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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노후를 멋있게 살자 원문보기 글쓴이: 유 래영
우리세대 향수가 깃든 6070년 시대의 정감어린 물건과 사회 환경들
전세계에서 가장 빨리 변하는 한국
얼마전에 미국의 언론인이 쓰신 칼럼에서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변하는
나라 라고 하면서 1900년부터 2000년의 불과 100년만에 조선시대부터 한일합방과
6,25 전쟁으로 남과 북쪽이 분단되여 항상 전쟁의 위협에 살고 있으며 가난으로
외국의 원조 없이는 자력으로 아무 것도 할수없는 나라가 지금은 세계 최강국이
되였다고 하면서 전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변하는 나라가 한국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어릴적 시절을 생각하면서
전쟁이후에 부모님은 황해도 연백에서 월남하였기에 남한에는 숟가락 하나없이
고생은 말로 표현할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고교 선생님을 하셨기에 지독한 가난을
경험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부족했던 어린시절에 추억은 너무도 힘들었지만
그래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시절이 가장 행복한 시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릴적 친구들과의 추억
죽마고우(竹馬故友)의 뜻은 대나무로 만든 말을 타고 놀던 벗이라는 뜻으로 어릴 때부터
같이 놀며 자란 친한 벗을 뜻하기에 모든 것을 이해할수가 있기에 그만큼 격이 없어서
지금 만나도 그냥 좋다, 다른면에서 보면 추억에 너무 사로잡혀서 과거의 생각에 집착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는 안겠지만 나이들수록 옛날 어릴적 향수에 기울면서 조용히
아름답고 즐거운 미소를 짓곤한다, 우리와 달리 자식들은 너무 풍족한 시절에 살았기에
커서 우리처럼 고향에 대한 향수나 어릴적 친구들과의 추억은 적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청계전 건물과 추억의 물건들을 보면서
어느날 시간이 나서 인터넷 서핑을 하면서 아래 글과 사진을 보면서 너무도 느끼는 것이
많았기에 나만 보는 것이 아까와서 공유를 하고자 퍼왔습니다, 내 생각에 청계천 고가도로를
철거후에 전시작품 사진들을 보면서 글을 쓰신분이 자신의 솔찍한 감정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너무도 리얼하게 표현을 하셨기에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몇번이나 다시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는데 아마도 이글을 보시는 우리세대의 모든분들이 같은 생각을 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1960~70년대의 시절로 추억의 여행을 떠나보시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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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와 70년대 청계천 건물과 추억의 물건들 (펌) 청계천 남단에 60년대와 70년대 추억의 물건들이 청계천 판자집과 더불어 전시돼 있다. 3칸의 작은 방에 왜 그리 많은 추억의 물건들이 전시돼 있는지.. 