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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말씀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행 19:11-20
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5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6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17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18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행 19:11-20 / [스게와의 아들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놀라운 이적을 행하는 능력을 주셨다. 12) 그래서 그의 손수건이나 옷가지만 병자에게 갖다 대도 병이 낫고 어떠한 귀신이라도 떠나갔다. 13) 그때에 악마를 쫓아내는 일을 하며 돌아다니던 유대인 마술쟁이 일행이 있었다.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을 사용해서 귀신을 쫓아내 보자는 계획을 세우고는 `바울이 전하는 예수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령한다. 나가거라' 하는 주문을 정하였다. 14) 이런 짓을 한 사람들은 유대의 제사장인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었다. 15) 그런데 그들이 실제로 귀신들린 사람에게 실험을 하자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 그런데 너는 도대체 누구냐?" 하고 귀신이 오히려 반발하였다. 16) 그뿐 아니라 귀신 들린 사람이 그들 가운데 두 사람에게 덤벼들어 난폭하게 구는 바람에 그들은 상처투성이가 되어 간신히 도망쳐 나왔다. 17) 이 소문은 순식간에 에베소에 있는 유대인과 헬라 사람에게 퍼져 온 시내는 두려움 속에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 찬양하였다. 18-19) 그리고 마술을 써오던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지금까지 행한 일들을 고백하며 주문 외는 책이나 부적들을 가지고 나와서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불살라 버렸다. 그 책값을 계산해 보았더니 은화 5만개에 해당하였다. 20) 이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얼마나 큰일이 온 지방에 일어났는 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손에 놀라운 능력을 더해주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바울의 능력을 흉내내보기도 하지만 외려 험한 꼴을 당하고 맙니다. 이 일은 에베소에 두려움과 주님을 높이는 경외함, 그리고 자복하는 회개의 역사를 불러옵니다.
바울의 능력과 흉내 내는 자들(11-16) 에베소에서 3년 동안 사역하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손에 능력을 더해주셨습니다. 심지어 바울이 직접 가지 않아도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 병자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며, 귀신도 물러갔습니다. 말씀 위에 능력을 더하셔서 말씀이 힘이 있게 하시기 위한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곳은 말씀이 말씀되게 하기 위하여 능력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질병의 치유나 악귀의 내어 쫓김의 목적은 복음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며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하기 위하여 능력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능력은 흉내 낼 수 없습니다. 순례 마술사들이 시험 삼아 악귀 들린 자에게 명해보았지만,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흉내 내 보았지만 오히려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 올라 상하게 하므로 벗은 몸으로 도망할 뿐입니다. 우리는 자주 믿음을 흉내 내려 합니다. 신앙은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힘 있는 말씀으로 인한 일들(17-20) 바울을 통하여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은 에베소를 변화시켰습니다. 마술을 행하던 자들이 자신들의 책을 공개적으로 불태울 만큼 구체적인 변화의 증거들이 나타났습니다.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이 일을 알고는 두려워했으며, 주님을 높여드렸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죄를 자복하며 통회하였고, 마술사들은 은 오만이나 되는 값의 책을 불살랐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힘이 있고 흥왕하여 세력을 얻은 결과입니다. 복음은 삶 속에서 영적 대청소를 불러일으킵니다. 또한 죄와 단절하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적용: 에베소에 성령의 능력으로 거짓된 풍속을 벗어 버리는 역사가 일어났듯이, 오늘 당신이 공개적으로 태워야 할 죄 된 풍속이나 습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두려움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신앙은 내가 주인으로 사느냐? 내 속에 주님을 주인으로 인식하고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주님을 주인으로 모실 때 나쁜 습관이 사라지고 끊지 못하던 것들이 끊어지게 됩니다. 습관의 죄가 끊어지면 변화되어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기도로 산다는 것은 성령을 인식하고 계속 주님과 교제하며 삶 속에서 주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 설 교 >
너희는 누구냐
행 19:11-16 / 주승중 목사
1. 들어가는 말
성도 여러분, 만약 이 시간 누군가가 우리에게 “너는 누구냐?”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너희는 누구냐?” 이 질문은 자기 정체성(identity)과 관련된 질문이지요. 그런데 사실 이런 질문에 선뜻 쉽게 대답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주 쉬운 질문인데도, 막상 우리는 이런 질문을 받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를 몰라 당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동안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했던 “사오정 시리즈”가 있습니다. 사오정과 손오공이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시험을 치르러 어느 회사에 갔습니다. 손오공이 먼저 면접장에 들어갔습니다. “15번 손오공입니다.” 면접관이 이런 질문들을 합니다.
