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유산] 임금 명령보다 더 소중한 가르침 : 척사윤음(斥邪綸音)
조광
머리글
우리 나라의 천주교회는 18세기 말엽에 교회가 창설된 이래로 일백여 년 동안에 걸쳐 정부 당국으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당시 우리 나라는 전근대적(前近代的) 왕조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사실 지구상의 모든 나라가 전근대사회였을 때에 그러하였듯이 일종의 사상통제 정책을 강력히 실행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기에 조선 왕조에서는 불교를 탄압하기도 했었고, 양명학(陽明學)을 사문난적(斯門亂敵)으로 몰아 배격했다. 이러한 상황은 유럽이 전근대사회였을 때, 이단 재판이 성행하고, 마녀에 대한 화형을 집행하던 상황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박해시대 당시 우리 나라의 지배층에서는, 외국에서 들어온 천주교 신앙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전근대적 가치관에 정면으로 위배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천주교 신앙은 신분제적 질서를 거부하고 인간 평등에 대한 인식을 강화시켜 주었다.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새롭게 강조하고 인격과 양심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천주교 신도들은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가르침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하느님이 모든 인간과 삼라만상을 창조하신 분임을 절실히 믿고 따랐다. 그러기에 그들은 세속의 국왕도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올바로 파악했다. 당시 거의 절대적인 존재로 인식되던 국왕의 권위도 하느님의 그것에 비하자면 보잘것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게 되었다. 여기에서 신도들은 하느님의 명령과 국왕의 명령이 다를 때 하느님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듯 당시의 신도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은 국왕을 정점으로 한 지배층이 주장하던 바와는 사뭇 상당한 차이를 드러냈다. 이 때문에 박해가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국왕은 신도들에 대한 자신의 처벌이 정당한 것임을 말하면서, 백성들에게 천주교를 경계하는 특별한 명령을 내렸다. 이 과정에서 국왕들은 몇 차례에 걸쳐 대규모로 일어났던 박해 때마다 박해를 일단 마무리지으면서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반포해 왔다.
윤음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이 사회생활을 해나가는 데에 있어서는 일종의 기준과 서로간의 약속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어느 곳에서든지 법을 제정하여 시행함으로써 사회질서를 유지하고자 한다. 오늘날에 있어서 모든 법의 제정은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하여야 가능한 것이므로, 선거를 통해서 선출된 사람들에 의해 구성되는 의회가 입법기관으로서 그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왕조체제 아래에 놓여있던 전근대사회에 있어서는 의회와 같은 대의기구가 존재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입법권자는 곧 국왕이었다. 국왕 자신의 말은 곧 법이었다. 그러기에 조선왕조 때에는 국왕의 명령을 모아놓은 “수교집록”(受敎輯錄)과 같은 책이 법전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수교집록”과 마찬가지로 윤음도 일종의 법적 가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윤음(綸音)이란 윤언(綸言)과 비슷한 말로써 국왕이 아랫사람에게 내린 말을 뜻한다. 윤음의 종류는 비교적 다양하다. 노인들에 대한 존경과 봉양을 장려하고 명하는 양로(養老) 윤음이 있고, 농사철에 부지런히 농사를 지을 것을 명하는 권농(勸農) 윤음이 있다. 그리고 기근의 구제를 위해서 내리는 계주(戒酒)나 구휼(救恤) 윤음도 있다. 국왕은 윤음의 형식을 통해서 충성을 표창하거나 장려했다. 각종 국가적 토목공사를 독려하기 위해서도 윤음을 내리기도 했다. 이렇듯 윤음은 국가적 중대사가 있을 때 내리던 국왕의 특명이었다.
지난날 한자 문화권에서는 윤언여한(綸言如汗)이란 말이 통용되었다. 이 말의 뜻은 땀이 한번 나오면 다시 들어가지 못하듯이 국왕의 윤언도 한번 내리면 고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왕의 말은 막강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고, 그 자체가 법적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비록 윤음은 구체적 사태에 대한 특별 명령적 성격을 갖는다 하더라도, 국왕의 명령이기에 법적인 효력을 부여받으며 조선인들의 삶을 지배해 왔다. 국왕이 천주교를 배격하기 위해서 내린 “척사윤음”도 천주교를 금지하던 기존의 명령을 재확인하며, 박해의 정당성을 역설하는 것들이었다.
