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48
8월13일[연중 제19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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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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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PmK22HgO470
[인천교구 한산동 마르코(만수2동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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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 세상은 언제나 호기심 천국이요 즐길 거리로 충만한 멋진 무대입니다!>
여름 신앙 학교 시작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마지막 차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하루 쉬는 날이라 만사 제쳐 놓고 ‘방콕’을 하며 밀린 잠을 실컷 잤습니다.
그런데 웃기는 일이 생겼습니다. 잠을 자는 동안 본인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아이고 아파라! 아이고 쑤셔라!”
잠을 자면서 신음 소리를 내는 것이 정말 오랜 만이었습니다. 오래 전 주택공사 현장에서 막노동을 세 달 정도 한 적이 었었는데, 일 시작하고 일주일 내내 밤마다 그렇게 앓았습니다. 온 몸이 쑤시고 아프고, 그런데 딱 일주일 지나니 적응이 되더군요.
요즘 산업 현장에서 땀흘리며 일하시는 노동자들, 참으로 고생이 많으십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힘든 때 인데, 두꺼운 작업복에 작업화, 작업모에 안그래도 더워죽을 지경인데, 철판 위는 복사열로 달구어져 계란 프라이를 해도 될 정도입니다.
다시 한번 현장 근로자들의 노고를 체험할 수 있게 해주신 주님께 깊이 감사드리는 요즘입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찐하게 체험하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덥다 덥다 하면 더 덥습니다. 왜 나만 이래야 해, 하고 불평불만 하며 더 힘듭니다.
이왕 일 하는 것, 짜증내지 않고 환하게 웃으면서, 여름에는 땀 흘리는 것이 정상이지, 건강에좋고 다이어트에도 좋다는 생각으로 기쁘게 일하면, 그것이 성덕으로 나아가는 길이요, 주님께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너무 복잡하게, 너무 인상 쓰면서 살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어린이처럼 단순하게, 철부지처럼 희희낙락하면서 재미있게 살아가라고 당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 3-4)
인생의 고수는 사실 매사를 재미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만사를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만사를 흥미진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큰 고통이나 시련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며, 이 고통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밋밋한 내 일상에 자극을 주시는구나, 나를 재미있게 해주시려나 보다 하고 생각해야겠습니다. 고수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 세상은 언제나 호기심 천국이요 즐길 거리로 충만한 멋진 무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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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e5GLfrRwn1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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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내가 죽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은 어린이처럼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어 작은 이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욕심이 있는 사람은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은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작은 생명도 죽이지 못하고 살리려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자기를 낮춘다는 말은 자기를 비운다는 말과 같고 자신을 죽인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삶입니다. 자신을 죽이려면 자신을 죽이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모든 선택의 기준은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죽으면 정말 행복할까요? 하버드대 연구원으로 지내던 37세의 뇌 과학자였던 질 볼트 테일러는 샤워 도중 신비한 체험을 합니다. 갑자기 어지러워 비틀거리다가 욕실 벽을 손으로 짚습니다. 그런데 어디부터가 자기 손이고 어디까지가 욕실 벽인지 구분이 안 되는 거였습니다. 그 이유는 언어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영역인 좌뇌 쪽에 출혈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니까 이번엔 자기가 누군지 내 이름이 뭔지 어떤 사람인지조차 점점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례로 시끄러웠던 그녀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고요하고 조용해집니다. 나와 세상을 구분하기 물리적 경계가 희미해지고 그냥 엄청난 우주의 에너지 자체만을 느낍니다. 모든 것과 하나가 된 거 같은 기분을 그녀는 이런 느낌을 마치 요술 램프에서 빠져나온 지니가 된 거 같았다고 표현합니다. 테일러는 이런 경험을 두고 “나의 정신적 에너지가 행복이 넘치는 침묵의 바다를 거대한 고래처럼 미끄러지듯 나아갔다.”라고 표현합니다.
좌뇌는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재잘거림을 통해서 우리를 삶에서 뒤처지지 않게 해줍니다. 좌뇌의 언어 중추가 나는 누구누구, 이렇게 말함으로써 우리의 정체성을 느끼게 합니다. 이때 우뇌는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의 판단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모든 사람을 인류라는 가족의 평등한 존재로 여기고 국적 인종 종교 이런 인간들이 많은 경계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어린이들의 뇌를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어린이들은 좌뇌가 덜 활성화되어 모든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온 우주와 하나가 되는 행복감을 느낍니다. [출처: 하버드대 뇌과학자의 깨달음, 심리학 고양이, 유튜브]
그렇다면 자아, 곧 나가 죽으면 모두가 참 행복을 느낄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자아가 강하면 어쨌거나 세상에서 자기만을 생각하는 존재가 되기 때문에 관계의 친밀함에서 오는 행복은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관계가 힘들어 스스로 관계를 위해 자기 정체성을 만드는 자아를 죽이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세계적인 뇌 과학자 애덤 지먼은 자기가 죽었다고 말하는 48세 환자 그레이엄과 만납니다. 그레이엄은 이미 본인이 죽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먹지도 자지도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행복한 표정은 짓지 못합니다. 사실 이는 그가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렵기 때문에 스스로를 죽은 사람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는 실제로 무덤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고 합니다.
니콜라스의 부모님은 항상 마약에 절어 있었습니다. 열두 살 되던 해에 니콜라스 엄마와 양아버지는 자주 싸웠으며 어느 날 어머니가 부엌에서 피를 흘리며 경련을 일으키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니콜라스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저는 어머니에게 서너 걸음 다가갔어요. 정상적으로 걷다가 갑자기 꿈속에 들어간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해졌다 모든 게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졌어요.”
그 후로 니콜라스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몸까지도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상태로 살게 됩니다. 현실은 안개가 자욱하고 꿈 같거나 시각적으로 왜곡된 것처럼 보입니다. 분명히 내 생각인데 내 생각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거나 내 감정이지만 마치 남의 감정처럼 멀게만 느껴집니다. [출처: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소재가 된, 소위 '걷는 시체 증후군'으로 불리는 전세계에서 가장 희귀한 정신질환, 심리학 고양이, 유튜브]
이런 경우는 자아가 사라져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사실 자아가 사라진 게 아니라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기를 감추어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없으면 반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관계를 맺기 위해 현실에서 반응하고 느껴야 할 주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자아를 죽여나가는 방향은 세상을 끊는 방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을 포용하는 방식입니다. 이 방식을 어린이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어린이는 자아가 지나치게 강해지지 못하는 환경이 자기를 밀어 넣습니다. 바로 부모라는 존재의 품입니다. 그 품 안에서는 내가 누구인지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기, 배고파요!”라고 말할 때 그 아기가 자기일 수 있습니다. 왜 제3자로 자기를 표현할까요? 부모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믿어야 합니다. 아이가 자기를 부모와 함께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스크루지 영감은 돈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색하고 이기적이며 탐욕스러운 노인이었지만, 자신이 죽었을 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모습을 보고는 회개하여 모든 사람을 잘 받아들이는 존재가 됩니다. 그는 살았지만, 죽었다고 믿고 살게 되었기에 착해졌습니다.