“자네 축구 선수 중에 누구를 제일 좋아 하는가?” “예, 옛날에는 차범근이었는데 지금은 박지성입니다” “산업혁명은 언제 시작됐나?” “예, 18세기입니다” “자네, 하나님은 있다고 믿는가?” “예, 과학적으로 증명은 안 되었지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면접을 잘 마치고 나간 손오공이 밖에서 면접순서를 기다리면서 벌 벌 떨고 있는 사오정을 보고는, 불쌍해서 첫 번째 질문부터 순서대로 잘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오정은 열심히 질문과 답을 순서대로 외우면서 자기 차례가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자기 이름이 호명이 되자 사오정은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사오정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27번입니다”라고 번호만 말했습니다. 사오정이 자기 이름을 말하지 않자, 면접위원이 묻습니다.
“자네 이름이 뭔가?” “예, 옛날에는 차범근이었는데, 지금은 박지성입니다”
“뭐? 자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나?” “예, 18세기부터 입니다”
“자네 혹시 바보 아닌가?” “예, 과학적으로 증명은 안 되었지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젊은이들이 만든 우스개 소리이지만, 사오정의 모습은 어쩌면 자신이 누군가를 모르고 살아가는 오늘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도 의외로 나 자신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질문을 했지만, 우리는 사실 내가 누구인지를, 나의 정체성을 잘 모르면서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들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까? 여기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도 “너희는 누구냐?”라는 질문 앞에 그 대답을 못한 체 당황해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2. 몸말
1) 본문의 배경
그들은 바로 스게와라는 유대인 제사장의 일곱 아들들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9장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또한 여러 가지 이적과 기사를 일으킨 사역을 소개하고 있는 곳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는 동안 성령의 충만함에 힘입어 세 가지 중요한 사역을 했습니다. 제일 먼저 바울은 주의 제자들과 함께 회당에 들어가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말씀 사역, 이것이 바울의 에베소에서의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사역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혀, 능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한 바울에게는 여러 가지 놀라운 은사들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치유의 능력이었습니다. 바울의 치유능력이 얼마나 놀라웠는지, 오늘 본문은 기록하기를 “희한한(놀라운) 능력”(11절)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12절에서는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갔다”(11-12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그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은 놀라운 능력이었습니다. 치유사역, 이것이 에베소에서 행한 바울의 두 번째 사역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사역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세 번째 중요한 사역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는 축사(귀)사역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우리가 다시 읽어보면, 바울을 통해서 나타난 능력이 얼마나 희귀한지, 바울의 손수건이나, 그가 텐트를 만들 때 입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들에게 얹으면 병이 나을 뿐만 아니라, 악한 귀신들도 떠나갔다고 했습니다(12절).
그런데 그 당시 에베소를 중심한 소아시아 지역에는 우상을 숭배하는 신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에베소에는 아데미 신전을 중심으로 많은 우상들이 세워져 있었는데, 자연히 에베소에는 마술을 하는 사람들, 주문을 외우는 주술가들, 그리고 소위 귀신을 쫓아내는 무당들(Exorcist)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이런 모든 종류의 악한 세력들과 능력대결(power encounter)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악한 세력들이 활동을 하던 에베소는 그 중에서도 마술과 마법이 아주 강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배후에는 악한 영들이 있었고, 따라서 귀신들의 활동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귀신들의 힘을 빌려 마술을 하던 마술사들 가운데 바울의 사역을 눈여겨 본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보니까 바울의 능력이 참으로 대단합니다. 바울이 병도 낫게 하고, 귀신도 쫓아내는데, 바울의 하는 이런 일들이 그들이 보기에도 아주 희한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도대체 바울이 어떤 주문을 외우길래 저렇게 병도 금방 낫고, 악귀들도 쫓겨나는가?” 하는 궁금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의 사역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생각하기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나가라”고 외치는 바울의 주문에, 악귀들이 도망간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어떤 유대인 마술사들이 바울의 흉내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 삼아 악귀 들린 자에게 주 예수의 이름으로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그 마술사들은 귀신들린 자들에게 바울의 흉내를 내면서 시험을 해 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스게와 라는 유대 제사장의 일곱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이들도 다른 마술사들의 흉내를 내면서 귀신에게 나갈 것을 명하였는데(14절), 이게 웬일입니까? 귀신이 나가기는 커녕 오히려 이렇게 대꾸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15절) 그들은 당황했습니다. 분명히 바울이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흉내를 내었는데,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했는데, 악귀가 나가지를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악귀가 그들을 공격해 왔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주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그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아마도 스게와의 아들들은 당황한 나머지 별의별 소리를 다 질렀을 것입니다. “베들레헴에서 나서 골고다에서 죽으신 예수의 이름으로 나가라”고 해보기도 하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나가라”를 외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귀는 도무지 나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달려들어 공격을 해 왔습니다. 마침내 스게와의 아들들은 악귀들에게 정신없이 얻어맞고는 입고 있던 겉옷마저 찢기고 빼앗긴 체, ‘다리야 날 살려라’ 하고 도망을 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2) 왜 이런 수모를 당하였나?
