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옥분
가수 남궁옥분은 1958년 서울 양천구 목동에서 태어났다. 김포가도 인공폭포를 지나 왼편에 자리한 용왕산 중턱의 산동네가 그의 집이다. 대청마루가 넓은 한옥과 마당에 펼쳐진 꽃밭은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할 정도로 커보였다.
2남2녀 중 맨 막내인 남궁옥분은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와 집안일만하는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유년기를 보냈다. 보통 아이들보다 키가 크고 남달리 달리기가 빨랐던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육상선수로 뽑혀 운동을 시작했고 평소에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학창 시절 등에 떠밀려 성악 콩쿠르에 나갔고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게 음악의 전부였다. 그가 나중에 유명 가수가 되리라곤 아무도 몰랐다.
남궁옥분은 1975년 포크동아리 '청개구리'와 쌍벽을 이뤘던 '참새를 태운 잠수함'에서 음악과 인연을 맺는다. 포크음악에 빠져 자신을 데리고 간 친구는 지금 화가가 됐고, 반대로 화가가 꿈이었던 남궁옥분은 가수의 삶을 살고 있다.
그는 포크동아리에서 강인원 등과 활동하다가 1977년 명동의 음악살롱 '쉘부르' 노래경연대회를 거치며 본격적인 가수의 길을 걷는다. 당시 상금 3만원에 욕심이 생겨 출전했다는 그는 1등을 하고도 무대에 오르지 못한 설움을 겪어야만 했다. 쉘부르 주인이었던 이종환(현 라디오DJ)은 못생겼다며 자신을 무대에 세우지 않았다고 그는 전한다.
남궁옥분은 그때부터 이를 악물고 열심히 노래와 기타 연습에만 매달렸다. 혼자 연주법을 터득하는 속도도 빨랐다. 그 결과 첫 무대 반응은 뜨거웠다. 포크 2세대로 불리는 전영의 '어디쯤 가고 있을까'가 한창 뜨고 있을 때 목소리와 창법이 비슷해 모창으로도 많은 인기를 얻었다. 양희은과 이연실 노래도 무대에서 즐겨 불렀다.
그는 쉘부르에서 활동하며 3장의 앨범을 냈고 송창식 김세화 등이 소속된 오리엔트 프로덕션의 나현구 사장에게 발탁돼 1981년 발표한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이 곡은 처음에 통기타 포크가수가 부르기에는 너무 요란스럽게 느껴져 별로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고 하나, 듣는 대중의 반응은 의외로 폭발적이었다. 이 노래는 에어로빅 음악과 응원가 등으로 불리며 젊은 세대들에게 참신한 곡으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음반에 수록된 '에헤라 친구야'란 곡도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그는 이어 '꿈을 먹는 젊은이' (82년), '나의 사랑 그대 곁으로'(83), '설악산'(84) 등을 발표하며 최고의 전성시대를 맞는다. 그러던 중 방송 토크쇼에 자주 패널로 나갔다가 팬들로부터 "가수가 노래는 안 하고 말만 많이 한다"는 지적을 받으면서 슬럼프에 빠진다. 스스로 인기관리를 소홀히 한 결과였다고 인정하고 2년간 볼링과 윈드서핑 등으로 공백기를 극복했다.
그는 1987년 신곡 '재회'로 재기에 성공하며 꾸준한 활동을 보이다가 IMF가 터지면서 1997년 무대를 미사리 카페촌으로 옮겼다. 혼자 사회를 보고 노래하며 손님들과 대화하는 남궁옥분의 독무대는 미사리 일대에서 최고의 공연으로 꼽혔다.
지금은 7080 복고바람에 힘입어 방송 출연과 지방 행사 등으로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부모님과 오빠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하나 남은 혈육인 언니와 반포아파트 같은 동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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