현실을 도피하기 위함이 아닌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되기 위해 자아를 잊어야 합니다. 하늘나라는 이 행복이 지속되는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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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하느님 앞에 서면 겸손해진다>
며칠 전 밤에 집으로 돌아오다가 집 앞에서 작은 짐승이 튀어나와 급정거를 했지만 결국 그것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처음 해보는 로드킬이라 기분도 좋지 않았지만 한 생명을 의미 없이 죽였다는 것에 더욱 마음이 아팠습니다. 차를 뒤로 빼서 가만히 살펴보니 고라니 새끼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온 몸에 부스럼이 났고 털이 다 빠진 불쌍한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죽을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불쌍해 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차에게 더 밟히는 일이 없도록 길가에 던져주고 집으로 들어왔는데 어디선가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크게 들려왔습니다.
예전에는 짐승의 생명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특별히 혐오감을 주는 것들은 없애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동네 아이들과 함께 뱀 일가족 3마리를 몰살시킨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큰 자랑거리였습니다.
물론 그래야 용감하게 보였기 때문에 하긴 했지만 양심의 가책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즘 같으면 그렇게 갇혀 있는 뱀을 죽이기보다는 다시 산에 풀어줄 것 같습니다.
요즘은 예전처럼 벌레들도 잘 죽이지 않습니다. 혐오스런 다리가 많이 달린 소위 돈벌레나 나방 같은 것들이 방으로 들어와도 잘 잡아서 창문 밖으로 던져줍니다. 내가 그 생명 하나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없는데도 지금까지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살아왔음을 반성한 적이 있습니다.
하루살이 하나도 다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생명을 주신 분만이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날파리나 인간이나 다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어린이들을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어린이와 과부는 사회에서 인정해주지 않는 부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어린이와 같이 낮아진다는 말은 어린이와 같이 낮은 이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는 뜻과 같음을 말씀하시려 하신 것입니다.
내가 낮아지면 낮은 이들을 잘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물을 받아들이는 곳은 높은 산이 아니라 낮은 계곡입니다. 자신이 고귀하다고 생각하면 보잘 것 없는 이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목자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도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의 양처럼 소중한 존재입니다. 한 마리의 가치가 구십구 분의 일이 아니라 나머지 구십구 마리만큼이나 소중하단 뜻입니다.
작은 생명 하나도 소중히 여기고 찾아 나설 수 있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생명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가지려면 겸손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한 초보 강도가 어떤 집에 들어가서 누워 있는 집 주인에게 “꼼짝 마, 손들어”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당황한 강도가 “왜 손을 안 들어. 죽고 싶어?”라고 협박했더니 그 사람은 “제가 오십견이어서 손을 들 수가 없네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집 주인의 말을 들은 강도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아, 오십견이세요? 저도 오십견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 나았습니다.”라고 말하며 오십견에 대한 정보를 주고는 그냥 가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가 아파봐야 아픈 사람의 마음을 알고, 내가 작아져 봐야 작은 사람을 품을 수 있습니다. 어린이는 세상에서 가장 약한 존재입니다. 부모가 먹여주고 재워주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든 처지입니다. 그런 처지이니 아이들은 자신처럼 불쌍한 이들에 대한 연민이 큽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혼자 힘으로 살 수 있게 되면 자신처럼 자립하지 못하는 이들은 게으르고 노력도 하지 않는다며 판단합니다.
그러면 다시 어린이처럼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린이가 어린이인 것을 알 때는 부모 앞에서입니다. 모든 것을 대 해주시는 부모 앞에서 비로소 작아질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 없으면 부모 없는 어린이와 같은 운명입니다. 주님 앞에서 깊이 고개를 숙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만큼 겸손해질 수 있고 그런 사람이라면 세상 모든 사람을 품에 안을 수 있게 됩니다.
이렇듯 아이가 자신을 낮추는 법을 배우려면 부모 없이는 안 되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 또한 기도 안에서 하느님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달아가야 합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환시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보고는 앞으로 고꾸라집니다. 이는 요한 묵시록의 요한 사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이 모시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는 엎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분 앞에 서야만 우리가 아무런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어린이처럼 될 수 없습니다. 항상 하느님 앞에서 사는 자는 모든 존재하는 것을 포용할 능력을 지닌 자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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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제가 태어난 곳은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입니다. 앞에는 안덕 저수지가 있고, 뒤에는 높은 산이 있습니다. 집 앞에는 채석장이 있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돌을 캐는 일은 없다고 합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신 선산이 있고, 집안의 장손이 있어서 부모님을 모시고 가끔 다녀왔습니다. 말 그대로 해님만, 달님만 알아준다면 만족한다는 두메 꽃처럼 깊은 산골입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아랫마을에 쉼터가 생겼습니다.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이라 아픈 사람들이 요양차 내려왔습니다. 입소문이 나서인지 외지에서 건강 회복을 위해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예전에 도시는 정주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었습니다. 교통이 발달하고, 도시화 되면서 도시의 형태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사망하는 사람이 출생하는 사람보다 적어지면서 도시의 기능과 모습도 변하고 있습니다. 이제 도시는 상주인구를 기준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외지에서 찾아오는 사람들과 잠시 머무는 사람들을 기준으로 재편되고 있다고 합니다.
강남이 개발되면서 사람들이 강남으로 몰렸는데, 요즘은 강북으로 사람들이 몰린다고 합니다. 강북만이 가지고 있는 정과 문화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강북에는 고궁이 있고, 한옥이 있고, 오래된 문화가 있습니다. 거기에 젊은이들의 취향과 입맛을 끄는 콘텐츠가 함께 어우러지면서 인적이 드문 마을들에 사람들의 생기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명동에서 8년을 살았기에 강북의 맛과 멋이 있는 곳을 찾곤 했습니다. 명동에서 나오면 바로 남산 한옥마을과 남산길이 있습니다. 을지로로 내려오면 도심 속의 쉼터인 청계천 물길이 있습니다. 종로로 나가면 광장시장이 있고, 혜화동으로 나가면 대학로와 낙산이 있습니다. 홍대, 연남동, 경의선 길, 성수동, 이태원에도 젊은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런 모습은 비단 서울에 한정된 게 아닙니다. 전주에는 한옥마을이 있고, 여수에는 벽화 거리가 있고, 남해에는 독일마을이 있습니다. 순천에는 습지가 있습니다. 양양에는 서핑 해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늙음과 낡음은 다릅니다. 비록 오래되었을지라도 멋지게 늙어가면, 새로운 콘텐츠가 접목된다면 사람들은 그곳을 찾기 마련입니다.