그렇다면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스게와의 아들들은 왜 이런 수모를 당하게 된 것입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의 사건을 통해서 아주 중요한 한 가지 메시지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 예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스게와의 아들들은 비록 제사장의 아들들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제사장의 아들들로서 경건의 모양은 있었는지 모르나, 주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경건의 능력은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사건을 볼 때 바울의 놀라운 능력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이었습니까?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갖다 대어도 병이 낫고, 악귀들이 도망가는 이런 놀라운 능력의 근원은 어디서 온 것이었습니까? 그것은 바울 자신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능력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11절을 보세요.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능력의 주체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희한한 능력은 바울이 하나님과 맺은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지, 마술과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신앙은 우리를 위하여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 들어가는 것이며, 바로 그 관계에서 놀라운 능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게와의 아들들은 이것을 몰랐습니다. 이것을 착각했습니다. 그들이 바울과 같은 놀라운 능력을 행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주님과의 관계속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과의 관계는 아랑곳없이 그저 예수님의 이름만을 주술적으로 외우면 되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악귀들에게 그런 수모를 당한 것이었습니다.
악귀들이 “너희는 누구냐?”라고 물었을 때, 적어도 그들은 다른 것은 다 몰라도, 예수님과 그리고 바울과의 관계만은 분명히 설명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다.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목숨까지 내어 놓으신 나의 주님이시다. 그리고 바울은 그 예수님의 제자요, 우리의 동역자다.” 이렇게 대답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과도, 바울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부르고 있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전혀 모르고 있었고, 예수님께서 바울을 비롯한 제자들에게 위임하신 능력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단지 주술적으로 예수님과 바울의 이름을 인용하고 있었습니다. 본문 13절에 마술하는 유대인들이 악귀 들린 자에게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명하노라”는 단어는 “호르키조”라는 말인데, “부탁한다” “애원한다”(막 5:7절 참조)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동사가 성경원문에는 명령형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단순 현재 직설법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즉 “내가 애원한다. 내가 부탁한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악한 귀신을 쫓아내기 위한 단호한 명령(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나가라!) 이 아니라, “얘,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부탁하는데, 좀 나가줄래?”라는 일종의 타협이요, 부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단지 예수의 이름으로 이교적인 축귀 관습을 따라 주술을 외우듯 인용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라고 묻는 악귀들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악귀들은 그들이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도 없고, 바울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런 자들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오히려 공격을 가한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것은, 인류 역사를 통하여 사람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서,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해서 믿지를 못하고 의심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 오히려 귀신들은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 그 어떤 의심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귀신들과 악한 영들은 오히려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분 앞에서 두려워 떨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여러 곳에서, 오히려 귀신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고백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눅 4장 31-3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사역을 하실 때에, 한 더러운 귀신이 예수님을 보고는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눅 4:34)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그 분이 누구인 줄 알았습니다.
또한 막 5장 1-20절에도 보면, 군대 귀신이 들어 고생을 하던 사람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거기에도 귀신은 예수님을 보고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라고 애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귀신들은 하나 같이 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믿고 떨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약 2장 19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 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
오늘 본문 15절에서도 악귀가,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고 했습니다. 우리 성경은 모두 ‘안다’고 번역을 했지만, 여기서 악귀가 예수님을 안다고 한 단어는 ‘기노스코’인데, 이는 ‘본질을 속속들이 알다’라는 뜻으로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바울을 ‘안다’고 할 때의 단어는 ‘에피스타마이’인데, 이는 ‘안면이 있다’는 뜻으로, 바울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몇 번 보아 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귀신들과 악한 영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귀신들과 악한 영들은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 그 어떤 의심도 가지지 않는데, 오히려 사람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 의심하고, 믿지를 않습니다. 아무튼 오늘 본문의 스게와의 아들들은 “내가 예수도 확실히 알고, 바울도 안면이 있어 아는데, 그런데 너희는 누구냐?”라고 도전하는 악귀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주술처럼 인용하고 있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귀신들조차도 알고 있고, 귀신들조차도 믿고 떠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의 아들들이었는데도 말입니다.
3) 나는 누구인가?
사랑하는 새문안교회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과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혹시 오늘 우리의 모습이, 이 스게와의 아들들과도 같은 모습은 아닙니까? 겉으로는 제사장의 아들들이요,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 같고, 예수님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인 것처럼 보이지만,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인 것처럼 보이지만, 혹시 우리의 속사람은 오히려 주님과 별로 상관이 없는 것은 아닙니까?
