퓰리처상 수상 작가, 20세기 최고의 역사가 윌 듀런트
삶의 여정에서 영원히 마주하게 될 인간의 조건에 답하다
『노년에 대하여』는 명저 『철학 이야기』와 『문명 이야기』를 통해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역사가”([뉴욕 타임스])로 꼽히는 윌 듀런트의 마지막 원고이자 가장 개인적인 생각을 담은 에세이다. 듀런트 사후에 소재를 알 수 없어 거의 사라질 뻔했다가 30여 년이 지나 극적으로 발견된 원고들이다. 스물두 편의 짤막한 글은 삶과 죽음, 청춘과 노년, 신과 도덕, 전쟁과 정치, 예술과 교육 등 인생의 여러 단계를 통과하면서 마주하게 되는 20여 가지의 중요한 문제를 다룬다. 그중 격변의 시대를 살아내고 마침내 “무덤에 한 발을 들여놓은” 듀런트 만년의 아쉬움과 홀가분함을 살릴 수 있도록 ‘노년에 대하여’를 제목으로 삼았다. 이 책에서 독자들은 삶의 의미를 탐색하는 사람을 위해 대가가 남긴 정제된 지혜의 메시지를 만날 수 있다.
윌 듀런트는 폭넓은 학식과 그보다도 넓은 인간에 대한 이해를 갖춘, 즉 교양을 갖춘 진정한 자유주의자이다. ―[월스트리트 저널]
듀런트의 빼어난 학문적 경력 끝에 다다른 인생에 대한 괄목할 만한 결론. ―[북리스트]
『문명 이야기』, 『철학 이야기』로
1만 년 문명사를 꿰뚫은 위대한 역사가
윌 듀런트가 들려주는 인생의 정수
듀런트는 누구보다 지식과 교양을 사랑하고 인류 문명과 사상을 연구하는 데 일생을 바쳤지만 결코 상아탑 속의 학자는 아니었다. 그의 눈은 학교가 아니라 세상을 향해 있었다. 모두를 위한 책을 썼고 노동회관에 모인 사람들에게 강연했다. 출간 후 5년간 계속 베스트셀러에 오를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킨 철학 입문서 『철학 이야기』나, 1만 년 인류 문명사를 11권 1만 페이지로 풀어낸 대작 『문명 이야기』 모두 삶 속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소화하고 연구한 지식을 대중과 나누고자 한 노력이었다.
철학, 종교, 예술, 문명에 대한 폭넓은 학식과 그것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풀어내는 능력을 겸비한 듀런트에게 인생의 조언을 구하려는 독자들의 반응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노년에 대하여』 도입부에서 듀런트는 학자로 살아오는 동안 독자들로부터 수많은 편지를 받았으며 그 덕분에 인간의 삶과 운명에 관해 숙고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인생은 근본적으로 수수께끼”이며 “생각하기에도 벅찰 만큼 복잡한” 것이라고 유보의 말을 달면서도, 역사서를 쓰면서는 다소간 삼켜야 했던 개인적인 견해를 이 책에서 편안하고 솔직하게 전달한다.
우아한 문장에 담긴 깊은 통찰
인간과 문명에 대한 믿음이 돋보이는
노학자의 사려 깊은 지혜
『노년에 대하여』를 통해 듀런트는 유연하고도 균형 잡힌 사색의 결을 보여 준다. 청춘의 성급함을 경계하면서도 그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가 만들어 내는 변화를 간과하지 않으며, 노년에 깨닫는 지혜를 칭송하면서 이때가 육체와 정신이 쇠퇴하는 시기임을 잊지 않고 지적한다. 그 자신은 신학도의 길을 저버렸지만 종교의 미덕을 부정하지 않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장점과 단점을 아울러 본다. 또한 위인들의 영욕과 문명의 흥망성쇠를 수없이 지켜본 역사가로서 날카로운 현실주의자의 시선을 보여 주지만, 그럼에도 인류 문명에 대한 낙관주의를 거두지 않는다. 그 바탕에는 그의 삶을 이끈 원동력이기도 했던 지식과 교육에 대한 믿음이 자리한다.
문명의 유산을 활기찬 사람들에게 쏟아붓는 것이 교육의 기능이자 고귀한 운명이다. 그러면 이 땅의 선물들이 예전보다 더 지적으로 이용될 수 있을 것이고, 우리 후손들은 더 널리 퍼질 수 있을 것이며, 우리의 부는 더 훌륭해진 예의와 도덕, 더 심오해진 문학과 더 건강해진 예술로 꽃을 피울 것이다. 교육의 기회와 물질적 가능성이라는 기반이 그 어느 때보다 널찍하게 마련되어 있으니, 우리가 인류의 유산에 지혜와 아름다움을 추가할 수 있는 사회와 문명을 건설하게 되리라는 점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21장 ‘교육에 대하여’
그 밖에도 듀런트는 실로 다양한 물음에 답한다. 청년 세대와 노년 세대의 긴장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성과 과학이 종교를 무너뜨린 후에 신앙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전쟁은 인간의 본성상 피할 수 없는 일일까? 예술의 목적은 무엇일까? 미래 세대를 위해 어떤 교육 방법이 최선일까? 인생, 사랑, 행복의 궁극적 의미는 무엇일까? 시간이 흘러도 인생의 여정에서 맞닥뜨리는 고민의 모습은 비슷하기에, 우리는 듀런트의 인간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오랜 성찰에서 우러나오는 현명한 조언에 어느새 밑줄을 긋게 될 것이다.
