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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三國志)제52편※
미녀 초선(貂蟬) (中)
이윽고, 동탁과 초선을 멀리까지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온 왕윤이 내실에 앉아 여러가지 감회에 젖어 있는 바로 그때, 대문을 박차고 들어와 시끄럽게 하는 사람이 있었다.
"여포 장군이 대감을 찾아 왔습니다."
집사의 말을 듣고 왕윤이 밖으로 나오니, 횃불을 밝혀든 십여 명의 호위병 가운데 여포가 앞에 보인다.
"아니 이거 여 장군 아니오 ?"
왕윤이 짐짓 놀랍고, 반가운 음성으로 여포를 맞이했으나, 여포는 왕윤을 보기가 무섭게 멱살부터 움켜 잡으며 부르짖듯 고함을 지른다.
"이 늙은 것아 ! 너는 초선이를 이미 나에게 주기로하고, 이제 또 태사에게 보냈으니,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
왕윤은 급히 손을 들어 여포을 진정시키며 말한다.
"이렇게 밖에서 말씀드릴 일이 못 되니 안으로 들어가서 애기하십시다."
왕윤은 여포를 후당으로 데리고 들어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장군은 나를 오해하고 계신 것 같은데, 결코 그런 것이 아니오.
내 자세한 말씀을 드릴 테니 들어 보시오.
오늘 태사께서 불시에 우리 집에 오셨기에 내가 소연을 베풀었는데, 태사께서는 술이 거나하게 취하시더니,
나더러 너희 집에 초선이라는 미녀가 있다고 하던데, 그 아이를 한번 불러 달라고 하시더구려.
분부를 거역할 수가 없어서 초선이를 잠깐 나와서 인사를 올리게 하면서, 초선이는 이미 여포 장군과 가약을 맺기로 약속하였다 했더니 태사는 그러냐고 고개를 끄덕이시면서,
그러면 이 애는 내 며느리나 다름 없으므로 당신이 데리고 갔다가 장군에게 친히 보내 주신다 하시면서,
데리고 가겠다고 하시니 태사의 말씀을 내가 어찌 거역하겠소. 그래서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혀서 조금 전에 초선이를 전송하고 들어왔던 것이오."
여포는 그 소리를 듣고 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왕윤앞에 엎드렸다.
"내가 사연을 잘 모르고 크게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천만의 말씀, 그 애가 가지고 갈 예물이 있는데, 그것은 그 애가 여포 장군의 집에 도착하는 대로 보내 드리리다."
왕윤의 이 같은 말을 듣게 된 여포는 크게 기뻐하며 호위 군사를 몰고 돌아갔다.
그 다음날이었다.
여포는 양부 동탁에게 기쁜 소식이 있을 것을 아침부터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그러나 한낮이 다 되도록 동탁에게는 아무런 기별이 없는 것이 아닌가 ?
기다리다 속이 탄 여포는 집에서 기다리다못해 당중(堂中)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러나 동탁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태사는 여태 안 나오셨느냐 ?"
여포는 시종을 붙잡고 물어보았다.
"아직 침실에서 기침(起寢)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이 몇 신데 아직 주무신단 말이냐 ?"
그러자 시종은 남의 눈을 꺼리는 듯 사방을 한번 휘 둘러보더니, 나지막한 소리로 여포의 귀에 입을 갖다대고 이렇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태사께서는 어젯밤, 왕윤 대감 댁에서 초선이라는 미인을 데리고 오시더니 여태까지 주무시는 것을 보면 어젯밤에 재미를 단단히 보셨는가 보옵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여포는 눈알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왕윤의 딸 초선은 분명히 여포 자신의 첩이 되기로 약속한 미인이 아니었던가 ?
그리고 동탁으로 말하면 여포의 양부(養父)가 아니던가 ? 부자의 인연을 맺고 있는 처지에 동탁이 설마 초선을 어찌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여포였다.
그런데 시종의 말에 의하면, 동탁은 분명히 어젯밤 초선을 데리고 침실로 들어가서는 여태까지 나오지 않았다고 하지 않는가 ?
