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마산 시민들이 봉기했다. 이날 시위는 민주당이
주도했으며, 수천명의 마산 시민이 가담했다.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7명이 죽고 870명이 다쳤다. 그리고 이 날
고등학생이었던 김주열이 실종되었다. 김주열의 시체는 4월 11일에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이승만과 자유당은 부통령으로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최악의 부정 선거를 감행했다. 야당인 민주당의 강력한 후보였던 조병옥이 하와이에서 병을 치료한 후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사망하자
대통령은 이승만만 단독 입후보하게 되었다. 문제는 부통령 자리였다. 당시 이승만의 나이가 85세였기 때문에 부통령이 실질
대통령이었다. 당시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는 장면이
었다. 4년 전인 1956년 대통령 선거때 이기붕은 장면에게 패했었기 때문에 자유당은 경찰 및 공무원 조직을
동원하여 희대의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하지만 결국 이 부정선거로 4.19 혁명이 벌어졌고, 이기붕 일가는 권총으로 자살하고
이승만은 하야 후 하와이로 망명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로 다시 한 번 민주주의
암흑기를 겪어야 했다.
그 첫번째 단추를 꿴 사람들이 마산 시민들이었던 것이다. 3월 15일 그날, 마산시 민주당 간부들은 투/개표소에서 경찰 및
공무원들이 부정선거를 자행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10시 30분 선거 포기를 선언하고 시위를 준비했다. 민주당 중앙당도 오후 4시
30분에 “3·15선거는 선거가 아니라 선거의 이름 하에 이루어진 국민주권에 대한 포악한 강도 행위”라고 규정하고 불법, 무효임을
선언했다.
저녁 7시 30분, 마산시 민주당 당사 앞 수천 명의 시민이 모였다. 민주당 의원 정남규를 중심으로 한 민주당 간부들이 앞장 서서
가두 행진을 하며 이승만 정권의 부정 선거를 규탄했다. 경찰이 정남규 의원 및 당 간부들을 연행하여 시위 해산을 시도했으나
오히려 시민들의 숫자는 늘어나 밤 9시가 되자 10,000여명으로 불었다. 당시 마산시 전체 인구가 157,547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참가자 수다.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시민들은 돌을 던지며 저항했지만 도망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찰의 총격에 쫓기면서도 자유당 당사,
서울신문 지국, 국민회, 남성로파출소, 파출소장의 집, 자유당 의원 허윤수의 집을 파괴했다. 허윤수는 민주당으로 당선된 후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겨 배신자 소리를 듣고 있었고, 강경진압을 요구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이 과정에서 고등학생 김주열이 실종된
것이다.
이승만은 시위가 어김없이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특정 세력들이 무책임하게 남발하는) 공산당이 주도한 것이라는 배후음모설을
주장했고,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은 기자들에게 "총은 쏘라고 준 것 아닙니까?"라고 경찰 발포가 당연하다는 투로 대답했다. 그래서
이기붕은 아들 이강석에게 권총으로 사살된 모양이다.
어쨌거나 이 날 있었던 이승만 독재 정권의 폭거와 장기 집권을 노린 부패 기득권 세력의 부정선거라는 큰 흐름 속에서 마산 시위,
그리고 최루탄이 얼굴에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른 김주열의 시체, 그리고 4월 18일 종로에서 백주 대낮에 고대생들을 감행된
정치 깡패들의 폭력이 도화선이 되어 4.19 혁명이 터졌던 것이다.
사건 발생 후 9년이 지난 1969년, 마산시는 마산시 구암동의 애기봉 일대에 1,200평으로 사건 당시 희생자의 묘역을
조성했다. 1994년 희생자 묘역 성역화 사업 추진을 결정한 후 1996년에 계획이 확정되면서 1998년 3월부터 공사에 들어가
시위 43주년이 되는 날인 2003년 3월 15일에 개관했다. 2002년 7월 22일 마산시가 묘지 관리권을 국가보훈처로
이관하였고, 이후 8 월 1일에 국립 묘지로 승격되었다. 국립묘지 관리소는 9월 11일에 국립 묘지 관리소가 설치되었다.
국립묘지로 개장한 2003년, 경상남도에서는 도 조례 3017호를 통해 매년 3월 15일을 기념일로 지정했으며, 2010년 3월
9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3.15의거를 국가기념일로 정하는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 일부 개정령안'을 의결하고,
3월 12일에 공포하여 3.15 마산 시위는 이제 한국 민주화 운동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 되었다.
▶참고자료
[키워드] 마산시, 3.15 부정선거, 김주열, 이승만, 이기붕, 부정선거, 민주화 운동
[분야] 한국 민주화 운동, 대한민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