느님은 한 분이신 하느님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0,30) 이 말씀은 비유나 상징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 말씀하신 ‘진리’입니다.>
3)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하느님이신 분이니까 성전 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데, 왜 내셨을까? 27절에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를 원문대로 직역하면, “그러나 그들이 걸려 넘어지게 하지 않도록”입니다.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다.’라는 번역은 좀 이상합니다.>
‘걸려 넘어지게 하지 않도록’은 ‘죄 짓게 하지 않도록’입니다.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은 정당한 직무 수행을 하는 중이고, 그리고 그 규정은 원래 하느님께서 직접 명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 문제나 정결 예식 문제로 바리사이들과 충돌한 일이 많은데, 그 충돌은 바리사이들이 만든 규정들 때문이었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을 ‘모범적으로’ 준수하셨습니다. 또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내신 것은 “하느님의 명령을 지키는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그리고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의 직무 수행을 존중하고 그들을 배려하기 위해서”라고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세를 낼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작은 기적’을 행하시는데, 그 기적은 “봉헌이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일”이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나의 것’은 없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주님께서 주신 ‘주님의 것’입니다. 그것을 잠시 내가 맡고 있는 것뿐입니다.
4)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니까 성전 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데 왜 내셨을까?”라는 질문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 왜 사람들 손에 넘겨져 죽으셨을까?” 라는 질문에 연결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인류를), 그리고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주셨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 일은 우리에 대한(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이(1요한 4,9-10) 우리의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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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황태웅 요셉 신부님]
<메시아의 비밀 그리고 성전세>
복음말씀에서 예수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그 한가지는 당신의 수난예고입니다. 그 내용을 다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왜 그렇게 되어야 되는지 또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반응은 그들이 기대했던 주님께 대한 실망이었고 낭패였습니다.
예수님이 늘 함께 계시며 기적도 행하고 가르침도 주시기를 바랐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하루빨리 당신 왕국을 세우고 자기들을 등용해주시기를 바랐습니다.
세상을 구원해 주실 메시아 주님께서 수난하시게 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주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하고 만류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를 대단히 나무라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네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셨습니다.
우리는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남을 위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아니니까요. 또 부활이야기를 하시지만 수난하게 될 예수님을 미리 알았다면 그 제자가 되었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 신앙생활은 마음도 편하고 또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가 원하는 것이 좀 잘되기 원해서 아닙니까?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야 된다고 하지만, 십자가는 피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제자들을 잘 알고 계시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십자가 이야기를 미리 하신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이신지 또 어떤 분이신지를 제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수난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미리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는 당신의 참모습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 빼놓고 다른 가르침이나 기적으로만 으로는 당신이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도 알 수 없고, 우리 모두를 어떻게 구원 해주실 지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적을 보고 예수님께 “당신이 주님이십니다”하고 외쳤을 때 “입 다물어라” 하셨습니다.
아무에게도 이 사실조차 말하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리신 것도 몇 번이나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메시아의 비밀”이라고 합니다.
사도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메시아의 비밀은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베드로 일행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체험한 후 성령의 내려오시자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난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알게 되고 그분의 사랑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십자가를 지기를 원하십니다. 올바르게 살아가면서 져야하는 우리자신의 모든 어려움, 이것을 이겨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것을 피하고서는 즉 우리의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는 주님을 제대로 알 수도 없고 또 주님의 제자도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주님의 수난을 만류했다가 야단맞았지만 나중에 자신의 십자가를 끝까지 졌습니다. 그래서 자기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십자가 피하고서는 참된 신앙인이 될 수도 없고, 주님의 질책을 피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메시아의 비밀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 중에 두 번째는 성전세금을 내는 문제입니다. 그 당시 유대에서는 남자가 20세가 되면 매년 성전세를 냈습니다. 세금을 내는 돈도 정해져 있었습니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그리스 돈 드락메가 아니라 유다 자기나라 돈 세겔이었습니다.
자기 나라 돈으로만 성전세를 냈던 이유가 있습니다. 우상숭배를 하지 않으려하던 그들이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다른 돈은 일상생활에서는 어쩔 수 없었지만 성전세금을 내는 데는 불가했기 때문입니다. 황제도 신으로 숭배되었으니 당연히 우상입니다.