만일 오늘 저와 여러분이, 사탄으로부터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는 누구냐?”라는 이런 공격적인 질문을 받는다면, 오늘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입니까?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로 하여금 바로 이 질문에,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하여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저 2천년 전, 십자가의 길, 예루살렘의 길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 가르쳐주신 우리의 신분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을 받는 자녀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과거에 우리는 죄인들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경건치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죽어 마땅한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진노의 자식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는 지옥의 땔감으로 밖에 쓸 수 없는 그런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사, 우리를 살리시려고 당신의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그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그 귀한 피와 물 한 방울까지 다 쏟으셨습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을 살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의 이 사랑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9-10)
“영접하는 자, 곧 그 (아들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저와 여러분을 죄와 죽음에서, 멸망에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그의 자녀삼아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온갖 조롱과 멸시와 천대를 당하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림을 당하셨고, 우리의 죄악을 사하시기 위하여 대신 징계를 받으셨고, 우리의 연약함과 상함을 고치시기 위하여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말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아무리 설명을 해도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언젠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이사야 49:14-16)
사랑을 말할 때 흔히 가장 깊은 사랑을 어머니의 사랑으로 비유합니다. 여기 이런 어머니의 사랑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난 1995년 성탄절이 가까운 때에 舊소련 연방의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커다란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에 그 엄청난 지진 때문에 무려 55,000명의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그 때에 한 어머니와 딸이 무너진 건물더미에 함께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 어머니의 이름은 수산나였고, 딸의 이름은 구이안(Guian)이었습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공간에 갇혀 있는 모녀의 몸은 점점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구조의 손길이 임할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어린 딸은 무서워서 자꾸 울기 시작했습니다.
“엄마, 무서워” “엄마, 우리 여기서 못나가는 거야?”
“아니야, 걱정하지 마라. 조금만 기다리면 아저씨들이 우리를 금방 찾으러 올 거야”
무서워 떨고 있는 딸을 향하여 엄마는 계속해서 우리는 괜찮을 것이라고 위로하였습니다. 그러나 밤이 되면 어두운 공간은 그야말로 칠흙같이 어두워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구조의 손길은 닿지 않았고, 그렇게 사흘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이는 공포와 허기에 지쳐 점점 그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목이 마른 아이는 엄마에게 계속해서 먹을 것과 물을 달라고 울면서 보채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아이도 엄마도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인하여, 그 생명의 불꽃이 가물가물 사라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어머니의 손에 무엇인가 예리한 것이 잡혔습니다. 그것은 건물이 무너질 때 쏟아진 유리조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엄마는 그 유리조각으로 자신의 팔뚝을 그었습니다. 그리고는 아이에게 자신의 피를 마시게 했습니다. “구이안아, 여기 물이 있다. 이 물을 마셔라”라고 그 어머니는, 자신의 몸에서 흐르는 물과 피를 아이에게 마시게 했습니다. 그리고 가물가물 의식이 흐려져 가던 아이는, 어둠 속에서 엄마의 몸에서 흐르는 물과 피를 받아 마시고는 비로소 갈한 목을 축이고, 의식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 마침내 구조대가 이 두 모녀가 갇혀 있는 곳을 지나다가,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건물 더미들을 치웠습니다. 구조대가 건물 더미들을 다 치우자, 거기에는 비교적 건강한 모습을 한 여자아이가 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옆에는 모든 물과 피를 다 흘려,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는 엄마가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누워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어머니의 희생적인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에 의하면, 세상에 자식에 대한 가장 진한 사랑이 어머니의 사랑인데, 그 어머니의 사랑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우리에게 대한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부모들도 때로는 전쟁과 같은 극한 상황에서는, 그렇게도 사랑하는 자식들을 버릴 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결단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고, 그리고 십자가에 물과 피를 아낌없이 다 쏟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의 값을 대신 치러주셨습니다. 내가 달려야 할 십자가에 그가 대신 달리셨습니다. 내가 찔려야 할 창에 그가 대신 찔리셨습니다. 내가 맞아야 채찍을 그가 대신 맞으셨습니다. 내가 당해야 할 멸시와 천대를 그가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흘려야 할 물과 피를 그가 대신 흘리셨습니다. 아낌없이, 최후의 한 방울까지 다 흘리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는 바로 저와 여러분을 그렇게도 사랑하시고 계십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다른 어떤 대답을 잘 못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 대답만큼은 분명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은 자녀들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제가 4년 전(2005년) 고난주간이 가까운 때에 갑자기 심한 복부의 통증으로 밤에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습니다. 병명은 급성 담낭증이었습니다. 