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백시사 작명의 날. 2017년 3월 12일. 심경호 선생님이 강연해주셨습니다.
연백시사(然白詩社) 명명의 변(辨)
심경호(고려대 한문학과 명예교수)
‘시사’는 근대 이전 시기에 시 동호인의 모임을 가리키던 말입니다. 시를 통해 벗과 사귀고 자신을 완성해나간다는 뜻을 가지므로, 문학적 취향만이 아니라 이념과 세계관이 같은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연백’이란 말은 고전강의 시간에 두보(杜甫)의 「절구(絶句)」를 읽던 중에 생각한 말입니다.
江碧鳥逾白 강물 파랗고 새 더욱 흰데
山靑花欲然 산 푸르고 꽃은 타는 듯 하네.
今春看又過 이 봄도 목전에 또 지나려는데
何日是歸年 어느 날이 돌아갈 해인가.
첫째 구(기구)에서는 ‘강은 푸르다(심록빛이다)’와 ‘새가 희다’가, 자연물과 자연물, 색채와 색채의 관계로 짝을 이뤘습니다. 둘째 구(승구)에서는 ‘산은 푸르다’와 ‘꽃이 불타다’이므로 색채와 색채가 짝을 이룬 것이 아니지만 ‘불타다’는 동사는 붉은 빛을 연상시켜서 ‘푸르다’와 의미상 짝을 이룹니다. 또한 첫구의 ‘새 더욱 희다’와 ‘꽃이 타는 듯 하다’가 대(對)를 이루어 자연의 생명력을 구상적으로 보여줍니다. 이것은 이 봄도 목전에 지나가건만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다시 말해 나의 본래성(本來性)을 찾지 못하고 있는, 나의 처지와 대비됩니다.
‘꽃이 타는 듯하고’ ‘새는 더욱 흰’ 자연의 생명력을 마주하여 인간 자신의 왜소함을 자각하고 겸허한 마음을 갖자는 뜻으로 ‘연백’이란 말을 시사의 이름으로 채택했습니다.
‘연백’의 뜻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절로 그러하여 희다’는 뜻을 중의(重意)로 지닙니다.
‘연’은 ‘자연’의 뜻입니다. 『노자』에서 근원하는 ‘산 절로 수 절로’의 태도를 우리 삶의 근본태로 삼자는 말입니다. 또한 북송 때 장재(張載)가 지은 「서명(西銘)」에 “살아서는 나, 하늘에 순응하고 죽어서는 나, 편안하다.〔살아서는 순리대로 섬길 것이고 죽어서는 편안하리라.〔存吾順事, 沒吾寧也〕”라고 했는데, ‘연’은 그 뜻도 담고 있습니다
‘백’은 ‘백비(白賁)’의 뜻입니다. 아무 것도 꾸미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꾸밈임을 강조한 말입니다. 『주역』64괘중 제22번째가 비괘(賁卦)로, 산 아래에서 불이 타올라서 산의 바위를 황백색으로 빛나게 하는(山火, 離下艮上)의 형상입니다. (‘분’괘로 잘못 읽지 않도록 합시다.) 이 괘는 꾸밈이란 실질이 있어야 비로소 조화의 미를 지니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특히 비괘의 맨 위 효(爻) 즉 상구(上九) 효의 효사(爻辭)는 “백비(白賁)니 무구(无咎)리라.”입니다. “희게 꾸미니 허물이 없다.”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비괘의 상구(上九)는 꾸밈이 극도에 이르러 꾸밈이 없는 데로 나아간 것을 말합니다. 인생의 부침(浮沈)을 경험한 사람들로서는, 본바탕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여 꾸밈의 폐단에 빠지지 않아야 재앙을 면할 수 있다고 가르쳐 줍니다.
연백(然白)은 쉬운 글자입니다. 간이(簡易)함만큼 훌륭한 것이 또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