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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3. 묵상글 (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 하느님의 사랑 장단에 맞춰.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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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2.13 04:21
- 하느님의 사랑 장단에 맞춰
어제에 이어 오늘도 세례자 요한을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대했는지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제는 당시 권력자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폭행을 가한 것을 말씀하셨고,
오늘은 당시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씀하십니다.
힘 있는 사람은 힘이 있기에 폭력을 행사하고,
군중은 힘이 없기에 폭력 행사는 하지 않지만
평가로 작은 폭력을 행사하는 겁니다.
그들은 세례자 요한을 좋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평점 테러를 집단으로 하는 겁니다.
그들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 세례자 요한을 못마땅해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좋게 얘기해야 하는데 먹고 마신다고 못마땅해합니다.
자기 외에는 다 부정적으로 보는 자기중심입니다.
남을 긍정할 수 있는 사랑이 너무도 없는 것이고,
자기를 사랑할 수 있는 선이 너무도 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선이 없겠습니까?
하느님이 그들을 악으로 만드셨겠습니까?
하느님은 악을 만드실 수 없는 분입니다.
작은 선을 무시하는 교만,
작은 악을 확대하는 교만,
이 교만이 자기부터 부정하게 만든 것이고,
자기 안에 형성된 부정으로 남도 부정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뜯어 보면 남을 부정함으로 자기를 긍정하고,
남을 깎아내림으로써 나를 높이려는 교만한 자기중심일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또 다른 자기중심 곧 미성숙한 자기중심도 말씀하십니다.
어린이처럼 자기 장단에 남들이 춤추기를 바라는 자기중심 말입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내가 성숙하다면 남의 장단에 내가 춤추지 말아야 하지만
나의 장단에 남이 춤추기를 바라지도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신자라면 그리고 성숙하다면
너의 장단도 나의 장단도 아닌 하느님 장단뿐이고,
진정 우리가 춤춰야 할 장단은 하느님 장단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장단에 맞춰
어떤 때는 단식을 하고,
어떤 때는 회식을 하고,
어떤 때는 슬픔을 나누고,
어떤 때는 기쁨을 나눕니다.
슬퍼하는 사람과 있을 때는 같이 단식하며 슬퍼하고,
기뻐하는 사람과 있을 때는 같이 회식하고 기뻐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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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남들처럼만 하면 중간은 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남 따라 하는 것이 정답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 과정 안에서 남과의 비교가 생겨나고, 또 따라갈 수 없음에 좌절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물론 남 따라 하는 것이 편하고 쉽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짜 자기의 삶이 될까요? 남이 알아주든 말든 진정 독창적인 무엇인가를 잘해 나가는 삶이 진짜 자기만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른이 편하고 쉬운 삶을 살겠다고 어린이처럼 놀면 잘못입니다. 신부인 제가 편하고 쉬운 삶을 살겠다고 미사를 안 하면 어떨까요? 큰 잘못입니다. 자기 역할에 충실한 삶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당연하고 평범한 삶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무시하면 게으른 삶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성인 성녀는 자기 역할에 충실한 삶을 사셨습니다. 이를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고(물론 다른 사람은 특별하다고 생각합니다), 평범한 자기 일상으로 만들어 자기 삶의 방향을 바꾸셨던 것입니다.
성당 안에서 봉사하시는 분의 고충을 많이 듣습니다. 열심히 봉사한다고 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부정적인 평가일 때, 봉사의 힘을 잃게 된다고 하십니다. 바로 이때 ‘자기 역할’을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 봉사가 원래 해야 할 자기 역할이라고 생각하면, 특별한 삶이 아닌 평범한 삶을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에는 편하고 쉬운 길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세상의 눈으로 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눈으로 봐야 하며, 주님과 함께하는 나의 역할에 집중할 때 평범한 삶으로 당연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장터에서 노는 아이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장터에서 피리를 불면서 놉니다. 그러면 함께하는 친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같이 춤추며 놀아야 합니다. 이번에는 장례 놀이를 합니다. 그때 춤추고 있다면 장례 놀이를 할 수 없습니다. 장례 놀이를 할 때에는 가슴을 치면서 곡을 해야 합니다.
이처럼 자기 역할에 충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외쳤을 때 진심으로 참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지만, 예수님을 비판하면서 전혀 기뻐하지 않습니다. 모두 자기가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자기 역할을 떠올려 보십시오. 어떤 역할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을까요? 사랑의 역할을 주셨는데, 어렵고 힘든 이런 특별한 삶을 어떻게 따를 수 있냐면서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사랑의 역할은 우리의 고유한 역할로 지극히 평범한 삶인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전해주신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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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 11,16-17)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의 놀이는 요한의 “회개의 세례의 선포”(마르 1,4;루카 3,3)에도 회개의 가슴을 치지 않고, 예수님의 “하늘나라의 복음의 선포”(마태 4,23;9,35)에도 기뻐 춤추지 않는 세대를 말해줍니다.
이러한 타자에 대한 폐쇄와 계시에 대한 배척의 뿌리에는 무관심과 영적무지와 완고함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완고함’이란 마치 엎어져 있는 항아리를 보고 입이 없다고 투덜거리거나 바닥이 없다고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바로 세워놓고 보면 입도 있고 바닥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 뿌리에는 바로 보고자 하지 않는 ‘비뚤어지진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완고함’이란 사실을 바로 보고자 하지 않는 비뚤어진 마음 때문에 ‘목이 뻣뻣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외침을 듣고도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귀신들렸다’고 비난하고, 예수님의 선포를 듣고도 진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먹보요, 술꾼이요, 죄인들의 친구’라고 조롱합니다.
사실, 이쯤 되면, 예수님의 사랑은 안타까움과 비탄을 넘어 아픔입니다. 결국, 당신의 사랑은 춤추지도 곡하지도 않는 냉대와 완고함이라는 가시에 찔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됩니다. 사랑이 거부당한 아픔입니다. 내가 당신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냉대할 때, 바로 그러할 것입니다. 내가 당신의 사랑을 거부하고 완고할 때, 그렇게 당신의 눈에는 눈물이 흐를 것입니다. 내가 내 형제를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은 그렇게 가시에 찔릴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어 하신 일은 십자가에 달리시어 자신을 ‘깨뜨려’ 찢고 나누어 건네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진정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면, 예수님의 그 피와 살을 먹고 자신도 ‘부서져’ 쪼개고 나누어져 다른 이에게 건네주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들려주실 때 벌리시는 일은 우리를 ‘깨뜨리고 부수는’ 일이요, 진정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우리가 ‘찢기어지고 나누어지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힘이 있고 살아 있으며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의 영께서 오시어 벌리시는 일은 우리와의 교제와 친교로 진리를 깨닫게 하고 새롭게 하여, 변화와 성화로 주님과 일치를 이루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성령께 응답한다면, 다윗이 주님의 계약 궤 앞에서 춤추었던 것처럼 우리도 춤추게 될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말씀과 영에 제가 꺾이고 부서져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마태 11,17)
주님!
불의를 보고도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지 않고
진리를 보고도 기쁨의 노래를 부르지 않으니
무디어 진 제 마음이 빛보다 어둠에 치우친 까닭입니다.
제가 당신의 말씀을 냉대할 때, 당신의 가슴은 가시에 찔리실 것입니다.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의 눈은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완고함의 벽을 헐고 함께 웃고 함께 울며 사랑의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곡을 하면 가슴을 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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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복음적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를 장터에 앉아“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11,17).고 말하는 아이들에 비유하십니다. 이 말씀은 제 뜻대로 하자고 우기는 세상을 말해줍니다. 제 입맛에 맞지 않으면 틀렸다고 하며 상대에게 무관심한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하느님의 말씀이 어찌 제대로 통하겠습니까? 자기 마음에 들면 하하거리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투덜대는 세상에서 누구의 비위를 맞추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요즈음 소위 정치지도자들이 하는 일은 하느님 마음에 드실까요?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하느님 앞에 당당해야 합니다. 내 뜻을 고집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그러기에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그리고 사랑할 때입니다. 정의는 사랑을 포용하지 못하지만 사랑은 정의를 포용합니다. 정의와 공정을 내세우는 이들이 참으로 하느님 앞에 부끄럽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요즘 나라의 혼돈상태를 보십시오. 서로 남 탓만 하고 있잖습니까?
