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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록 실중어요(室中語要) 56. 해와 달, 뭇 별들이 땅 위에 쫙 깔렸다. 보이느냐?
[한 때 운문선사가 법을 보이셨다.
스님께서 하루는 불자를 잡고 한 번 흔들더니 말씀하셨다.]
우리가 아는 선어록이라고 하면 아주 큰 선지식이 법당이나 법석을 차려놓고 사부대중을 위하여 설법하는 것을 연상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나오는 운문선사의 법은 실중어요를 모아놓은 말들입니다. 실중어요는 사찰내에서 일상생활 속에서 법석이나 법당에 올라서 상당법문을 하는 것이 아니고 차를 마시다가 식사를 하는 중에 아니면 포행을 하면서 이른 언제 어디서나 당연히 의복은 법복을 항상 입고있을 것이며 주로 다닐 때는 주장자를 들고 다니실 것이고 방장실에 주하고 있을 때는 좌우 상좌들이 배석하고 손님이나 방문객이 있을 때도 항상 방장실에서 근무하듯이 그렇게 앉아 계십니다. 그 때 한 마디 하고 말씀이 있으면 함께 있는 식솔들을 향하여 일거수 일투족과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갑자기 법을 보이시는 것을 정리하여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향상일구도 하시지 않고 불자를 한 번 흔들더니 좌장과 우장이 보필하고 있는 가운데서 그냥 한 마디를 하기 위하여 불자를 흔들어 자기의 위상을 먼저 보이시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첫 향상일구는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해와 달, 뭇 별들이 땅 위에 쫙 깔렸다. 보이느냐?"]라고 하십니다. 이 무슨 뚱딴지같은 말입니까?
말에는 물론 순리적인 말이 있고 직설적인 말도있고 역설적인 말도 있고 거짓말도 있고 형이상학적으로 무수히 많은 방법을 통하여 설하지만 오늘의 말은 나와 상대된 대경에 대하여 한 말씀하는데 참으로 들어도 무슨 말인지 알수 없는 말을 합니다.
“해와 달, 뭇 별들이 땅 위에 쫙 깔렸다. 보이느냐?"라는 말을 한 번 분석해 보면 ”해와 달, 뭇 별들이 땅 위에 쫙 깔렸다. 보이느냐?" 어찌 해와 달은 허공에 떠있고 별들은 밤에만 빛그림자를 통하여 드러나는 것인데 무슨 땅 위에 쫙 깔렸다라고 하시는 것은 전혀 맞지도 않고 도리와 이치에 맞지도 않는 말을 해 놓고는 보이느냐?라고 하십니다. 우리 납승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언어도단(言語道斷)입니다. 말에는 그 어떤 진리도 실상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운문선사의 헛소리가 과연 헛소리일까요?
ㅎㅎㅎㅎㅎㅎㅎㅎ여기서 한 마음 회광반조(廻光返照) 해 보십시오.
지금 여기서 실내입니다. 우리가 느끼고 감각하는 마음에서 본다면 전혀 헛소리이지만 항상 지금 여기에 있는 그대로 일 뿐인 찰난간의 감각(感覺)이란 견문각지(見聞覺知)는 다 헛것이란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대들이 한 생각 일으킴은 다 헛것이란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견문각지는 먼저번에서 다 설해 드렸습니다.
그럼 눈앞에 펼쳐진 관념과 사상과 철학과 종교는 다 견문각지며 본심은 이 펼쳦진 삼천대천 세계을 어떻게 실내에서도 어둠속에서도 펼쳐진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그 생각의 본심은 무엇입니까? 바로 저장식이요 함장식이며 종자식(種子識)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보고 본식(本識)이라 합니다.