3일 동안 너무 통증이 심해서 병원을 두 곳이나 갔는데, 그 원인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 사이에 담낭의 염증은 더욱 심해져 갔고, 세 번째 병원인 현대 아산 병원에 갔을 때에는, 담낭이 염증과 담석으로 인해 부어서 터지기 일보직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응급실에서 옆구리를 뚫어서 긴급조취를 하였고, 결국 수술을 통해서 담낭(쓸개)을 완전히 제거하게 되었습니다 (너는 누구냐? 나는 ‘쓸개 빠진 인간’이다.) 그러나 저는 쓸개를 떼어내는 작은 고통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께서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수술 후에 한 이틀은 통증이 심해서 매우 고통스러웠는데, 토요일 밤에 통증으로 인하여 잠을 못 이루다가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기도 중에 깜빡 잠이 들었는데, 이런 꿈을 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높은 산에 세워놓고는 제게 휘황찬란한 우주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더 이상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수많은 별들과 함께 형형색색의 아름다움과 신비함을 간직하고 있는 우주를 보여주시다가, 갑자기 하나님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우주가 참으로 놀랍고 신비스럽지? 그런데 내가 너를 이 온 우주보다도 더 사랑한단다. 그래서 내가 너를 위하여 나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냈단다.” 저는 꿈속에서 그 말씀을 듣고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는 제게 온 삼라만상의 아름다운 것들, 꽃들과 푸른 들과 물과 산 등의 너무나 아름다운 자연을 보여주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또 말씀하시기를 “아들아, 삼라만상이 너무 아름답지. 그런데 내가 이 모든 아름다운 것들보다 너를 더 사랑한단다. 그래서 내가 내 아들 예수를 너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게 했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일어나 밤새도록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새문안교회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이토록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견디지를 못해 하십니다. 그래서 이 사랑을 두고 스바냐 선지자는 이렇게 노래한 것이 아닙니까?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 3:17)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누구인지?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사실을, 이것이 나와 주님과의 관계라는 사실을 언제 어디서나 잊어서는 안 됩니다.
3. 나가는 말
그러므로 사랑하는 새문안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오늘 이 주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깊이 묵상하고 감사하십시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나와 하나님의 관계, 나와 우리 주님과의 관계를 다시 한 번 확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아느냐?”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탄이든 누구든 “너는 누구냐?”고 우리에게 물을 때,
“나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고, 주님은 지금도 나를 이 세상에서 나만을 사랑하듯이 나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나도 주님을 그렇게 사랑한다”라고 우리가 담대히 외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어떤 대답은 사오정처럼 잘못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이 대답만큼은 분명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대답을 제대로 할 수 없다면, 우리의 삶과 신앙생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다함이 없는 그분의 사랑을 먼저 받은 우리가, 아직도 이 사랑을 깨닫지 못하여, 신음하며, 죄와 사망 가운데서 방황하고 헤매고 있는 자들을 향해 나아가, 그리고 여러분이 지금 품고 있는 태신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당신을 너무나도 사랑하십니다”라고 담대하게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의 말씀이 힘이 있습니다
서금석 목사
가끔 생선 '도루묵'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조선 선조 임금이 국난으로 궁궐을 떠나 피신해 있었습니다. 식량이 귀하던 차에 마침 한 백성이 '묵'이라는 물고기를 임금께 바쳤습니다. 임금이 그 물고기를 먹어보니 그 맛이 천하일품이었습니다. 맛이 하도 기가 막혀, 맛에 탄복한 임금은 물고기 이름을 '은어'라 부르도록 명했습니다. 물고기의 맛과 '묵'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은어'라는 아주 멋진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얼마 후, 난리가 끝나 임금은 궁으로 돌아왔고,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임금은 피난 길에 먹었던 은어의 맛을 잊을 수가 없어서 그 요리를 해오도록 명했습니다. 그러나 다시금 산해진미로 입맛이 길들여진 임금에게 그 물고기가 맛이 있을 리 없었습니다. 그토록 맛있었던 은어의 맛이 영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도루 '묵'이라고 불러라"하고 명했습니다. 여기서 '도루묵'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하지요?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사실 물고기 '은어'의 맛이야 배고플 때 먹거나 배부를 때 먹거나 똑같습니다. 문제는 사람의 입맛이 바뀌었다는 것 아닙니까? 상황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배고플 때와 배부를 때의 마음은 달라집니다.
성도 여러분.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입맛이야 상황 따라 변할 수가 있다 해도 믿음은 어떤 경우라도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배고플 때나 배부를 때나, 기분 좋은 때나 기분이 나쁠 때나, 옛 교회에서나 새 교회에서나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변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믿음은 성장하는 방향으로 변해야 합니다.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석달동안 회당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고 권면하면서 담대하게 전하긴 했는데 몇몇 사람이 마음이 완고하여 믿으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 앞에서 기독교를 비난 하자 바울은 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나가서 날마다 두란노 서원에서 강론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2년이나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주의 말씀을 들었고 바울의 손을 통하여 이상한 기적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1. 바울의 희한한 능(11-12)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기적을 일으키기 시작하셨는데, 그 기적들은 제자들에게도 익숙치 않은 특별한 것들이었습니다. '희한(稀罕)한 능'이란 헬라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우연히 발생한 것들이 아닌 능력들' '평범한 것들이 아닌 것'들을 뜻합니다. 글자 그대로 바울의 손을 통해 나타난 희한한 능은 희귀하고도 이해하기도 어려운 일들을 일어나게 했는데, 이런 일은 바울에게 있어서도 전무후무한 일이었습니다.