사람들은 아주 엄격한 속죄의 생활을 하였던 요한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마귀 들린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리고 버림받고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며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기를 거리끼지 않는 예수님을 보고는 너무 세속적이라고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은 먹보요, 술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이 굽어서 이것도 저것도 좋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요한의 길을 가는 것이요, 예수님은 예수님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의 비위를 맞출 이유도 없이 아버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대나 요한의 시대나 마음이 굽어있는 이상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오늘도 여전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새겨 마음의 눈을 뜨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누구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가야 할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열어주신 길을 굳건하게 걸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선한 것은 선한 것으로, 봐줄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 내리면!” 참 신앙인은 세상이 아무리 흔들어도 동요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삶이 복음적인 삶이 될 수 있도록 끝까지 노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 너의 온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이 그 밝은 빛으로 너를 비출 때처럼, 네 몸이 온통 환할 것이다”(루카11,34-36)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주장만 옳고 상대는 그르다는 확신은 오류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주님께서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느님의 백성이 된 우리가 무엇을 바랄 것인지 알게 해 주시길 빕니다.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콜로3,16).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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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죽음 교육에서 ‘버킷 리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버킷 리스트란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이나 이루고 싶은 목표를 목록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이 용어는 “죽는다”를 의미하는 영어 표현 “kick the bucket”에서 유래했습니다.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남은 시간을 가치 있게 보내기 위해 개인적으로 소중한 일을 기록하고 실천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의 삶은 제한적이라는 사실이 버킷 리스트라는 개념의 근간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방식과 우선순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버킷 리스트는 단순한 욕망의 목록이 아니라, 개인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성찰하는 도구로 볼 수 있습니다. 버킷 리스트를 통해 스스로 열망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면, 나중에 ‘하지 못한 일’에 대한 후회가 줄어듭니다. 신앙적 관점에서, 버킷 리스트는 우리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실천하고 싶은 덕목이나 영적 목표를 세울 수도 있습니다. 여행, 배움, 관계, 봉사, 영성 등 다양한 영역에서 리스트를 작성하도록 권유함으로써 더 풍성한 삶을 설계할 수 있습니다.
버킷 리스트를 주제로 한 영화도 있습니다. 버킷 리스트(The Bucket List, 2007)는 말기 암 진단을 받은 두 노인이 병원에서 만나 서로의 버킷 리스트를 공유하며 남은 시간을 가치 있게 보내기로 결심합니다. 함께 스카이다이빙, 세계 여행 등 다양한 버킷 리스트 항목을 실천하며 삶의 의미를 되찾고, 우정을 쌓아가는 과정이 감동적으로 그려집니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 2013)은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을 살던 주인공 월터가 자신만의 상상 속 모험에 머물지 않고 실제로 세계를 여행하며 꿈을 이루는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 1985)는 한 여성의 아프리카에서의 삶과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녀가 꿈꾸었던 삶의 모험과 성취를 담고 있습니다. 직접적인 버킷 리스트 이야기는 아니지만, 새로운 경험과 자유를 찾아가는 여정을 통해 버킷 리스트의 철학적 측면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나우 이즈 굿(Now Is Good, 2012)은 암에 걸린 소녀가 죽음을 앞두고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 자신의 마지막 소원을 하나씩 이루어나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그녀의 여정을 통해 사랑과 가족, 삶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대림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면서 버킷 리스트를 만들면 어떨까요? 동방박사들은 황금, 유향, 몰약을 준비해서 먼 길을 떠났습니다.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동방박사들은 포기하지 않고 별을 보며 길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 경배드렸습니다. 한나와 시메온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성전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기 예수님께 축복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본당에서도 성탄을 기다리며 몇 가지 버킷 리스트를 마련했습니다. 하나는 ‘고린토 전서’를 필사하는 겁니다. 지난 사순시기에는 로마서를 필사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대림 특강’입니다. 올해는 오클라호마 박락군 신부님이 ‘구약과 신약에서 드러나는 성탄의 의미’를 강의해 주시기로 했습니다. 버킷 리스트는 거창한 것일 수 있습니다. 버킷 리스트는 큰 비용과 시간이 필요한 것일 수 있습니다. 신앙인에게 버킷 리스트는 일상의 삶에서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으로 옮겨가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인류에게 큰 영감을 주는 고전을 읽는 것도, 가슴을 울리는 음악을 듣는 것도, 대가의 그림을 감상하는 것도 버킷 리스트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신앙인이 지녀야 할 버킷 리스트를 이렇게 말합니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하게 지킨다면, 우리는 이미 버킷 리스트를 살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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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나이가 들었는데 아직도 아이처럼 칭얼대고,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 달라 투정하고, 그런 어른을 뭐라고 합니까?
애어른이라고 합니다.
어떤 아이에게 ‘그놈 철들었네.’라고 말한다면 어떤 행동을 했기에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보다는 남을 배려했을 때, 나보다는 다른 이를 생각하고 행동했을 때, 우리는 ‘철들었네.’라고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가 장터의 아이들 같다고 하십니다. “내가 피리를 불 때 너희는 춤을 추지 않았고, 내가 곡을 할 때 너희는 울지 않았다.”라고 말합니다.
만약 철들었다면 춤을 출 일이 있을 때 피리를 불어 주고, 슬픔이 있을 때 같이 곡을 해주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함께 사는 삶이고, 이를 익혔을 때 우리는 함께 울고 웃으며 지낼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아이들은 다릅니다. 아직 자기가 중심입니다. 생각하는 대로 해야 하고 이해하고 싶은 대로 이해합니다. 신앙인도 이런 모습을 보입니다.
주님을 중심으로 사십시오. 사십시오! 일 년 열두 달을 말해도, 돌아서면 끝입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내가 중심입니다. 내 발에 떨어진 불이 우선이고, 내 일과 내 삶을 위해서만 기도합니다. 주님의 뜻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나에게 무엇을 주시는지.. 그것이 기쁨이면 그 안에 주님께서 주신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슬픔이라면 그 안에 주님께서 주신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가늠하려 하지 않습니다. 기쁘면 기쁨에 취해 감사를 잃어버리고, 슬프면 슬픔에 취해 달라고만 보챕니다.
성당 제대 앞, 주님이 오실 자리를 보십시오. 비어 있지 않습니까? 아름답게 꾸며 놓았지만 비어 있습니다. 그 빈 자리에 주님을 담을 수 있길 함께 기도합시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 철든 신앙인의 모습, 저와 여러분이 지녀야 할 모습일 것입니다.
⭐마음 담긴 편지 한 장
9월과 10월에 ‘하루 피정’을 진행했습니다.
매주 목요일 다른 주제로 피정 오신 분들과 하루를 보냈습니다.
함께 미사하고 식사를 하고 산책도 했습니다.
강의도 하고 기도도 함께 했습니다.
그렇게 피정이 끝나고 삶의 자리로 모두 돌아갔습니다.
어느날 한 통의 편지가 왔습니다.
피정을 통해 느낀 것들과 마음의 변화, 그리고 기도에 대한 감사함을 담은 편지였습니다.
편지봉투 안에는 작은 선물도 들어 있었습니다.
유튜브를 보다 보면 ‘구독과 알림 설정은 큰 도움이 됩니다.’라고 말합니다.
응원과 감사의 편지 한 통은 그렇게 제게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작은 온정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외면하지 않고, 마음을 나누면 됩니다. 저도 이번에 다시금 알게 되었습니다. 작은 마음 하나가 응원이 되고 큰 힘이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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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은 나의 빛
“루멘채치스(Lumen Caecis;맹인에게 빛을)”
<우리는 주님의 반사체(反射體)다>
“주님은 눈먼 이를 보게 하시며,
주님은 꺾인 이를 일으켜 세우며,
주님은 의로운 이를 사랑하시도다.”(시편146,8)
오늘 화답송 시편중 한구절이 깊이 마음에 새겨집니다. 우리가 믿고 사랑하는 주님은 이런 분입니다. 오늘 옛 현자 다산의 두 말씀도 깊은 울림을 남깁니다.
