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淸)에 끌려간 조선인 포로 60만
조일전쟁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는 수만 명 정도였는데, 병자호란 때 심양(瀋陽)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는 60만명을 헤아린다.
지금도 만주의 선양에는 많은 조선족이 살고 있는데, 이중에는 일제 때 건너간 사람 말고 병자호란(丙子胡亂)때 끌려간 조선 포로의 후예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청(淸)은 포로들의 속환금을 받을 생각과 적은 만주의 인구를 늘리려는 목적으로 이렇게 엄청난 수의 포로를 잡아갔다.
'뒷날 심양에서 속환(贖還)을 바치고 돌아온 사람이 60만 명 이나 되는데 몽골군사에게 붙들린 사람은 숫자에 들지 않는다.'
<병자록>의 기록이다. 이 숫자에 대한 기록은 최명길의 <지천집>과 나만갑의 <남한일기> 그리고 정약용의 <비어고> 와 작가미상의 <산성일기> 등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좀 보탰다고 해도 엄청난 숫자이다.
조선의 인구가 1천만 명을 넘어선 것은 1511년(중종 6년)이다.조일전쟁 때 700~800만 정도로 줄었다가, 1642년(인조 20년)에 다시 1천만 명을 회복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니,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전 인구의 5~6퍼센트가 잡혀간 것이다.
포로들은 수백명씩 조를 이루어 갔으며 청군이 뒤에서 호송했다.가다가 볼일을 보고 싶으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아무 데서나 옷을 내리고 볼일을 보았다.
가다가 병이 들거나 하면 가차없이 버리고 가거나 죽여 버렸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호송 도중에 죽었는지 모른다.도망친 사람도 많았는데, 도망치다가 잡히면 그때부터는 귀에 구멍을 뚫고 한데 묶어 끌고 갔다. 미국에 잡혀온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연상하면 쉽게 감을 잡을 수 있다.
끌려간 포로 중에는 양반집 가족들도 많았다. 돈 많은 양반들이나 벼슬아치들은 자기네 가족을 속환(贖還)하는 데 거금을 아끼지 않았다. 그 바람에 가난한 사람들은 가져간 돈으로는 가족을 데려올 수 없어 서로 끌어안고 울음바다를 이루는 경우가 지천이었다.
대표적인 반정공신이자 영의정인 김류(金瑬)는 전쟁중에 도체찰사였다. 그는 첩의 딸이 포로로 끌려간 것을 알고 역관 정명수에게 딸의 속환금으로 은 1천냥을 내겠으니 돌아오도록 주선해 달라고 하였다. 이 네가지 없는 인간 때문에 포로값이 올라 숱한 포로가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 은 1천냥이면 막대한 돈이었다. 농군의 하루 품삯이 한냥이었고, 쌀 한석이 닷냥이었으니 쌀 200석에 상당하는 돈이었던 것이다.
자신이야 반정공신(反正功臣)에다 영의정이니 그간 해먹은 돈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김류(金瑬)에겐 1천냥이 별것 아닌 돈이었겠으나, 이 바람에 50~60냥에 지나지 않던 포로값이 두당 수백 냥으로 올라 가난한 사람들은 그 돈을 마련할 길이 없어 가족을 데려올 수 없었던 것이다.
1637년부터 청황제의 명으로 포로의 공개매매가 심양에서 있었는데 조선에서 온 가족들과 포로들이 서로 만나 울고불고 흥정을 하고 시끌벅적했다.
노비가 된 포로를 사러 오는 사람은 먼저 여자든 남자든 건강상태부터 본다.
노비들의 옷을 모두 벗긴 다음 앞뒤를 잘 살피고 피부를 본다.그런 다음 벌거벗은 채로 앉았다 일어섰다를 몇 번 시켜본 다음 걸음을 걸려 관절을 본다. 다음으로 발바닥과 치아를 살핀다.
여자를 사서 첩으로 삼으려는 사람은 여자의 가슴, 성기, 체모 등을 상세히 살펴보고 흥정에 들어간다. 말하자면 시장이 온통 나체쇼장이 되는 것이다.
조선 여자 가운데 이러한 수모를 참을 길 없어 옷 벗기를 거절한 여자들 중 채찍을 맞고 죽은 여자도 부지기수(不知基數)였다.
조선 조정에서도 은을 내어 포로를 사오긴 했다. 돌아온 포로는 공노비가 되어야 했다. 나랏돈으로 샀으니 당연히 나라의 노비가 되어야 한다는 짱구였다. 이러니 차라리 청나라에서 살다 죽겠다는 포로도 많았다.
🌹 조선이 버린 여인들, 화냥년
화냥년은 환향녀(還鄕女, 고향으로 귀향한 여인)에서 유래되었다.1637년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은 거의 60만 명의 포로를 청으로 끌고 갔는데, 그 중 젊은 여인이 거의 20만 명에 달했다.
청(淸)이 이들을 끌고 간 이유는 그들의 부모에게서 몸값을 받고 풀어 주려고 한 것이었고, 물론 몸값을 받을 때까지는 당연히 데리고 잤다.
그러나 여자 포로 대부분이 가난한 집의 딸들이라 돈을 주고 풀려난 경우는 별로 많지 않았다.
이렇게 노예로 살다가 목숨을 걸고 청에서 탈출하여 고국땅을 밟은 여인들은 "몸을 더렵혔다"며 손가락질 하는 가문과 남편들의 냉대와 멸시를 견디지 못해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목을 매어 자살하는 일이 빈번했다.
환향녀(還鄕女)들이 자살하는 사례가 급증하자 조선 조정은 홍제동(弘濟洞, 널리 구제하는 동네) 개울에서 더렵혀진 몸을 씻는 것으로 일체의 과거사를 묻지 못하게 했으나, 이는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칭기스칸은 몽골을 통일하기 전 세력이 미약했을 때, 적대관계인 메르키트 부족의 침입을 받고 아내인 보르테를 놓아두고 도망친 일이 있었다.