12절에는 더 구체적인 기적의 내용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바울이 쓰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낫고, 귀신들린 사람에게 얹으면 악귀도 떠나갔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 기적은 이미 우리가 보았던 사도행전 5:15-16절에 나타난 베드로의 기적과도 비슷해 보입니다. 침대에 병들어 누워있던 병자들, 귀신들려 괴로워하던 사람들이 베드로가 지나가는 그림자만 닿아도 다 나음을 얻었습니다. 바울의 기적은 두 가지 면에서의 기적을 보여 줍니다. 육신의 질병이 낫고, 귀신이 나가는, 육적인 능력과 영정인 능력입니다. 육적인 병과 영적인 병을 고치는 능력이 동시에 나타난 것입니다. 기적에 쓰여진 바울의 손수건과 앞치마는 무엇입니까? 손수건까지는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남자가 웬 앞치마입니까? 원어를 보면 손수건이란 '땀'이란 뜻의 라틴어에 해당하는 헬라어입니다. 흔히 땀 닦는 수건입니다. 앞치마는 천이나 가죽으로 된 것으로 종이나 직공들이 일할 때 두르는 것으로 두 가지는 모두 바울이 장막을 만들 때 사용하던 물건들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능력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독교 역사를 보면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는 기적의 사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쳐다보기만 해도 능력이 접촉됨을 느끼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면,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 지는 사람도 있고,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이것까지도 놀라운 영적인 능력입니다.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이 병도 고치고 안수해서 성령의 역사가 임한 것도 여러 번 있었지만, 바울이 사용하던 손수건과 앞치마를 병든 사람에게 얹어 병이 낫고, 귀신들린 사람에게 얹어 귀신이 나가는 이런 류의 특별한 기적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습니다. 왜 여기서만 이런 기적이 일어났습니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지금 바울의 기적이 나타난 곳이 어디인가에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에베소. 에베소가 어떤 도시였다고 했습니까? 미신이 극성스럽게 퍼져 있는 도시였다고 했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이 최대의 영예로 생각했던 것이 아데미 신전이었다고 했어요. 무슨 뜻입니까? 우상숭배가 심했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 에베소가 유명한 것이 있다 했지요? "에베소 부적" 부적과 주술이 성행한 곳이 바로 에베소였습니다. 미신과 주술이 범람하는 도시에서 바로 이런 기적의 사역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곳에서 필요한 기적을 주셨지 모든 곳에서 같은 기적의 역사를 주시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서 흔히 우리가 빠지기 쉬운 오류가 있습니다. 바울이 사용하던 손수건이나 앞치마가 닿기만 하면 병도 낫고, 귀신도 쫓겨 갔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에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에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입니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생각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손수건이나 앞치마에 무슨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그 능력을 받아들인 믿음을 통하여 기적은 일어납니다. 분명하고도 중요한 것은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가 아닙니다. 바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요, 능력의 하나님께서 잠시 바울의 손을 빌어 희한한 능을 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쓰셨어요. 바울의 손을 쓰셨어요. 성도 여러분 그렇게 믿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정리해야 합니다. 기적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기적은 다만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때에, 필요한 곳에서 바울의 손을 빌어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우리도 병든 자 위해 기도하면 나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도 기적입니다. 전도할 때 기적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마다 병이 낫고 전도할 때마다 기적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만 믿으면 만사형통하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왜 순교자가 나고 왜 성도들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습니까?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가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미신과 주술이 심한 에베소에서 전도하는 바울에게 기적이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바울을 쓰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기도하며 소원해야 할 것은 나도, 우리도, 하나님의 필요한 때에,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방법으로 쓰임 받는 것입니다. "주여! 나를 기적의 도구로 써 주시옵소서. 영광의 도구로 써 주시옵소서" 쓰임 받으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능력은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13-16)
바울을 통해 병이 낫고 귀신이 쫓겨 나가자 바울을 흉내 내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유대인 가운데 마술하는 사람이 시험적으로 귀신들린 사람들에게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무슨 주문 외듯 귀신을 쫓아내려 했습니다. 제사장 스게와의 아들들도 똑같은 흉내를 냈는데 드디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귀신이 대답합니다.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고는 오히려 덤벼들어 몸을 상하게 했습니다.