척사윤음의 종류
19세기 이래 천주교의 박해과정에서는 모두 네 차례에 걸쳐서 척사윤음이 발표되었다. 즉, 1801년의 신유교난, 1839년의 기해교난, 1866년의 병인교난 그리고 개항 이후인 1881년에 각각 천주교를 배척하는 척사윤음이 반포되었다.
우리의 교회사에 있어서 처음으로 발표된 척사윤음은 1801년 12월 22일에 반포된 ‘토역반교문’(討逆頒敎文)을 지적할 수 있다. 이 ‘토역반교문’은 일반 윤음이 그렇듯이 국왕의 명의로 나온 것이지만 실제의 지은이는 대제학(大提學) 이만수(李晩秀 ; 1752~1820)였다. 이 ‘토역 반교문’에서는 우선 조선이 받드는 유교 윤리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천주교는 유교 윤리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사도(邪道)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1801년의 교난 과정에서 처형된 지도적 신도들의 ‘죄목’을 확인해 주었다. 이어서 천주교의 교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다시금 적시하고 모든 백성들은 올바른 도리인 유교적 가치관에 충실해야 함을 강조하면서 끝을 맺고 있다. 이 윤음은 1801년의 박해를 마무리 지으며 박해의 원인과 경과를 정부의 입장에서 정리한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조선왕조의 당국자들은 천주교 신앙에 대한 배격과 탄압의 결의를 확실히 하고 있다.
척사윤음이 두 번째로 반포된 때는 1839년 10월 18일이었다. 이 윤음의 작성자는 조인영(趙寅永 ; 1782~1850)이었다. 이때 ‘척사윤음’이란 제목이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1801년의 ‘토역 반교문’도 윤음의 일반적 형식을 그대로 따라서 작성된 것이지만, 그 제목에 윤음이라고 명확히 밝혀놓지는 아니했다. 그러나 이번의 윤음은 그 반포의 목적이 ‘척사(斥邪’ 즉 천주교의 배격에 있음을 분명히 밝혀주었고, 한문본(7張)과 함께 한글본(9張)도 간행하여 배포하였다.
이 윤음에서는 먼저 윤음 반포의 배경과 취지를 밝혀주고 있다. 그리하여 이 첫부분에서는 유학사상의 떳떳함을 말하면서 조선의 천주교 신앙을 역사적 관점에서 비판하고, 천주교의 박멸을 위해서 윤음을 반포한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두 번째 부분에서는 천주교 교리를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이 반박을 통해서 우리는 천주교 교리에 대해 당시의 지배층이 가지고 있었던 이해와 오해의 정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부분에서는 천주교 신도들에게 마음을 바꾸고 충량한 백성으로 남을 것을 호소하고 있다. 이 척사윤음을 통해서 우리는 기해교난에 관한 폭넓은 인식과 함께 유교적 지식인의 입장에서 천주교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나를 확연히 알 수 있다.
세 번째의 척사윤음은 1866년 8월 3일에 반포되었다. 이 윤음에서는 병인교난과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함께 다루며 천주교에 대한 배격의 결의를 다지고 있다. 이 윤음의 작성자는 예문제학(藝文提學) 신석희(申錫禧 ; 1808~1873)였다. 그리고 네 번째로 반포된 윤음은 1881년 7월 10일에 내려진 것이었다. 이 윤음은 1876년 개항이 단행된 이후 이에 대한 수구세력들의 반발을 일시적으로나마 무마하기 위해서 반포한 것이다. 그 내용은 천주교에 대한 배격과 함께 개화정책에 대한 비판까지 아울러 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사(辛巳) 척사윤음으로 불리는 이 윤음은 그 효력이 발휘되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1882년경부터는 신앙의 자유를 묵인하기 시작했고, 한미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어 개화정책에는 더욱 박차가 가해졌다.
맺음말
박해시대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임금님의 그것보다 월등히 소중한 것으로 인식했다. 그러기에 그들은 신앙을 포기하도록 종용하던 관원들에 맞서 자신의 신앙을 지켜나갔고, 때로는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자신의 믿음을 증거하고자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부 당국에서는 천주교 신도들에 대한 금령을 강화해 나갔고, 자신의 탄압정책이 올바름을 안팎에 천명하기 위해서 척사윤음을 발표했던 것이다.
우리는 수차례에 걸쳐 반포된 척사윤음을 통해서 오히려 박해시대 신도들의 굳건한 신앙과 당시 집권층이 천주교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이해와 오해의 실상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천주교 신앙과 유학사상간에 전개되는 논쟁의 한 부분에 관해서도 선명한 지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척사윤음”을 통해서 우리 신앙의 유산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