당시 상황이, 둘이 같이 도망치면 둘 다 잡혀서 죽을 상황이었기 때문에 보르테가 자청해서 남아 칭기스칸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 주었다. 보르테는 잡혀서 메르키트의 부족장 집안의 사내에게 주어져 살다보니 임신을 하게 되었다.
칭기스칸이 의형제인 자무카의 도움을 받아 메르키트 부족을 격파하고 아내를 되찾을 때 그녀의 배는 눈에 띄게 불러 있었고, 보르테는 칭기스칸을 보자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 그녀를 감싸안으며 칭기스칸이 말했다.
"그 아이가 누구의 자식이든 내 첫째 아들이 될 것이다." 칭기스칸이 세계 최대의 제국을 만든 이유를 여기에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부끄러운 줄 알자! 기백도 없고 기대도 없는 조선 사내들아! 이런 네가지 없는 짓은 조일전쟁 때도 있었다.
조정이 일본군에게 몸을 뺏겨 임신한 여인들과의 이혼을 금하자 남편들은 그녀들을 내치고 후처를 구하러 바삐 다녔다. 수많은 임신한 여인들이 길에 나앉게 되자 조정에서는 임신한 여인들을 한데 모아 집단으로 거주하게 하고 보살펴주었는데, 그곳이 바로 '이태원(異胎圓)'이다. 이태원의 '이'자는 '다를 이(異)'자이고 '태(胎)'자는 신생아의 태를 말한다.
청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는 동안 경기도 일대는 청군에 의하여 쑥밭이 되었다. 청군의 눈에 띈 아녀자들은 모조리 강간을 당했다. 전쟁중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데, 문제는 양반집에서 실절(失節)한 여인을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었다. 어떻게 더러운 몸을 가지고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후손을 볼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라의 법도 과거에 응시하려면 친가 3대와 외가 2대의 인적사항을 적어야 하는데 실절(失節)한 여자의 자식은 서얼(庶孼)의 자손처럼 벼슬길에 나갈 수 없었다.
이러니 절개를 잃은 여자는 천상 어디 가서 죽던가 신분을 감추고 행방불명이 되어야 자식이 사니 어떤 선택을 해야 했을까? 많은 여자들이 목을 맸고, 많은 여자들이 거지가 되었다.
청에 잡혀가는 포로끼리도 신분이 탄로날까봐 신분이나 이름을 묻는것은 금기여서 참나무댁, 미루나무댁 등으로 서로 불렀다. 잡혀가는 여자 중에는 기생도 있었고, 백정의 아내와 딸들도 있었다. 하여간 청에 포로로 잡혀가서 팔자 핀 사람들은 기생들이나 백정 같은 천민들 이었다.
조선시대 기생이란 대개 관비(官婢)를 이르는 말이었고, 관비는 수령이나 고관, 사신 등 갖가지 사람들의 수청(守廳)을 들어야 했다. 그러다가 자식이라도 낳으면 그 자식도 천민이 되는 기구한 팔자였다. 이러한 팔자의 기생들은 차라리 청군에게 잡혀가면 조선에서 보다 훨씬 더 사람 같은 대접을 받았다.
백정(白丁)출신의 포로도 마찬가지였다. 여진족들은 수렵과 채집이 생업이어서 조선에 와서도 소, 돼지, 닭 등의 가축을 도살해서 주식처럼 먹었다.
그러나 그들이 짐승을 처리하는 방식이나 요리법은 대단히 거칠었다. 고기를 그대로 삶아서 둘러앉아 칼로 한 토막씩 베어 먹는 식이었다.
이를 보던 조선 백정이 짐승을 다루는 법과 요리법 몇가지를 일러주자, 다음부터 짐승을 도살할 일이 생기면 조선 백정만 찾게 되었다. 백정은 여진족들에게는 소중한 기능인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짐승이 청에 포로로 붙들려가더니 사람이 된 것이다.
조선에서의 백정(白丁)은 사람이 아니었다. 조선에서 백정이 할 수 있는 일은 짐승을 도살하거나 버들고리를 짜는 일, 사형수의 목을 베는 망나니 일, 양반집 잔치에 불려가서 일을 해주고 겨우 밥이나 얻어먹는 일이 전부였다.
그들은 일반 양민들과 함께 한동네에서 살지 못하고, 외진 곳에 따로 모여 살아야 했다. 어린 평민에게도 말을 할 땐 '소인'이라고 해야 했으며, 그들 앞에서는 술, 담배도 못했다. 옷도 중치막이나 명주를 입지 못하게 했고, 모자도 패랭이만 쓰도록 했으며, 가죽신도 신을 수 없었다.
당연히 그들의 자식들도 과거를 볼 수 없어 똑똑한 자식을 가진 백정들은 자식들이 안타까워 피눈물을 흘리며 살아야 했다. 그런데 여진족들은 양반, 상놈이
없고 백정(白丁)을 기능인으로 대우하니, 백정 입장에서는 포로된 것이 차라리 팔자가 핀 것이었다. 조선사(朝鮮史)를 쓰다 보면 참으로 불쌍한 백성들의 모습 때문에 마음이 아리다.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조선(朝鮮)이 더 이상 존재해야 되는지에 대한 이유를 아무 데서도 찾을 수 없다.가장 좋은 가정은, 조일전쟁 이전에 조선이 망하고 새 왕조가 들어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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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슬프네요ㅠㅠ 이런 부끄런 사고는 글쎄요..요새도 그리달라진것같진않네요.
ㅈㄹ을한다..팩트도 모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