인생은 눈에 보이지 않는 원천에서 시작하여 무한히 치밀하게 발전해 나가는 강, 말하는 것은 고사하고 생각하기에도 벅찰 만큼 복잡한 “수많은 색깔의 유리 돔”과 같다. (……) 그러니 인간의 존재를 전체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려고 애써 보자. 우리가 우리 의사와 상관없이 세상에 내던져지는 순간부터, 우리가 묶여 있는 운명의 수레바퀴가 완전히 한 바퀴를 돌아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그리고 인생의 여러 단계, 그러니까 유년기, 청소년기, 성인기, 노년기를 통과하면서 형이상학, 윤리학, 정치학, 종교, 예술의 중요한 철학적 문제를 마주 바라보고 함께 걸으며 지적인 세계를 한 바퀴 돌아보자. 그러다 보면 우리의 복잡한 삶이 지닌 가치와 의미, 그리고 진실이라는 총체적인 시야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지 모른다. ---「들어가며」중에서
우리가 죽음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은 자신이 개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종(種)의 일시적인 도구이며, 생명이라는 몸속의 세포일 뿐이다. 생명이 젊고 강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우리는 죽어서 떨어져 나간다. 만약 우리가 영원히 산다면 성장이 억제되고, 청춘은 지상에서 자리를 찾지 못할 것이다. 죽음이란 멋 내기와 똑같이 쓸데없는 잡동사니를 제거하는 과정, 불필요한 것을 잘라 내는 과정이다.
우리는 나이를 먹어 가는 몸에서 자신의 일부를 떼어 낸 뒤, 아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늙은 몸이 죽기 전에 결코 수그러들지 않는 사랑을 통해 이 새로운 형태의 자신에게 생기를 전해 준다. (……) 개인은 실패할지라도 생명은 성공한다. 개인은 어리석을지라도, 생명은 자신의 피와 씨앗 속에 몇 세대에 걸친 지혜를 품고 있다. 개인은 죽을지라도 생명은 지치지도 풀이 죽지도 않고 계속 이어지며 궁금해하고 갈망하고 계획하고 노력하고 높은 곳에 오르고, 또 갈망한다.
바깥의 초록색 나뭇가지에서는
새들이 즐겁게 지저귄다. 수탉은 태양을 향해 찬가를 부른다. 빛이 벌판을 흐르고, 봉우리들이 벌어지고, 꽃자루는 자신 있게 고개를 들고, 나무에 수액이 오른다. 아이들이 보인다. 과연 무엇이 아이들을 저리도 즐겁게 만드는가? 이슬에 젖은 풀밭을 정신없이 뛰어다니고,웃고, 소리치고, 뭔가를 쫓고, 피하고, 숨을 몰아쉬면서도 지치지 않게 하는가? 저 에너지와 활기와 행복이라니! 저들이 죽음에 대해 무슨 신경을 쓰겠는가? 아이들은 배우고 자라고 사랑하고 몸부림치고 창조할 것이다. 어쩌면 죽기 전에 삶을 아주 조금 더 높은 곳에 올려놓을지도 모른다. 세상을 떠나더라도 그들은 자녀를 통해, 자식들이 자신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게 돌보는 행위를 통해 죽음을 속일 것이다.
생명의 승리다.
「5장 죽음에 대하여」중에서
나는 유한한 내 생명에 상당히 만족한다. 아무리 낙원 같은 곳이라 해도 영원히 살아야 한다면 나는 경악할 것이다. 나이가 90대에 접어들면서, 나의 포부는 누그러지고 삶에 대한 열정도 이지러진다. 오래지 않아 나는 카이사르처럼 이미 충분히 살았다 하고 외치게 될 것이다. 충만한 인생을 살고 때가 되어 죽음이 다가오는 것은 용납할 수 있는 좋은 일이다. 만약 내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지금의 허장성세와 어긋나는 말을 하거든 그냥 무시하기 바란다. 우리는 자손들을 위해 자리를 비워 줄 의미가 있다.
[6장 우리의 영혼] 중에서
나는 젊은 날에 믿었던 종교를 완전히 놓고 싶지 않아서 그 종교의 기본 교리가 철학적인 진리를 대중적으로 표현한 상징이라고 해석하려 했다.
이 해석에 따르면, 원죄는 호전성, 성적인 문란함, 탐욕이라는 본능을 따르고자 하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기질이라고 고쳐서 표현할 수 있다.