“사유는 눈빛으로 담기고, 세월은 주름으로 새겨진다. 얼굴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이 얼굴로 드러나는 것이다.”<다산>
나이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도 생각이 납니다. 내 눈빛은, 내 얼굴 주름은 어떤지요? 날로 깊어지는 눈빛이요 날로 뚜렷해 지는 세월의 얼굴 주름이요, 세월의 나이테인지요? ‘관상은 과학이다’라는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사람의 생김새가 그 사람의 성격, 생활상 등에 따른 것이라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대개 익힌 것이 오랠수록 성품도 이에 따라 변한다. 속으로 마음을 쏟는 것이 겉으로 드러나 얼굴도 변하는 것이다.”<다산의 여유당전서>
이래서 좋은 덕목의 선택, 훈련, 습관을 통해 주님을 닮아갈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부단한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삶이, 영성이 그의 운명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는 성녀 루치아(283-304) 동정 순교자 기념일로 지내지만, 우리 “선교 성 베네딕도회 오딜리아 연합회”에 속한 수도원들은 “우리 연합회의 수호자 오딜리아(660-720) 동정 대축일”로 지냅니다. 늘 자명한 사실에 대한 깨달음은 그 누구든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성인들의 생몰生沒연대를 볼 때 마다 생각하게 되는 나의 죽음입니다.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사부 성 베네딕도의 말씀이 떠나지 않습니다.
성녀 루치아는 로마 박해 시대에 순교한 동정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시칠리아 섬에서 태어납니다. 순교 연대는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그리스도교 박해기간 도중입니다. 성녀는 신심깊은 부모의 영향으로 일찍 세례를 받았고 후에 어머니의 주선으로 귀족청년과 약혼합니다만 어머니께 이미 자신이 동정서원을 한 사실을 고백했고 어머니의 승낙을 받아냅니다.
루치아는 약혼한 몸이었지만 결혼 준비로 장만한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결혼하지 않습니다. 이에 분개한 그녀의 약혼자는 루치아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시칠리아 시라쿠사의 집정관 파스카시우스에게 고발하였고 루치아는 감옥에 갇혀 온갖 고문을 받으며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받았으나 끝내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성녀의 이름 루치아는 ‘광명’, 또는 ‘빛’이라는 뜻의 라틴어 룩스(Lux)에서 유래합니다. 이름 뜻대로 끝까지 주님의 빛으로서 살다가 순교한 동정녀 루치아입니다.
오늘 대축일은 지내는 오딜리아 동정녀는 7세기 프랑스 북동부 알자스 지방의 귀족집안에서 맏딸로 태어납니다. 오딜리아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고, 잔인한 성격의 아버지는 앞도 못보는 딸로 태어난 오딜리아를 하인을 시켜 죽이려 합니다. 오딜리아는 유모의 도움을 받아 수녀원에 맡겨집니다.
오딜리아는 앞을 보지 못했지만 누구보다 밝고 착하게 자랐고, 마침내 673년경 레겐스부르크의 성 에르하르두스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중 바른 성유가 그녀의 눈에 닿자마자 눈이 열려 시력이 온전해지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후에 아버지와의 화해도 이뤄지고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수녀원을 세우고 원장이 됩니다. 수녀원에는 신자들을 위한 병원도 함께 지어졌고, 여기서 성녀 오딜리아는 아버지의 변화에 기뻐하며 남은 생은 기도와 봉사로 지내다가 720년 선종해 몽생트오딜 수녀원에 묻힙니다.
성녀에 대한 공경은 프랑스를 넘어 독일까지 퍼져나갔고, 9세기부터 여러 지역의 교회의 성인 호칭기도에 성녀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성녀가 묻힌 무덤은 신자들, 특히 앞을 못 보는 이들이 즐겨 찾는 순례지가 됩니다. 16세기 이전부터 성녀 오딜리아는 알자스 지방과 앞을 보지 못하는 이들과 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져 왔고, 1807년 교황 비오 7세는 공식적으로 성녀 오딜리아를 알자스 지방과 앞을 보지 못하는 이들, 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합니다.
세례은총을 통해 눈이 열려 시력을 회복한 오딜리아, 말 그대로 “주님은 나의 빛”이라는 말씀이 이뤄진 것입니다. 루멘채치스, 맹인에게 빛을 이란 오딜리아 연합회의 모토도 여기 근거합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예나 이제나 영적으로, 무지에 눈먼이들로, 역설적으로 온통 눈뜬 맹인들로 온 세상은 차고 넘칩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녀 루치아, 오늘 대축일을 지내는 성녀 오딜리아는 물론 교회의 모든 성인들이 주님의 빛으로, 열린 눈으로 살았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빛입니다. 맹인에게 빛을, 루멘채치스! 눈먼이들에게 빛을 주시는, 제대로 보게 하시는 주님입니다. 주님은 세상의 빛이니 주님을 따르는 이들은 생명의 빛을 얻습니다. 개안의 여정입니다. 빛이신 주님과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밝아지는 우리의 눈입니다. 주님이 발광체라면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반사하는 주님의 반사체입니다. 어떻게 주님의 빛을 반사하는 주님의 반사체로 참삶을 살 수 있을런지요?
첫째, 사랑하는 삶입니다.
사랑의 빛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날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 깨끗한 마음이요 하느님을 만납니다. 분명한 사실은 발광체는 주님이요 우리는 반사체라는 엄중한 사실이요 이를 깨달을 때 저절로 겸손입니다. 주님의 빛을 그대로 반사하는 주님의 반사체로, 주님의 빛으로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할수록 주님의 영광을 잘 반사합니다.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않을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 너의 온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이 그 밝은 빛으로 너를 비출 때처럼, 네 몸이 온통 환해질 것이다.”
참으로 사랑으로 밝고 맑은 눈을 지님으로 주님의 반사체가 될 때 마음은 물론 온몸도 환한 빛이 됩니다. 저절로 심신의 치유요 구원입니다. 사랑뿐이 답이 없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온전히 주님의 반사체로, 주님의 빛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둘째, 찬미하는 삶입니다.
찬미의 빛, 찬미의 기쁨, 찬미의 사랑입니다. 사랑의 찬미와 더불어 주님의 반사체로, 주님의 빛으로 살 수 있습니다. 이사야 말씀이 참으로 고무적입니다. 성탄의 기쁨을 앞당겨 대림의 기쁨, 찬미의 기쁨, 찬미의 사랑을 사는 것입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 맥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마라. 보라, 너희 하느님을!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라,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이런 찬미의 기쁨으로, 찬미의 사랑으로, 찬미의 빛으로 살 때 참으로 날로 주님의 반사체로, 주님의 빛으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초연한 삶입니다.
초연의 빛입니다. 무욕의, 무집착의 텅빈 충만의 초연한 삶이 참으로 자유로운 삶입니다. 날로 겸손과 비움의 여정에 충실한 자아초월의 삶과 더불어 주님의 반사체로 주님의 빛으로 살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바로 초연한 삶의 비결을 가르쳐 줍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을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지납니다. 모두가 떠납니다. 세상 것들의 무시가 아니라 세상 것들에 집착하지 말고 초연하라는 것입니다. 집착의 늪에, 탐욕의 수렁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날로 이런 초연한 사랑이 주님의 반사체로, 주님의 빛으로 살게 합니다. 억지로의 이탈이나 초연이 아니라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수록 저절로 이탈의 초연한 삶에, 주님 반사체로서의 빛나는 삶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빛입니다. 주님은 스스로 빛을 발하는 발광체요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반사하는 반사체입니다. 루멘채치스! 주님의 반사체로, 주님의 빛으로 살 때 눈먼 이들에게 주님의 빛을 줄 수 있습니다. 답은 셋입니다. “사랑하라, 찬미하라, 초연하라”입니다. 한결같이 이렇게 살 때 주님의 반사체로 주님의 빛으로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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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함께>
살리려는 함께
베풀려는 함께
돌보려는 함께
깃들려는 함께
품으려는 함께
깨치려는 함께
바르려는 함께
돋우려는 함께
나가려는 함께
빛나려는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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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마태 11,16)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말하자면 이런 뜻입니다: 우리는 너희가 선행을 하도록 노래 불러 주었고 다윗이 주님의 계약 궤 앞에서 춤췄던 것처럼 춤추라고 피리를 불어 주었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하기를 싫어했다. 너희가 회개하라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회개하지 않았다. 너희는 두 가지 선포, 다시 말해 지은 죄를 회개하라는 것과 선행에 힘쓰라는 권고를 다 거부했다. 너희가 가난과 부를 똑같이 경멸하니 구원에 이르는 두 가지 길을 다 하찮게 여긴 사실이 조금도 놀랍지 않다. 너희가 가난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이라면, 왜 요한을 못마땅하게 여겼느냐? 너희가 부를 좋아한다면, 왜 사람의 아들을 싫어했느냐? 너희는 이 둘 가운데 한 사람에게는 마귀가 들렸다고 하고, 또 한 사람은 먹보요 술꾼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들 가운데 어떤 가르침도 받아들이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곧 하느님의 가르침과 지시로 드러났다. 하느님의 영광이요 지혜인 내가 올바르게 행동했다는 사실이 내가 이룬 일, 곧 사도들의 증언으로 드러났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셨던 것을 그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셨다.