여포는 시종의 말을 반신반의 하면서도 동탁의 침실이 있는 내정(內庭)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방안을 유심히 살피며 동정을 엿보았는데, 때마침 아리따운 여인이 침실 창가에 기대 서서 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는데,
그녀는 틀림없는 초선이 아니던가 ? 이제 여포로서는 동탁과 초선의 관계를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침실 창문 앞으로 다가서니, 마침 침대에 누워있던 동탁이 여포를 발견하고 괴이하게 여기며, 몸을 일으키며 묻는다.
"여 장군이 여기는 웬일인고 ?"
"네, 별일은 없사오나 태사께서 늦게까지 기침하지 않으시어 웬일인가 싶어서 들어와 보았습니다."
여포는 원한을 머금은 채 거짓말을 하였다.
"음 ... 별일 없으니 물러가 있으라."
여포는 마지 못해 그 자리를 물러나왔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창자를 끊어 낼 듯이 괴로웠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였다.
그날도 동탁이 늦게까지 당중에 나오지 아니하므로, 여포는 자기도 모르게 또다시 동탁의 내실로 들어와 보았다.
그리하여 방안에 들어와 보니 동탁은 아직도 곤히 자고 있는데, 초선은 잠옷바람으로 일어나 머리를 빗고 있다가 여포를 보더니 원한과 연민의 정이 가득한 슬픈 시선으로 머리를 빗다 말고 그윽히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
여포는 자신을 애잔한 시선으로 바라 보는 초선에게 와락 덤벼들어 병풍 뒤로 잡아 끌었다.
초선은 손목을 붙잡힌 채 병풍 뒤로 끌려오면서도 원한이 넘치는 시선으로 여포를 그윽히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
그 시선은 마치 말없는 가운데,<장군은 어째서 나를 이꼴이 되도록 내버려 두느냐 ?> 하고 책망하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여포가 초선을 힘차게 끌어 안으려하는데 별안간 동탁의 노기에 찬 불호령이 떨어진다.
"이놈, 여포야 ! 네가 감히 내 애희(愛姬)를 희롱 한단 말이냐 !"
동탁은 자리에서 일어나 목청을 세우고 크게 소리쳤다.
"여봐라, 거기 누구 없느냐 ! 저놈을 당장 밖으로 끌어내어라 !"
한순간 시종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러나 그들은 감히 여포를 끌어낼 용기를 내지 못했다.
여포는 순간 화가 극도로 치밀었으나, 잠시 머뭇거리다가 아무 소리도 하지 아니하고 제발로 동탁의 침실에서 걸어 나왔다.
이렇게 화가 난 모습으로 중문을 나서는데 때마침 이유가 들어오고 있으므로, 여포는 이유를 붙들고 억울한 사정을 말하였다.
이유는 여포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동탁에게로 달려 들어왔다.
"장차 천하를 얻으시려는 태사께서 어찌 그만한 과실로 여 장군을 책망하시나이까 ?
만약 여 장군의 마음이 변하면 천하 대사를 그릇치기 십상이옵니다."
"나의 애희를 희롱하는 놈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
"아니옵니다. 계집 하나로 인해 명장 하나를 잃어버리는 것은 천하 대사를 그르치는 결과가 되옵니다,."
"음 ...그렇다면 어찌했으면 좋겠는가 ?"
천자의 야망을 품고 있는 동탁은 천하 대사가 그릇치게 될 것이라는 이유의 말을 듣자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내일이라도 여 장군을 불러 금은을 후하게 내리시면서 좋은 말로 위로하시어 울분을 풀어주소서."
동탁은 그 다음날, 이유의 말대로 여포를 불러서 많은 금은 보화를 안겨주면서,
"어제는 내가 말이 좀 지나쳤으니 그대는 너무 노여워 마라 !"
하고 위로의 말을 하였다.
여포는 그제야 분이 약간 풀렸다.
그러나 초선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에는 궁중에서 동탁을 위시로 하여 여러 고관들과 함께 국사를 논의하던 자리에서 여포는 슬며시 빠져나와 초선의 거처로 달려갔다. 비밀리에 초선을 만나 보려는 것이었다.
초선은 여포를 보고 깜짝 놀라면서,
"아니, 태사께서 아시면 어쩌시려고 오셨나이까 ?"