도시빈민의 상징 판잣집/청계천 복개 이전에는 이곳 청계천 주변에 도시 빈민들이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생명 유지를 하기에 급급한 세상이라 환경보호니 자연보호니 이런 단어가 생소하던 때였다. 개인 위생이나 가족 건강도 챙기기 힘든 때였기에 사회적인 이슈에 동참하기가 힘든 가난한 시절이 아니었던가? 건강에 해로운 줄도 몰랐지만 판자도 돈이니 썩지 말라고 콜타르나 폐유를 얻어다 바르기도 했고 물이 귀해 설걷이도 대강 하고 살았었다. 그래도 그 나름대로의 행복이 있었다.배깔고 만화를 보기 시작하면 허리, 어깨 아픈 줄도 모르고 10권씩 읽어 제꼈다. 그 때 어른들은 무슨 생각으로 만화책을 무작정 나쁘다고 못보게 하셨는지... 아마도 교과서를 등안시 할까봐였을 것이다. 이웃 형이 초등학교 졸업후 시내로 양복기술을 배우러 다닐 때 만화책을 많이 빌려와 보고는 내게 인계해 주고 순천 역전 앞에 있는 만화방에 갖다 주라고 했다. 난 공짜로 본다는 게 즐거워 10리길 걸어서 책 갖다주는 심부름을 마다하지 않았다. 간혹 늦게 갖고왔다며 만화방 주인에게 혼 난 적도 있었다. 빌려온 날짜를 내게 말해주지 않고 늦으면 날 시켰기에 혼나는 것도 공짜로 본 내 몫이었다. 하지만 그 때 만화를 실컷 볼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당시엔 거의 모든 상점의 간판은 "ㅇㅇ상회"라고 붙였다. 페인트 가게도 포목점도 그릇가게도 그랬다. 지금의 슈퍼인 구멍가게에도 그랬다. 구멍가게에는 우표 판매소 표시나 담배 표시가 있었고 틀림없이 반공방첩 포스터나 표어가 벽에 붙어 있었다. 반공이 국시였으니 그랬어야 했다."빨갱이"라는 한마디면 심하면 죽었고 안그러면 '사회적 매장'이었다. 바람에 판자집을 눌러주는 지붕위의 폐타이어가 인상적이다. 리어카는 당시 고급 돈벌이 수단이었다. 몸둥이로 벌어먹고 살아야 했던 당시 도시 노동자들은 지게였고 지게로 돈을 모으면 겨우 리어카 한 대를 장만하였다. 빨랫줄에 걸린 빨래가 인상적이다. 여자들은 손빨래 하고 밥짓고 남편과 함께 일을 해야 방 한 칸이라도 마련 했었다. 못사는 나라일수록 여자들이 고생이다. 똑같이 일하고 애낳고 기르고 밥짓는 가사는 오롯이여자 몫이었기 때문이다. 전봇대에 달린 백열구 가로등도 지금 생각하면 초라했지만 당시엔 문화혜택이었고 낭만이었다. 농촌에서 지을 농토도 없고 그러면 무작정 도시로 올라 온다. 오로지 몸둥이 하나로 먹고 살아야 했다. 제일 쉬운게 지게꾼,넝마주의,연탄배달 이런 거였고 중국집 주방 보조나 배달, 기술을 배우는 견습공은 알음이나 빽이 있어야 했다. 19공탄이 22공탄되고 연탄도 크가가 각기 달랐다. 이것은 그래도 공장에서 압착된 수명이 긴 연탄이다. 돈없는 빈민들은 연탄가루를 사거나 주워와서 물을 부어 이긴 후 틀에다 붓고 큰 나무해머로 내리쳐서 연탄을 찍어 말려서 때는 가정도 많았다. 페인트 통으로 만든 물지게-- 폐품 활용은 시키지 않아도 했다.돈이 궁했으니까. 물지게를 보면 돈 들어갈 것이 없다. 페인트통에 판자도 주워와서 못 질 하면 되고 멜빵끈은 방앗간의 피댓줄을 재활용 한 것이다. 영화프로도 곳곳에 저렇게 붙였다. 