-히에로니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3
하느님 바깥에 있는 것은 무일 뿐이다
모든 이의 아버지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6).
“갈라진 둘은 사랑을 일으키지 못하지만, 하나가 된 둘은 자연스레 뜨겁고 자발적인 사랑을 낳는다. " 이것은 참된 겸손을 아는 사람들, 곧 만물을 꿰뚫고 만물 안에 있는 아버지에게 복을 받은 사람들의 열정이다. 무를 알고, 변증법적으로 움직이는 복된 의식만이 그러한 손님을 맞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영혼의 터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깨끗한 신성뿐이기 때문이다. 만유내재신론에서 보면, 우리 안에 있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를 감싸고 있는 것도 은총이다. “영혼이 하느님 안에 보금자리를 치는 것이야말로 은총이다." 은총운 모든 아름다움을 영혼 안으로 불어넣을 뿐, 어떠한 일도 하지 않는다. 은총을 불어넣는 아름다움은 충만, 곧 신적인 충만이다.(295)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아우구스티노
성체성사에 대하여(강론 272)
강론 60
마태 6,16-21에 대해 아우구스티노가 강론한 것은 397년 5월 14일에서 22일 사이이다. 그가 주교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기에 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어느 한 지점에서 믿음의 전 영역으로 들어가도록 노력해야 하고, 기초적인 체험으로부터 시작하여 믿음의 전 영역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삶을 단순하게 살아가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관련해서는 언제나 단순하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해야 한다.
마태 25,31-46에 의하면 어느 한 사람이 참된 믿음을 가졌느냐는 시금석은 그가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가 아니면 거부하는가에 놓여 있다. 성서에 이 구절보다 더 분명하게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하나로 일치해 있는 것에 대해 알려주는 것은 없다. 아우구스티노는 “성서에서 이 구절이 나를 가장 많이 사로잡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이웃은 바로 그리스도와 같은 존재이다.
“어떤 사람이 어려운 상황에 빠져 들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쩔쩔매게 될 때에 그는 어떻게 해야 그 어려움을 해결해 나갈 수 있는가를 잘 아는 현명한 사람에게 찾아가려고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여기에 나쁜 행위에서 벗어 나와 좋은 일을 하기를 원하지만 실제로 실천으로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는 사방으로부터 유혹을 받아 좋지 않은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 이외에 어디서 최상의 조언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가 어떤 좋은 사람을 발견한다면 그로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 대에 대한 조언을 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보다 더 좋은 조언자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조언을 구할 수 있는 그분께 갑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조언을 받아 들이고 실천하여 큰 악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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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 [fisherpeter] 241213. 03:58 ㅣNo.178428
오늘 복음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이 말씀은 어떤 말씀인가요? 달리 말하면 공감능력을 말하고 계십니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입니다. 감정이 있다는 것은 그 감정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따뜻한 인간애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와 함께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말씀 하나를 추가해서 말씀하십니다. 세리와 죄인들과도 함께 어울리십니다. 그분께서 그들과 함께 어울리신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타락의 길을 걸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신 이유는 그들과 함께하시면서 그들에게 바로 살아가는 방법이라든지 아무튼 다양한 정도의 길을 가르치시고 그들을 교화시키는 방편으로 행하신 일이실 겁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는 그런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익히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 말씀은 사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삼위일체 책에서 벌써 언급되신 내용인데 그걸 현대식 표현으로 바뀌어진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어제 올린 생활묵상 글에서도 한 노래방 도우미 여성을 언급했지만 그런 여성도 지구라는 별에서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입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의 시각으로 보면 건전하게 일하지 않는 건 인정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살아가는 그 도덕적인 모습만 보고 그들의 삶을 단죄하는 식으로 경계를 하면 예수님께서 내리신 지상명령인, 땅끝까지 이루어져야 하는 선교 사명은 결코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복음에는 어떤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보통의 선량한 사람에게만 구원의 손길이 가게 된다면 과연 우리는 그 구원의 손길이 얼마나 우리에게 올 수 있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과 잣대를 그대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잣대로 들이대신다면 과연 우리가 구원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사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도 그 뜻대로 실행을 하는 것도 쉽지는 않습니다.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 보려고 노력은 해야 할 것입니다. 노력에 노력을 더하면 언젠가는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아주 근접하게 그 위치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게 성인의 반열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성인이라고 해서 하느님처럼 그 경지에 오른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을 꺾고 그 다음 하느님의 본성에 가까운 사람으로 되는 여정에 이른 분이 마치 우리가 생각하는 성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가 다 성인처럼은 될 수는 없어도 그렇게 살아보려고 노력은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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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생활묵상 : 그 여인도 우리처럼 하느님의 딸입니다.
강만연 [fisherpeter] 241212. 14:20 ㅣNo.178416
다음 포털에서 짧은 기사 하나를 봤습니다. 부산에서 한 탄핵 집회에서 일어난 일 같습니다. 한 여성이 발언했는데 그 여성은 먼저 자신의 직업을 노래방 도우미라고 소개를 하고 발언을 했습니다. 또 손가락질할 거란 것도 알고서도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발언 내용은 언급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이 기사를 보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만약 저라도 그 여성분의 입장이었다면 그런 말을 했을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생각하면 감히 그런 자리에 설 용기도 없을 것입니다. 제가 이 여성분을 보고서 왜 가슴이 아팠을까요?
자기가 하는 일 때문에 자기 자신의 인격을 아주 비참하게 격하시켰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러한 직업에 대해 좋은 시각을 가지지 않다는 걸 보편적인 국민이라면 그렇게 인식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저는 그런 직업이 칭송 받을 만한 직업은 아니더라도 그게 범죄를 저지르는 형태가 아니라면 단순히 그와 같은 일을 한다고 해서 경멸적인 시선으로 그런 사람을 바라보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저는 신앙을 가진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봅니다. 제가 언젠가 글에서 제 어머니처럼 여기는 자매님과의 어떤 일화에서 노래방 도우미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신영세자 신분이었을 때 언제 레지오 마치고 레지오 단원들과 노래방을 갔는데 그때 도우미를 불러서 너무나 놀라 적당한 핑계를 대고 나온 후 집에 귀가하는 길에 그분을 만나서 하도 기가막혀 어떻게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지 충격이라 그걸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그분이 제가 그때 당시는 어머니처럼은 생각하지 않았던 때이긴 하지만 그래도 편하게 생각하는 분이라 그런 말씀에 제 생각에 공감하실 줄 알았는데 의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분이라서 네 하고만 했습니다. 그때 그분이 “베드로야, 우리가 어디 성직자 수도자도 아니고 인간 세상에 살다 보면 그렇게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해야지” 이런 내용으로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왜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제가 이런 사람을 비천하게 여겨서 그런 게 아니고 우리는 신앙을 가졌기에 도덕적으로 좋지 않은 행동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모르고 흥청망청 사는 사람들이야 뭐 그런 곳에 가는 것은 모르지만 우린 신자이기 때문에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저는 예전부터 창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종교를 떠나서 개인적으로는 불쌍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직업을 어떻게 가지고 있는 동기는 따지고 싶지 않습니다. 뭐 어떤 사람은 편하게 돈을 벌려고 한다고 이따위 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이 사람들을 절대 두둔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설사 그런 것 때문에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가슴 아픈 사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것까지 동정심을 주자고 항변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도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 피치못한 사정이 있다고 생각해 조금은 연민의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봤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제가 고상해서가 아니라 좀 더 고상하게 생각한다면 그들도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사람이라면 그들도 하느님의 창조물입니다. 그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존경과 찬사의 눈으로 보자는 게 아니라 최소한 그들의 직업을 가지고 경멸의 시각으로 바라보지는 않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제가 이런 걸 글로 남기는 이유는 이런 것 때문에 남기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복음에서 나오는 예수님께서 측은하게 바라보시는 그런 사람들에게만 측은하게 여길 게 아니라 이와 같은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서 그들의 영혼만이라도 좋게 생각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희망을 우리 모두가 한번 가져보면 어떨까 해서 공유를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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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열린 마음으로 평화와 의로움을 / 대림 제2주간 금요일(마태 11,16-19
박윤식 [big-llight] 241212.21:21 ㅣNo.178421
우리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생색내기 모습을 곳곳에서 본다. 가끔은 어떤 허황된 꿈에 잡혀 제한된 사랑의 의미에 집착한 사례를 종종 본다. 인생은 길고 밤은 짧다는 육체의 뜨거운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하여, 패가망신 꼴을 겪는 경우도 많이 있다. 사랑은 드러내는 어떤 행위가 아니다. 사랑은 스스로를 즐기면서 그것으로 주변에 바람을 안겨주는 활력소이다. 사랑은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준 것이기에, 우리는 그저 주어야할 의무만이 있다.