미주 지역에는 140여 개의 한인 성당이 있습니다. 이민과 유학생들이 많았을 때는 한인 성당이 늘어났고, 공동체도 활기가 넘쳤습니다. 몇 가지 이유로 한인 공동체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첫째는 공동체 인원의 감소입니다. 고령화되면서 고인이 되는 분들이 늘어납니다. 젊은이들은 미국성당으로 가거나, 성당에 나오지 않으려고 합니다. 언어와 문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민과 유학생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둘째는 한국에서 파견된 사제와 공동체의 갈등입니다. 사소한 이유도 있지만, 본당의 신축과 이동이 관련된 갈등도 있습니다. 사제의 독선과 권위주의가 더해지면 갈등의 폭도 커지기 마련입니다. 한국과는 다른 사목 환경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그렇습니다. 먼저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이제 나의 뜻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회개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에서 시작됩니다. 회개는 어려운 이웃에게 손을 내밀면서 시작됩니다.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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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8,1-5.10.12-14: 보잘것없는 사람들이라도
제자들은 주님께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1절) 물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3절) 예수님께서 어린아이 하나를 가운데 세우셨다. 그 어린이는 성령을 지닌 어린이이다. 성령을 지닌 그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어린이는 부모를 따르고 사랑한다. 이웃에게 해를 입힐 생각도 못 하고, 재산에도 관심이 없다. 교만하지도 않고 미워하지 않으며, 거짓말하지 않고, 자기가 들은 말만 믿고 진실이라고 들은 것을 지키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4절) 누구든지 당신을 본받고 당신처럼 자신을 낮추면, 즉 당신이 종의 모습을 취함으로써 당신을 낮추었듯이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5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겸손과 순결을 본받으며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신다.
순결하시고 어떠한 죄도 없으신 예수께서는 우리도 거룩하게 살면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어린이를 본보기로 세우셨다. 어린이와 같은 모습은 어떤 것인가? 어린아이는 말을 들으면 믿는다. 무엇을 가르치면 따지지 않는다. 아이는 온 마음으로 부모님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어린아이가 가진 순수함을 되찾아야 한다. 이렇게 죄 없는 어린이가 된 사람은 당연히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누구든지 이런 사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은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10절) 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라고 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10절) 하셨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은 바로 이러한 작은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고 인류를 죽음에서 삶으로 구원하셨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인간이 죄를 지었지만,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이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도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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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마태오 복음서 18장은 교회의 삶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읽은 어린이에 관한 말씀 다음에는 그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오고, 그다음에 다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 대한 말씀, 다음에는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니 여기에서의 문제는, 나 혼자만 죄를 짓지 않고 나 혼자만 구원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백 마리 가운데 나를 포함한 아흔아홉 마리가 길을 잃지 않고 집으로 잘 돌아갔다고 하여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 말씀이 적힌 두루마리를 받아먹은 에제키엘에게도, 동족에게 가서 경고하라는 사명이 주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에게, 그가 경고를 하지 않는다면 악인이 죽은 책임을 그에게 묻겠다고 하십니다.
오래전 일이 떠오릅니다. 어떤 신부님과 꽤 먼 길을 가던 중에, 작은 휴게소 같은 가게에 들렀습니다. 가게에 있던 자매님은 자기가 오래전부터 냉담 중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그 자매님을 끈질기게 설득하여 결국 고해성사를 보게 하였습니다. 그때 저에게는 솔직히 신부님이 너무 강요하는 것처럼 보였고, 자매님은 그 자리에서 성사를 보아도 내일부터 다시 냉담을 할 텐데 괜히 마음에 걸리는 일을 더 만드는 것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십 년도 더 지난 그 일이 왜 이렇게 뚜렷이 기억날까요? 그 일을 저만 기억하고 있을까요? 그 자매님도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요? 혹시 그 뒤에 또다시 냉담하였다 하더라도, 그날의 기억은 이 자매님을 계속 교회로 부르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그 신부님의 모습에서 저는 양 한 마리를 찾는 목자를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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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길 잃은 양’은 ‘남’이 아니라 ‘나’입니다. 누구든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3-5)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0.12-14)
1) 여기서 ‘누구든지’ 라는 말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아무도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지금 예수님의 가르침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가르침이고, ‘모든 사람’이 실천해야 할 가르침입니다. “어린이처럼 되어라.”,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어라.”라는 말씀은 “겸손한 사람이 되어라.”라는 뜻입니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는, 뜻으로는 “하늘나라에 들어간다.”입니다. ‘회개’는, 여기서는 각자 자신의 교만을 버리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나는 교만했던 적이 없다. 나는 항상 겸손하게 행동했다.”라고 주장하거나, 아니면 말은 그렇게 안 하더라도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자기 스스로 그렇게 주장하거나 생각하는 사람은 백 퍼센트 위선자이고, 교만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위선과 교만부터 회개해야 합니다.
2) ‘되찾은 양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길 잃은 양’은 남이 아니라 ‘나’입니다. 이 비유에서 ‘아흔아홉 마리’는 의인들의 실제 수가 아니라, 양을 잃었을 때의 목자의 슬픔과 되찾았을 때의 기쁨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의인들과 죄인들의 실제 비율은 ‘99대1’이 아닙니다. 실제 상황을 반영한다면 ‘1대99’ 라고 말해야 할 텐데, 사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길 잃은 양’이고, 회개해야 할 죄인들이고, 예수님의 속죄와 구원이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지옥은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이 가는 곳이고, 하늘나라는 ‘회개한 죄인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회개할 필요가 없는, 또는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성모님 외에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모님은 회개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또 늘 하느님과 함께 계시기 위해서 ‘회개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3)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히브리서에 있는 다음 말이 연상됩니다. “형제애를 계속 실천하십시오.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히브 13,1-2)
이 말에서 ‘손님’은 ‘낯선 나그네, 뜨내기’를 뜻하기도 하고, ‘작은 이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뜻하기도 합니다. ‘천사들’을 접대했다는 말은, 하느님을 접대했다는 뜻입니다. ‘나보다 작은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곧 주님께 사랑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 작은 이들이 곧 주님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오실 때 ‘나보다 작은 이’의 모습으로 오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라는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천사들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는 말씀은, 작은 이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수호천사들이 곧바로 하느님께 말씀드린다는 뜻이고, 다시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시고, 다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자기보다 작은 이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학대하는 것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거스르는 큰 죄’이고, 그것은 심판 때에 엄한 처벌을 받게 되는 죄입니다.