초선은 기대반 걱정반의 말을 하면서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거렸다.
"나는 네가 그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리들이 만나는 것을 태사께서 아시면 큰일이옵니다.
장군께서는 후원에 있는 봉의정(鳳儀亭)에 먼저 가 계시옵소서. 제가 곧 가겠나이다."
여포는 봉의정으로 가서 초선을 기다렸다.
잠시후 초선은 수려한 꽃밭을 헤치며 버들가지를 휘어잡으며 하늘하늘 걸어오는데 그 아리따운 자태는 선녀와 같았다.
이를 보다 못한 여포가 초선을 힘차게 끌어 안자, 초선은 여포에 품에 와락 안기며 얼굴을 파묻고 이렇게 호소한다.
"첩은 장군을 한번 뵈온 이후로 오늘날까지 장군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르옵니다.
그러나 태수께 금수와 같은 일을 당했으니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나이까.
첩이 오늘날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은 오직 장군님을 뵙고 억울한 하소연이나 하고 죽으려하였는데, 다행히 오늘 이렇게 뵙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삼국지(三國志)제53편※
미녀 초선(貂蟬) (下)
"초선이! 말을 안 하기로 내가 그대의 마음을 모르리오? 너무 슬퍼 말고 나를 기다리오."
"첩이 무슨 면목으로 장군 같은 영웅을 모실 수 있사오리까."
"나는 그대의 마음을 모두 알고 있으니 염려 말고 조금만 기다리오."
"정말 그러시다면 저를 하루속히 구해 주소서."
"내가 이승에서 그대를 구해주지 못한다면 무슨 면목으로 영웅이라 불리리오.
그러나 오늘은 늙은 도둑의 의심을 샀다가는 안 되겠으니 다시 돌아가 봐야겠소.
내가 불원간 그대를 구해낼 것이니 당분간 기다려 주시오."
"그건 안 되옵니다. 장군께서 태사를 그렇게나 무서워하신다면 무슨 방도로 첩을 구해 주신다는 말씀입니까?
차리리 연못에 뛰어들게 그냥 놓아 두시옵소서."
초선은 여포의 손을 뿌리치고 또다시 연못으로 뛰어 들려하였다.
"염려말고 조금만 참고 있으라니까... 내 반드시 그대를 구해 준다니까 ..."
여포는 그러면서 다시 돌아가려고 하자, 초선은 원한이 가득찬 시선으로 여포를 바라보며 이렇게 원망하는 것이었다.
"첩은 장군을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영웅으로 믿었더니 늙은 도둑을 이처럼 무서워 하시는 줄은 정녕코 몰랐습니다."
말을 마치자 그대로 눈물을 비오듯이 흘렸다.
여포는 적이 민망하고 무안하여 그 자리를 쉽게 떠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천만 뜻밖에도 동탁이 정자로 성큼 들어서는 것이 아닌가?
그는 여포가 별안간 없어진 데 의심을 품고 초선을 찾아온 것이었다.
동탁은 여포가 초선이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눈에서 불이 일어날 것같이 소리를 질렀다.
"이 죽일 놈아! 네 놈은 어째서 여기에 와 있느냐!"
동탁은 고함을 지르며 정자 난간에 세워 놓은 화극을 들어 여포를 치려 하였다.
그러나 여포는 나는 듯이 정자를 벗어났다.
동탁은 여포의 뒤를 쫒아가며 화극을 냅다 던져버렸다.
그러자 여포는 날아오는 화극을 손으로 쳐버리고 쏜살같이 후원 밖으로 사라져 버린다.
동탁이 다시 화극을 집어들고 여포의 뒤를 쫒으려는데 이유가 후원으로 들어서다가 두 사람의 모습을 번갈아 보고, 깜짝 놀라며 달려왔다.
"태사! 이게 무슨 일이옵니까?"
"여포란 놈이 내 애희를 희롱하니 그놈을 죽여 없애 버려야 하겠다!"
"태사님! 진정하시옵소서. 그것은 결코 좋지 않은 일이옵니다.
여포의 목을 자르는 것은 태사님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옵니다."