우상이 새겨져 있는 돈, 말하자면 오늘날에는 우상이 된 돈이 성전마당에까지 들어온 것입니다. 돈 그것은 하느님을 공경하는데 도움이 되어야 하는데, 하느님이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전마당의 환전상 자판을 뒤집어 버리신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는 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성전세를 바치게 하셨습니다. 또 바칠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그 당시 성전에서 봉사하던 제관들과 다른 종사자들은 성전세를 면제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시몬아 세상 임금들은 누구에게서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냐, 아니면 남들이냐?” 베드로는 “남들입니다”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하고 확인하십니다.
그러니 주님도 또 베드로도 성전세를 면제 받는 것은 확실해졌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 없다”하시고 성전세를 바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이웃사랑의 실천입니다. 우리가 정해진 세금을 바치지 않으면, 그것이 교회 내 일 때는 교무금이 되겠습니다만 해야 할 일을 하지 아니하는 잘못도 범하겠지만, 이웃사랑을 실천하지 아니하는 사람도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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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때때로 성경 말씀이 수수께끼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도 그런 난해한 부분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두 번째 예고의 말씀으로 시작되어, 곧바로 앞뒤 맥락과 연결점이 없어 보이는 성전 세에 관한 질문과 대답이 나옵니다.
그러고는 물에서 건져 낸 물고기와 그 입 속에 담긴 동전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이는 마태오 복음에만 나오는 말씀으로, 그 뜻을 유추하고 비교해 볼 다른 성경 구절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이들은 여기서 초대 교회 공동체가 마주하였던 문제를 봅니다.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들과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이들 사이에 성전 세에 대한 입장이 서로 달랐기에, 신자들이 분열되지 않도록 유다교의 전통에 충실한 이들의 입장을 인정하였다는 설명입니다.
이와는 다르게 전체적인 맥락을 고려한 영성적인 해석에는 이런 것도 있습니다. 먼저, 우리말 성경에서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말씀의 성경 본문을 직역하면 자녀들은 ‘자유롭다’입니다.
이를 통하여 오늘 복음의 주제를 자녀들의 자유로 보는 견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자유인으로 만드셨습니다. 이 자유의 대가로 우리가 내야 할 유일한 세금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이웃에 대한 형제적 사랑이라는 세금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세금을 내기 위하여 해야 할 일은 물속에서 고기를 건져 올리는 일이었습니다. 곧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죽음과 예속의 조건에서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자유인으로 만드시고자 당신 자신을 사람들의 손에 넘기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스스로 사람의 손에 예속되실만큼 사람을 한없이 신뢰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봅니다. 갓 태어난 아기는 자유롭지 못하고, 부모의 보살핌을 필요로 합니다.
부모는 자유 의지로 기꺼이 아이를 보살피면서 스스로 아이에게 매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는 성인이 되면 자유인으로서 다시 자기 아이를 사랑하고 보살피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으로 자유를 얻은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내 자유가 예수님처럼 다른 이를 섬기고 사랑하는 자유인지 자문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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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17,24)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종교인의 과세가 시행되고 있지만 아직도 미흡한 점이 많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종교인의 과세는 정의와 형평성에서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서에도 세금에 관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태 22,17.21)라고 응답했다는 일화입니다. 여기서 황제의 것, 일명 카이사르의 것이란 다름 아닌 당시 통용 화폐,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은전을 말합니다. 또 다른 일화는, 오늘 복음의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이 베드로에게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17,24)라고 묻자, 베드로가 “내십니다.”(17,25)라고 답했다는 내용입니다. 아무튼 베드로의 답변을 통해 보면 두 경우 다 세금을 내셨던 것 같습니다.