이렇게 그분 사랑으로부터 우리 사랑이 존재한다. 그 출발은 세례자 요한에서 예수님으로 이어진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서 이렇게 말한 아이들 같다. ‘우리가 피리 불어도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해도 가슴을 치지 않았다.’ 사실 요한이 와 먹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 먹고 마시자,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하고 말한다. 지혜가 옳다는 건 지혜가 이룬 일들로 드러났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지내면서 사람들에게 회개하기를 촉구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과 죄인들과도 어울리면서 식사마저도 함께하시면서,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는 것을 알렸다. 이런 모습이 힘 좀 쓴다는 이들에게 공격의 빌미가 되었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이중적인 잣대를 엄히 탓하신다. 우리도 이 같은 것에 자신이 편리한 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을 게다. 또한 일하기 전과 그 후의 마음가짐이 때로는 다르리라.
다만 자신이 하는 일에 확고한 신념을 꼭 지녀야만 한다.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하게 알아야만 한다. 그리고 변함없는 신뢰심과 굳센 믿음을 지니면, 그분께서 나에게 손수 오심을 비로소 느낄 수가 있으리라. 우리가 하늘 나라의 기쁨을 나누고자 헌신하는 이들의 활동을 비방한다면, 우리는 자기 착각에 빠져서 시기심에 갇혀 빈정거리는 이가 될 게고, 회개와 하늘 나라의 ‘기쁜 소식을 거부하는 이’가 될게 어쩜 눈에 보듯 뻔하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비판받는 일들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아직 그 진면모가 알려져 있지 않아 오해받을 수도 있다. 하느님의 계명에 충실하면서 꾸준히 예수님의 일을 하는 이는 모욕과 수치 가운데서도 더 빛나는 진가를 발휘한단다. 이는 하느님께서 친히 그 이를 단련시키고 완성시키시기에. 이는 마치 차분히 단식하면 단식한다고 비난하고, 반대로 단식하지 않으면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고 고발하는 것과 같은 ‘이중적 행위’를 묘사하신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이 같은 현상을 보고도 자신이 편리한 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또한, 일하기 전과 일한 뒤의 마음가짐이나 심정 또한 때로는 전혀 판이하게 다르기도. 그러기에 각자 하는 일에 확고한 신념을 지니자.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하게 알자. 이렇게 변함없는 신뢰심과 굳센 믿음으로 주님만을 바라본다면, 그분께서 이미 오셨음을 비로소 느끼리라.
아무튼 우리는 주어진 상황과 주위를 인정하지 않고 언제나 모든 것을 거부하려는 비판적인 마음을 지니고 있다. 주님 계명에 주의를 기울이고 모든 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모든 상황에서도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 사랑을 실천하자. 나아가 좋은 것만을 바라보는 열려 있는 마음을 가진다면, 우리 마음에는 평화가 강물처럼,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릴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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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어 기다린 열에 다섯 /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1213](마태 25,1-13)
박윤식 [big-llight] 241212. 21:21 ㅣNo.178422
루치아 성녀는 로마 박해 시대에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생애는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는데, 5세기의 기록에서 부분적으로 순교 사실이 전해지고 있다. 신심 깊은 부모님의 영향으로 일찍 세례를 받은 성녀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딸의 신변을 염려한 어머니의 주선으로 귀족 청년과 뜻하지 않게 약혼하였다. 그러나 성녀는 동정을 결심하고 있었기에 한사코 혼인하기를 거절하였다. 이에 격분한 약혼자의 고발로 갇히게 되고 결국 300년 무렵에 순교하였다. 루치아(Lucia)의 이름은 ‘빛 또는 ‘광명’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되었다.
이 열 처녀의 비유 이야기는 하느님의 종인 처녀들의 행실도 문제이겠지만, 사람의 아들이 늦게 오실 때의 그 시각에 그들의 준비성에 집중되어 있다. 이는 예수님께서 ‘최후의 심판’을 위해 오실 그 재림 때에 종들의 못된 행실이 아니라, 신랑이 도착하였음을 알리는 외침이 나올 때에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 열 처녀의 일부는 슬기롭게도 바위 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이었고, 일부 어리석은 이는 모래 위에 집을 지었다는 거다.
‘사람의 아들이 오실 그때에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처녀가 가진 ‘등’은 동정심이 담겨진 순수한 마음을 뜻한다.
거기에는 연민이 가득하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먹으면 언제든 달려가 사랑이 담긴 배품의 보따리를 풀 수가 있다. 기름 그릇은 그들이 동정심으로 실행한 사랑의 나눔이다. 선한 행실들, 소위 자선이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보편 신앙을 믿으며 선행을 실천한 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처녀들은 게으르고 부주의한 이들이다. 그렇지만 슬기로운 이나 어리석은 이나 다 같이 최후의 날에 떨기는 매 한가지다. 자신의 믿음과 행동에서 충분하지 못했을까 봐 두려움을 갖는다.
사실 부활과 심판의 날에는 오로지 자신이 행한 실천만을 두고 평가받는다. 이처럼 아무도 다른 이의 칭찬 득에 빛나기를 기대할 수가 없다. 그래서 다들 자기들만의 선행을 두고 떨면서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신랑이 늦어지자 그들 모두 졸다 잠이 든다. 그런데 갑자기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라며 외치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최후의 심판 면접장에서는 모습이다.
참으로 비정하다. 거기에는 인간 본성으로 더러 날만한 동정심에 의한 양보내지는 배품이 없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건만, 오로지 하느님 사랑뿐이지, 이웃은 아예 없다. 그 어떤 집단도 이렇게 냉혹하지는 않을 게다. 그러나 세상 종말은 그렇다. 하느님마저 비정하다. 그리하여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니 평소에도 준비하면서 깨어 기다리자.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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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하느님 때문에 자신이 변화되기를 바라는 신앙인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바뀌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이 바라는 것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지만 그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느님께 원망을 늘어놓습니다.
실천하기 어렵거나 힘든 말씀은 외면하고 위로와 감동을 주는 말씀만 들으려고 합니다.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마태 11,18-19).
변화가 없는 신앙인은 하느님의 계획과 그분의 말씀 앞에서 늘 못마땅해하기만 합니다.
참된 믿음은 하느님 말씀 때문에 나 자신이 변화하는 열매를 맺게 합니다.
인색하던 사람이 이웃에게 자선을 실천하고, 바쁘다며 기도할 시간조차 없다던 사람이 기도를 합니다.
상처받고 끊임없이 험담만 하던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고 고해소로 향합니다.
주일 미사 말고는 결코 성당에 갈 생각을 하지 않던 사람이 평일 미사에 날마다 참례합니다.
모두 하느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그 사람 안에서 일으키는 일들입니다.
변화가 없고 하느님의 말씀이 열매 맺지 못하는 신앙생활,
끊임없이 누군가를 비난만 할 뿐 정작 본인은 꿈쩍도 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 믿음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 결실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너희는 춤추지 않고, ……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11,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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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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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적하십니다.
요한이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 것에
마귀가 들렸다고 말하면서
예수님께서 먹고 마시자
먹보요 술꾼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그들에게 먹는 것이나 먹지 않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중요했다면
먹는 사람이던 먹지 않는 사람이던
둘 중 한 쪽으로 기울었을텐데
그들은 둘 다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즉 그들은 요한이던 예수님이던
둘 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행동해도 그들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정말 지적하고 싶어하시는 것은
아마 그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그들이 요한이나 예수님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면서도
아닌 척하며 그것을 표현하지 않는 모습을
지적하고 싶어하시는 것 같습니다.
먹지 않는 것을 부정적으로 본다면
그 이유가 있을텐데
그리고 그 이유를 말하면서
요한과 대화를 할 수 있을텐데
그들은 이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이 마귀가 들렸다고 판단합니다.
여기에서 그들이 그 이유를 말하면
예수님께서 드시는 것을
부정적으로 반대할 수 없게 됩니다.
하나의 기준으로
서로 반대되는 경우에서
똑같은 결론이 나오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요한이나 예수님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유를
말하지 못합니다.
