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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3: 1-7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새
아브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사실 중에 가장 큰 것이 있다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해주신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주시는 모든 혜택이 실제로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세속적인 물질들과 세상 나라도 그를 위한 한 배경으로 주어졌습니다.
1. 본문 1-2절은
“①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 하여 남방으로 올라가니
②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 입니다.
이 장의 서두에서 모세는 아브람을 보호해 주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아브람이 안전하게 돌아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재물도 함께 가지고 갔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다음 상황은 또한 우리의 주의를 필요로 하고 있으니 그가 가축과 보물들을 많이 가지고 애굽을 떠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여행길을 편안히 갈 수 있게 인도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애굽인들이 아브람이 취득한 것을 가지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 모세는 보여주기를 이 재산도 아브람이 제안받은 목적을 계속 중요시하는 것과 조금도 해이됨이 없이 그 목적을 향하여 발걸음을 움직여가는 것을 방해하고 늦추게 하는 데에 충분한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지하고 있는 사실대로 심지어는 건전한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도 그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방해하여 그들이 하늘을 바라보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까? 정말로 풍요를 소유하고 있는 자들은 나태에 빠져 있을 뿐만 아니라 모두가 전적으로 땅에 얽매어 죽음을 벗어날 수 없게 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아브람의 덕성을 다른 사람들의 공통된 사악과 대조를 시켜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가 다시 가나안 땅을 찾아가는 것을 어떤 장애로 인하여 방해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설명한 때에 그 사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그럴 듯한 핑계를 붙여서 많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아첨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자신에게 그토록 풍부한 복을 주신 하나님이 이집트에서 그에게 호의를 베풀고 은총을 주셨기 때문에 사실상 그에게는 거기 머물러 있는 것이 옳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조금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족쇄(足鎖)가 풀린 사람처럼 그는 자기가 부름 받은 곳으로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부자들이 이 세상 것에 깊이 뿌리를 박고 하나님의 소명에 무관심 한다면 모든 변명의 여지를 박탈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 극단들을 우리가 경계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① 많은 사람들이 빈곤에다 천사 같은 안전성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부유함을 내팽개치지 않으면 절대로 경건을 지니지 못하고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몇몇 사람은 정말로 데베 사람 크라데를 본받고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 모든 재산과 보물들을 버리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기의 보물들을 바다에 던져버린 자입니다. 그러나 많은 광신자들은 아직도 부유한 사람들을 구원의 소망에서 배제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빈곤이 하늘 나라의 문이나 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내세우고 있는 가난이 부요보다 더 많은 장애를 인간들에게 야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지혜롭게 우리에게 교훈하기를 부자와 가난한 자는 똑같이 생명의 유업에 참여하고 있다고 합니다. 가난한 나사로도 아브라함의 품에 영접되었기 때문입니다.
②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그 반대의 잘못에 대하여도 주의를 해야 합니다.
부요가 우리의 길에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을 놓거나 또는 우리들을 너무도 부담스럽게 하여 그만큼 우리가 하늘 나라를 향하여 재빠르게 나아갈 수 없게 만드는 일이 생기지 않게 부요 자체에도 주의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2. 본문 3-4절은
“③ 그가 남방에서부터 발행하여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④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입니다.
모세는 아브람이 벧엘에 도착하기 전에는 쉬지 않았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비록 그가 여러 곳에서 장막을 치기는 했지만 그 어느 곳도 자기의 항구적인 처소로 발을 굳힌 곳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기서 이집트와 관련된 남방을 말하지 않고 단지 유다의 남북 지역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여러 가지 문제와 수고를 한 후에야 그가 전에 머물기로 결심했던 곳에 도착했습니다. 모세는 그 다음에 이렇게 추가하고 있으니 전에 그가 제단을 쌓았던 곳이며 그리고 그가 거기서 새롭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고 이 거룩한 사람이 언제나 변함 없이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했으며 그의 경건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설명하기를 그곳의 정착인들은 모두 하나님을 순수하게 경배하였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전혀 가능성이 희박할 뿐만 아니라 모세의 말에서는 전혀 추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곳에서 ‘그 이름으로 간구하다’ 또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의 표현이 하나님을 진실하고 순수하게 경배하는 것을 공언하는 데에 위력을 지니고 있다고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아브람이 그의 생애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 단지 열두 번만이 아니고 그가 공식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그분을 기념할 때마다 엄숙한 의식으로 자기는 이방인들이 따르고 있는 공통적인 미신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밝힐 때마다 하나님을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그가 언제나 하나님을 경배하고 날마다 기도하는 생활에서 자신을 단련시켰지만 아직도 사람들 앞에서 외부적인 공언으로 그의 경건성을 날마다 증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덕성을 특별히 모세가 칭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반드시 제단과 연관되어야 함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은 드려진 희생제물로 그는 자신이 경배하고 있는 하나님을 분명하게 증거 하여 그들 이방인들이 공통적으로 따르고 있는 우상들에 빠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가나안 사람들이 알게 했기 때문입니다.
3. 본문 5-6절은
“⑤ 아브라함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⑥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입니다.