그럼 그 아뢰야식인 제 팔식(八識)을 보고 본식이며 근본식이며 종자식이라고 하는 것은 이것을 아상(我相) 인상(人相) 수좌상(壽座相)이요 중생상(衆生相)이라는 것을 진리이며 실지한다고 착각한 것을 나라하고 인간이라 하고 목숨이라는 것도 있다고 하고 나는 중생이라는 상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이 진리에 입각한 바른 안목과 바른 자연에 법칙과 우주의 법칙에 여여한 진여실상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부 자기의 관념으로 받아 사량분별하고 사유하여 이것이라고 결정하여 기록한 자기적 판단이라는 것입니다,
이 전체가 조작되고 사량분별된 나라는 상이 만들어 낸 것이니 전부 조작된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른 아뢰야식도 전부 전도몽상(轉倒夢想)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면 바로 깨달음이요 이것이 한 생각 일으나면 다 법이 되지만 그래서 나라는 상도 거짓이고 법도 본래 다 조작된 것이라는것입니다. 이것을 삼법인에서 말하는 제법무아(諸法無我)인 것입니다. 그래서 동양 11조이신 임제선사는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설법에 속지 않는 한 사람을 찾고 있었으나 찾지를 못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선지식이라고 한 마디를 하면 바로 할을 하거나 침을 뱃아버리고 돌아서고 아니면 발로 차버리고 밥상이오면 밥상을 엎어버리듯이 다 헛소리이니 듣지 말라는 뜻이였다. 말기에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문을 닫고 밖간 출입도 안하고 있다. 열반송에서 맏상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법이 사라지지않도록 하라.라고 삼성스님에게 당부를 하였습니다. 그랳더니 삼성스님은 “악”하면서 “할”을 하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법이 이 눈먼당나귀한테서 사라지는 구나”하시고는 열반에 들었습니다. 이것이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열반송을 했습니다.
그러니 이 운문선사의 말씀은 마음으로 그려 보라는 뜻이지 그 본식마져 헛소리이며 내 말도 헛소리임을 밝혀 드렸습니다. 돌~~~!!!
이 말씀을 하고 나서 이렇게 말후구를 했습니다.
[한참 잠자코 있다가 몸을 일으키면서 말씀하셨다.
"얼마 있다가 그대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것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참 잠자코 있다가 몸을 일으키면서”라고 하신 것은
“한 참 잠자코 있다가”라는 것은 가만히 앉아 있으도 마음은 항상 작용을 하고 있으며 몸으로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니 해도 함이 없는 무위법(無爲法)을 드러내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켜”라고 하신 것은 환화공신인 몸을 어디에 있어 일으키고 행주좌와 어묵동정에서 하고있는 것은 다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본체인 마음을 일으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는 말후구를 이렇게 하십니다.
[조금 있다 그대들의 눈알이 뛰어나올 것이다.]라고 하신 것은 몸에서 한다고 들어면 그대들은 다 헛것을 본 것이다.
오직 그대 마음은 그 실상을 보려고 눈으로 보려고 눈알이 뛰어나와 삼천대천 세계를 찾아 뛰어나와 경계를 살펴보려고 한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몸과 마음이라는 양변이 몸이 마음이고 마음이 몸이라는 불이법으로 알아차리면 바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운문선사의 한 마음 일으킨 것은 다 헛소리를 통하여 헛소리 속에 숨어 있는 근본 뜻을 알아차려 한 소식 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끝으로 조사선의 삼대원칙인 언어도단(言語道斷)에 대하여 말을 하면 이미 틀렸다라는 화타(話墮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알아야만 바른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아야만 바른 안목을 기러는 것이라 이 말의 허구성인 화타에 대하여 논술적으로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화타(話墮) 말에 떨어지지 말라
'생각이전", '비이원성', '공', '무심', '진여', '그것'... 등은 규정되지 않는 그 무엇이지만, 부득이 분별을 기반한 언어로 대상화(규정) 해 표현할 수 밖에 없다.
화타(話墮)는 '말에 떨어지다'라는 뜻으로, 말이나 언어에 사로잡혀 그 너머의 본질을 놓치지 말라는 선어(禪語)이다.
'말에 떨어지지 말라는 화타(話墮)'는 '생각이나 언어에 집착하지 말고, 말 너머의 진리를 직접 체험해 보라'는 뜻이다.
