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진리 열정적으로 설교
이단 맞서 정통 교리 전파
설교자회 도미니코회 창설
12∼13세기의 교회는 제2차 3차 라테란 공의회를 통해 「이단자」들의 척결을 논의할 만큼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고 교리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여러 가지 이단 운동으로 골치를 앓고 있었다.
특히 가타리(Cathari)파 같은 경우는 프랑스 남부 지방에 광범위하게 퍼져 기사 귀족 영주 심지어 일부 성직자들까지 추종자가 생기는 현상을 빚었는데 이들은 교회를 부정하고 마니교에서 주장하는 이원론을 믿으며 교계제도의 불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순회 설교를 통해 사람들을 모았다.
이들의 세력 확장은 교회는 물론 국가의 질서마저 무너뜨리는 우려를 낳게 했고 심지어 이단 조사를 위해 파견된 교황 사절이 암살되고 알비(Albi) 지방의 가타리파를 근절할 목적으로 십자군이 조직돼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도미니코수도회(일명 설교자 수도회, Ordo Praedicatorum)의 창설자 성도미니코(Dominicus 1170∼1221)는 프란치스코 성인과 함께 12∼13세기 교회 쇄신에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로서 그는 당시 교회를 위협하던 가타리파 등 이단에 맞서 교회 정통 교리를 전파했고 수도회 설립 역시 그러한 참된 신앙을 적극 수호하고자 하는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스페인 북부 칼라루에가(Calaruega)에서 출생한 도미니코는 사제였던 삼촌의 영향으로 일찌감치 성직 교육을 받았으며 교육 중심지로 유명한 팔렌치아에서 문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성인은 태어날 때부터 부모들에 의해 성직의 길을 걷도록 키워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신자들은 자녀를 가지면 일찍부터 결혼 생활을 할 것인지 성직자로서의 삶을 살 것인지 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독실한 신앙을 가졌던 이들에게는 성직을 준비하는 자녀를 두는게 큰 기쁨이었다.
성인의 탄생과 관련해서는 특별한 에피소드가 전해지고 있다. 그의 어머니는 환한 빛의 등불을 입에 문 강아지 한 마리가 품속으로 들어와 그 등불로 온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태몽을 꾸었는데 이는 그녀가 예수 그리스도의 등불로 인해 죄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쳐 예수님께로 인도할 위대한 설교자를 잉태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또 성인은 이마에 반달 모양의 상징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는 그 어머니가 꾸었던 꿈처럼 어둠과 죽음의 그림자 속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빛을 비추어 줄 것을 뜻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공부를 마친 도미니코는 고향 교구 오스마(Osma)주교좌 성당의 참사위원이 됐는데 참사위원이란 중세 유럽 주교좌 성당에 있던 제도로 성당 중앙 제단 주변에서 매일 규칙적으로 성무일도를 바치면서 중요한 일을 함께 결정하는 사제들을 말한다.
이를 시작으로 공동 생활을 하게된 도미니코는 외교 사절로 덴마크 등 북부 유럽을 다니면서 이단 운동에 위협받고 있는 교회 현실을 목격할 수 있었고 그로인한 심각성을 체험하게 됐다.
이후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 의해 이단에 대응키 위한 시토회 설교 수사회에 합류한 도미니코는 9년 동안 이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설교자회 창설을 구상했다. 이단의 위협에 빠진 교회를 구하기 위해서는 사도들과 같은 청빈한 생활을 하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수도회가 필요하다는 절감에서다.
그가 구상한 수도회는 절대 청빈에 바탕을 두면서도 세속 가운데 살며 사람들의 회개와 개종을 촉구하기 위해 어느 곳에라도 갈 수 있는 적극적인 수도회였다.
1215년 툴루즈(Toulouse)에서 첫 회원을 모집하고 풀크(Fulk) 주교 허락하에 활동에 돌입한 도미니코는 1216년 교황 호노리오 3세로부터 단체를 인준하는 교황 문서를 받음으로써 공식적인 수도회 기틀을 마련했고 그 다음해 교황청에서 발행한 공문을 통해 명실 공히 설교자 수도회로 인정을 받았다.
당시 교회 상황에서 설교를 할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 주교들에게 제한돼 있었던 것을 감안할 때 이같은 교황청의 관심은 수도 생활안에서도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을 뿐 아니라 그간 교회가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사목 형태를 선보이는 것이기도 했다.
증인들에 따르면 도미니코는 어느 곳을 가거나, 누구와 함께 있거나, 항상 사람들을 격려하는 말을 했고 또 많은 교훈적인 이야기들로 사람들의 마음을 그리스도께로 이끌었다. 어디에서나 말과 행동은 복음의 삶을 사는 사람다웠다.
1233년부터 시작된 그의 시성 절차에서 증언자로 나선 사람들은 『그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끊임없이 열렬히 기도했으며 또 밤새도록 기도하곤 했는데, 때로는 상당히 시끄러워서 그의 신음소리와 울음소리에 형제들이 잠을 깨기도 했다』고 전했다.
도미니코는 교회와 복음의 진리에 열렬하고 헌신적이었으며 아울러 여러 가지 운동이나 공식적인 교회의 한계선 너머에 있는 참 가치들에 대해서는 민감한 사람이었다. 다감한 성품을 지녔던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는 달리 의지가 강하고 통솔력도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림은 이단인 알비파에 대항한 성도미니코의 열성을 표현한 「불타지 않는 기적의 책」. |
가난실천하며 순회설교 헌신
교구 지원 안받고 가난 선택
끊임없이 기도하며 성서연구
1215년 툴르즈 교구내 법적 설립을 인준 받은 설교자들의 수도회는 한편 풀코 주교로부터 「항구성을 띤 설교자들의 직무」를 맡게 됐고 도미니코와 회원들은 이에따라 순회 설교에 헌신하는 진정한 수도 공동체를 건설하는데 전력을 다하게 된다.