4) 그러면 그 죄를 짓는 사람 쪽에는 수호천사가 없는가? 있다면 왜 그렇게 하는 것을 내버려 두는가? 위선자들, 교만한 자들, 작은 이들을 학대하는 자들 쪽에도 분명히 수호천사가 있고, 양심을 통해서,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충고를 통해서, 또는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그러면 안 된다고 계속 타이를 것입니다. 그러나 위선자들과 교만한 자들 쪽에서 그 ‘사랑의 충고’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수호천사의 반대쪽에는 마귀들이 있습니다. 마귀들은 “보잘것없는 사람들은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학대해도 된다.”라고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너는 지금 충분히 겸손하다.”, “너는 죄가 없으니 특별히 회개할 것이 없다.” 라고 유혹할 때도 많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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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마태오는 복음서 전체의 구성을 천을 짜듯 치밀하게 다듬으면서, 독자들에게 올바른 그리스도의 모습을 일관성 있게 보여 주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말씀을 주제별로 모아 다섯 개의 담화문으로 정리합니다. 복음적 담화문이라고 할 수 있는 산상 설교(5―7장), 제자들에 대한 파견 설교(10장), 하늘나라에 관한 일곱 가지 비유를 모아 놓은 설교(13장), 예수님께서 교회에 관하여 하신 말씀만 모아 놓은 교회 설교(18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말론적인 담화문인 심판 설교(23―25장)입니다.
오늘 복음은 교회 설교 가운데 두 부분을 전해 줍니다. 곧 ‘겸손하여라.’로 시작하여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마라.’로 이어진 내용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부르시어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잘난 신자들에게 공동체 안에서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말라고도 이르십니다.
더욱 이해하기 쉽도록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되찾은 양의 비유’를 덧붙이십니다. 아무리 못난 신자라도 구원을 받도록 공동체 모두가 돌보아야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입니다.
1210년, 프란치스코 성인의 설교를 듣고 감동한 클라라 성녀는 2년 뒤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밤에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보속의 수도복’을 받아 입고 순명을 서약한 뒤, 복음적 가난과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을 닮은 절대적 가난 속에서 인간 존재의 가난이 참으로 무엇인지를 삶으로 밝혀 준 성녀야말로, 오늘 복음이 말하는 잘난 체하는 마음으로 작은 이들을 쉽게 업신여기는 우리에게 겸손의 참 본보기가 됩니다.
클라라 성녀는 말합니다. “그대는 다른 이들이 바라보고 따를 수 있도록 그리스도를 반영하는 거울이 되어 가고 있는가?” 답은 오늘 복음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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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 곧 유다인이면서 그리스도인이 된 신자들을 염두에 두고 복음서를 썼다고 알려진 마태오 복음사가는, 구약의 모세 오경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기록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산상 설교(5,1─7,29 참조)를 필두로, 선교에 관한 말씀(10,1-42 참조), 비유로 전하신 말씀(13,1-52 참조), 교회 공동체를 위한 말씀(18,1-35 참조),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미래에 관한 말씀(24,1─25,46 참조)으로, 이렇게 모세 오경의 가르침에 대응하려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교회 공동체를 위한 예수님 말씀의 첫 부분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교회의 성장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맨 먼저 다룹니다. 말씀의 첫 부분은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이 질문에는 세상에서와 같이 교회에서도 큰 사람, 높은 사람, 더 가진 사람이 되고 싶은 제자들의 본능적인 욕망이 담겨 있습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첫째 자리를 탐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은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을 낮추어 스스로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은 이들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말씀의 연결성을 생각해 보면 모든 회개의 종착점은 우리가 어린이와 같이 되는 데에 있습니다. 어린 시절로 돌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가 마치 아버지의 품 안에 있는 갓난아기처럼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며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며 살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교회를 유지하고 성장시키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믿는 이들의 겸손한 마음과 태도라고 말합니다. 겸손한 마음이 우리를 참된 신자로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비결이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 죽음에 이르시기까지 온갖 유혹을 떨쳐 내시며 하느님을 신뢰하신 원동력입니다.
이른바 ‘어른들’과 ‘주인들’만 가득한 공동체는 미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겸손을 묵상하며 하느님과 형제들 앞에서 가장 작은 이가 되기를 주님께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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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권선민 요셉 신부님]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오늘 복음인 마태오복음 13장은 마태오복음 사가에 의한 네 번째 설교 집성문인 교회 설교 혹은 공동체 설교라 불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지역에서 유다 지역으로 가시기 직전에 교회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목표를 다루십니다. 곧 교회공동체 안에서 차지하는 작은 이들의 가치(마태오 18, 1-14절)와 공동체 안에서의 형제애(마태오 18, 15-35절)를 다룹니다.
오늘 복음은 그 전반부로서, 제자들의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마태오 18,1)
예수님께서는 이 물음에 세 가지 말씀을 주십니다.
첫째는 우선 ‘누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인지’를 먼저 밝히십니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간 사람이라야 그곳에서 큰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오 18,3)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어린이’란 열두 살이 되기 이전의 아이를 가리는데, 고대인들은 ‘어린이’는 오늘날 우리가 여기고 있는 것과는 달리, 천진무구하다고 여기지 않고, 손이 많이 가고 책임감도 없고 늘 어른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하찮은 존재요, 율법을 모르는 죄인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회개하여 어린이 같이 된’ 사람이란, 어린이가 어른에게 의지하고 지시에 따르듯이, 어린이처럼 하느님께 의지하고 그분의 지시에 잘 따르는 겸손한 태도를 취할 뿐 아니라, 회개한 죄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곧 어른처럼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능력함을 받아들이고 주인께 신뢰로 의탁하는 죄인을 말합니다. 이를 산상설교에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마태오 5,3)고 선언하셨습니다.
둘째는 ‘누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인지’를 밝히십니다. 곧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오 18,4)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하늘나라에서는 명예나 권력을 가진 이가 아니라, 결국 자신을 낮추어 섬기는 이가 ‘가장 큰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게 주님을 예배하는 이가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가장 작은 계명이라도 스스로 지키고 가르치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마태오 5,19)이라고 제시하셨습니다.
셋째는 ‘누가 당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인지’를 말씀하십니다. 곧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오 18,5) 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일’, 그것은 무력하고 미천한 이를 받아들이는 일이요 죄인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와 같은 회개한 죄인과 당신을 동일시하십니다. 사실 당신께서는 먼저 미천하고 무력한 이들을 당신 제자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래서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하시며,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태오 18,10)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되찾은 양의 비유'(12-14절)를 통하여, '아버지의 뜻'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마태오 18,14)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작은 것 하나마저도 귀중하게 여기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말해줍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아버지의 지극하신 사랑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가 작은 이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하찮고 비천한 이일수록 더 더욱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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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샘 기도>
주님!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게 하소서.