깨침을 '논리적 분석(分析)으로만 접근하지 말고, 직접적 직관을 통해 답을 찾으라는 간절한 선(禪)의 경책의 말이다.
마조대사 "도불용수(道不用修) 단막오염(但莫汚染)" 도는 닦을 필요가 없다, 다만 물들지 않으면 된다. 즉 일어나는 생각의 '내용물'에 빠지지만 않으면 된다(에고에 빠지지만 않으면 그게 해탈이다).
반야심경에 '그러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는 것을 고심무가애(故心無罣礙)’이다.라고 표현 합니다.
"도는 닦을 필요가 없다는 도불용수(道不用修)"라는 사실을 알더라도, 수행할 '나'가 없다 무아(無我)라는 사실을 체득하지 못하면, 그 경험은 삶의 현장에서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휘둘리게 됩니다.
생각하지 않아도 분명한 이것!
말꼬리 잡고 늘어지지 말라의 화타(話墮). 일정한 언어학적 분석은 매우 유용하고 깊은 통찰을 줄 수는 있다.
말에는 깨달음(道)이 없나니. 말에 있지 않고 말 너머에 있다.
그러니 오히려 자기가 말에 잡혀있는지? 알아차림이 더 중요하다.
말과 언어에 대한 분석(分析)이 바로 '생각놀음'이다는 것이다.
그 어떤 것도 하나의 가치를 추구하면, 다른 건 반가치가 된다. 추구할 바 없는 가치가 참된 가치이다.
도(道:깨달음)가 말과 글 속에 있는 건 아니지만, 말과 글이 아니면 전(傳) 할 수가 없다. 결국 전달(傳達)은 말과 글이다. 그것마저 무시한다면 우린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말과 글이 가지고 있는 언어적 한계점(限界點)은 분명 있을 수 있다. 이 점을 염두(念頭)해 두어야 할 것이다.
말과 글은 어쩔 수 없이 쓰는 필요불가결(必要不可缺)한 것으로 불가피(不可避) 하게 사용합니다.
이건 비판받을 오류가 아니라, ‘표현상의 마지막 응어리’로 조심스럽게 짚어야 하는 지점이다. "말 자체는 정직하지만, 그 말이 구조를 갖는 순간 중심은 되살아난다.
이건 논리적 오류가 아니라, ‘무아 이후를 말로 담으려는 순간 생기는 표현의 구조적 남김’이다.
그리고 버나뎃은 이 구조가 중심을 살려내는 방식이라고 본다."
AI 분석은 자기 자신에게 긍정적(肯定的)인 면과 부정적(否定的)인 면을 동시에 줄 수 있다는 점이다.
긍정은 언어학적 날카로운 분석은 매우 깊은 통찰을 줄 수도 있고, 부정은 오히려 자기가 말에 잡혀있는지즉 화타(話墮)? 알아차림이 더 중요하다. 말과 언어에 대한 분석이 바로 "생각"이다는 것이다. 흔히들 말하는 병 주고 약 준다.
말에 떨어지지 말고, 깨침을 논리적 분석으로만 접근하지 말고,
직접적 직관을 통해 그 깨달음을 찾으려는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
깨침의 핵심은 "자아(自我)가 사라짐을 의미한다." 의미한다는 나가 뒤에 있다. 이렇게 따지면 한도 끝도 없다.
다만, 무아(無我)에 대한 과도(過度)한 논쟁(論諍)이나 잡착(執着)은, 오히려 깨달음에서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사랑, 덕(德)과 자비심(慈悲心), 정직(正直)과 진실(眞實)이 오히려 더욱 중요한 명제이다. AI가 있어 세상은 넘 좋아졌다. 분석(分析) 검증(檢證)이 가능한 시대라는 것이다.
이 공부(工夫) 하시는 분들에게는 매우 귀중(貴重)한 노정(路程)의 자료(資料)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다만 동시에 '자기가 말에 잡혀있는지(話墮)? 알아차림이 더 중요하다는 지점이다.'