설교자들의 수도회 첫 공동체는 교구로부터 설교에 투신할 수 있는 재정적 지원을 받게 됨으로써 개인적인 가난만을 실천했다. 그러나 5년여가 지난후 수도회는 이같은 고정적 수입을 거절하고 공동체 전체의 엄격한 가난을 채택했다.
교회내 전문가들은 이러한 도미니코의 결정이 1218년 포르치운쿨라에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만났던 것에 깊은 연관을 두고 있다고 풀이한다.
프란치스코가 지식과 문화에 매이지 않고 좀 더 철저하고 근본적인 가난에 집중했다면 도미니코는 가난을 중요시하면서도 학문적이고 문화적인 양성과 준비에 더 역점을 두었다는 평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가난한 순회 설교 모습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대문호 단테는 이러한 도미니코의 영성에 대해 「그리스도교 신앙의 연인」(L’amoroso drudo della fede cristiana)이라는 묘사를 남기기도 했다.
도미니코의 관심은 오로지 「사람들의 영혼을 해방시키고 구원해 줄 진리를 만인에게 전파하는 것」이었고 수도회를 세운 목적은 이단에 맞서 자발적인 가난과 겸손을 통해 선포되고 증명되는 설교로 사람들을 설득, 참된 신앙을 지키는 위한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설교자들의 수도회는 신앙적 위기를 느끼고 있던 그리스도교 내부를 재생시키는 의미로 받아들여 질 수 있다.
교회사가들은 가난을 지체없이 진실하게 회복시키는 것, 또 가난을 다시 회개의 징표가 되게 하는 것이 당시 프란치스코와 도미니코가 보였던 업적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특별히 도미니코는 학문적이고 대중적인 설교를 계획했고 대학 설립의 큰 흐름 속에서 수도회의 탄생을 계획했다.
도미니코가 자신의 영적인 사상과 관련해 저술은 남기지 않았지만 특별히 「마태오 복음」 「바오로 서간들」 「요한 카시노의 사막 교부들 담화집」을 애독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다른 성서들 역시 필독서였고 특히 시편은 그의 기도 생활에서 언제나 묵상하고 인용되는 영적 참고서였다.
그는 마태오 복음과 바오로 서간의 내용을 다 외울만큼 항상 소지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사막 교부들 담화집 역시 성인이 수도생활 초기부터 지니고 다녔던 것이었다.
그러한 바탕속에서 도미니코가 후대에 남긴 영적 유산은 무엇보다 그가 온전히 하느님의 사람이었다는 것.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에 대해서만 말했다』는 유명한 말처럼 도미니코는 열정적으로 하느님 현존 안에서만 생활했으며 이는 그가 보여준 침묵의 유일한 근거였다.
또한 그는 끊임없이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그같은 기도는 끊임없는 하느님 탐구,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연결됐다. 학자들은 『도미니코가 한평생 혼신을 다해 설교했던 것은 그리스도가 선포했던 올바른 신앙의 진리 바로 그것이었다』고 밝힌다. 그의 진리에 대한 사랑과 열망은 성경의 끊임없는 연구 안에서, 이웃들을 향한 구원과 성화에 대한 사랑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도미니코는 또한 가난하고 겸손한 순회 설교자로 살며 신학적 차원의 청빈을 실천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물질적 부를 가진 이들의 선두에 서서 그리스도의 가난을 설파했다면 도미니코는 지성인들을 대상으로 드러나지 않는 삶 자체로써 가난의 복음을 선포했다.
신학자 철학자 법률가 등 또 다른 분야의 권력가들이 나타나던 시기에 그는 유럽을 순회하며 복음적인 삶의 체험과 신앙의 체험으로 복음을 살고 전하는 진리의 설교가, 은총의 설교가였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사랑」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 성모 마리아처럼 오로지 구세주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에 삶과 성덕과 활동의 목표를 걸었던 도미니코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된 듯 도미니코회는 「설교자들의 모후」 「거룩한 묵주기도의 모후」라는 호칭이 있을 정도로 도미니코회는 성모 신심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천국에서 성모의 스카풀라 안에 보호돼 있었던 도미니칸들에 대한 환시, 스카플라의 기원, 끝기도 후 성수 축성 등으로 부터 전해오는 성모님에 대한 사랑 등은 현재까지도 도미니칸 전례와 영성의 특성으로 남아있다.
당시에 보편화되었던 예수 그리스도 생애 신심에 큰 영향을 받았던 도미니코는 그런만큼 깊은 예수 신심을 지니고 있었다. 소위 「도미니코 성인의 9종류 기도방법」으로 알려진 기도법에는 그의 신심이 잘 드러나 있다고 볼 수 있다.
겸손하고 가난한 설교가로 그리스도의 모습을 재현하려 애썼던 도미니코는 살아있을 때는 단순히 형제들중 한 사람으로, 또 죽어서는 형제들의 발 아래 묻히기를 원했다.
1221년 8월 6일 「살아서 보다 죽어서 더 많은 도움을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볼로냐의 니콜라스 수도원에서 생을 마감한 도미니코. 그의 나이는 51세였다.
도미니칸들에게는 이때 도미니코가 남긴 약속을 기억하며 부르는 노래(O Spem Miram)가 지금껏 전해지고 있다.
『오 놀라운 희망이여 죽음의 순간에 당신을 위해 울고 있던 형제들에게 당신이 주신 그 희망은 당신이 가신 후에 하늘에서 더욱 그들에게 도움이 되어 주실것이라는 약속이었나이다. 오 아버지 당신 말씀을 이루어 주소서. 당신이 약속하신 대로 당신의 전구로써 우리를 도와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