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송주의 좋은 글 나누기> 옥녀꽃대
180323전라닷컴[한송주 괴나리봇짐] 장성 아곡 백비
빗돌에 새길 글자마저 아꼈던 청백리
매화가 알싸하게 터진 날, 봄비 속에 장성을 간다. 황룡강변 솔뫼에 백비(白碑)가 섰다. 아곡(莪谷) 박수량(朴守良 1491∼1554)선생을 기리는 비문 없는 빗돌이다. 이 무서백비(無書白碑)는 조선조 청백리(淸白吏) 아곡의 얼을 기렸다.
세상에, 글자 한 자가 새겨지지 않는 비석이라니! 고금동서에 다시없는 성물이다. 우리 참선비는 이처럼 청빈도 들킬까 저어했던 것이다. 아곡은 30년 동안 관직생활을 했으면서도 평생 집 한 칸을 마련하지 못했다. 이 빙설(氷雪)같은 청렴결백도 살아생전에는 밖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청빈을 꼭꼭 안으로 숨겼던 것이다. 극심한 빈한 속에 죽은 뒤에야 그 덕이 드러나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명종9년 64세를 일기로 임종하면서 아곡은 “나라를 위해 별로 한 일이 없으니 시호도 청하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며 간단히 장례를 치르라”고 후손에게 유언했다.
임금이 이 사실을 알고 아곡의 고향 장성 아치실에 99칸 집을 마련해 주고 ‘청백당(淸白堂)’이라 당호를 내렸다. 그리고 백비를 하사했다. 조선조에 청백리에 녹선된 벼슬아치가 3백 명을 헤아리지만 백비가 하사된 것은 아곡이 유일하다. 명종은 비를 내릴 때 “아곡의 청백을 알면서 비에 새삼스레 그 내력을 적는 것은 되레 누가 될 것”이라며 “겉으로는 맑은 척하면서 몰래 부정을 일삼는 무리들이 이 비를 보면 어찌 등줄기에 식은 땀을 흘리지 않으랴”고 말했다.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호산에 선 백비 앞에 선다. 서해안에서 공들여 캐왔다는 대자 가웃 조촐한 화강암 빗돌이 봄 는개에 싸여 은은하다. 눈부신 남루. 어떤 치장보다도 화사한 맨몸의 장엄. 어느 성구금언(聖句金言)보다도 거룩한 무서(無書)의 무게. 진유의 소슬한 향기를 460여 성상 정정히 뿜어내는 민짜 청석의 힘.
시걸(詩杰) 백거이(白居易)의 ‘청석(靑石)’이 뇌어진다.
가묘 앞 신도비 되기 싫으이 不願作人家墓前神道碑
무덤흙 마르기 전 이름 금세 없어지니 墳土未乾名已滅
관청 앞 길거리 송덕비도 난 싫으이 不願作官家道傍德政碑ㅣ
진실은 안 새기고 거짓만 새기니 不携實錄携虛辭
이율곡은 ‘강호사품론(江湖四品論)’을 말했다. 강호에 내 부류의 선비가 있다. 유현(儒賢), 은둔(隱遁), 염퇴(恬退), 그리고 도명(盜名)이다.
유현은 환로와 강호간에 두루 의연한 진군자를 일컫는다. 관직에서 뜻을 펴다가 막히면 미련 없이 강호로 물러나와 독서 소요하고, 다시 조정에서 부르면 순순히 나아가 소신을 편다.
은둔은 애당초 홍진을 멀리 하고 산간에 숨어사는 청류(淸流)를 가리킨다. 염퇴는 스스로 경륜과 학덕에 한계를 느껴 겸허하게 전원으로 내려온 경우다.
도명은 말 그대로 이름을 도둑질하는 걸 이른다. 관직에서 사세가 불리해지면 잽싸게 짐 싸들고 향리에 내려와 강호에 낚싯대를 드리운다. 벼슬에 뜻이 없는 양 위장하며 속으로는 자나깨나 관부의 동정을 살피며 조명(朝命)을 학수고대한다. 바로 ‘조명(釣名)’이다.
일찍이 백운거사 이규보(李奎報)는 ‘조어사(釣魚辭’에서 이렇게 꼬집었다. ‘조어(釣魚)하면 생선이라도 먹지. 조명(釣名)해서 뭐 할라나. 명(名)은 실(實)의 주인이니 주인이 있으면 손님은 절로 오는 법. 조명으로 현인이 된다면 어느 때인들 안연(顔淵 공자의 수제자)이 없으랴’
만고의 흉수 한명회(韓明澮)도 말년에 압구정(鴨鷗亭)을 짓고 무소유를 자처했다. 염치없게도 정자에 ‘젊어서는 사직을 붙들고(靑春扶社稷) 늙어서는 강호에 노니누나(白首臥江湖)’하는 편액을 걸로 청명을 낚시질했다. 나중에 견결한 선비 있어 시액을 바꾸었으니 ‘靑春傾社稷 白首汚江湖’라 하였다나.
아곡은 자신의 청덕을 일체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안으로 숨기고 남에게 들킬까 늘 조심했다. 하심하고 발밑을 살폈다(照顧脚下). 조선실록에 ‘공은 매우 청백하고 강직했으니 이 때문에 포용력이 작고 일 도모에 소극적이라는 비판도 있었다’고 사평(史評)되어 있다.
그는 누구 앞에서도 굽신거렸으며 학문도 숨기고 경륜도 숨기고 청빈도 숨기고, 심지어 말술의 주량까지 숨겼다. 화광동진(和光同塵) 양광지계(佯狂之計)의 도리. 하지만 자기를 낮추는 사람일수록 안으로는 가을서리 같은 규율은 운영하는 법. 불의와 부정 앞에서는 위언(危言)과 극간(極諫)으로 견결히 맞섰다. 겉으로 봄바람 같았던 아곡은 안으로는 댓바람소리가 나는 인물(송수권 시인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아곡은 동향 숙유인 김개에게서 배우고 24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38년 동안 내외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일솜씨가 야무지고 처신이 맑아 특진을 거듭했다. 소격서 혁파를 상소하는 등 기묘명현과 뜻을 같이 했는데도 사화(士禍)를 면하고 육경벼슬을 산 것은 오로지 주변 관리를 깔끔히 한 공덕이었다.
이윽고 강이 저문다. 매화향 깊어지고 댓바람 사나워진다. 재물과 여색에 찌든 우리들 정수리를 후려치는 아곡의 절명시가 생생히 운다.
생사는 천명인 바 괴로울 거 뭐람 生死有命寧煩念
화복 또한 하늘 뜻 마음 쓸 일 없네 禍福隨天不動心
내 몸 안 버리고 할 일 마쳤으니 不失吾身吾事畢
이만하면 넉넉한데 무얼 더 구하리 悠悠此外更何尋
글 한송주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