극장은 당시 영화를 상영하기도 하고 가수들의 '리사이틀'이라 불리던 공연을 하는 문화공간이었다. 각 도시마다 '중앙극장'은 다 있었다. 남의 벽이고 뭐고 주인 허락도 없이 아무데나 풀칠 쓱쓱하고 영화 포스터를 붙였다. 뭐라고 항의하면 초대권이라고 씌여진 영화표를 한 장씩 주고 입막음을 했지만 그 때는 영화를 보는 것이 낭비라고 여겨질만큼 돈이 귀했던 시절이다. 개인 가게의 벽에다가 공권력의 힘으로 경찰서의 대형 표어를 붙여도 되던 시절이다. 만약에 저 표어 붙이는 것을 거절했다면 주인은 '빨갱이'라는 누명을 쓰고 혼났을 것이다. 지금 저런 일이 가능할까? 소화기는 지금 시점에서 생각해야 한다, 당시에는 소화기가 보기 힘든 물건이었다. 대개 붉은 페인트 칠을 한 드럼통에 물을 채워주고 바께스 몇개를 걸어 둔 방화수나 빨간 나무상자에 모래를 담아두거나 종이 봉투에 모래를 담아 쌓아두는 방화사가 비치돼 있었다. 저 소화기는 지금 전시관이 판잣집이라 화재에 대비하기 위해 관리실에서 비치한 방화도구다. 도시 주택가의 쓰레기통--집집마다 대문 옆에 설치됐고 연탄재등 화재예방을 위해 시멘트로 규격화 해서 만들어 설치했다. 새벽이면 청소부 아저씨들이 쇠스랑으로 긁어내어 싣고 갔다. 물론 넝마주의 아저씨들이 먼저 재활용 가능한 물건들은 먼저 훑고 지나간다. 개인 주택에 사는 남자들이 술먹고 늦게 들어갈 때 저 쓰레기통은 담을 뛰어넘는 것을 도와주는 디딤돌이었다. 물론 도둑에게도 유용하게 쓰인 물건이기도 했다. 플라스틱이 나오기 전에 유용하게 쓰인 생활도구 바가지--- 거지들의 밥통,곡식 계량기.국뜨는 국자, 물뜨는 컵, 여자들의 밥그릇,심지어 거름을 하기위해 밭으로 오줌을 퍼날르는 도구. 막걸리 잔, 행사때 쓰는 탈바가지,참으로 용도가 다양했다. 박 내용물은 박나물이라고 무쳐 먹으면 담백하고 맛있다. 60년대 70년대에는 매스콤이나 통신이 발달되지 않아서 조선시대 "방"처럼 정부의 시책들이 담화문이라는 수단으로 국민들에게 전달됐다. 당시 야무지고 잘생겼다고 생각한 박정희 대통령 사진이 실린 담화문이나 배움이 많은 인상의 정일권 국무총리,김종필 국무총리 사진이 새겨진 담화문을 많이 봤다. 쌀이 모자라던 시대라 혼식과 분식을 장려하던 정부 시책을 전하는 담화문이다. 주식으로 먹기에도 모자라는 쌀과 잡곡들을 술을 만들거나 다른 용도로 쓰지 말라는 내용과 보리밥이 쌀밥보다 건강에 좋다는 내용이다. 그 때는 혼식의 날을 정해 잘사는 사람들도 하루는 보리밥을 먹도록 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도시락 검사를 하여 쌀밥을 못먹게 했다. 이런 정책들과 국민들의 고통을 바탕으로 오늘 우리가 잘 살게 된 것인데 우리의 자식들은 아마 이해를 못할 것이다. '북청 물장수'라는 말이 생각나는 물지게. 일제시대때 함경도 북청 사람들이 한양에 혈혈단신 돈벌러 들어와 물지게로 부유층에 물을 공급해주고 생계를 이어갔다는 얘기. 60년대나 70년대에도 상수도 공급이 원할하지 않아 동네에 공용 상수도를 하나 놓고 집집마다 받아다 쓰던 물지게. 아니면 공동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길러 집으로 져 날랐다. 지금은 부억,화장실 필요한 곳에서 수도꼭지만 틀면 나오는 게 물이지만 당시엔 참 물이 귀했다. 화장실도 저런 판잣집 동네라면 동네에 하나 있었고 공동으로 썼을 것이다.아침이면 동네 사람들이 화장실 문 앞에서 줄을 섰다. 초등학교 교실이 이랬다.그러나 1998년도 중국 연변에 조선족 학교에 갔을 때는 등받이도 없는 풀빵집 의자같은 개인 의자였다. 풍금은 발로 페달을 밟아 바람을 공급하며 건반을 눌러야 한다. 