이유를 말하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그들이 무엇인가 숨기고 있다는 것
결국 요한과 예수님을
둘 다 거부하고 싶다는 마음이 드러납니다.
물론 상대방을 거부하는 마음을 표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숨긴 것이
생각하지 못한 상황에서 드러나면
그 당혹스러움은 더 크게 느껴질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을 잘 돌아볼 수 있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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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마태 11, 19)
하느님의
지혜가
참으로
옳았습니다.
한꺼번에
모두
드러나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빛으로
다시 읽어가는
빛의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답하시는
하느님의
빛입니다.
삶을 일으키는
삶이 있듯이
삶을 일으키는
빛의 삶입니다.
다시금
의미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성녀 루치아의
삶을 통하여
보게 됩니다.
하느님의 빛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과
지혜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회개의 빛이
필요한
간절한
시간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빛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우리의
모든 시간이
빛의
시간이었습니다.
빛을 추구하여
빛을 닮아갑니다.
빛이 세상의
문을 엽니다.
빛은 빛을
찾는
우리들의
것입니다.
빛의 삶이
깨어있는
삶이며
양심의
삶이며
공감어린
삶입니다.
모든 순간이
빛을 향해야 할
소중한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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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거룩하고 흠 없으며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 있기를 원하시는 하느님!
우리를 기쁘게 해주고, 신명나게 해주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우리를 적극적으로 환대하고 공감해주고, 호응해 주는 분위기입니다.
그런 분위기는 정말이지 사람 살맛나게 하고 기를 한껏 살려줍니다.
어딘가 강의를 갔는데, 다들 소 닭 보듯이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하품을 하는 분위기, 마치 민방위 교육장 같은 분위기가 있습니다.
강사로서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인지 모릅니다.
이땅에 육화강생하신 예수님께서도 그런 냉랭한 대우를 참 많이 받으셨습니다.
특히 당대 나름 잘 나간다고 자부하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노골적으로 노골적으로 그분을 거부하고 무시했습니다.
아무리 목청을 높여 강조하고 또 강조해도, 끝끝내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죽음을 길을 향해 걸어가는 유다인들이 너무나 안타까웠던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서글프셨을까, 하는 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대가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 11,16-17)
또다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특별한 사건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극진히, 각별히 사랑하시는지를 만천하에 드러낸 사건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냥 거기 계셔도 아무 문제가 없는데, 우리 인간을 향한 극진한 사랑과 연민의 정 때문에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인간 세상으로 하향하셨습니다.
육화강생하신 것입니다.
이 대림 시기는 하향하시는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우리 인간 측의 호응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그분을 기쁜 마음으로 환대하고 우리 내면 깊숙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에 앞서 필요한 노력이 있습니다.
그분께서 머무시기에 합당한 거처가 되도록, 우리의 몸과 마음을 잘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제대로 된 판공성사를 통해 내면을 잘 정리해야 하겠습니다.
흥청대는 술잔치나 말 잔치, 불평불만, 과도한 욕심, 미워하는 감정 다 한번 정리해야 하겠습니다.
또 하나의 작은 교회인 우리 각자가 하느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으며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 있기를 원하십니다.
이 은혜로운 시기 교회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자 새로운 교회의 모델인 성모님을 바라보라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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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 비유를 말씀하신다. 그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례자 요한도 배척하였고,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리며 식사하시는 예수님도 배척하였다. 그 모습이 마치 장터에서 편을 갈라 노는 아이들과 같다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17절), 즉 우리는 너희가 선행하도록 노래를 불러 주었지만, 너희는 그렇게 하기를 싫어했다. 너희가 회개하라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17절), 너희는 회개하지 않았다. 이렇게 두 가지 선포, 즉 지은 죄를 회개하라는 것과 선행에 힘쓰라는 권고를 다 거부했다. 이는 바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요한을 마귀 들렸다 하고, 예수께는 먹보요 술꾼이라고 했다. 그들이 둘 가운데 어떤 가르침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터에 앉아 있는 아이들의 비유는 바로 세례자 요한의 엄격함도, 그리스도의 자유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어떤 가르침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마르 1,4)할 때, 자신을 회개해야 할 사람의 본보기로 제시했고,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마태 4,23; 9,35)하실 때, 당신 안의 빛나는 자유를 보여주셨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그려 보여주셨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19절) 지혜는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서 자신이 전에 주었던 선물을 빼앗아, 순종하며 믿음 깊은 백성에게 선물로 준다. 지혜의 선물은 사용하지 않으면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으로 잃어버리고도 알지를 못한다. 요한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삶이 달라졌다. 그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을 위해 그 지혜를 사용했다. 유다인들은 요한의 단식과 금욕적인 삶을 보고서도, 주 그리스도의 순종하는 삶의 모습과 하늘나라에 대한 약속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것을 지혜롭게 완성하신 분을 단죄하였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그분을 살아계신 지혜라고 생각한다. 그분은 믿지 않는 유다인들에게는 고약한 대접을 받으셨지만, 그들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라고 부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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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지혜란 생명의 원천을 알아보는 눈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씀에 꿈쩍도 하지 않는 세대를 비판하십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 11,17)
왜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을까요?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원하기는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에 묶여있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무엇에 묶일까요?
자신을 생존하게 해 줄 무언가를 줄 수 있다고 믿기에 묶이는 것입니다.
사람의 모든 선택은 다 자기 생존을 위함입니다.
저는 정치 이야기는 최소한만 하려고 하지만, 워낙 지금의 이슈가 이것이기에 그 상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특별히 여당을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처음에 밤에 계엄령 무효화를 위해 회의를 개최했을 때 그들은 국회로 모이려고 했다고 금방 말을 바꿔서 당사로 모이기로 하였습니다.
이 말은 회의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국민의 대다수는 계엄선포가 옳지 않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국민의 뜻보다는 당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지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마태 11,19)
지혜는 그들이 옳지 않았음을 드러내었습니다. 대통령 탄핵과 영부인 특검도 안철수 의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표결을 거부하고 나가버렸습니다.
그들을 뽑아준 국민 중 많은 수는 답답했을 것입니다.
그중에 어떤 여당 의원은 1년이면 또 자신들을 뽑아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동료 의원에게 말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서서히 분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다가는 여당의 씨가 마를 것 같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속속 자신들은 탄핵에 찬성하겠다고 하는 여당 의원이 늘어납니다.
왜 그 이전에는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요?
사람들은 결과보다는 과정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시야가 좁아져 있기 때문입니다.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는 다른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욕망은 우리 시야를 좁힙니다.
그러나 지혜가 드러나는 것은 과정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결과를 미리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이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지혜가 이룬 일”은 결과를 나타냅니다.
과정만 봐서는 어떤 선택이 진리인지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지혜가 없기에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하고
말하고 아드님께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했습니다.
과정만 가지고 말하면 헛갈립니다.
윤석열 대통령도 전두환 씨가 쿠테타와 5.18만 빼면 정치를 잘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그의 생각입니다.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의 목숨을 잃게 만드는 결정을 한 사람임에도 과정만 보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가 어떤 벌을 받았는지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리를 알아볼 방법은 무엇일까요? 사람은 다 어딘가에는 속해야 합니다.
‘힘’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힘이 없으면 죽습니다.
다시 말해 모든 선택이 다 생존을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원천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지혜입니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대통령이나 당의 사람들이 그 힘의 원천이라 믿으면 시력을 잃게 됩니다.
지혜를 잃게 됩니다.
그리고 안 좋은 결과를 맞게 됩니다.
민주주의에서는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옵니다.
국민의 눈치를 보았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생명의 원천은 어린이들이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생명의 원천이 어머니임을 압니다.
그래서 어머니 말에 웃고 울고 춤을 춥니다.
저도 어렸을 때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는 국민교육 헌장을 외우며 머리를 갸우뚱했던 적이 있습니다.
‘뭔 소리야. 나라가 나를 만들었나? 쳇!’
나라와 어머니의 말 중 누구의 말을 들었을까요? 당연히 나에게 생명을 준 이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면서 이제 생명의 원천이 자기 자신이 됩니다.
자신이 돈을 벌고 아기를 낳고 명예를 얻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생명을 유지하는 데 관련되고 그렇게 원천을 잊으니 그것들이 나오는 회사나 정당, 모임 등에 소속하게 되고 그 뜻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정치인들이나 우리 모두 성 토마스 모어를 본받았습니다. 좋겠습니다.