수난 예고와 성전세 납부에 관한 일화는 분명히 별개의 사안처럼 보이는데 왜 마태오 사가는 두 번째 수난 예고와 성전세 납부 문제를 의도적으로 서로 연결했는지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마태오복음은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점입니다. 즉 복음이 기록될 당시에 성전은 이미 불타 없었으므로 성전세 또한 납부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세상의 임금들이 자기 자녀들에게는 관세나 인두세를 거두지 않는다.”(17,25)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과 성전과의 관계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하느님 신앙의 표징이자 정점인 장소이며, 모든 율법과 예언의 집합소입니다. 따라서 율법에 의해 제관들을 제외한 모든 유다인은 만 20세부터 반 세겔의 성전세를 바쳐야 하는 규정은 이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성전뿐만 아니라 모든 율법과 예언 위에 군림하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인 당신에게 성전세를 징수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들이 바로 새로운 성전이기 때문이십니다.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고,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2,19)하고 말씀하신 의도도 이런 맥락에 근거한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을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당연히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는 셈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지 않으시고 때로는 실정법에 권위를 양보하십니다. 이는 불필요한 갈등과 문제를 야기하고 싶지 않은 의도도 있겠지만 아직 당신의 때가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봅니다. 당대 성전세는 이스라엘 은전 반 세겔이었다고 합니다. 스승님도 성전세를 낸다고 베드로가 대답했기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17,27)라는 말씀을 통해 성전세를 내도록 당부하셨습니다. 사실 불교계나 개신교의 일부 스님들과 목사들을 제외하고 사실 많은 종교인은 경제적인 어려움에 놓여 산다, 고 합니다. 개인이 할 수 없으면 소속 종파에서 대신 납부하는 방안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세금은 형평과 정의의 맥락에서 접근해야 하며, 종교세는 결코 성역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예루살렘아, 주님을 찬미하라. 주님은 기름진 밀로 너를 배불리신다.”(시147,12.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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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글을 쓰기 위해 산사에 머물던 시인이 어느 날 택배를 받았습니다. 기다렸던 물건이었고, 빨리 이 물건을 볼 생각으로 택배 상자의 끈을 가위로 자르려고 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던 스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끈은 자르는 게 아니라 푸는 것이다.”
자르는 것이 편할까요? 아니면 푸는 것이 편할까요? 당연히 자르는 것이 훨씬 편합니다. 그런데 자르는 것을 선택하지 못하게 하는 스님을 보며, 별걸 다 나무라신다고 생각하면서 힘들게 매듭을 풀었습니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잘라버렸으면 그 끈이 쓰레기가 될 뿐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풀면 나중에 다시 쓸 수 있지 않느냐? 자르는 것보다 푸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인간관계처럼 말이다.”
택배 끈을 풀면 다시 사용할 수 있지만 잘라버리면 그냥 쓰레기통에 버려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의 인간관계도 정말 그런 것이 아닐까요? 인간관계를 아예 잘라버리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기와 맞지 않는다고, 자기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자기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가위로 싹둑 잘라버리듯이 관계를 잘라버리고 끊어버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택배 끈도 풀면 계속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인간관계 역시 풀어나갈 때 비로소 연결의 끈이 이어질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관계를 너무나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단 한 명의 예외 없는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성전 세’ 논란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논란은 예수님도 성전 세를 내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당시 사제와 라삐는 성전 세를 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또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은 어떤 신원으로 하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실 예수님의 몸은 성전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성전의 주인이 세금을 낸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사제와 라삐보다 훨씬 더 큰 존재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지만 때가 되지 않은 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불필요한 논쟁과 충돌을 피하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또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으려는 것이 아니라, 계속 푸시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 역시 구원의 대상이기에 자기를 낮춰서라도 관계를 푸시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 사랑을 보면서, 우리의 사랑을 바라보게 됩니다. 너무 쉽게 관계를 잘라버리려고 하지 않았나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따른다면, 우리의 이런 모습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관계는 푸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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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적절한 순서와 아량이 필요하다>
“똥이 무서워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행동이 좋지 않은 사람은 서로 상종할 수 없으니, 이쪽에서 삼가서 피하라는 뜻입니다. 물론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도 없고, 완벽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상대가 되지 않으면 때로는 기다려야 하는 아량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전세를 거두는 이가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세금은 로마 총독이 로마제국을 위해 거둬들이던 세금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자체적으로 징수하던 인두세였습니다. 스무 살 이상 성인 유다인 남자라면 누구나 해마다 영혼의 속죄를 위해서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임금들은 관세나 인두세를 남에게서 받아내지 자기 가족에게 부여하지는 않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셔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성전의 참 주인이시며 “성전보다 더 큰 분”(마태12,6)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속죄받을 필요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세도 바치셨습니다.(마태 17,27) 성전의 참 주인이신 분께서 성전세를 내신 까닭이 어디 있을까요? 그야말로 요즘 표현으로 스캔들이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세금을 내셨는데 예기치 않았던 돈으로 성전 세를 내셨습니다. 호수의 고기를 잡아 그 입안에 있던 돈으로 베드로의 몫과 주님의 몫으로 주도록 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다.’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시라는 모습에는 손상을 입지 않으시면서도 하느님께는 영광이 드려지며 인간의 비위는 조금도 건드리지 않는 모습에 참 지혜를 만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꼬인 사람에게는 우선은 한발 물러서는 것이 좋습니다. 원리(原理)는 소중합니다. 그러나 실천하며 살아가는 데는 적절한 순서와 아량이 필요합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일상 안에서 많은 일들을 접하면서 그때마다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지 않은지 신중히 고려해야 할 상황들이 있습니다. 아주 분명하고 명확하게 말하거나 일관되게 행동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릇이 되지 않는데, 시간을 허비할 필요 없습니다. 더더욱 비굴하게 물러서는 것 같이 보이는 때 정말 참 지혜가 필요함을 절감합니다.