난 음악책의 계이름을 다 외웠기에 간주는 못넣더라도 계명으로 노래를 칠 수가 있어서 몰래 풍금을 치다가 선생님께 혼 난 적이 있었다. 또 별도로 음악실도 없어서 음악 시간이면 다른 교실에서 풍금을 옮겨와야 하는데 난 키가 커서 맨날 오르간 옮기는 노역에 차출됐다. 교실출입문 위나 정면 칠판 옆에는 항상 저런 시간표가 붙여져 있었다. 오후에 한 두시간 더 공부하는 날이 제일 싫었다. 첫째 도시락을 싸 가야했고 둘째 공부하는 것이 싫었으니까. 그 때는 초등학생이 학원을 다닌 다는 것 자체가 없었고 기껏 부유층에서 보내는 학원이 있다면 주산학원이었다. 도시에서는 5학년 때부터 '과외'를 하는 학생이 있다고 들었다. 순천중학교는 전남 최고의 학교로서 2시6개군 센타 학교라 했고 작은 초등학교에서는 전교 1,2등을 해야 합격할 수 있었기에 부유층에서는 미리 과외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스스로 열심히 해서 입학했다. 나도 과외라는 것은 있는 줄도 모르고 합격했다. 300점 만점에 커트라인이 287점.7살에 입학한 애는 합격했고 8살에 입학한 얘는 불합격 됐다. 만화가게 흔히만화빵이라고 불렀다. 신간만화를 선전하는 포스타도 붙어있고 겨울에는 난로에 계란도 쪄서 팔고 오뎅국물도 팔았다. 또 저녁에는 당시 귀했던 TV를 보여주고 한시간에 10원씩 받았다. 지금도 기억나는 만화가는 이근철,정운경,손의성 김종래,김삼,박부성,박기정,길창덕,신동우.... 여학생들의 장난감.인형은 비싸서 그렇고 저런 것을 사서 가위로 오려 옷입히기를 하며 놀았다. 요즘엔 PC에 아바타가 대신한건가? 겨울철 조개탄 난로에 도시락을 올려서 뎁혀 먹었다. 난로 옆 친구는 주기적으로 도시락 순서를 바꿔야 했다. 안그러면 맨아래 도시락은 타버린다. 반찬통이 도시락 속에 있으면 반찬도 익어 버린다. 당시엔 반찬통이 따로 있는 도시락도 드물었다. 하교할 때 도시락 속에 젓가락과 반찬통을 넣고 책보자기에 쌓아 어깨에 메고 뛰면 딸강딸강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들렸다. 우리 초등학교 때는 가방을 가지고 다니는 학생이 거의 없었다. 모두 교과서를 보자기에 싸가지고 다녔다. 우리는 난로에 결명자 차를 항상 끓여 먹었다. 학교 옆 텃밭에 결명자차를 재배해서 공급했던 것같다. 그 유명하신 방석우 교장선생님이 계셨으니~ 신간 만화 선전 포스터.또한 그 때 미운 여자애 인형이 유행했다. 그렇게 먹고싶었던 삼립빵.하지만 초등학교 졸업 할 때까지 5개 먹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린 아무 것도 몰랐지만 당시 고급 술집에선 서양 흉내를 낸 호스티스가 있었고 그를 소재로 한 영화 "0번 아가씨" 포스터가 붙어 있다. 사실 그 때에는 우리 누나들의 자화상이었다. 저 정도면 학력이 있는 여자들이고 보통은 니나노 집이라고 한복 입고 막걸리 주전자나 상 두들기며 노는 그런 곳에서 우리 누나 세대들이 돈 벌어 부모님 모시고 동생들 공부 가르켰다. 그 때는 집안의 기둥은 장남이고 남자들이었다. 여자들은 남의 집에 줘야하는 '출가외인'의 후보자일 뿐.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가장 허접한 것 먹으며 자랐고 커서는 집안을 위해 희생을 해야 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뿌리깊은 유교사상이 문제다.남자는 씨앗, 여자는 밭...이게 말이 되는가? "홍도야 우지마라"라는 노래가 그런 줄거리 아니던가! 