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남보람. 정치학 박사.국방부 軍史편찬연구소 연구원 (문중13 남성원님 장남)
저서 「현리-한계 전투」「전쟁이론과 군사교리」「미 육군 MHD 보고서 시리즈 1~10」
제임스 카디건 백작
카디건 Cardigan
카디건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보온복으로 즐겨 입는 옷이다. 왜인들은 ㅋ 발음을 낼 수 없어 가디
건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ㅌ과 ㅍ 발음도 낼 수 없어 텔레비전을 줄여서 데레비로, 점퍼를 잠바로 부
른다. 카디건의 정식 명칭은 카디건 스웨터다. 카디건은 이 옷을 개발해낸 영국의 귀족 제임스 카디
건 백작의 姓에서 따온 것이다.
제임스 카디건은 귀족 집안의 전통에 따라 어릴 때부터 군인이 되기를 열망했다. 나이가 차서 장교에
임관된 카디건은 가문의 부를 이용하여 사비로 자신의 기병대에 최고의 무기와 장비를 갖추고 최고
급 제복으로 치장했다. 어릴 때부터 입고 자란 최고의 패션을 부대원들에게도 입히고 싶었던 것이다.
다른 부대 장병들이 구경도 해본 적이 없는 카디건 스웨터를 지급한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1853년
크림전쟁이 발발하자 제임스 카디건이 이끄는 제11경기병여단도 참전하게 되었다. 그가 이끄는 기병
대는 최고의 무기를 갖추고 러시아군에 연전연승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제임스 카디건과 그의 부
대원들은 귀국 후 영웅 대접을 받았다.
크리미아전쟁(1853. 10~1856. 2)은 서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러시아제국과 이를 저지하려는
대영제국‧오스만제국‧프랑스 제2제국‧사르데냐왕국 등 동맹국들 간에 벌어진 국제전이었다.
전쟁이 러시아제국의 영토인 크리미아반도에서 가장 격렬하게 펼쳐졌기 때문에 크리미아전쟁이라고
명명되었다. 동맹국들은 러시아제국의 휴전 제안을 받아들여 전쟁을 끝냈으며, 파리회담에서 동맹국
들은 러시아제국의 흑해 이용 제한을 요청하여 받아들여졌다.
전쟁 중 대영제국의 간호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활약으로 부상병에 대한 치료법이 획기적으로 개
선되었다.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치료해주는 새로운 국제적 전통이 생겨난 것도 이때부터였다.
러시아제국은 막대한 전비를 충당하기 위해 북아메리카대륙의 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알래스카
(171만 8000km2)를 720만 달러를 받고 아메리카합중국에 팔았다.
제임스 카디건은 제대 후에도 군에서 입던 카디건 스웨터를 입고 사냥도 하고 무도회에도 나갔는데,
이를 본 귀족들이 멋진 디자인과 탁월한 보온성은 지닌 이 옷을 따라 입기 시작하면서 점점 널리 유
행하게 되었다. 런던에서 시작된 카디건 열풍은 금세 영국 전역으로 퍼져나갔으며, 1925년부터는 영
국의 세계적인 패션 회사들을 거쳐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카디건은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 멋쟁이들
이 애용하는 패션으로 계속 인기를 끌고 있다.
사이렌 슈트 Siren Suits
사이렌 슈트는 공습에 대피하기 위한 복장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 상‧하의를
붙여서 통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공습 사이렌이 울리면 퍼뜩 꿰어 입으면서 대피하기 딱 좋다 하여 붙
은 명칭이다. 맨몸이나 속옷 위에 걸쳐 입어도 보온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지하의 추운 공간에서 오래
견딜 수 있어 생존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원래 이 옷은 공장이나 건설현장의 노동자들이 입던 것인
데, 편의성 덕분에 군에서 공습 대피용으로 전군에 보급했다. 군에 보급되기 전에는 보일러공들이 입
기에 알맞다 하여 보일러 슈트로 불리기도 했다.