아기가 어머니께 소중한 것처럼,
제가 당신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시고,
아기가 어머니께 속해 있듯, 당신께 속해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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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18,1)
남보다 높은 지위, 남보다 더 귀하고 막중한 책임을 맡기 위해서 수도원에 입회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살다 보면 자기의 소임과 직책에 따른 미묘한 갈등과 유혹은 남녀 수도자를 불문하고, 그로 인해 겪을 수 있는 갈등이며 상처이기도 합니다. 때론 동기 사이에 그리고 선후배 사이에 보이지 않는 싸움은 이미 가정에서부터 비교와 경쟁을 은연중에 받았고 주입된 결과물입니다. 관구장으로 봉사하고 있을 때, 이미 죽은 형제가 술로 인해 침대에 누워서 제게 “아오스딩 신부는 수도원에서 해 볼 것(=직책) 다 해봤지만, 나는 지금껏 아무 직책을 맡은 적이 한 번도 없다.”라는 그의 속 깊은 말을 들었을 때, 무척 당황스러웠던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남녀 수도자들은 무엇이 되어 누구와 비교 경쟁하기 위해서 입회한 것은 아니고, 분명 하느님을 살기 위해서 수도 생활을 선택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다른 형제자매들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안에서 살다 보면,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외부 사람들의 자신에 대한 시선과 질문을 받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누가 큰 사람이며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지?’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오늘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 잠시 마르꼬 복음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에 도착하셔서 제자들에게 “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하고 묻자, 그들이 답변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누가 가장 큰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9,33~34 참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갈등을 전제로 마태오 복음은 제자들이 자신들의 의문을 먼저 묻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18,1) 조금은 생뚱맞은 질문입니다. 웬 하늘나라! 그들의 현실적인 문제는 지금 여기서 주님을 따르면서 누가 더 큰 사람인가에 대한 갈등인데 막연히 하늘나라를 핑계 대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제자 가운데서 예수님께서는 최측근으로 12명을 사도로 선임하였고, 이들은 분명 다른 제자들보다 더 큰 사람, 크다는 것은 키가 크다는 의미는 아니겠지요. 아마도 소임이나 책임에 따른 표현임에 분명하고, 12명 중에서도 일단은 베드로가 더 큰 사람인 듯싶지만, 당시엔 다른 제자들 사이에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계급이나 직위 그리고 연장자 순으로 서열이 정해집니다만, 당대 유다 사회는 그 우위가 뚜렷했고 그에 따른 대우받는 것을 즐긴 풍조가 있었기에 제자들 가운에서도 이런 서열논쟁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는 지금도 지속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던진 질문의 심각성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은 그냥 말씀으로 대답하기보다 확실히 이 문제를 매듭지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셨기에,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확답을 내리십니다. 말씀으로 그 이유를 설명하시기 전에 하신 예수님의 작은 몸짓이 중요합니다.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셨다.”(18,2) 이 광경이 눈에 들어오시나요. 실제 키가 큰 어른들 가운데 키가 작은 어린이 하나가 서 있는데 이 얼마나 대조적인 모습입니까? 어떤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이 이 어린이는 낮추지 않아도 실제로 어른들에 비해 작고 낮습니다. 작고 낮은 어린이는 자신의 처지를 알기에 낮출 필요도 없었고, 어른들의 키에 맞추려고 발꿈치를 들을 이유도 없었습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 앞에선 이런 어린이와 같은 존재임을 예수님께서 깨우치기 위해 이런 구도를 만드셨다는 점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우리 모두 가장 크시고 크신 존재인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작은 자, 낮은 자일뿐입니다.
이런 이해 맥락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먼저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18,3.4)하고 제자들에게 명백히 제시하십니다. 여기서 회개는 통상적인 죄에서 회개라기보단 지금껏 관습과 인습에 젖어 살아왔던 사고와 행동양식 곧 존재 방식을 바꾸라는 의미로 알아듣습니다. 주입되고 교육되어 당연시하고 살아왔던 유대인의 삶의 태도처럼,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대우받고 자만하면서 늘 높은 자리에 연연했던 존재의 태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 곧 하늘나라에 적합한 존재의 태도로 태어나야 하고 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실제로 지금 여기 제자들 가운데 서 있는 ‘어린이와 같이 실제로 작고 낮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것의 참뜻은 그러기에 높임과의 상대적인 낮춤이 아니라, 이분법적인 높임과 낮춤의 개념이 없는 순수한 상태의 지금 여기 있음으로써 높임도 낮춤도 없는 작은 자로, 낮은 자임을 깨닫고 그것 때문에 전혀 열등감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존재가 되는 것일 겁니다. 그럴 때 어떤 누구도 다른 누구보다 더 높아지려고 발버둥 치지 않고 자신이 지금 여기 서 있는 어린이와 같은 상태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의도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제자들 가운데 서 있는 어린이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 낌새조차도 의식하지 못한 채 다만 예수님 앞에 서 있다는 그 자체, 하늘나라에서 행복했으리라 믿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하늘나라에선 어떤 누구도 큰 사람도 작은 사람이 없음을 말씀하신 것으로 저는 받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이처럼 되라, 는 말씀은 다 큰 어른이 다시 어린이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아도 정말로 나이 들면, 정말 철부지 어린아이처럼 사리 분별 못하시는 분들을 저는 노인병원에서 많이 만났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어른이면서도 철딱서니 없는 어른이 되시지 마시고, 어른이면서도 어린아이처럼 마음만은 순수하고 무심한 듯 비교하지 말고 주어진 현실에서 만족하며 살아가길 바랍니다. 저도 이제 나이 들어가면서 주책없고 철딱서니 없는 어른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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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지난 7월부터 계속 바쁜 일정이었습니다. 7월 15일부터 27일까지 튀르키예, 그리스 성지순례를 다녀왔고, 지난 8월 2일부터 4일까지는 제가 소속되어 있는 연수지구 유소년 연합 캠프가 있었습니다(제가 연수지구 유소년 지도신부라서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8월 5일부터 9일까지는 서품 동기 은경축 기념 일본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이 모든 날짜도 길지만 제가 없는 시간을 위해 미리 준비했던 시간, 그리고 다녀와서 밀려 있는 일을 하느라 정신없을 정도로 바쁜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모든 일정을 마치고 밀린 일도 어느 정도 정리하면서 어제는 푹 쉬려고 했습니다. 월요일 새벽 미사를 마치고 곧바로 침대로 들어가서 하루 종일 잠만 자야겠다는 거창한(?) 계획을 세웠지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잠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피곤하니까 잠을 자야 해.’라고 머리에서 말하는데, 점점 정신이 맑아지면서 해야 할 일이 떠올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는 온종일 책 읽으며 공부하고, 또 글을 쓰는 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더 피곤해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더 힘이 나는 것입니다. 사실 피곤하면 쉬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번아웃이 와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는 정말 아무것도 안 해야 힘을 얻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가 필요할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새로운 변화를 계속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그냥 세속적인 과거의 습관적인 모습에 갇혀 있는 삶이 아닌, 주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변화를 추구해야 할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오늘 복음도 그렇습니다.