유대인 가운데 마술사들이 있었어요. 제사장의 일곱 아들들도 마술을 했어요. 생각해 보면 구약을 믿는 유대인들이 마술한다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 아닙니까? 구약을 믿는다면 적어도 유일신 하나님은 믿을 터인데 마술로 밥먹고 산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남의 말해 뭣하겠어요. 믿는다 하면서, 재미로 한다는 토를 달고는, 토정비결보고, 점치는데 기웃거리지는 않습니까? 고대 세게에서는 악령을 쫓기 위햇 주문을 외울 때 주술적(呪術的)인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보편적인 경향이었습니다. 에베소에서는 우상숭배와 미신이 극성이었으니 얼마나 심했겠어요? 바울이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과 능력을 행하는 것을 본 마술사들이 바울의 행동을 모방하여 예수의 이름을 주술로 사용하려 했습니다. 거기다가 더 확실하게 바울 이름까지 들먹입니다. 한 마디로 마술사들은 바울이 하는 것보고 바울 흉내냈어요. 바울의 믿음이 어떤 믿음이었는지는 관심이 없었고 다만 바울의 말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하는 선언을 자기들이 무슨 주문 외는 것처럼 주술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은 흉내낸다고 되는 것 아닙니다. '예수를 빙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아 나가라'하니가 귀신이 나가는 것 보고 마술사들도 '옳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아 나가라 하니까 나가는구나'생각하고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여 귀신에게 나가라 했는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갔습니까?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도 마술사 노릇을 하고 있었나 봅니다. 제사장의 아들들이 마술사라니요. 제사장 스게와가 실제 인물이냐 아니냐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그런 것은 덮어두고, 스게와의 아들들이 다른 마술사들처럼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으려 했습니다. 그랬더니 오히려 귀신들린 사람 속에서 귀신이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는 누구냐?'하고 덤벼들어 오히려 두드려 패게 합니다. 결국 그들은 옷 벗은 채로 도망 가 버렸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진짜와 가짜입니다. 귀신이 진짜와 가짜를 더 잘았습니다.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는 누구냐?" 예수 이름을 대고 있지만 귀신이 보기에는 진짜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으려고 마술하던 유대인들은 다 가짜였습니다. 진짜가 나타나면 가짜는 사라지게 마련 아닙니까?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와 요한도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어서게 했습니다. 바울도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나 바울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친 것은 그들의 절대적인 믿음이었지 흉내가 아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은 모방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짜 꽃은 모양은 진짜 꽃과 같게 할 수가 있지만 자연적인 향기까지 같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가짜 꽃이 진짜 꽃처럼 보이게 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가짜에게는 열매가 없습니다.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도 비슷하고 헌금드리고 봉사하는 것도 비슷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차이가 납니다. 가짜는 귀신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귀신에게 조롱을 받았습니다.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는 누구냐?' 능력이란 믿음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이지 결코 모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부분의 성경을 묵상하면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진짜일까? 예수도 믿고, 예배도 드리고,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하긴 하는데, '예수 이름의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가?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으면 귀신이 나갈까?' 예수 이름의 능력이 여러분께 있습니까? 예수 이름의 능력이 이 교회에 있습니까? 흉내 낼 수 없는 기적, 모방할 수 없는 능력은 예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예수에 대한 믿음 없이는 어떠한 능력도 행해질 수 없습니다. 성도여러분 사도행전 속에서 우리에게 회복되어야 할 것은 바로 이 복음의 능력임을 깨닫고, 복음의 능력이 우리 속에 회복되어지기 바랍니다. 가짜가 아니라 진짜 믿음의 성도가 되도록 더 힘써 믿음생활하시기 바랍니다.
3. 기적의 결과(17-20)
섣부르게 흉내 내다가 센 귀신에게 걸려 옷도 홀랑 벗긴 채 도망갔다는 소문이 에베소에 쫙 퍼졌습니다. 반응이 어떠했겠습니까?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영적 분위기가 생겼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에 대한 두 가지 기본 자세가 있어야 하는데 바로 공경과 두려움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에 대한 공경과 두려움이 없으면 버릇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 들어설 때, 예배실에 들어설 때 여러분 마음은 어떻습니까? '여기 하나님이 계시다'는 생각으로 두려움, 경외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교회에서 믿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17절 후반에 보니까 주 예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주 예수만이 참 구세주이시고, 주 예수만이 참 능력의 주님이심을 분명하게 알았다는 말씀입니다. 능력 앞에 거짓이 여지 없이 드러났습니다. 마술사들의 거짓과 위선이 다 드러났습니다. 주님만이, 하나님만이 참 능력자임이 드러났기에 오직 주 예수의 이름만 높였습니다.