"불의의 짓을 하는 놈을 그냥 두고 보란 말이냐?"
"안 됩니다. 태사께서는 지금 당신 한 분의 감정으로 분노하시고 계시지만, 저는 지금 태사의 장래를 위해 간언(諫言)을 올리는 것이옵니다.
옛날에 이런 일도 있지 않았습니까?"
이유는 흥분한 동탁의 노기를 가라앉히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해주었다.
.....
그 옛날 초(楚)나라 시절 장왕(莊王)은 어느날 국가의 공로가 많은 무장(武將)들을 한자리에 불러 놓고 연회를 크게 베푼 일이 있었다.
그런데 연회의 흥취가 한창 무르익었을 무렵에 별안간 바람이 불면서 등불이 모두 꺼져 버리고 마는 것이 아니던가?
장왕은 빨리 불을 켜라고 말했으나 무장들은 불이 없는 것이 오리려 흥취가 있다고 떠들어대었다.
그 자리에는 장왕이 총애하는 궁녀 하나가 무장들에게 돌아가며 술을 따르느라고 특별히 나와 있었는데 어느 장수 하나가 불이 꺼진 어두운 틈을 타서 장난삼아 그 궁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 순간 크게 놀란 궁녀는 소리를 지르며 그 장수의 갓(笠)끈을 낚아채 가지고 장왕에게 달려가 그 사실을 고해 바쳤다.
그리고 장왕의 무릅위에 엎드려 울면서 말하였다.
"지금 저에게 욕을 보인 사람은 바로 이 갓끈의 주인공이옵니다.
그러니 어서 불을 밝히시고 그 사람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갓끈이 없는 사람이 범인이옵니다."
궁녀는 자신의 절개가 굳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영명한 장왕은 노여워하기는 커녕 오히려 어둠 속에서 무장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 나의 총희(寵姬)가 나에게 부질없는 부탁을 하고 있으나 오늘밤 연회는 여러 무장들을 위로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오.
지금 한 장난은 취중에는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소.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처럼 유쾌한 장난을 해 준 것이 오히려 나는 기쁘다는 말이오.
그러니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밝히기 보다는 지금 연회의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서라도 여러 무장들은 지금부터 다 같이 갓끈을 끊어 버리고 오늘밤을 마음껏 즐기도록 합시다."
장왕의 이같은 지혜로운 처사 덕분에 범인은 누구인지 아무도 모르게 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몇 해 뒤에 장왕은 진(秦)나라의 대군과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 죽음을 면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바로 그때에 멀리서 장수 하나가 급히 달려오더니 장왕을 호위해 가며 전신에 상처를 입으면서 적과 결사적으로 싸워서 장왕을 구출한 뒤에 땅에 쓰러져 버렸다.
그는 장웅(蔣雄)이라는 장수였다.
"나는 장군의 덕택으로 극적으로 죽음을 면하였소.
그런데 어떤 까닭으로 이처럼 목숨을 걸고 멀리서 달려와 주었소?"
그러자 장웅은 죽음을 눈앞에 맞으면서도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저는 전날 대왕께서 베풀어 주신 연회에서 대왕의 총희에게 입을 맞추었던 사람이옵니다.
그날 밤 대왕께서 지혜로운 총명으로 저를 용서해 주셨으니 제가 성군을 위해 목숨을 바친들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장웅은 그렇게 말하며 숨을 거두었다.....
"그후에 세상에서는 그 일을 절영지회(絶纓之會)라고 부르옵니다.
바라옵건데 태사께서도 여포 장군에게 장왕과 같은 관용을 베푸시옵소서."
하고 말하였다.
동탁은 그 이야기를 듣고 크게 깨닫는 바 있었던지,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
"잘 알았네. 그러면 나도 여포를 용서하고 다시 노하지 않겠네."
동탁은 그 길로 내실로 들어와 초선을 불렀다.
"너는 어찌하여 여포와 사통을 하였느냐?"
초선은 울면서 대답한다.
"여포 장군으로 말하면 태사님의 양자이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줄 아옵고 여 장군을 무심히 대했사옵는데 여 장군이 오늘은 화극을 들고와 저를 억지로 봉의정으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설마 태사님의 양자인 여 장군이 그럴 줄은 몰랐습니다."