깨침을 '논리적 분석으로만 접근하지 말고, 직접적 직관을 통해 깨달음을 찾으려는 태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깨달음은 이미 여기에 있으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착각에서 깨어나는 것뿐입니다. 깨달음은 더 나은 자아가 되는 게 아니라, 자아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때 삶은 설명하지 않아도 명확하고, 붙잡지 않아도 충분하다.
식지즉시망(識知即是妄), 불식즉무기(不識即無記).
안다고 하면 망상이 되고, 알지 못하면 무기에 떨어진 것이다.
이 말은 언어적·개념적 사유에만 매달리면 망상에 떨어지고, 그렇다고 사유를 완전히 포기하면 무기(혼침 내지 무자각, 몰지각)에 떨어진다는 양극단의 위험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그 너머를 직지하는 중도적 지혜를 암시한다.
1. 임제 선사(臨濟義玄,?~866)는
그대들의 눈앞에 분명이 드러난 전체는 어디에도 없는 그 놈(참사람)에게 비롯된 것이다.
그대들의 눈앞에 분명히 보이는 이놈이 바로 길 없는 곳에서 온 진인이다.
여등제인목전현성(汝等諸人目前現成) 시종무위진인처래(是從無位真人處來). 임제는 이 말을 통해 언어로 묘사할 수 없는 ‘무위의 진인(無位眞人)’, 즉 본래면목은 언어 이전, 지금 여기에 이미 드러나 있음을 가리킨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로 가리키는 선사의 역설에서 락초자비(落草慈悲)를 본다.
2. 담계(曇噩)선사의 시(詩)
언어도단절사려(言語道斷絶思慮) 말이 끊어지고 생각도 멈춘 자리,
불락유무이단상不(落有無離斷常); 존재도 비존재도 아닌 곳,
돌(咄)!약이설두촉저자(若以舌頭觸著者),아악!, 혀끝으로 그것을 건드리려 하는 놈은 편시할려아진허풍(便是瞎驢兒趁虛風).눈먼 당나귀가 허풍 쫓는 격일세.
이 시(詩)는 언어로는 닿을 수 없는 경지를 묘사하면서도, 시(詩) 자체가 언어로 구성된 점에서 이미 언어의 역설적 쓰임을 보여준다.
3. 혜능 선사(六祖 慧能)의 《육조단경》
"불법은 무념(無念)을 종지(宗旨)로 삼는다. 무념이란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者가 없기에)생각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혜능대사는 "무한히 생각하고 말을 해도 말하고 생각하는 자(者)가 없기에 무념(無念)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무념'은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언어와 생각이 일어나되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 자유로운 경지를 뜻한다. 언어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사용하는 실용주의적 태도가 드러난다.
이러한 선사들의 어록과 시는, 언어가 진리를 가릴 수도 있지만 동시에 진리를 가리키는 손가락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언어를 도구로 삼되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 것, 이것이 곧 선(禪)의 언어관(言語觀)이며 중도정견(中道正見)의 실천이다.<담선사>
성불인연 맺으소서 옴 바아라 믹~~~~~~~~!!!!!!!!!!!
조사선(祖師禪) 운문록(雲門錄)을 들어시어
인연성불(因緣成佛) 하시어서 붓다(佛陀) 같이 살아가소!
일승법문을 시절인연삼아 인연성불 하옵시고 대원성취 하옵소서 !
원오선원 명상쉼터 천안시 두정동 611_1번지 5층(041)551 8546
무명 납승 원오선사 010 8748 6006 옴~바아라 믹!!!_()_
탁발성원 보시구좌 농협 351 1042 1598 93 대한불교 정토회

첫댓글 조사선(祖師禪) 운문록을 통하여 한국불교 1300년의 선사중에서 선어록의 해설서를 쓰신분은 처음입니다. 조사선(祖師禪)의 보설을 통하여 인연성불 하시어서 본불본락 하옵소서 옴~바아라 믹!!!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