매스콤이 발달이 안돼 저런 계몽 포스터가 많이 붙어 있었다. 이건 정의사회구현이라고 써진 것을 보면 5공때? 80년대 것인가? 성냥은 필수품이었다.그래서 집들이용 선물로 애용됐다. 불처럼 확 살림 펴라고 그랬다. 논산역 부근에 '남성 성냥 공장'이 있었다. '화랑'이라는 이름의 대통성냥을 생산했던 공장이었다. 근데 지금은 귀신이 나올 것같은 폐허로 변했고 중장비 보관 창고로 쓰이는 것같았다. 근데 왜 인천에 '성냥공장 아가씨'라는 노래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남자들 담배 피울때도 성냥이 필요했고 집에 불을 켤 때 요리하는 불을 피울 때도 성냥은 필수품이었다. 이러던 성냥이 가스 라이터가 나오니 그 힘을 잃게 되었고 나중엔 카페 선전등 작은 성냥곽으로 홍보용 선장품이 되더니 지금은 케이크에 불 붙일 때나 쓰라고 포장돼 오는 것이 전부다. 진열장에 머리 염색약도 보인다. 당시 담배는 파랑새,새마을,수연이라는 봉초,희망 이런것이었는데 아리랑 파고다,금관 이런 담배는 고급이라 서민 노동자는 꿈도 못꿨다. 선생님께 드리는 선물이 '금관'한 값이면 충분하던 시절이었다. 이 때 양담배는 질의 여부를 떠나 귀한 선물이자 뇌물이었다. 밀가루 푸대---미국 국기와 두 손이 악수하는 그림의 밀가루 포대는 용도가 다양했다. 그 포대를 쌀이나 다른 곡식을 담는 것으로 재활용 하는 것이야 당연했고 그것을 뜯어 옷을 만들어 입기도 했다. 원래 미국의 원조품이었지만 박정의 정부에서는 '일하지 않은자 먹지도 말라'는 기치 아래 조국근대화를 위해 취로사업을 시키고 배급용으로 썼다. 사실이런 발상이 새마을 사업을 성공시킨 것같다. 윗줄은 당시 상품 선전 포스타-광고지. 왈순마는 삼양라면과 경쟁사인 롯데에서 최초로 만든 라면. 그 때는 저 왈순마 라면을 배불리 먹는게 소원이었다. 그 때는 또 왜 그렇게 '국산품 애용'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외제품도 별로 들어오지 않았는데... 아마도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양담배 때문에 국가의 주요 재정 수입원인 담배를 파는 전매청에서 붙인 포스터다. 신간만화 광고 포스터 당시 맥주병과 소주병 - 지방마다 소주 메이커가 있었고 법으로 그 지역 내에서만 판매토록 했다. 강원도 경월,전남의 보해,군산의 백화,동해 백주, 전북의 보배소주,등이 그것이다. 맥콜은 생산되자마자 아주 인기 좋은 음료수였다. 술에 약한 사람은 맥콜 먹고도 취했다. 맥주는 크라운과 OB 두 종류 뿐이었는데 돈많은 사람들이 먹는 술로 인식됐다. 서민들은 오로지 막걸리나 막걸리 종류였던 약주였고 도시 서민들은 소주,고급스럽다는 술이 정종 그 윗단계가 맥주,그리고 양주였다. 내가 고등학생 때 처음으로 국산 양주가 생산됐다. 해태주조에서 나폴레온 꼬냑,롯데에서 캡틴 큐~~ 당시에 귀해서 선물용으로나 쓰였던 설탕. 서민들은 엄두도 못내고 삭카린이나 당원을 사서 감미료로 대신했다. 저런 설탕통을 진열만 해놔도 부의 상징 내지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저 분유를 먹고 자라는 애기들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우유를 먹는 얘들은 튼실하게 보일 정도로 비만이었다. 못먹던 때라 그렇게 조기에 살이 찌는 분유나 우유를 부러워 한 것이다,알고보니 모유보다 훨씬 못한게 분유인데 당시에는 거의 모든 국민들의 인식이 분유가 모유보다 훨씬 좋은 것인 줄 알았다. 