[8장 종교에 대하여]중에서
종교는 지식인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만약 지식인들이 만든 종교가 있다면 결코 사람의 영혼을 울리거나 대중의 마음을 열거나 오랫동안 생명력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믿을 수 없는 요소가 하나도 없는 종교가 성공을 거둔다면 그것이 바로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종교가 성공하려면 상상력을 자극해야 한다. 고되고 무미건조한 삶, 고통과 패배에 무겁게 짓눌린 삶에 창조적인 믿음이 모종의 비전이나 사적인 감흥을 얹어 주어야 한다. 종교는 과학적 명제의 집합이 될 수 없다.
[9장 재림에 대하여]중에서
교회의 이상이 버림받은 것은 그 이상이 스스로 자기를 버렸기 때문이다. 교회는 예수의 비길 데 없는 윤리 위에, 사도 바울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했지만 그리스도 본인은 잘 모르는 엄청난 교리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를 덧씌웠다. 인간의 정신을 묵직하게 짓누르며, 국민들을 감옥에 가두거나 재산을 몰수하거나 사형에 처할 수 있는 국가의 권력을 이용해서 독자적인 생각을 질식시킬 태세를 갖춘 종교 경찰과 조직이라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몽마 같은 존재 또한 그 위해 덧씌웠다. 방방곡곡에 퍼져있는 사제들과 수녀들은 그리스도교 윤리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지만(실제로 실천하는 사람도 많았다.) 고위 성직자들은 모든 공격에서 안전한 무오류의 권위를 얻으려는 욕망에 휘둘려 그 윤리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10장 종교와 도덕에 관하여]중에서
전쟁에 종지부를 찍자고 인류의 양심에 모호하게 호소하는 방식은 역사를 통틀어 별로 효과를 보지 못했다. 양심은 경찰관 앞에서 생겨난다. 현명한 사람은 평화를 사랑하면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할 것이다.
전쟁 문제에 효과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은 통 크고 너그러운 감정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원인과 분쟁을 연구하고 참을성 있게 조정해 나가는 것이다. 평화에도 전쟁처럼 현실적인 계획과 조직이 필요하다. 모든 요인에 미리 대비하고, 세세한 부분 하나하나까지 미리 앞을 내다보아야 한다. 정치가들이 가끔 국내 문제를 회피하려고 슬쩍 평화를 말하는 식으로는 평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 ---「15장 전쟁에 대하여」중에서
우리는 좁은 원 안을 빙빙 돌며 살아간다. 그 원을 에워싸고 있는 것은 생물학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이며, 그 너머에는 우연한 사고와 계산 불가능한 운명의 영역이 넓게 펼쳐져 있다. 교육은 절제의 기술뿐만 아니라 한계도, 그리고 그 한계를 우아하게 받아들이는 법도 가르쳐야 한다.
그 한계 안에서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이 평생을 살아도 닳지 않을 만큼 아주 풍부하게 들어 있다. 이 가능성들을 탐구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의 기능이 되어야 한다. ---「21장 교육에 대하여」중에서
과거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미 일어난 일은 대개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 현재는 돌돌 말아서 지금 이 순간에 집중시킨 과거일 뿐이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과거다. 저 멀리 이미 잊힌 세대에까지 이어진 유전적인 뿌리,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 모든 환경 요소, 지금까지 만났던 모든 사람들, 지금까지 읽은 모든 책, 지금까지 경험한 모든 일이 우리의 기억, 몸, 품성, 영혼에 쌓여 있다. 도시, 나라, 종족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그들의 과거이므로, 과거를 모르고서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 죽는 것은 현재이지 과거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이토록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이 순간은 우리와 눈과 손가락을 스치고 사라져, 우리가 과거라고 부르는 삶의 받침대 겸 기반 속으로 영원히 들어간다. 살아 있는 것은 과거뿐이다. ---「22장 역사의 통찰」중에서
나는 지금 세대가 덧없는 현재의 소식들에 쏟는 시간이 너무 많고, 살아 있는 과거에 쏟는 시간이 너무 적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새로운 소식이 목까지 쌓여 질식할 지경이고, 역사에는 굶주렸다. 하지만 역사가 없이 어찌 그런 사건들을 이해하고, 의미를 파악하고, 크고 작은 것을 가려내고, 표면의 변화 밑에 자리한 저류를 찾아내고, 미리 결과를 예견해서 치명적인 실수나 터무니없는 희망의 변질을 충분히 방지할 수 있겠는가?
볼링브로크 경은 투키디데스의 말을 인용해서 “역사는 사례를 통해 가르치는 철학”이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역사는 세상을 공방으로, 인류를 재료로, 기록을 경험으로 사용하는 거대한 실험실이다. 현명한 사람은 타인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지만,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경험에서조차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역사는 수많은 세월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겪은 경험이다.
---「22장 역사의 통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