때로는 비유를 들고, 때로는 비유를 해설해 주시던 예수님, 손가락에 침을 발라 눈을 닦아주시고, 귓구멍을 열어주시던 예수님, 일어서라고 하시며 손을 잡아주시던 예수님,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라 하시던 사랑의 예수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내 생각을 앞세우지 않고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넉넉한 마음으로 지혜를 갈망하는 날 될 수 있길 희망하며 눈높이를 맞춰가는 가운데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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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사람>
마태오 17,22-27 (수난과 부활에 관해 두 번째로 예고하시다, 성전 세를 바치시다)
제자들이 갈릴래아에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슬퍼하였다.
그들이 카파르나움으로 갔을 때,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다.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는 집에 들어갔더니 예수님께서 먼저,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 하고 물으셨다. 베드로가 “남들에게서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하느님의 사람>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마태 17,27)
빛은
스스로
밝다하지 않으며
다만
어둠 속 깊이까지
스며들 뿐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높다하지 않으며
다만
우러르는 이를
보듬을 뿐입니다
땅은
스스로
넓다하지 않으며
다만
모든 이 깃들게
내어놓을 뿐입니다
물은
스스로
자유롭다하지 않으며
다만
모든 이보다 낮추어
흐를 뿐입니다
사람은
참으로
하느님의 사람은
스스로
드러내지 않으며
다만
모든 이를 비추고
모든 이를 보듬고
모든 이에게 내어놓고
모든 이보다 낮출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계시니
그러할 뿐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이니
그러할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계시도록
그러할 뿐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이도록
그러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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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오늘 복음의 전반부는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인간들이 예수님을 죽일 것이지만, 결국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일으키실 것이라는 사실이 명확히 제시되고 있습니다. 곧 하느님의 계획, 하느님의 승리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선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미리 알려주심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이 그저 우연히 발생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계획하신 섭리임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당신께서 하느님의 그 계획에 기꺼이 동의하시고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제자들에게 수난에 대한 준비와 부활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시는 제자 교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는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내시는 장면입니다. 성전세는 모세가 “누구나 자기 영혼의 속죄를 위하여 주님께 반 세겔을 내야 한다.” (탈출기 30,13)고 말한 대로, 영혼과 육신의 속죄를 위해 내는 세금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금은 자신이 다스림을 받는 왕에게 내는 것임을 일깨워주면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이니 성전세를 면제받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십니다. 곧 ‘어떻게 아들이 자기 아버지의 집을 위한 세금을 낼 수 있겠느냐?는 반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먼저 당신께서 성전의 주인이심을, 그리고 당신의 자녀들도 성전세로부터 자유로움을 밝히십니다.
그렇게 하시면서도 성전세를 내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사랑입니다. 자신이 옳긴 하지만, 무모한 분쟁을 가질 필요가 없기에 지혜로운 방법으로 세금을 내기로 하십니다. 곧 세금 낼 돈을 호수로 가서 낚시를 해서, 먼저 잡힌 물고기의 입을 벌려 거기에 들어있는 은전으로 세금을 내라고 하십니다.
이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당신의 놀라운 권능을 드러내십니다. 당신께서는 땅에서도 동전을 취하실 수도 있었지만, 호수에서 그 기적을 이루십니다. 물고기는 교회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한 마리의 물고기입니다. 당신 생명의 호수를 헤엄쳐 다니는 한 마리의 물고기입니다. 당신 사랑의 파도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물고기입니다. 당신 그물에 걸려든 한 마리의 물고기입니다.