분유도 부의 상징이었고 모든 엄마들의 꿈이 분유 멕여 애를 튼튼하게 키우는 일이었다.인식의 차이가 사회문화를 바꾼다. 남양분유에서 매년 '우량아선발대회'라는 대회도 개최했다. 알고보면 비만아에게 상을 준 것이다. 없는 사람은 젖이 부족하면 '맘죽'이라고 쌀 죽을 쑤어 그 국물을 멕이기도 했다. 70년대 초 라면의 종류도 조금씩 다양해지던 시절 통조림을 먹는 것도 넉넉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기회다. 복숭아 통조림을 따서 먹어 봤는데 정말 황홀했다. 통조림에 씌여진 것을 보고 복숭아가 황도와 백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간스메'라고 불리며 귀한 대접을 받던 통조림도 요즘엔 천덕꾸러기다,.싱싱한게 최고인 시절이기에... 꽁치 통조림에 꽁치 보이루라고 씌였던 기억이 난다. 학시절 처음 등산 갈 때 필수품이 꽁치 통조림이다. 그것으로 코펠에다 찌게를 끓인다.감자 삐져 넣고... 옆에 플라스틱 1회용 컵이 폴리 컵이란 이름으로 서있다. 서민들은 일회용 컵으로 쓰지 않았다.못 쓸때까지 썼다. 지금 못사는 필리핀에 가면 저런 컵을 많이 쓴다. 우리나라는 발암물질인 다이옥신이 나온대서 요즘은 잘 안쓴다. 세수비누 하나로 머리까지 감았던 우리가 언제부터 샴푸로 머리를 감았지? 빨랫비누로 머리 감았던 때가 초등학교 시절, 쇠똥이라 불릴만큼 머리에 때가 낄 때였으니. 세수비누로 머리 감을 때가 중학교때.그것도 이상한 비누였다. 샴프로 머리 감던 시기가 고교 졸업 이후였던 것같다, 하기야 고교땐 빡빡머리여서 샴프가 필요 없었다. 유니나.리도 이런 샴푸. 당시 고급스러운 과자들.이것은 서민 자제들이 먹지못한 것, 박스에 포장 된 것들은 도시에 사는 얘들이나 일본에 친척을 둔 얘들이 먹는 과자로만 알았다. 서민 자제들은 오다마라 불리던 큰 사탕이나 박하사탕, 비과,고무과자,라면땅,냉차등 요즘 말하면 불량식품 수준. 난 '오리온 종합선물세트'라고 써 진 갖가지과자가 포장된 박스를 받아 먹어 보는 것이 꿈이었다. 해서 내가 사회에 나와 돈을 벌었을 때 시골에 있는 동생들에게 그 ;종합선물세트'를 사다 줬다. 종재기 불 쓰다가 남포불 쓰다가 전기를 썼다. 양초는 고급 조명기구.제사 때나 굿할 때 썼던 거. 봉지에 든 세수비누는 지금 생각하면 비누수준이 아니었다. 우유비누는 아주 좋은 것. 캔디를 그 때는 캰듸로 표기했다. 외래어니까 탓할 게 없지만...벌꿀비누는 인기였다. 내 기억엔 양초도 잘 쓰지 못했다. 당시 우리나라 이름난 제과회사 3개는 해태,롯데,오리온이었다. 종합선물세트가 유행했다.물론 아주 귀한 선물이었다. 꽈리라.전라도 말로 땡깔이라 했다 여자 아이들이 입에 넣고 공기를 넣어 소리를 내며 다녔다. 입술과 혓바닥 장난감이다. 스노우 샤베트는 집에서 만들어 먹는 아이스 크림인데 우선 냉장고가 있어야 했다.냉장고 있는 집이 얼마나 된다고~~ 도시 얘들 먹거리였다.쵸코렛 또한 달콤함의 상징, 하지만 우리들에게는 그림의 떡. 럭키치약---내가 기억하는 최초의치약/ 지금 북한의 포장기술을 보는 것같다, 우리네 서민들은 손가락으로 소금 뭍혀 이를 닦던 때라 치약도 초등학교땐 써보지 못했다. 돈이 없어 치약이나 칫솔은 꿈도 못꾸고 소금을 손가락에 뭍혀 닦으려니 짜고 이틀까지 쓰리니 이를 닦겠는가? 초등학교 때 용의검사를 하거나 건강진단 할 때면 전 날 선생님은 학교옆 개울로 우리들을 데려가서 모래로 이를 닦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