그 다음 18절을 보니까 '믿는 사람이 많이 와서 자복하고 행한 일을 고했다'고 했습니다. '자복하다'는 뜻의 헬라어 '엑소몰로게오'는 공식적으로 항복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모든 흉금을 다 털어 놓아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이제까지 믿는다고 하면서 시원찮게 잘못 믿은 사람들이 모두 다 회개했다는 말입니다. '이제까지 잘못 살았다. 이제까지 죄된 삶을 살았다. 구체적으로 이런 죄를 지었다' 고백하면서 새 삶을 다짐했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삶의 위기 앞에 설 때에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법학을 전공하여 법률가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던 어느 날 루터는 다정한 친구와 길을 걸으며 서로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요란한 천둥소리와 함께 내리친 벼락에 잠시 전까지 자기 장래의 푸른 꿈을 이야기하던 친구가 목숨을 잃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루터는 미래가 자기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피부로 깨닫고 "오! 하나님 나를 구원하소서. 나는 수도사가 되겠나이다!"하고 그 길로 어거스틴 파 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능력 앞에서 잘못 살아온 인생을 후회하며 회개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이 일으키는 기적을 보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눈으로 목격하게 되니 두려움과 함께 저절로 자신들에 죄에 대한 고백이 쏟아져 나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믿으면서 아직도 제대로 회개 한번 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직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능력의 주님을 만나지도 못했으니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회개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좀 불향한 사람들입니다. 회개없이도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교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회개없이도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삶은 모래 위에 지은 집 같아서 언제 무너져 내릴는지 모릅니다. 회개있는 삶이 정말 축복된 삶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왜 이리 세상의 비난을 받고 있습니까? 물론 비난하는 사람들의 비난의 잣대로 찬성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한국 교회가 제대로 회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의 책망에 우왕좌왕하고 힘없이 주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두렵다고 고백한다면 반드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성도 개인도 교회도 하나님 앞에서 참다운 회개가 있을 때 - 회개 한다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이 아닙니까? 회개할 때 - 하나님의 능력이 성도의 삶과 교회에 나타나게 됩니다. 회개하세요. 자복하세요.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꾸세요. 변화되세요. 1900년대에 한국 교회에 일어났던 대각성운동은 바로 회개운동이었습니다. 회개운동이 일어나니 한국교회에 성령께서 역사 하시고 커다란 부흥까지 이루지 않았습니까? 19절을 보니까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이 책을 모아가지고 와서 불사르니 그 값이 은 오만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몇 가지 생각해 봅니다. 이 당시의 책은 참 귀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처럼 인쇄술이 발달되어 대량으로 책을 찍어내던 때가 아니라 파피루스라는 종이에 손으로 옮겨 써야 했으니 얼마나 힘이 들었겠어요. 책 한권의 값이 엄청나게 비쌌어요. 똑같은 책 한권 만들려면 한 사람이 몇 년씩이나 얘를 써야 했습니다. 책값이 얼마나 되었다구요? 은이 오만입니다. 화폐 단위가 나와 있지 않지만 주석 학자들은 은 하나가 대략 드라크마나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에 해당한다고 말합니다. 은이 오만이면 노동자 한 명이 135년을 쉬지 않고 일한 대가로 받을 수 있는 정도의 돈이었습니다.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얼마입니까? 3만원만 잡아도 15억 정도의 돈입니다. 사실 마술사에게 있어서의 책은 재산과도 같습니다. 책이 귀하기도 한 때였고 그 만큼 가치 있는 것이기도 했지만 마술사들에게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책이 없으면 끝장입니다. 더 이상 마술로 밥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술사들이 책을 불살랐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마술사들이 진짜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눈으로 목격하고는 가짜 버리고, 회개하고 제대로 나도 이제 주님을 믿겠다는 인생의 전환적인 -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적인 신앙고백이 아닙니까? 진짜인줄 알고 마술하며 살았는데 아니었어요. 다시 돌아갈 수 없도록 책까지 태워버렸어요. 철저한 회개였습니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배수의 진을 친 회개였어요. 이렇듯 회개는 철저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니 20절 보니까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런 모든 기적은, 능력은 말씀을 전하다가 혹은 말씀을 전하는 중에 일어났음을 주시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회당에서 두란노 서원에서 열심히 말씀을 전했고 모두들 열심히 들었더니, 그랬더니 바울로부터 희한한 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분명히 바로 아셔야 할 것은 말씀에 힘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이 힘이 있습니다. 말씀이 능력입니다. 말씀이 살아있기만 하면 내 삶에도 기적이 일어납니다. 교회가 부흥합니다. 이 교회에도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마치면서
여러분! 사도행전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의 이야기, 우리 교회의 이야기도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들으세요. 말씀을 붙잡으세요. 말씀을 믿으세요. 말씀이 능력임을 확신하세요. 하나님께 쓰여지는 손이 되세요. 하나님께 쓰여지는 사람이 되세요. 어떤 사람을 쓰십니까? 믿음의 사람, 말씀 붙잡고 확실하게 오직 주님, 오직 예수님만 붙잡고 나아가는 사람들을 쓰십니다. 춘천중앙의 성도와 교회도 말씀과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기적의 도구로, 능력의 도구로 쓰시는 교회와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