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중생의 동백 아가씨
중학교 2학년 오락 시간 이였다.
노래와 춤에는 전혀 소질이 없는 나였지만 어찌된 일 인지 오락 부장은 항상 내 차지였다
현숙이의 개 다리 춤과, 아들이 연예인이 됐다며 동창회에 금태 안경을 쓰고 조금은 거들 먹 거리며 나왔던
순자의 어설픈 팝송은 언제나 단골 메뉴였다.
그리고 또 하나의 단골 순서는 오락부장인 나를 노래 시키기였다.
친구들은 어쩌면 내 노래가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오락부장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청해준 것 같은데 당하는 나는 정말 죽을 맛 이였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내가 부를 수 있는 노래는 한 곡도 없었는데 “동백아가씨는 많이 들어서였는지
그럭저럭 부를 수 있었다.
“동백아가씨는 높고 낮음이 유난스럽지 않아 음치의 종결자인 나도 부를 수 있었던 단 하나의 노래였다.
“해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
오락부장의 노래는 엿가락처럼 늘어지고 있었지만 60명도 넘는 친구들 누구도 내 노래에
귀를 기우리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그냥 흥얼거리면 됐었다..
노래는 예의상 시켜놓고 자기들끼리 수다 떨기에 열중하지만 별로 서운하지 않았던 것은 내 자신도
내 노래를 듣는다는 것이 지독한 고문 이라는 생각에서 였다.
그날 오락시간이 끊나고 반장이 담임선생님께 종례를 청하러 갔고 나도 내 자리로 돌아와 앉으려는데
촌스러운 짝꿍이 내 손을 잡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너 노래 정말 잘해, 가수 해도 되겠어, 하며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새까만 얼굴의 내 짝꿍이 내 노래를 비웃자고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았지만 나는 버럭 화를 내며 손을 뿌리쳤다.
“뭐야? 이 촌뜨기가?,,,
나는 환갑 진갑을 넘긴 나이가 된 지금도 착한 편은 아니지만 어렸을 때는 정말 밥맛 이였다.
짝꿍이 시골에서 전학 왔다는 이유로 무시하며 상대를 하지 않고 별 유치한 짓을 다 했다.
책상 중간을 책으로 가로 막아 3.8선을 만든 것도 모자라 돌아 앉아 있는대도
짝꿍은 항상 웃고 있었다.
공부에 별 취미가 없던 나는 국어와 가정시간을 빼고는 거의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그 날도 역시 뜨개질에 빠져 있을 때, 대형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까다롭기가 가시나무 같으신 음악선생님 시간 이였는데 내 뜨개실이 대굴대굴 굴러서
교탁 앞까지 가서 교탁 앞에 멈췄다.
아이들은 책상을 치면서 깔깔거렸고 선생님의 커다란 두 눈은 화산 폭발을 예고 하는 듯 했다.
“뜨개질 한 놈 나와”,,,하며 교탁을 내리쳤다.
버텨봤자 소용 없음을 깨달은 내가 일어서려는데 짝꿍이 뜨개질 깜을 뺏아 들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멍하니 앉아 있는데, 화가 나신 선생님이 짝꿍의 손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 여섯 대의 손바닥을 때리고도 화가 풀리지 않은 선생님은 죄 없는 짝꿍을 복도로 내 쫓아 벌을 세우셨다.
그런 지경을 빤히 보면서도 나는 끝까지 침묵했다.
자청한 벌을 다 서고 자리로 돌아온 짝꿍이 내 뜨개질 실을 돌려주며 “씨~익 하고 웃어 보였지만 나는,
고맙다고도 말 하지 않고 다만 책으로 3.8선을 세워놨던 책을 슬그머니 치웠다.
그 날 이후 미얀 해서 인지 고마워서 였는지, 바보처럼 웃어주는 짝꿍하고 절친이 되였다.
짝꿍은 강원도 화전민 아버지의 막내딸 이라는데 서울 부잣집으로 시집온 큰언니 덕분에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였다고 했다.
그런 이유로 짝꿍은 나보다 두 살이나 더 많았다.
촌뜨기라며 무시했었는데 사연을 듣고 나니 동정인지 우정인지가 솟아나서 찰떡같이 붙어 다녔다.
친구는 내가 “동백아가씨 노래를 부르면 아주 많이 좋아 해서, 가끔은 함께 부르기도 하였다.,
친구의 검은 얼굴이 서울 아이들처럼 뽀얗게 변해갈 무렵 생각 할 수도 없는 불행이 찾아왔다.
친구 집은 큰 시장 근처였는데 집 앞에서 7명의 남자들에게 성 폭행을 당하고 말았다고 하였다.
병원에 입원을 하였다고 하여 달려가 보니 찢어지고 멍들고 퉁퉁 부운 얼굴로 침대에 누워있는 친구는
언제나 웃어주던 내 짝꿍이 아니였다.
나의 잘못을 대신 할 정도로 나를 좋아해 주던 친구는 그날에는 나 마저 외면하였다.
내가 그날 참혹한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친구를 본 것이 마지막 만남 이였고
영원한 이별 모습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 친구 언니를 찾아 갔을 때, 친구는 다시 시골로 내려 갔다는 이야기를
언니의 긴 한숨 소리와 함께 듣고 왔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친구 시골집 주소라도 알아 둘걸 그랬다는 후회를 하였다.
“동백 아가씨를 즐겨 듣던 내 친구가 반 백 년이 지나버린 오늘, 많이 그리워 진다.
지금쯤은 그 날의 끔찍한 사건을 깨끗이 잊었기를 바래본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친구야~ 짝꿍아~
내 노래 소리 들리니?
첫댓글 참 대단한 짝궁입니다. 어디서 그런 짝궁을 만날 수 있겠어요?
'세월은 가도 추억은 남는 것'이란 노래가사가 입을 맴돕니다.
아이구 어쩌나? 성 폭행에서 성" 을 삭제 한다는 게 그냥 올라갔군요. ㅠ ㅠ
또, 지금은 모든 사람이 알듯한 아들의 엄마 이름도 바꾼다는 게 ,,,
하기야 욕한 건 아니니까 괜찮지요? ㅎㅎ
소풍가면 진달래꽃을 머리에 꽃고 웃어주던 좋은 친구였어요.
다른 연예인 엄마들은 티비에 잘 나오는데 친구는 나오지 않내요?
맛깔스러운 글 속에 빠져
잘 읽었습니다 ㆍ
친구분이 완쾌되셨기를 바랍니다ㆍ
내 글은 읽기가 쉽다고 해요. 나는 그냥 입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를 글로 옮기거든요.ㅎㅎ 레이스도 리본도 달지 않고
그냥 편안하게요. 그래서 "시 쓰기에는 도전하지 못하는 거에요.
"시 는 너무 어려워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