그는 헨리 8세에게 신임받는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헨리 8세가 재혼하기 위해 교황청을
저버리자 헨리 8세에게 더는 순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에게 생명을 주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단두대에 끌려가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까지 자유로웠습니다.
생명의 원천을 알고 그분의 말씀에 춤출 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번 계엄에도 일부 군인들은 시민들의 안전을 우선으로 해서 명령에 따르지 않기도
했습니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명심하는 정치인들이 많이 생기고 모든 생명의 근원은 하느님뿐임을 아는 신앙인들이 많아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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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생활 자체가 끊임없이 회개하는 생활입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마태 11,16-19).”
1) 여기서 ‘이 세대’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굳이, ‘이 세대’ 사람들을
‘장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로 비유하셨을까?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아버지의 뜻을 외면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꾸짖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아이들과 같다.”는 “철없는 아이들과 같다.”입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는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선포하는데도 듣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2)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는 세례자 요한의 엄격한 극기고행의 생활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는 “저자는 미쳤다.
정상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회개하기를 거부한 자들은, “우리가 회개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세례자 요한이 미친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라고 핑계를 댔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만나시는 것을 나타낸 말씀입니다.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는,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니 예수는 죄인이다.”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자들은, “예수는 죄인이니까 그의 말은 듣지 않겠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이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옳다는 것은”이라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생활 방식이나 예수님의 활동 방식은 모두 ‘인간 구원’이라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고, 그것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와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구원받음으로써 요한의 회개 선포와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이 증명된다는 뜻입니다.
3) 사실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와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보면, 표현이 똑같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 4,17).”
표현은 같은데, 요한의 선포는 회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예수님의 선포는 하늘나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어떻든 요한의 선포와 예수님의 선포를 거부한 자들은, ‘복음을 믿기를 거부하고 회개하기를 거부한 자들’입니다.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살던 대로 살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자들이고, 그렇게 거부하는 자들은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자들, 즉 스스로 심판과 멸망을 선택한 자들입니다.
4) 신앙인들은 회개 선포와 복음 선포를 이미 받아들여서 회개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회개와 신앙생활은 한 번 한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꾸준히, 그리고 끝까지 해야 하는 일입니다.
‘끝까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입니다.
만일에 이미 신앙인이 되었다는 생각만 하고서
자만하고 방심한다면, 위험한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그때에 그는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말한다.
그러고는 가서 그 집이 비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이 악한 세대도 그렇게 될 것이다(마태 12,43-45).”
5) 베드로 사도도 이렇게 경고합니다.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이 세상의 더러움에서 벗어난 그 사람들이 그것에 다시 말려들어 굴복을 당하게 되면, 그들의 끝은 처음보다 더 나빠집니다. 의로움의 길을 알고서도 자기들이 받은 거룩한
계명을 저버린다면, 차라리 그 길을 알지 못하였던 편이 나을 것입니다.
‘개는 자기가 게운 데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돼지는 몸을 씻고 나서 다시 진창에 뒹군다.’는 속담이 그들에게 그대로 들어맞았습니다(2베드 2,20-22).”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는 말은, 똑같은 죄를 지어도 신앙인이 더 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일 수도 있고, 똑같은 벌을 받아도 신앙인이 더 비참한 상태가 될 것이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은총 안에서’ 잠깐이라도 살아본 적이 있는 사람은 그 행복과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은총 밖으로’ 쫓겨났을 때,
은총 안에서의 행복과 기쁨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보다 더 비참한 심정이 될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아예 모르는 사람들보다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 나라 밖으로 쫓겨났을 때
더 비참하고 더 고통스럽게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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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11,16-19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팔짱을 낀 완고한 자세로 당신 말씀을 꼬투리 잡아 비판하기만 하면서 받아들일 생각은 하지 않는 이들을 장터에 앉아 놀이를 하는 미성숙한 아이들의 모습에 빗대어 설명하십니다. 그 아이들이 ‘미성숙’하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즉 그 아이들은 남들이 자기가 원하는대로 따라주기만을 바랄 뿐, 정작 자신은 남들이 무엇을 원하는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설령 안다고 해도 그들이 원하는대로 따라줄 의지도 없기에,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기에 미성숙하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원하는대로 하며 누구에게도 속박되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착각하겠지만, 현실은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하고 고립된 채 고독하게 살아가는 ‘외톨이’일 뿐이지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유다인들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그들은 철저한 회개와 엄격한 고행을 강조하는 요한의 가르침을 따르기가 너무나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그를 ‘마귀 들린 사람’ 취급하며 그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아도 되는 핑계를 만들었지요. 또한 세리나 창녀들처럼 당시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배척받던 ‘죄인’들, 그리고 함께 해봐야 이득될 게 없는 힘 없고 가난한 이들과는 같이 어울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시는 예수님을 ‘먹보요 술꾼’ 취급하며 그분처럼 하지 않아도 될 이유를 만들었지요. 그러나 그들이 요한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분들 때문에 자기 삶이 변화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의 가르침을 올바른 것, 중요한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삶 속에서 실천해야 되는데, 그렇게 하면 자기들이 세속적인 이익을 더 얻을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해야 될까봐, 하기 싫고 귀찮은 ‘의무’와 ‘책임’을 떠맡게 될까봐 두려웠던 겁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이 그들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것은 그들에게 ‘꼭 필요한 것’과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위함입니다. 자기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하느님께로 삶의 방향을 돌리는 회개는 구원받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충만히 받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은 우리가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잘 가꾸어 완성시켜 나가야 할 참된 기쁨과 행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걸 모르는 철없는 아이 같은 사람들은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하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내놓으라고, 멸망을 피할 방법이나 세상에서 성공할 방법 같은 걸 알려달라고 고집을 부리며 떼를 쓰는 것이지요.
그들에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과 행동으로,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명하시는 삶으로 당신이 전하시는 메시지가 옳다는 것을, 그 메시지가 당신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그분의 뜻임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입을 삐쭉거리며 군소리하거나 핑계거리를 찾는 게 아니라, 주님의 뜻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명으로 따르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가 피리를 불면 함께 춤을 춰 주시고 우리가 곡을 하면 함께 울어주시는데, 왜 우리는 그분을 위해 그렇게 해드리지 못하고 자꾸만 핑계를 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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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옛날 어른들은 ‘밥장사 밑지지는 않은데 사람들 비위 맞추기가 힘들다.’라는 말씀을 하곤 했습니다.
교구청에서 직영하는 식당이 있었습니다.
제일 까다롭게 하는 것은 외부인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 교우들이었습니다.
‘쓰네 맵네, 맛이 없네.’ 불평도 다양합니다.
때로는 그 말이 힘들어서 새벽시장에 나가 신선한 식자재에서부터
많은 것을 신경을 쓰며 최선을 다하려던 주방장은
의기가 소침할 때가 있었습니다.
방부제나 조미료를 안 쓰려 안간힘을 쓰다가도
그런 불평들을 들으면 남들이 하는 대로 조미료도 듬뿍 넣으며
대충하고 싶다는 푸념도 널어 놓으며 속상해 했습니다.
주방일을 하며 예비자 교리를 하여서 세례를 받은 주방장은
다른 사람도 아닌 교우들이 ‘콩 놔라 밭 놔라.’하는
참견과 불평이 서운했던 모양입니다.
자기가 기대를 걸었던 천주교 교우는
식당에 일하는 사람들을 집안 식구로 감싸 줄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오히려 교우들이 더 심한 말을 해서
상처를 주거나 실망을 줄 때가 많았습니다.
물론 끝까지 주방장은 좋은 식당으로 꾸려 나갔습니다.
예수님의 오늘 말씀을 들으면 세상 일이 내 마음 같지 않음을 배웁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마태 11,16)
장터의 아이들은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았고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았다’는 내용을 부릅니다.
이 노래에 비유해서 주님께서는
세례자 요한과 당신 자신에 대해서 ‘자기 멋대로 해석해서 말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지 않는 세례자 요한을 마귀에 걸려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고
주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니까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19절)라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씩 게임 중에 한 줄을 세워놓고 한쪽 끝에서 말을 해서
그것을 옆 사람에게 또 그 옆 사람은 그 다음 옆 사람에게 이어가게 합니다.
그리고 맨 나중에 어떤 내용을 전해주는가를 알아봅니다.
바로 옆에서 하는 말인데도 한 사람씩 옮길 때마다
그 내용이 다르게 변해서 나중에는 완전히 변하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보는 데도 그 내용이 변하는데 하물며 시간적으로나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데 그 내용이 얼마나 바뀌겠어요?