그리고 제 입에는 당신 형상이 새겨진 고귀한 동전이 물려 있습니다. 당신 말씀이 물려 있습니다. 제가 당신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 생명의 말씀이 저를 먹여 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 영혼을 당신께 바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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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샘 기도>
주님!
저는 당신 생명의 호수를 헤엄쳐 다니는 한 마리의 물고기이오니,
당신 형상이 새겨진 고귀한 동전을 입에 물고
당신 파도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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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분별의 지혜와 사랑>
-겸손한 삶-
“주님을 찬미하라 하늘로부터 높고 높은 곳에서 찬미들하라.”(시편148,1)
찬미의 종교요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찬미의 사람들인 우리들입니다. 어제 제 고향집이 구암리카페로 변했다는 사실에 흥분했지만 웬지 모를 참 미묘한 느낌이 떠나지 않았고 지금도 그러하고 아마도 평생 그러할 것입니다. 결코 쉽게 판단할 일이 아니기에 깊고 긴 침묵속에 담아둬야 할 것 같습니다.
분별의 지혜와 겸손한 사랑은 함께 갑니다. 참으로 이런 이들은 판단을 보류하며 침묵하며 하느님께 맡깁니다. 공동생활에서도 참 필요한 겸손한 사랑, 분별의 지혜입니다.
김훈의 소설에서도 겸손과 지혜를 발견합니다. 이런 내용을 자주 발견하는데 연륜에서 오는 겸손과 지혜일 것입니다.
“이승훈의 죽음과 형식에는 순교와 배교가 합쳐져 있다. 그는 고문과 순교의 과정을 배교로 마감하고 참수되었지만, 그의 최후의 내면이 배교인지 순교인지는 달레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만이 아신다. 정약용의 신문과정은 그가 천주교 지도자들과 동료 지식인을 고발한 대가로 사형을 모면했으리라는 정황을 보여주지만 증거는 없다. 형틀에 묶여서 고문당하고 있는 인간의 육성 진술을 놓고 신앙의 순수성을 따지는 언설은 무의미해 보인다.”(김훈, 허송세월 232쪽)
겸손한 지혜와 연민이 배어있는 통찰입니다. 특히 사람의 경우는 삶 전체를 깊이 들여다 보면서 일체의 판단을 보류해야 할 경우가 참 많습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에서도 지혜로운 통찰이 빛납니다.
“마음이 자세에서 드러나듯 몸가짐 또한 마음에 스며든다. 마음의 안정을 원한다면 먼저 몸가짐부터 정돈하라.”<다산>
“얼굴이 단정하면 마음도 경건해 지니, 옷매무새와 띠를 항상 단정 해야 한다.”<관자>
이 또한 겸손한 삶의 지혜이자 예의입니다. 결코 마음따로 몸따로의 삶이 아닙니다. 어제 교황님의 삼종기도후 강론중 일부말씀과 평화를 호소하는 메시지 핵심 내용 또한 우리 마음의 귀를 기울이게 합니다.
“우리의 편견에 기초해 있는 믿음이라면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 참된 믿음과 기도는 정신과 마음에 열려있다. 너희가 정신과 기도가 닫혀 있는 사람을 발견할 때, 그의 믿음과 기도는 참되지 않다. 마리아여, 우리가 주님의 목소리를 믿음으로 듣고, 그분의 뜻을 용감히 실천하도록 도우소서.”
“평화를 위한 우리의 강렬한 기도를 새롭게 합시다. 특별히 우크라이나, 중동, 팔레스틴, 이스라엘 그리고 미안마를 위해!”
교황님의 시야는 세계 곳곳에 열려 있음을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의 자제력과 분별의 지혜가 빛납니다. 이 또한 겸손한 사랑의 반영입니다. 아버지와 깊은 일치의 삶이 바탕이 되고 있음을 봅니다. 주님은 수난과 부활에 대해 두 번째 예고하며 자신은 물론 제자들의 마음 가짐을 새롭게 합니다.