다음에는 아브람이 자기의 부요로 인하여 겪게 되었던 불편한 점이 게재되고 있습니다.이를테면 자기가 낳은 친자식처럼 그가 무척 사랑했던 조카와 갈라지게 되었던 점입니다. 확실히 그에게 양자택일이 주어졌다면 외아들처럼 보살펴왔던 그와 헤어지는 것보다는 자기의 부요를 버리고 그와 함께 있는 것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언쟁을 피하는 다른 방법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일의 잘못을 그가 지나치게 까다로왔다는 것에 전가시켜야 되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의 조카가 조숙하여 건방지게 굴었다는 것에 돌려야 될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반드시 고려해야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번영이 많은 사람을 소경으로 만들고 있으니만큼 아브람도 자기의 성공으로 지나치게 자만하게 만들어 주는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비통함으로 부요의 달콤함을 경감시키시고 그분의 종의 마음이 지나치게 그 재물에 매혹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 부요에 대하여 현혹시키는 평가가 무절제하게 그것을 탐하게 우리를 유인할 때마다 우리는 이 이야기의 교훈을 회상하여 그 재물들에 대하여 불건전하게 집착되는 것을 절제하는 데에 적용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이 초래하는 엄청난 불리한 것들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부자들이 자기들의 재물로 인하여 어떤 문제가 야기되는 것을 알아차리면 그때그때 마다 이 약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결케 하여 현세의 좋은 물질에 지나치게 탐닉되지 않게 하는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여호와께서 간헐적으로 인간들에게 제재를 가하지 않으신다면 그들이 번영으로 차고 넘치게 되면 과연 그들이 얼마나 깊은 지경에 빠지게 되었는가?
다른 한편으로 만약 우리가 가난으로 쪼들린다면 이 방법으로도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 속에 있는 숨겨진 죄악을 교정(矯正)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마지막으로 자신들이 가시들로 에워싸여 있다는 사실과 그것에 찔리지 않으려면 반드시 주의를 해야 된다는 사실을 부자들은 잊지 말아야 될 것이며 또한 자기의 일들이 잘 풀리지 않고 곤경에 있는 자들은 그들이 악하고 유해한 올무에 걸려들지 않도록 하나님이 그들을 보살피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조카 롯과 분리되는 것이 아브람의 마음을 슬프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잠재되어 있는 많은 악한 것들을 교정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적절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요가 그의 열심의 열을 묵살시키지 않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아브람이 그런 해독제가 필요했을진대 하물며 우리야 오죽하겠습니까? 만약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징치를 하심으로 우리의 지나침을 억제하신다고 해도 우리는 절대로 놀라거나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가 타락할 때까지 언제나 기다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때 멀리 미래를 바라보시고 그렇게 하심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실상 그분의 종 아브람의 탐욕과 교만을 교정하신 것이 아니라 예측된 치료방법으로 사단이 어떤 유혹으로도 아브람의 마음을 감염시키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4. 본문 7절은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입니다.
1) 부요에 관하여 암시하는 것은 또한 수행하는 많은 사람들에 관해서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야심을 가지고 거의 큰 백성의 무리에 달하는 엄청나게 많은 종들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아브람의 가족은 그에게 너무나 귀중한 희생을 치르게 했으므로 이제 우리는 적은 가족을 거느리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 앞에 우리가 가족이 전혀 없이 지내는 것이 옳은 일이라면 또한 그렇게 가족이 없는 것으로도 만족해야 되겠습니다. 한 집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기거를 하고 있는 경우에 큰 혼란을 피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속담의 진리가 사실이라는 점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이제 만약 정양(靜養)과 평온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좋은 것이라면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작은 집을 지니고 개인적으로 가족의 방해가 전혀없이 조용한 시간을 보낼 때에 과연 진정한 우리의 복지를 위하여 가장 훌륭하게 생각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우리들 상호간에 적개심을 일으킬 수가 없으며 우리를 다른 사람의 싸움에 끼어들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롯과 아브람은 둘이 서로 한 마음 한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분쟁은 그들이 부자들 사이에 일어나서 그들은 망설이면서 서로 멀리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마음에 내키지 않은 작별을 서로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틀림없이 아브람은 자기 목자들에게 그렇게 싸우지 말고 잘 지내라고 여러번 강조하여 지시하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소원과 노력대로 그 집에 붙어있는 불화의 가장 파괴적인 불을 예방하는 것에는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에서 흔히 야기되는 소란들을 볼 때에 역시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므로 그다지 이상스럽게 생각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약 300명 정도의 종들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롯의 권속들도 거의 그 수효에 비등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5,6천명들 사이에서는 그것도 특별히 자유인들 사이에서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들이 서로 다툴 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고 기대됩니까?
2)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라는 말씀에서 모세는 그 죄악을 더 확대시키기 위하여 이것을 더 첨가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선언하기를 그 분쟁의 열도가 대단히 엄청나게 되어 심지어 파멸이 임박하는 두려움도 그것을 식힐 수가 없으며 진정시킬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 두 사람은 주변에 마치 이웃 사람들처럼 많은 원수들에 의하여 에워싸여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이 두 사람의 가족들을 멸망시키기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적당한 기회만을 노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회를 그들 자신들이 둘이 서로 다툼으로 인하여 적군들에게 제공하게 되어버렸습니다.
맹목적인 노기가 사람들을 그런 정도에까지 이르러 일단 분쟁의 과열이 지배하게 되면 그들의 죽음이 목전에 있을 때에도 그들은 그 죽음을 무모하게 경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런 가나안 사람들에 의하여 포위되어 있진 않지만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우거하고 있는 한 원수들 가운데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들이나 우리의 형제 동포들을 구원하려는 간절한 소원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런 분쟁을 조심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결국 우리를 사단에게 넘어지게 하여 멸망당하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