당시의 어린이는 아직 인간으로 보기에 부족한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린이를 무시했고, 어린이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사회적 약자라고 할 수 있는 여성이나, 병자들을 행해서도 거리를 두는 것이 당시 사회의 풍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회 풍조를 과감하게 버려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시고,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변화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세상이 원하는 변화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변화이고, 이 변화에 맞춰서 살아가는 모습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갈 때 더욱 힘차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며, 하늘나라에서의 영광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원하는 변화는 자기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변화는 사랑의 완성을 따르게 됩니다. 더 큰 영광을 위한다면 무엇을 따라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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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1)가장 큰 사람>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불러 가운데 세우시고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18,4).하시고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태18,10).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어린이를 중심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결국 어린이와 같은 단순함과 순수한 마음, 어린이가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듯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미아 발생으로 부모의 애간장을 태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보면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는 어중간한 아이가 길을 잃고 헤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는 많이 소유한 것이 위대하게 보이지만, 하늘나라에서는 가진 것 없는 사람, 자신을 낮추어 비우는 사람이 위대합니다. 애당초부터 가진 것이 없는 것이 자랑이 아니라 가진 것을 모두 버릴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꾸만 더해서 많이 갖고, 현명한 사람은 자꾸만 덜어서 많이 갖습니다”(이규경). 노자도 “성인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므로 밝고, 자기를 옳다고 하지 않으므로 빛나고, 자기를 자랑하지 않으므로 공이 있고 자기를 뽐내지 않으므로 윗사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루카18,17). 회개하여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마음으로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할 때 우리는 하늘 앞에서 큰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많이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랑을 지니고 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사랑이 담긴 일을 보시고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생각하는 데는 어린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한 일에는 어린 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는 어른이 되십시오”(1고린14,20). 주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 천국에서 위대한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마음이 넓고, 속이 깊은 사람, 생각하는 차원이 높은 사람이 되려면 주님을 꼭 닮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큰 사람은 키가 커서 큰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커서 큰 사람입니다. 하루를 허물로 누벼놓았어도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주님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자비를 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시는 주님 품에 안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나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주님 안에서 큰 사람이 되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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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은 하늘의 선물이다>
시간은 하늘이 준 선물이다. 각 사람은 주어진 시간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사용하고자 애를 쓴다. 똑같이 주어진 시간이지만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는 사람에게는 매 순간이 소중하고 선을 행할 수 있는 더 좋은 기회이다. 허투루 낭비할 수 없는 보물이다.
어느 수도원에서 보리농사를 지었는데 장상은 두 형제에게 보리를 베어 단으로 묶어 놓으라고 했단다. 보리밭 양쪽에서 보리를 베고 있는데 한 형제가 보기에 상대는 열심히 하지도 않으면서 중간중간 쉬는 것이 보였다. “좀 성실하게 일하지.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은연중에 화가 나서 불평불만 하였는데 저녁에 마무리할 때 보니,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한 자기보다 더 많은 양의 일을 해 놓은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 그 비결을 물었더니 그 형제가 하는 말, “나는 틈이 날 때마다 낫을 갈았네!”
시간을 관리하면서 사는 사람과 시간에 쫓기면서 사는 사람의 미래는 다르다. 게으르면서 늘 바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열심히 일하면서도 여유가 있는 사람이 있다. 우리에게는 시간에 끌려다니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편안하고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최선은 아니다. 그것은 자칫 게으름의 늪에 빠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지각없는 자들과는 시간을 줄이고, 사려깊은 이들과는 시간을 늘려야 한다.”(집회 27,12) 자기주장이 커가는 시끄러운 세상에서 의미 있는 시간의 여유를 갖기를 소망해 본다.
파리 올림픽 경기가 끝나면서 기쁨과 안타까움의 순간이 마무리되었다. 메달을 획득한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이날을 기다리며 혼신의 노력을 다한 수고와 땀은 값지고 소중하다. 혹독한 훈련을 통해 단련되었던 시간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산이다.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었고, 세계의 넓은 벽을 실감한 순간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메달을 통해 돈방석에 앉은 사람을 기억할지 모르지만 땀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늦추어진 성공을 기약하며 또다시 정열을 쏟는다. 다음 기회가 올 수 있다는 희망으로 오늘을 가꾼다. 실패는 좋은 경험이고 승리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며 성공을 위한 최상의 연습이다. 내일을 희망하는 만큼 오늘은 활력을 얻는다.
시간의 흐름 속에 우리는 나이가 들어간다. 그러나 어느 가수가 노래하였듯이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다.” 깨어 있는 영혼에는 나이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순의 청춘이 있을 수 있고, 스물에도 청춘이 아닐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마음이 어디 있는가?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어르신이 되는 것은 특권이고, 어르신의 지혜는 소중한 자산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해야 하는 일을 우선하면서 오늘을 낭비하지 않는다면 우리 삶은 늘 청춘이다. 나의 고유한 빛깔을 내면서 품격을 지키는 이 순간은 참 아름답다.
사람에게 시간은 유한하고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다. 그리고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낭비한 시간은 복구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마치 시간이 무한정 있는 것처럼 살아간다. 사실 ‘과거는 흘러간 역사이니 하늘의 자비에 맡기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신비이니 하늘의 섭리에 맡기며 오늘은 주어진 선물이니 이 순간을 사랑으로 살아야 한다.’ 매 순간순간을 알차게 살아가는 것은, 하늘이 준 선물에 대한 감사이고, 동시에 하늘의 축복을 받는 비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살아야 한다.
“할 일이 생각나거든 지금 하라. 오늘 하늘은 맑지만, 내일은 구름이 보일는지 모른다. 어제는 이미 당신의 것이 아니니 지금 하라”(로버트 해리). 지금 아니면 내일은 이미 늦을지 모른다. 그러니 지금 시간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하고자 하는 일을 지금 시작하라. 그리고 최선을 다하라.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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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작은 이>
마태오 18,1-5.10.12-14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 되찾은 양의 비유)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작은 이>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4-5)
애써
작은 이에게
눈길 건네니
나도 따라
어느덧
작아지고
내가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작은 이
스스럼없이
내 품에 안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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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초보자들>
+ 찬미예수님
이탈리아에서 박사과정에 들어간 뒤, 처음으로 수동 운전을 했던 날을 기억합니다. 가성비와 실리를 중시하는 유럽은 한국과 달리 승용차조차 수동이 대부분이며 제가 새롭게 머물게 된 한인 신학원에는 운전 봉사자가 필요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1종 면허증을 땄기 때문에 이태리에서도 당연히 수동 면허증을 취득할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선배 신부님들은 제가 하루 빨리 운전에 익숙해지길 원했습니다. 면허를 딴 이래 수동 운전을 해 본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저는 그래도 금방 적응해 운전을 잘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저의 운전 연습에 동승한 선배 역시 운전은 차를 몰고 나가면 금방 익숙해진다는 주의였고 그러므로 저희는 아무런 준비 없이 봉고차를 끌고 외곽의 도로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러한 생각이 커다란 착오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10년 전에 배운 운전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고 어느 타이밍에 클러치를 떼야 할지 속도를 줄일 때 어떻게 자연스럽게 기어를 바꿔야 할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습니다.
