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끝없는
새로움에 도전한다
서울고 총동창회 뉴스레터 28호(2019. 07. 09)
윤석주(44회, 45세) 동문
우리에겐 개그맨낙지로 잘 알려진 윤석주(44회)동문을
그가 제주도에서 운영하는 ‘윤스타 피자&파스타’ 매장에서
만났다.
윤동문은 본업인 개그맨 이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늘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그의 끊임없는 도전의 원동력은 어디에서 샘솟는 것일까?
이>바쁘신 중에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학창시절의 윤석주 동문은 어떤 학생이었나요?
윤>공부하기는 싫고, 뺀질 거리고, 그냥 특별히 잘하는 것 없는 그런 학생. 키가 작으니 눈에도 안 띄고 그랬어요. 싸움이나 공부나 운동이나 그런 특기가 있어야 눈에 띄었는데 체격도 작고 한마디로 눈에 안 띄는 조용한 학생이었죠. 우리 44회 동기들은 한 학년이 20개 학급에 학생수는 1,200명이었어요.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활기찬 학생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실 분들이 많을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원래는 예술고등학교 진학을 희망했는데 당시에는 어떻게 진학을 하는지 방법도 잘 몰랐어요. 당시 강남에 살면서 내 거주지 인근의 초, 중,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예고 진학을 하고 싶다는 것을 부모님께는 말씀 드리지도 못하고, 그냥 막연하게 예술이나 예능 쪽 적성을 살리고 싶은데 마음 고생이 심했죠. 결국 대학전공도 산업디자인을 택했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에 남들보다 늦은 고2에 그림을 시작했어요. 사실 ‘미술학원이라는 것이 있구나?’ 하는 것도 그때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정보기술의 발달로 다양한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지만, 그 당시는 ‘공부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던 때라, 자신이 원하는 분야를 이뤄나가기 위해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아무도 도움을 주는 사람이 없었던 시기라 상당히 막막해하던 시기였습니다.
이>KBS 공채 15기 개그맨이신데 개그맨에 도전한 계기를 여쭤봐도 될까요?
윤>어린 시절부터 꿈이 개그맨이 되고 싶다는 동경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방송을 통해 KBS 공채 개그맨 모집공고를 보고 ‘이거다~!!!’ 싶어 도전을 하게 됐습니다. 개그맨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까지만 해도 박봉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가 있었지만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으로 버텼던 것 같아요. 개그맨이 되고 1년이 지난 이후에는 본인이 한만큼 벌어가게 되어 있는 구조라고 보면 됩니다. 현재도 희극인 협회 KBS소속이에요.
제가 개그맨 공채시험에 도전할 때는 응시자들의 90%이상이 연극영화학과 출신이었어요. 당시 2만명정도가 응시했는데 거기서 내가 1등(대상)으로 합격했어요. 제 경우는 근성이 있어서인지 어디엔가 도전을 하면 1등을 해야 직성이 풀리더라고요(웃음). 그때 옥동자(정종철)가 동상을 받았어요.
이>경기도 강화에 전원주택을 짓는 일을 계획하고 이를 정리하여 “땅집go”란 책을 출간하셨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윤>방금 하신 질문에 대한 답을 여기에서 말하기엔 시간이 부족해요. 아마 이 이야기를 하자면 3박4일 이상은 걸릴 겁니다.(웃음)
그냥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남자들의 로망 중 하나를 실현해보고 싶었습니다. 남자들은 자기가 살집을 지어보고 싶어하는 게 로망이잖아요. 그냥 집을 지어보고 싶었고,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생각이 난 김에 바로 땅을 사고 집을 지은 겁니다.
어떻게 보면 삶은 단순한 것이고, 인생은 어렵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 가지 많은 생각을 하지만, 여기서 그것을 다 나열하기는 어렵고 “나의 로망을 실현하자.” 이거 하나로 실행을 한 겁니다. 일반적으로 생각만하고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온 터라 “난 그렇게 살지 말자.”라는 생각이 든 겁니다.