주님은 분명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면서 오늘 지금 여기에 집중했음을 봅니다. 제자들은 몹시 슬퍼했다는 반응입니다. 예수님 또한 제자들의 심중을 이해하면서 일체의 판단을 보류한 채 이런 현실을 겸손한 침묵중에 깊이 담아뒀을 것입니다. 이어 성전세를 바치는 문제로 국면을 전환합니다.
주님은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여 주님의 자녀들이자 제자들이 성전세에서 자유롭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겸손히 성전세를 내도록 말합니다. 흡사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치라’(마태 22,21)는 말씀을 연상케 합니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스타테르 한 닢을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여기서 물고기 예화의 자연이적은 처음부터 대담에 깔려 있지 않았고 후대에 첨부됐을 것이라 해서 생략했습니다. 그러니 자연이적은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굳이 해석을 한다면 하느님을 닮은 예수님의 초인적 능력은 곳곳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탁월하다는 것일 겁니다.
오늘 에제키엘 예언서에서 계시되는 자유롭고 겸손한 사랑의 하느님 모습이 친근감이 가고 감동적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안에 갇혀있는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들의 고난의 현장에서 함께 하시는 현장의 하느님, 역사의 하느님이심을 보여줍니다.
바빌론 유배중 크바르 강가에서 만나는 에제키엘의 하느님입니다. 이제 하느님은 바빌론 유배중인 백성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 에제키엘 메시지의 핵심 주제입니다. 바로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교회 안에서 하느님 현존의 전조(前兆)가 되고 마침내 하느님의 백성은 성전이 됩니다. 하느님의 겸손한 사랑의 극치이자 절정입니다.
바로 내가, 우리가 있는 지금 여기가 주님이 현존하시는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온갖 피조물에서 발견하는 하느님의 영광이니 온세상이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그래서 어느 신비가 시인은 고백합니다.
“세상은 하느님의 장엄함으로 가득차 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그분의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을 계시하면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의 눈을 열어 보는 것을 배우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에제키엘 같은 묵시적 비전이 아니라, 우리가 정말 볼 수 있다면 황홀하게 하는 아름다움에 에워싸여 있음을 알것이다.”
그대로 “주님의 영광 하늘과 땅에 가득하네.”라는 오늘 화답송 후렴과 일치합니다. 우리가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야 할 자리는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우리가 있는 곳이 주님이 함께 계신 거룩한 성전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겸손한 사랑 중에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며, 언제 어디서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살게 합니다.
“너희는 주님 이름 찬미들 하라. 당신의 이름만이 홀로 높으시도다. 하늘땅 아득 높이 찬란하신 그 영광!”(시편 148,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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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요한 6,51)
<재육화(再肉化)의 삶!>
오늘 복음(요한6,41-51)은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요한 6,41)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유다인들이 수군거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끼리 수군거리지 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43-44)
"나는 생명의 빵이다.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요한 6,48.50)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예수님의 이 말씀을 믿는 사람은, '이제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받아 모시고 또 하나의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이들의 삶'인 '재육화의 삶'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페 4,30-5,2)는 우리가 살아야 할 '재육화(再肉化)의 삶의 모습에 대한 말씀'입니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용서하십시오. 그리스도께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에페 32-5.2)
연일 폭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구촌의 이상 기후가 심각합니다. 우리의 잘못인 '온실 가스로 인한 지구 온난화의 결과'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서로 사랑하면서 '재육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녀 글라라와 성녀 수산나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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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자녀들은 면제 받는 것이다."(마태 17, 26)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질 수 없는
부모와 자녀들의
관계입니다.
어버지 하느님께서는
자녀들의 것을
빼앗는 분이 아니라
소중한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사랑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현실의 토대 위에서
지혜롭게 우리를
하느님의 나라의
자녀임을 자상하게
가르쳐주십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세상을 등진 이들이
아니라 더 좋은 세상을 위해
노력하고 참여하는 이들입니다.
먼저 순종하고
먼저 충실해야 할 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상적 실천을
강조하십니다.
우리의 신앙 또한
비현실적이지
않아야 합니다.
구체적이고 보편적인
작은 실천이 신앙인의
참모습일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께
내어드려야 할
시간에 충실한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수동적인
삶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삶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느님의 자녀라는
엄청난 선물을 발견했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은
가장 귀한 것이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임을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면제 받는 것이
많을수록 그 책임 또한
막중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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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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