"음 ... 이미 사태가 이에 이르렀으니 나는 너를 여포에게 돌려줄까 하는데 네 생각을 어떠냐?"
그러자 초선은 동탁의 무릎위에 쓰러지며 목을 놓아 운다.
"첩이 이미 귀인를 섬기게 되었는데 이제 종놈의 첩이 되라 하오시니 그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그런 욕은 못 보겠습니다."
초선은 말을 마치기 무섭게 벽에 걸려 있는 보검(寶劒)을 떼내어 목을 찔러 죽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동탁은 크게 놀라 초선의 손에서 검을 빼앗았다.
초선은 방바닥에 그대로 엎어지며 통곡한다.
"첩이 이제사 모든 사정을 죄다 알았습니다.
이유라는 자가 여포의 부탁을 받고 태사님께 그런 진언을 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유와 여포는 태사님이 안 계실 때에는 언제나 소근소근 밀담을
나누었으니까요.
그러실 것입니다. 태사님은 저같은 계집보다는 역시 이유와 여포가 소중하실 것이니까요.
첩은 이런 농간에 한 가운데로 저를 몰아 넣은 이유와 여포란 놈을 생으로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겠사옵니다."
"음 .... 염려 마라! 그런 말은 농담에 불과하였고, 내가 너를 설마 버릴 수야 있겠느냐."
"아무리 태사님이 그런 생각을 품고 계시더라도 제가 여기 이대로 있다가는 여포의 손에 목숨을 뺏기고 말 것이 분명하옵니다."
"염려 마라! 내가 내일은 너를 데리고 미오성 으로 가기로 하겠다.
그리로 거처를 옮겨가서 내 뜻대로 되면 너를 황제의 귀비(貴妃)로 만들어 줄 것이고 만약 뜻을 이루지 못한다 하더라도 너에게 한평생 부귀와 영화를 누리도록 해 주겠다."
초선은 그제서야 눈물을 거두고 동탁의 품에 안겨 회심(會心)의 미소를 지었다.
※삼국지(三國志)제54편※
, 여포의 복수
그 다음날이었다. 이유는 아침 일찍 동탁을 찾아와, 어젯밤 여포와 만났던 일을 낱낱이 말하고 나서,
"여포 장군이 태사님의 관대하신 배려에 깊이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초선이를 여포 장군에게 주어 버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
"음 ...."
동탁은 어제 초선에게서 들은 말도 있고, 또 초선앞에서의 장담도 있었기에 내심 이유를 괘씸하게 생각하였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이유는 다시 말했다
.
"이왕 물려주시려면 초선을 오늘중으로 여포 장군 집으로 보내는 것이 좋을까 하옵니다."
동탁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내가 먼저 살을 섞은 아이를 여포에게 보낸다는 것이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느냐?
여포와 나는 부자지간 이라는 것을 잊었단 말인가? 그건 안 될 말이다.
다만 여포에게 죄만은 다시 거론치 않겠다는 나의 뜻을 전하라!"
"그래두..."
"이유! 부질없는 소리는 그만 해라.
너 같으면 네가 사랑하던 계집을 아들에게 물려 줄 수 있겠느냐?"
이유는 하는 수 없이 밖으로 물러나오며 하늘을 우러러 이렇게 탄식하엿다.
"아아, 우리들은 모두가 그 계집의 농간에 망하게 생겼구나!"
동탁이 초선이를 데리고 자신의 사택인 미오성으로 떠나는 날,
문무 백관들 모두가 성문 밖까지 나와 그들을 배웅하였다.
초선은 배웅하는 사람들 중에 여포가 끼어 있음을 알자, 일부러 수레의 문을 열고 슬픈 얼굴을 내보였다.
여포는 초선의 모습을 보고 한숨을 쉬며 입술을 깨물었다.
"음...이유의 말에 의하면 초선을 나에게 물려준다더니 그것 조차도 새빨간 거짓말이었구나!"
이제는 이유에게도 원한이 새로워졌다.
그때 문득 여포의 등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장군은 어찌하여 미오성으로 태사를 따라가지 않으셨소?"