이>사진에도 일가견이 있으시던데요,
윤>내가 개그맨 활동을 시작하면서 대학을 중퇴했어요. 그러나 항상 마음속에는 그림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이 남아있어 언젠간 다시 기회가 되면 다시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시작한 일이 사진입니다. 사진은 “가장 간단하게 빛으로 그리는 것”이잖아요. 이 일도 시작하다 보니 주변에서 ‘개그맨이 무슨 사진을 찍냐?’며 무시하는 투의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난 외부기관의 사진콘테스트에 응모하여 객관적인 평가를 받아보겠다고 생각하고 바로 공모전에 도전해서 입상만 40-50개를 받았어요. 그러니 다들 인정하더라고요. 아쉬운 것은 2등까지는 여러 번 당선됐는데, 1등이 안되니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여기에 또 근성이 발동해서 가장 큰 공모전에 응모하여 대상에 당선되고 그만뒀죠(웃음).
이>제주를 찾는 지인들(특히 신혼부부)을 찍은 사진을 SNS에 올린 것을 보면 사진실력도 수준급인 것으로 보입니다. 사진을 찍을 때 어떤 느낌으로 촬영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윤>사진도 빛으로 그리는 그림이기에 ‘내가 그림을 그린다.’는 느낌으로 찍고 있어요. 사진은 ‘검은색에 빛으로 그리는 그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어떻게 보면 주변의 부정적인 시선과 말들이 자극을 주기도 한 것 같은데......
윤>사실 그러한 부정적 시선이 느껴지고, 부정적인 말들을 들을 때는 정말 화가 많이 났어요. 지금 돌아보면 내가 무엇인가를 도전하고자 했을 때 “안 된다. 안될 것이다.”라는 부정적인 말이 오히려 제게는 힘이 되었고, 저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경기도 강화에서 전원주택을 짓고, 얼마 되지 않아 제주도로 삶의 기반을 옮겨 “윤스타 피자&파스타”라는 브랜드로 외식업에 뛰어들었는데 어떤 계기로 결심을 하게 되었나요.
윤>강화도에 집 짓고 5개월을 살다 보니 내가 원하는 전원생활도 하고 좋긴 한데 심심하더라고요. ‘삶은 버라이어티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못한 삶이 좀 아쉬웠어요.’
인터뷰 중간에 매장을 찾은 손님으로 인해 인터뷰가 잠시 중단됐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윤석주 동문이 매장을 방문한 손님을 대하는 모습은, 윤동문만의 특유한 친밀함으로 마치 막역한 친구를 대하고 있는 듯한 모습처럼 보였다.
사실 제주도에 아무 생각 없이 오게 되었습니다. 제주도 구좌읍 세화리라는 조용한 이 동네에서 ‘음식점하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자리를 잡고 피자 집을 열었어요. 내가 피자도 좋아하고 피자 공부하러 외국도 다녀왔거든요. 피자 집을 오픈한 이후에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요. 고등학생 팬들까지 찾아옵니다(웃음). 그런데 내가 여기서 아무 것도 안하고 소비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으면 안 되겠더라고 요.
이>윤동문은 위 질문에서도 보듯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 같습니다. 윤석주 동문에게 있어 ‘도전’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나요?
윤>사람들은 ‘도전’이란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파괴한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그 사실을 몰랐어요. 사람들은 절 보고 이상하다고 말을 해요. 개그맨, 전원주택건축, 사진작가, 제주도로 3주만에 이주. 저는 칼을 뽑으면 무만 썰지 않고 다 썰어버리는 성격입니다. (웃음).
이>그래서 ‘개그맨 윤석주’하면 기대감이 있는 것 같아요. 또 무엇을 할까? 어떻게 얼마 만에 할까?
윤>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일을 처리하는 속도는 빨라요. 최근에 또 유튜브를 시작했어요. 현재 구독자 11,000명. 월 100만 원 정도의 수입이 들어오는데, 돈을 떠나 협찬도 많이 들어옵니다. ‘저 사람이 얼마 만에 무엇을 할까? 어떻게 할까?’에 대한 기대감이 팬들에게 있더라고요.
사진하는 사람들 중에도 팬들이 있는데, 제주도에 오면 개그맨 윤석주가 운영하는 피자를 꼭 가야 한다고들 합니다. 얼마 전 영화감독인 친구가 전화가 왔어요. ‘너 유튜브 하냐?’ 묻더라고. 자신의 지인 중에 꽤 부유한 사람이 있는데, 취미로 사진을 한데요. 제주도에 와서 내 얼굴을 보고 피자만 조용히 먹고 갔다는 겁니다. ‘이놈의 인기란? 하하’
인터뷰 중에도 윤동문의 개그맨 기질은 여지없이 발휘됐다.