외곽에 커브길은 얼마나 많은지 속도를 줄일 때마다 시동이 꺼졌고 다시 속도를 올릴 때는 엔진 소리로 차가 터져나갈 듯 했습니다. 그렇게 식은 땀을 흘리며 수십 번을 길에서 가다가 멈춰서다를 반복한 뒤, 한참 후에야 가까스로 기숙사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이러한 경험을 하곤 합니다. 아무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무언가를 행하다가 실수를 거듭한 뒤, 생각보다 내가 미숙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하고 조금 더 겸손하지 못했음을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린이와 어른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겸손함에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자신의 미숙함을 알고 있으므로 언제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어른들에게 의지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빈칸을 채워나갈 수 있는 여백이 있고 배우고자 하는 열정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더라도 혼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착각에 고집을 부리다 결국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곤 합니다. 그들에게는 누군가가 개입할 여지가 없으며 배우고자 하는 열의도 부족합니다.
오늘의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 앞에서 취해야 할 우리의 올바른 태도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전능하고 지혜로우신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아이들과 같이 여백을 지닌 채 겸손해야 하며 하느님의 말씀에 귀기울이고자 하는 의지도 갖춰야 합니다.
만약 이러한 열정이 없이 하느님께 바라는 것을 청하기만 한다면 운전에 미숙한 초보자가 도로 위의 다른 운전자들이 나를 이해해줄 것이라 믿으며 자기 마음대로 운전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실제로 이러한 실수를 우리는 종종 범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가 옳다고 생각하고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리하여 바라는 바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하느님을 원망하고, 왜 나를 이해해 주지 않느냐며 한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코 하느님 앞에서 완전한 사람은 없고 그보다 지혜로운 사람도 없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어린이와 같은 겸손함을 갖추는 것,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되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곱씹으며 그 와중에 일어나는 주님의 뜻과 위로가 무엇인지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미사 중에 특별히 오늘 복음 환호송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우리의 스승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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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 중심의>
-참 좋은 교회 공동체-
“온갖 재산 다 얻은 듯, 당신 법의 길 걸으며 기뻐하나이다. 당신 법이 저의 즐거움, 그 법은 저의 조언자이옵니다.“(시편 119;14,24)
제 사랑하는 고향집이 구암리카페가 되었다해도 고향집에 대한 사모(思慕)의 정(情)은 날로 깊어갈 것입니다. 첫 사랑의 추억처럼 늘 잊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구암리 카페가 프란치스코 수사 강론 카페처럼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며 기도합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주님 중심의 참 좋은 교회 공동체”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도 이런 공동체일 것입니다. 공동체를 떠나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 "인(人)"자 글자 자체가 공동체적 인간임을 보여줍니다. 공동체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공동체를 만듭니다. 공동체의 붕괴와 파괴가 인간성 상실의 원인이 됩니다.
예전 마을은 하나의 커다란 가정과도 같은 공동체였습니다. 요즘은 마을도 사라져 갑니다. 인구도 줄어들고 또 사람들도 편중되어 있어 균형과 조화의 마을 공동체를 이루기도 쉽지 않습니다. 참으로 사람은 누구나 공동체에 소속되고 싶은 소속감을 지니고 싶어하며 나름대로 공동체에 몸담고 살아갑니다.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지 않거나 공동체의 지지와 사랑을 받지 못하고 홀로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고 허약한지요! 날로 늘어나는 1인가구에 가톨릭교회 공동체의 역할이 날로 증대되고 있습니다. 홀로든 함께든 모두를 하느님 품에 안고 하나의 인류가족공동체로 살아가도록 하는 가톨릭교회의 미사전례은총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남남의 사람들이 미사은총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 모습을 볼 때마다 이런 범(汎) 인류의 교회 공동체가 우리의 미래가 아니겠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도대체 가톨릭교회의 미사전례가 아니고 이렇게 하나로 모을 수 있는 방법이 어디 있을 수 있겠는지요!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공동체 생활에 지혜를 제공합니다.
“작은 문턱에 걸려 넘어질지언정 산에 걸려 넘어질 일은 없다. 그러므로 마무리를 지을 때의 자세는 낮고 또 낮아야 한다.”<다산>
“발걸음은 항상 정중하게 하고, 손놀림은 항상 공손히 하라, 걸을 때는 땅을 가려서 밟고, 개미 한 마리(개미집)라도 밟지 마라.”<경재잠>
경재잠(敬齋箴)은 주자가 서재의 벽에 써붙이고 스스로 경계한 잠으로, 옛날 서원학생들 기숙사 중 하나인 경재(敬齋) 앞에 내걸어 학생들을 훈계하였기에 경재잠(敬齋箴)이라 부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전 공부는 주로 군자가 되는, 성인이 되는, 즉 참사람이 되는 공부였음을 봅니다. 오늘날 문사철(文史哲)의 인문학은 날로 쇠퇴하고 실용학문의 공부가 주류인 세상과는 달랐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평생공부는 참사람되는 공부임을 봅니다. 사제가 수도자가 신자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성철 스님이 입버릇처럼 했던, “사람 못된게 중되고, 중 못된게 수좌되고, 수좌 못된게 부처된다” 라며 선방 수좌들을 세속의 기준으로 가장 못된 인간들이라고 일갈했던 말씀도 생각납니다. 토마스 머튼에 대한 후대의 평가, 즉 “머튼은 가톨릭인이기보다는 크리스천이었고, 크리스천이기보다는 종교인이었고, 종교인이기 보다는 인간이었다.”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괴물이나 폐인이 아닌 참사람이 되는 공부가 얼마나 힘든 평생공부인지 깨닫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람이 되기 위한 공동생활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으로부터 우리는 참사람되기 위한 주님 중심의 참 좋은 교회 공동체 생활의 비결을 배웁니다. 참으로 어린이처럼 편견이 없고 개방적이고 유연한 예수님을, 작은 이들을 끔직히 사랑했던 예수님을 배워 닮는 것입니다. 공동체 성원들이 서로 맞추려 하다보면 공동체의 일치는 요원합니다. 그러니 모두가 공동체 일치의 중심인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 자기를 맞춰 주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서 몸소 깨달아 실천한 진리들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참사람이 되는 비결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겸손임을 깨닫습니다. 어린이는 편견이 없고 순수하며 개방적이고 유연합니다. 이 또한 부단한 회개의 열매입니다. 이런 이는 그대로 주님의 현존이요 이런 이를 받아들임은 그대로 주님을 받아들이는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 작은이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 애정의 관심입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달고 바다 깊은 곳에 빠지는 편이 낫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있는 내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작은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사는 그대로 하느님의 관심사를 반영합니다. 작은 이들을 무시하는 것은 그대로 주님께 대한 무시의 대죄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닮는 것이 하느님을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고대로 끊임없는 회개로 어린이처럼 낮아져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작은 이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 참사람이 되는 지름길임을 깨닫습니다.