하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
돌아자보니 초선의 양부 왕윤이었다.
"태사가 초선이를 데리고 가는 데 나를 데리고 갈 리가 있겟소!"
여포는 씹어뱉듯이 대답하였다.
왕윤은 짐짓 놀라며 반문하였다.
"아니 그럼, 초선이를 아직도 장군에게 돌려보내지 않았다는 말씀이오?"
"왕 대감은 그것을 몰라서 물어보시오?"
"나는 태사께서 초선을 장군에게 보내 주신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럼 여태 안 보내셨던가요?"
"늙은 도둑놈이 초선을 도무지 내놓으려고 하지 않는구려!"
여포의 대답에 왕윤은 다시금 놀라 보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설마 한들 태사께서 장군께 대해서야 그럴 리가 있겠소.
태사가 그렇듯이 금수의 행실을 할 줄은 정말 몰랐소이다.
우리 집에 가서 그 일을 좀 의논해 보기로 합시다."
왕윤은 한숨을 쉬면서 여포의 손을 잡아 끌었다.
그리하여 여포를 내실로 데리고 들어와 새삼스러이 분개하는 빛을 보인다.
"태사가 내 딸을 욕보이고 장군에게는 부인을 빼앗았으니 이는 하늘이 노하고 만천하의 사람이 노할 일이오.
이 몸은 늙고 힘이 없어 어쩔 수 없지만 장군 같은 천하의 영웅으로서는 실로 참기 어려운 모욕일 것이오."
여포는 그 소리를 듣자, 참고 참았던 분노가 폭발했는지 주먹으로 탁자를 두두리며 울부짖었다.
"나도 더 이상은 못 참겠소. 그 늙은 도둑놈을 내 손으로 죽여서 원한을 풀고야 말겠소!"
"여 장군! 함부로 그런 말을 마시오.
태사의 귀에 들어가면 큰일 나리다."
"그 늙은 도둑놈이 듣기로 뭐가 무섭단 말이오? .... 그러나 한가지 거리끼는 것은 나와 부자간의 의리를 맺었는데 내가 그를 죽이면 주변사람들이 해 댈 뒷공론이 두려울 뿐이오."
그러자 왕윤은,
"장군은 여씨고 태사는 동씨요.
비록 부자의 연을 맺었더라도 엄밀히 본다면 문제는 안 될것이오.
그리고 듣자니 태사가 봉의정에서 장군에게 화극을 내던져 장군을 죽이려고 했다는구려.
그런 사실을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알고 있는 터이오."
"옳은 말씀이오! 그가 먼저 나를 죽이려 했으니 내가 그를 죽인들 누가 잘못이라 하겠소."
"그리고 어젯밤에 내가 천문을 살폈더니 자미성이 약하게 보이다가 유성 하나가 떨어졌소.
이는 동탁의 기운이 쇠한 것을 나타낸 것이니 아마도 오래는 못 살 것이오.
그러니 만약 장군이 말씀하신 대로 태사를 기꺼이 제거하신다면 내딸 초선이가 악마의 소굴에서 벗어나 밤마다 그리워하는 장군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고, 쓰러져가는 한실(漢室)을 바로 일으켜 세울 기회가 되는 것이니 그 공로는 청사(靑史)에 길이 남게 될 것이오!"
"알겠소. 나도 이제는 깨닫고 결심한 바가 있소."
여포는 입술을 굳게 깨물며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일이 중간에 새 나가거나 실패를 하는 날이면 큰일이니 거듭 신중을 기하셔야 하오."
"왕 대감, 걱정 마시오. 내가 피로서 성공을 맹세하리다."
여포는 그렇게 말하더니 칼을 뽑아 왼편 팔을 찔러 피를 내어 보이는 것이었다.
왕윤은 그 모양을 보고 여포 앞에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한 왕실이 이제 장군의 덕택으로 바로 잡힐 기회를 갖는 것 같소이다.
비밀의 누설을 삼가하여 부디 성공을 바랄 뿐이오!"
여포도 고개를 끄덕이며 비밀을 지킬 것과 성공을 맹세하였다.
다음 제55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