이>윤석주 동문의 말씀을 들어보면, 결국 무엇을 쫓아가는 인생을 살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윤>좋아하는 인생을 살았어요.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살아야 된다는 생각입니다.
고등학교시절
운동도 공부도 못했어요. 모교 재학시절 이미 난 공부와 거리를 뒀으니 동기들과 경쟁해서 이길 수도 없고, 이기지도 못했고 능력도 안됐으니까요. 그때 전 느꼈습니다. ‘안 되는 것은 도전하지 말자.’, ‘하고 싶은 것과, 내가 잘하는 것 두 가지가 함께 있을 때 시너지효과도 제일 좋고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달리기를 하고 싶어요. 그러나 체력이 받쳐주질 않아 정작에 달리기를 잘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육상은 내 직업이 될 수 없는 거고, 만약에 둘 다 된다면 이것처럼 나랑 찰떡궁합인 직업이 없는 거죠.
사람이 생각해 보면 그런 것들이 많은데 다양성을 학교에서 키워줘야 하는데, 그게 안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린 학생들에게 여러 가지 길이 있지만, 다른 길을 제시하고 준비하라기에는 현실적인(제도적인)어려움이 있는 것 같아요.
이>제주도에서 동문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는 모습을 SNS를 통해 많이 접합니다. 윤석주 동문에게 ‘동문들과의 만남’이란 어떤 의미가 있나요?
윤>서울고는 서울고만의 특유한 끈끈함이 있는 것 같아요. 서울고 동문이라면 일단 오픈 마인드가 되는 거죠. 경계심이 허물어진다고 해야 하나요? (웃음) 특히 제주도는 좁으니 한 다리만 거쳐도 다 알게 됩니다. 이곳 제주동문회에서는 제가 막내입니다. (웃음) 여기서는 사기를 못 치죠. 두드리면 나오니까요.
이>윤석주 동문에게 가족이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요?
윤>가족이 있기에 힘이 나고, 가족이 있기에 좋아요. 그냥 막연히 좋은 겁니다.
이>저 같은 경우에도 결혼하고 나서 단단해졌거든요.
윤>저도 그렇습니다. 제 아내는 제겐 과분한 좋은 여성입니다. 확신이 들어서 바로 결혼했고 잘 살고 있습니다.
이>윤석주 동문에게 ‘서울고’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요?
윤>서울고 출신이어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얼마 전, 국방부장관을 역임하신 김관진 선배님을 만났는데 ‘서울고 44회 윤석주입니다.’라고 인사를 드렸더니 좋아하시면서 후배라는 말 한마디에 환한 미소로 ‘먼저 인사해주어 고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것이 서울고 동문만의 끈끈함이 아닐까요.
이>앞으로의 삶을 동문들에게 살짝 공개해주세요.
윤>사실 계획이 없어요. 중장기계획은 있지만,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요. 남들은 즉흥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때쯤 말을 해도 되겠다 싶으면 그때 이야기하려고요. 그러면 그 방향으로 가게 되어있어요.
이>피자집도 운영하시고, 강의도 다니시고, 유튜버 활동도 하시고 이 많은 일들을 감당하시는 모습이 대단하십니다.
윤>제가 감당해야 될 몫인 거죠. 인생이 별거 있나요? 다이내믹하게 사는 거지.
윤석주 동문과의 인터뷰는 단순한 대화가 아니라 그가 걸어온 삶을 공유하는 시간이었다. 그에게서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쳐흘렀다. 철저하게 분석하고, 준비하고, 때맞추어 행동하는 준비된 사람이란 느낌을 받았다. 인터뷰 내내 그의 말은 자신감과, 삶에 쫓기지 않고 삶을 이끌어가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강한 듯 보이지만 겸손함과 사람들 속에 들어가 함께 호흡하고 함께 움직이는 정많은 사람임을 또한 느꼈다.
인터뷰 도중 재학생 후배들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획일적이고 끌려가는 삶도 아니고,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삶도 아니기에, ‘우리 서울고 재학생 후배들이, 개척하고 도전하는 삶을 살아갔으면’하는 바람을 내비쳤다.
윤석주 동문은 늘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앞으로 전개될 그의 ‘새로운 도전’을 기대하며, 그의 새로운 도전이 사람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선사하는 도전이 되길 기대한다
글· 사진_ 이유종(47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