우리는 살면서 내 이웃이 나에 대해서 전혀 엉뚱한 소리를 하면
슬퍼하거나 분하게 여길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라는 마음의 소리를 하며 속상해 합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말은 변하게 된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되는데,
실망 속에서 다시 이해하는 데에로 너머가게 됩니다.
그리고 언제 부터인가 ‘사람은 그럴 수도 있어.’라는 자문을 하며
너그러워지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다 나 자신도 변하는 사실을 알게 되면 더욱 겸손해 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상처나 실망을 주는 사람이 바로 내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하기야 나와 먼 사람은 나를 알 턱이 없으니 이렇다 저렇다 할 수도 없고 또 있다 해도
거리가 있어서 내가 알 턱이 없는 것입니다.
교구 식당을 운영 하면서 배운 교훈은 사람마다 제 각기 입맛이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비위를 맞춘다는 것은 손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옳다는 길을 흔들림 없이 가는 것이고 그 길을 인도하는 것은 주님이실 때
나는 안전하게 가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내가 고집을 부려서 내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올바른 길을 기도하며 또 묵상하며
나의 길을 가는 것이 바로 참다운 신앙의 삶이라 하겠습니다.
때로 이웃이 이해하지 못해도 때로
나를 힘들게 해도 주님과 함께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사람의 평판보다는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요!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야말로 시편의 저자의 표현대로
‘물가에 심어진 나무’는 늘 생명과 푸름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렵더라도 늘 주님을 바라보며 세상의 번거로움에서 초연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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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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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들에서는 하느님의 안타까움이 읽힙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 11,17).
예수님께서 상대방에게 전혀 호응을 해주지 않는 당시 이스라엘 세대의 태도를 장터 아이들 놀이에 비유하십니다. 기쁨에 기쁨으로 슬픔에 슬픔으로 감응하지 않고, 어떤 판이 벌어져도 거부할 태세를 갖춘 모습이지요.
예수님 시대 사람들은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기는 했지만 가급적 자기들 구미에 맞는 존재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준을 벗어나는 듯하면 거짓 예언자나 선동가, 죄인으로 몰아 생명까지 앗아갔습니다. 게다가 이런 일들은 제도의 힘을 빌어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행되었지요.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마태 11,18).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은 친구다"(마태 11,19).
세례자 요한이 행한 절제와 극기는 거룩한 덕입니다. 예수님의 겸손과 포용력과 친화력 역시 아름다운 덕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덕들도 자기 프레임에 갇힌 굳은 마음으로 보면 마귀짓일 뿐이고 방종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일찌감치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께 선고를 내린 셈입니다.
제1독서에서도 하느님의 탄식이 들립니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이사 48,18).
이스라엘에 축복을 준비하고 계셨던 하느님께 이스라엘의 배반은 뼈 아픈 슬픔입니다. 그분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 "강물같은 평화,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릴 의로움, 모래알처럼 많은 후손, 길이 기억될 이름"(이사 48,18-19 참조)을 마련하고 기다리셨지만, 이스라엘은 그 기대를 벗어났고 하느님의 축복은 유예 상태로 묶입니다.
사람 마음이 그렇지요. 마음만 먹으면 온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지만, 반대로 그 무엇도 발 붙이지 못하게 밀쳐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보다 엄밀히 말해 민중을 움직일 수 있는 정치 종교 기득권층은 어쩌면 자기들 이익에 도움이 될 메시아가 나타날 때까지 이 거부권을 행사하며 하느님을 밀쳐낸 것이지요. 무수한 예언자의 죽음에 이어 세례자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까지 제거한 고질적 병폐였습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마태 11,19).
예수님의 안타까움은, 그러나 탄식으로 끝나지 않고 명쾌한 자기 확신으로 마무리됩니다. 지혜는 말씀이신 성자 예수님이시고, 진리 자체시기에 그르침이 없으시지요. 그분이 세상에서 이루신 사랑의 기적들로 지혜의 옳음이 드러납니다. 이는 거부하기로 작정한 이들에게만 가리워져 있는 선입니다. 예수님은 세대의 약함과 악함에도 흔들리지 않고 당신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이사 48,17).
하느님께서 마음을 다해 피력하신 이 자기소개는 듣는 이의 마음에 따라 따사로운 위로와 격려가 되기도 하지만, 현세적 성공과 자기본위적 이득을 보장해 줄 메시아가 나타날 때까지 믿음을 보류하고 사랑마저 묶어둔 굳은 마음에게는 스며들지 않겠지요.
오늘의 말씀은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묻습니다. 당신을 고대하는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준비하신 축복은 그분과 함께 춤추고 그분과 함께 가슴 치며 울 수 있는 촉촉하고 말랑말랑하게 열린 마음 안으로 쏟아질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이 공감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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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3.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믿는 삶
<2024.12.13> 아침을 여는 묵상 (암 7:10~17절)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믿는 삶❞
❚ 말씀에 순종하여 말씀에 근거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장 큰 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말하지 않아야 합니다(10~13절).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는 벧엘을 비롯하여 북이스라엘의 신당들이 파괴될 것과 여로보암 왕의 멸망에 대해 예언한 아모스 선지자의 행동이 몹시 언짢았습니다. 그래서 아모스를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로보암 왕을 찾아가서 마치 아모스가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모함했습니다(10절). 아마샤는 아모스가 예언한 내용에 대해 분명하게 들었습니다.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 땅에서 떠나겠다..’(11절). 아마샤는 아모스의 말에 대해 과장하고, 왜곡하여 아모스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증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급기야 아마샤는 아모스를 향하여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에서 예언을 하면서 밥벌이나 하라’(12절)고 비웃으며, 조롱했습니다. ‘...이는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임이니라..’(13절). 제사장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왕의 하수인과 같은 타락한 제사장의 모습을 보입니다.
아모스의 예언은 그들이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나에게 유익이 되는 부분만을 기억하려고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기준에 맞추어서 너무나 쉽게 왜곡하여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때로 우리를 아프게 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말씀을 들어야 하며, 하나님이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지 깊이 묵상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마침내 우리에게 복이 되는 것입니다. 오직 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말씀을 말씀 그대로 받지 못하고, 왜곡하여 듣고, 전하는 어리석은 삯군 목자가 되지 않아야겠다는 마음의 다짐을 해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듣고, 말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믿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당당하게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14~15절).
아마샤의 공격에 아모스가 답변합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아들도 아니다. 나는 단지 목자이며, 무화과나무를 기르며 사는 사람일 뿐이다..’(14절, 쉬운성경). 아모스는 자신이 선지자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위해서 이와 같이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된 것으로 이는 사람의 뜻으로 취소하거나 변경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양 떼를 치던 아모스를 하나님은 불러 내셔서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고 하셨습니다(15절). 지금 아모스가 외치는 메시지는 북 이스라엘을 위하여 주신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던 우리를 택하여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그 부르심에 겸손함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의 결과는 ‘가서, 전하는 것입니다.’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당당하게 전할 수 있는 믿음의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아모스는 남유다 사람이면서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상황과 처지가 너무나 나에게 불리하고, 도무지 그리스도인임을 들어낼 수 없는 자리라 할지라도 믿음의 정체성을 놓치지 않는 삶이어야 합니다. 때로는 핍박이 오고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저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믿어 당당하게 전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대로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16~17절).
‘이제 너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16절a)..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를 박해하고, 그 사역을 방해하는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아모스의 입을 통하여 심판의 메시지가 구체적으로 예언이 되고 있습니다. ‘아내는 성에서 창녀가 될 것이며, 아들과 딸들은 칼로 죽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땅을 빼앗아 나누어 가질 것이며, 낯선 땅에서 죽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틀림없이 그 땅에서 쫓겨나 포로로 끌려갈 것이다...’(17절).. 아마샤의 타락은 단순히 본인과 가정의 문제가 아닌 북이스라엘 전체를 멸망에 이르게 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로 행하지 않는 나 한 사람 때문에 우리의 공동체가 더 나아가 우리 교회가 건강한 공동체로 나아가지 못할 수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맡겨진 양들의 신앙생활을 올바로 지도하고, 모범을 보여야 할 교회의 리더십들의 그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안일하게 신앙 생활하지 말고 때로는 뼈를 깎는 고통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대로 그리고 말씀 그대로 살아가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복음 때문에 핍박이 오고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사명을 저버리지 않도록 말씀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삶을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선한 영향력을 나타내며 살아갈 수 있기를(암 7:10~17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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