자비로운 주님 중심의 참 좋은 교회 공동체의 참사람들이라면 끊임없는 회개로 어린이처럼 겸손한 사람이 되는 공부와 더불어 작은 이들에 대한 배려와 존중의 사랑 공부는 평생공부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을까요? 답은 단하나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과의 일치의 우정관계를 날로 깊이하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불림받은 예언자 에제키엘이 그 좋은 모범입니다. 에제키엘이 삼킨 두루마리가 상징하는바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성체요 말씀입니다. 주님은 두루마리를 에제키엘 입에 넣어주며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배를 불리고 속을 채워라.” 에제키엘이 먹었더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 합니다. 주님은 두루마리를 먹이신 다음 말씀을 선포하라 명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에 가서 그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에제키엘 역시 후대의 바오로처럼 똑같이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사시는 주님이시다.”(갈라2,20) 라고 고백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똑같은 주님께서 ‘예닮의 여정’중인 우리 모두에게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성체와 말씀을 두루마리를 먹이심으로 당신과의 일치를 깊이하시고, 당신을 닮은 참사람으로 각자 삶의 자리로 파견하십니다.
“당신 말씀 제 혀에 얼마나 달콤한지! 그 말씀 제 입에 꿀보다 다옵니다. 당신 법은 제 마음의 기쁨, 영원히 저의 재산이옵니다. 당신 계명을 열망하기에, 저는 입을 벌리고 헐떡이나이다.(시편 119;103,111,1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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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어린이스러운 회개와 어른스러운 회개>
오늘 주님께서는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라고, 그래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래서 저는 오늘 ‘어린이스러운 회개’와 ‘어른스러운 회개’를 묵상해봤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씀하시는 어린이는 철부지 어린이가 아닐 것입니다. 철부지 어린이는 보통 자기밖에 모릅니다. 그래서 늘 자기중심적이고 배려할 줄 모르며 처신이 미성숙합니다.
그러므로 어린이스러운 회개는 이런 어린이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어울리는 어린이요 회개일 터인데 그것이 무엇일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첫째로 단순함입니다. 복잡하지 않은 것이고, 복잡하지 않다는 것은 여러 가지가 얽히고설키지 않은 것이고, 여러 가지 또는 상반된 가치와 욕심이 얽히고설키거나 충돌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복잡한 이유가 그 반대인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생각이 많아서 머리가 복잡하고, 하고 싶은 것이 이것저것 많아서 복잡하고, 이 말도 솔깃하고 저 말도 솔깃하여 복잡하고, 이것이 좋아 보이고 저것도 좋아 보여 복잡하고, 육적인 욕망과 영적인 갈망이 같이 있어 복잡하지 않습니까?
두 번째로 어린이에게는 선입관이나 편견이 없습니다. 그래서 백지처럼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고, 한 마디로 때가 묻지 않아 영혼이 깨끗하며, 그래서 얘기하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고 받아들입니다.
세 번째로 어린이는 약하고 겸손합니다. 달리 말하면 자기의 약함을 인정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자기 힘에 의지하지 않고 부모나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며, 도움의 손길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도움에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이유로 어린이는 단순하게 믿고 잘 믿으며 그 결과로 여러 가능성에 다 열려 있으며 신앙 면에서도 하늘나라의 문이 열려 있으며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며 겸손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렸을 때는 어른이 하라는 대로, 교회가 가르쳐주는 대로 아무 의심 없이 하느님을 믿었다가 나이를 먹어가며 점차 때가 묻어서 하느님을 믿지 않다가 더 나이 먹으면 다시 단순해지고 겸손해져 하느님을 다시 믿는 회개를 해야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어른스러운 회개도 또한 해야 합니다. 앞서 봤듯이 철부지 어린이는 자기밖에 모르고 매우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래서 남의 사정이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래서 남을 고려하거나 배려할 줄을 모릅니다. 한 마디로 미 성숙하여 남을 위한 여백이 없고, 사랑의 기초가 아직 되어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이스러운 회개가 믿음의 회개라면 어른스러운 회개는 사랑의 회개입니다.
성숙하면 할수록 마음이 넓어져 이웃을 위한 공간이 있으며, 늘 남을 배려하고 남에게 너그러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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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마태 18,1)
오늘 복음(마태 18,1-5.10.12-14)은 세 단락으로 이루어진 말씀인,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에 대한 말씀과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마라.'라는 말씀과 '되찾은 양의 비유'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마태 18,1)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이르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3-5)
그리고 이어서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마라.'는 말씀과 '되찾은 양의 비유'가 전해집니다.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은, 지금 여기에서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작은 이들, 보잘것 없는 이들을 업신여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들을 예수님처럼 여기는 사람'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되찾은 양의 비유'를 통해서 이것이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임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나서지 않느냐?"(마태18,12)
작은 이들이 무시당하는 세상입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왕따 당하는 세상입니다. 혹시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그런 모습은 존재하지 않을까요?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은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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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 4)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는
당신의 사랑으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죽어야 할
이웃의 목숨을
자신을 희생하여
이웃의 목숨을 구합니다.
깊이 아파한 사람이
깊은 사랑을 실천합니다.
살아 있는 복음은
언제나 살아있는
실천에 있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생명의 문이 열립니다.
생명은
어떤 장소에 있든
소중한 생명입니다.
사랑은
어떤 시간에 있든
소중한 사랑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것이
진정 사랑하는 것임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사랑에서 잃어버린
희망을 다시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희망은 그냥
우리에게
오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희생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복음은 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희망적인
소식이 됩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이
드러났습니다.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이 있기에
아직 우리 모두는
희망입니다.
희망의 빛으로
잃어버린 우리의
길과 잃어버린
우리 자신을 찾는
기쁜 날 되십시오.
스스로 자신을
낮춘 이를 주님께서
들어 높여주십니다.
어무 것도
장담할 수 없는
부족한 우리들임을
고백합니다.
도움과 사랑이 필요한
낮출 수밖에 없는
우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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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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