보일러 슈트를 입고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 원수를 만나고 있는 처칠 총리
이 옷이 민간에 널리 퍼진 것은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이 입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처칠이 이 옷을
선호한 것은 귀족 및 부유층을 대표하는 보수당 정치인으로서 노동자들에게 親서민 이미지를 강조하
여 그들의 표를 얻기 위해서였다. 처칠은 보일러 슈트를 입고 저택에서 국내외 주요 인사들을 접견하
고 국민들의 눈에 띄기 쉬운 휴양지에서 휴가를 보내는 등 親서민 이미지를 획득하는 데 성공하여 두
번에 걸쳐 총 8년 8개월 동안 총리를 역임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처칠은 보일러 슈트를 전시 유니폼 삼아 상시 착용하기 시작했다. 편리
하기도 하려니와 전시효과도 노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처칠은 왜 그런 옷을 입고 생활하느냐는 기자
의 질문에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리면 빨리 걸치고 대피하기 쉬워서라고 대답했는데, 이때부터 보일
러 슈트라는 명칭 대신 사이렌 슈트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독일의 무차별 공습으로 영
국 국민들은 집집마다 지하방공호를 마련해두었는데, TV나 신문에서 본 처칠의 사이렌 슈트가 여러
모로 편리하여 빠르게 국민복으로 확산되었다.
사이렌 슈트는 여성들에게 특히 큰 환영을 받았다. 첫째 빨리 대피할 때 치마가 주는 불편을 일거에
해소해주었다. 단추를 잠그거나 끈으로 묶는 다른 여성복에 비해 지퍼만 올리면 되니 이만저만 편리
한 게 아니었다. 둘째 물자 부족으로 스타킹을 비롯한 여러 가지 여성용품들이 부족했는데, 사이렌
슈트 한 벌이면 겉옷‧속옷‧액세서리 문제를 한방에 해결할 수 있었다.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인
영국인들은 여성이 맨다리를 드러내는 것을 흉하게 여겼는데, 사이렌 슈트를 입으면 이 문제도 깔끔
하게 해결되었다. 바지가 여성복으로 등장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으니 여성들이 선호할 만도 했다.
사이렌 슈트를 맨 처음 군용으로 채택한 것은 미국이었다. 영국과 별도로 미국에서는 공정대가 낙하
산으로 강하할 때 어디 걸리지도 않고 보온기능도 탁월한 옷을 자체 제작하여 착용했는데, 그래서 명
칭도 점프 슈트였다. 공정대가 지상에 착륙하여 신속하게 움직이고 은폐물을 찾아 오랫동안 몸을 숨
기는 데도 점프 슈트는 큰 도움을 주었다. 처음 개발된 점프 슈트의 명칭은 ‘M1942’ 모델이었는데, 상
하가 분리되어 있었다. 상의는 보온을 위해 다리까지 덮였으며, 특수임무 수행에 필요한 각종 장비와
비상용 물품을 휴대하기 좋게 디자인되어 있었다. 이와 별도로 전차부대나 정비부대에서는 상하가
연결된 점프 슈트를 착용했다.
점프 슈트는 여성들에게 더 빨리 확산되었다. 젊은 남성 노동자들이 대거 전장으로 나가자 여성들이
전시물자 생산에 동원되었는데, 옷감이 부족하던 시절이라 아예 노동복으로 채택된 점프 슈트를 입
고 출퇴근을 하게 되자 점프 슈트가 어디서든 성행하게 되었다. 패션업계에서는 이를 놓치지 않고 다
양한 소재와 아름다운 디자인을 가미하여 상품화에 성공함으로써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마릴린 몬로를 비롯하여 1940년대와 1950년대에 할리우드를 주름잡던 유명 여배우들도 점
프 슈트를 매우 선호했다. 따라서 세계적으로 유행한 여성들의 간편복은 사이렌 슈트가 아니라 점프
슈트라고 부르는 게 맞다.
출처:문중13 남성원님 글
첫댓글 허드슨강 따라 크루즈 유람으로 의 멋진 뉴욕 야경, 대국 의 위세 만큼 찬란한 불빛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도시계획이 기초되고 빌딩이 들어선100여년이 훨씬 넘는 시절의 우리는 고작 이었지만 짧은 세월 동안 이에 버금가는 우리의 도심빌딩도 과히 경이로운 발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한데뭉친 마음으로 지혜롭고 풍요로운 우리나라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