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가지려단 모두 빈손, ‘원탁’의 교훈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 전시 중인 최우람 작가의 ‘원탁’. 머리 없는 지푸라기 인형 18개가 둥그렇게 모여 원탁을 등으로 떠받친다. 기계장치로 움직이는 인형들은 원탁을 기울여 그 위에 놓인 단 하나의 동그란 머리통을 자기 쪽으로 굴리기 위해 몸을 굽힌다. 그러나 막상 차지하려 몸을 들면 원탁은 반대로 기울고 머리는 멀어지고 만다. 인간 소유욕의 끝없는 굴레를 은유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커다란 원탁이 끊임없이 기울어지면서 움직이고 있다. 원탁 위에는 축구공(?) 같은 것이 기울어지는 방향에 따라 이리저리 뒹굴고 있다. 하지만 공이 가장자리에 이르면 원탁은 일어나 반대쪽으로 보낸다. 그러니까 축구공은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원탁을 운동장 삼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놀고 있다. 놀고 있다고? 사실 자세히 보면 놀기는커녕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처절한 현장이다. 원탁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교대로 일어섰다 앉았다 하면서 반복 동작을 하고 있다. 지푸라기로 치장된 인형 같다. 어쩌면 허수아비인지도 모르겠다. 실물 크기의 사람 모습은 마치 나의 모습과 같다. 하지만 이들은 머리가 없다.
아니, 머리는 바로 원탁 위에 있다. 원탁 아래의 인간들은 각자 머리통을 챙기려고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방향으로 머리통이 오면 얼른 일어나 차지하려고 한다. 하지만 머리통은 높게 일어설수록 멀리 달아난다. 머리를 잃은 인간들. 이들은 무슨 천형(天刑)을 받았기에 영원한 벌을 받고 있을까. 시시포스의 신화가 연상되는 장면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의 서울박스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원탁 공연(?). 바로 ‘MMCA현대차시리즈 2022: 최우람-작은 방주’ 전시의 현장이다. 작가는 말한다. ‘원탁’은 20년 작업 경험의 총체이다. 이 작품은 원래 희생정신 없이 개인 욕망만 내세우는 정치계를 풍자하려고 발상했던 것이다. 서로 우두머리가 되려고 투쟁하는 모습을 원탁 위의 머리로 상징하려 했다. 애초 3명의 지푸라기 인형을 세웠을 때는 의도에 맞았다. 만약 인형을 20명으로 늘리면 원탁의 지름이 6m에 이르러야 하고, 어쩌면 주요 20개국(G20)을 풍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울박스의 크기를 고려하여 지름 4.5m의 원탁으로 결정하니 등신대 인물 18명이 되었다. 3명에서 18명으로 늘어나니 정치계가 아니라 일반 사회의 대중으로 의미가 확대되었다. 관객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인형이 마치 나의 모습과 같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머리를 잃은 현대인. 상징성의 폭이 더 넓어지지 않았는가.
‘원탁’은 무게를 최소화하기 위해 알루미늄으로 만들었고, 인형은 인조 밀짚으로 감쌌다. 물론 원탁 안에는 정밀한 기계장치가 있다. 천장에는 머리의 동작을 제어하는 동작 인식 카메라와 전자 장치가 있다. 어쩌다 머리통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이는 밀짚으로 감쌌기 때문에 표면이 고르지 않아 컴퓨터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아서이다. 카메라가 원탁을 촬영하여 머리 위치를 컴퓨터가 계산하는 구조이다. 하지만 해독에 오차가 일어날 수 있다. 물론 더욱 정교하게 수정할 수 있지만, 오류 자체를 수용하기로 해 현재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변수 혹은 이변 즐기기. 관객은 어쩌다 떨어지는 머리통 보기를 기대하고 있다. ‘원탁’은 5분 작동하고 15분을 쉰다. 작동을 멈추면 머리통은 원탁의 한가운데에서 쉰다. 투쟁하지 않고 공유하면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소유욕은 서로 머리를 차지하겠다고 투쟁한다. ‘원탁’의 상징성이다.
최우람의 대표작 ‘작은 방주’. 배의 양쪽에 달린 70개의 노가 무용하듯 움직인다. 그러나 길을 알려줄 등대는 항로가 아닌 배의 한가운데에 있고 선장 둘은 등을 맞댄 채 반대 방향으로 가려 대립한다. 이 역시 현대사회의 아이러니를 상징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번 개인전의 대표작은 ‘작은 방주(方舟)’이다. 세로 12m에 가로 7m 크기의 정교한 기계장치로 만든 거대한 배이다. 배의 양쪽에는 날개(노)를 달아 35개씩 모두 70개로 이루어졌다. 각 날개마다 컴퓨터 장치를 달았고, 이를 통합 제어하는 별도의 장치를 달았다. 정교한 기계 장치의 승리라 할 수 있다. 매일 20분씩 8번을 공연(?)하는 ‘작은 방주’. 작동 시간이 되면 관객은 열을 맞추어 전시장을 가득 채운다. 주말에는 한 번의 공연에 1000명 정도가 모일 정도로 장안의 화제이기도 하다. 양쪽 날개의 선율은 아름다운 무용 공연과 같다. 하지만 이 방주는 갈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거대한 배이다. 우선 길을 밝혀줄 등대가 배 한가운데에 서 있다. 게다가 선장도 등을 맞대고 둘이 버티고 있다. 이들은 각자 반대 방향으로 가자고 대립하고 있다. 현대인의 상황을 암시하고 있는 듯 여러 측면에서 해석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래서 그럴까. 일반 관객은 ‘작은 방주’를 보고 신기해하면서도 뭔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나의 이야기로 직접 맞닿아 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객은 ‘작은 방주’보다 ‘원탁’을 더 좋아하고 있다. 후자는 이해하기 쉽고 게다가 바로 나의 이야기 같아 실감나기 때문이다.
최우람은 움직이는 미술 작품으로 일가를 이루고 있다. 사물에 숨을 쉬게 하고 싶다는 것의 실행이다. 그의 과제는 인간과 기계의 관계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인형을 직접 만들어 놀기를 좋아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기계 조작의 능수가 된 것은 아니다. 그의 선생은 청계천 공구상가의 업자들이다. 부지런히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기계의 원리를 학습했다. 그래도 첫 개인전 때는 기술력이 약해 전시장에서 수리를 반복해야 했다. 밤마다 수리해서 아침에 전시장으로 출근해야 하는 일과였다. 기계 조작은 하루살이에서 현재 3개월, 아니 6개월 이상을 작동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발전했다.
‘원탁’은 오늘도 움직이고 있다. 내 쪽으로 머리가 와 일어서면 그 머리는 반대쪽으로 달아난다. 언제 내 머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 쟁취하려 하면 할수록 멀어지는 것. 현대인에게 주는 참다운 교훈 아닐까. 소유욕을 내려놓으면 평화를 유지시켜 주고 있는데.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