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와 욕망
원제 : Fear and Desire
1953년 미국영화
제작, 감독, 촬영, 편집 : 스탠리 큐브릭
출연 : 프랭크 실베라, 케네스 하프, 폴 마주르스키
스티븐 코이트, 버지니아 리
오래전에, 그래봐야 십수년전 쯤까지 스탠리 큐브릭의 감독 데뷔작이 '살인자의 키스'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 극영화 데뷔작은 그보다 2년 일찍 발표된 '공포와 욕망(53)'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작품을 스탠리 큐브릭이 마음에 들지 않아 했고, 결국 필름을 다 회수하여 존재하지 않은 영화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미 복사된 프린트가 있었고, 그래서 큐브릭 사후에 공개가 되어 지금은 버젓이 유통되는 영상이 되었습니다. 큐브릭은 생전에 이 영화를 남들이 보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자기 영화에 대한 굉장한 완벽주의적 성향과 과도한 권리를 행사한 큐브릭이었기에 벌어진 일이었지요.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굳이 스탠리 큐브릭이 그럴 필요가 있었나 싶습니다. 생각외로 괜찮은 영화였고, 오히려 저평가 받은 작품이라고 보여집니다. 불과 25세의 젊은 감독 스탠리 큐브릭이 다큐멘타리 두 편을 만든 이후 데뷔한, 그것도 아버지와 삼촌이 조달한 아주 적은 예산을 투입해서 만든 전쟁 심리극으로서 신인 감독의 습작같은 수준을 기대할 뿐인데, 버젓하게 볼만한 작품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20대 중반 청년감독의 데뷔작이 이 정도면 이미 싹수가 보인 작품이지요.
전장의 4인
대립하는 맥과 코비
필사의 탈출을 하려는 4인
가상의 어느 숲에서 벌어지는 가상의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비행기가 불시착하여 숲에 남겨진 4명의 병사들, 장교인 코비(케네스 하프)와 나머지 3명, 코비는 침착하고 신중한 성격인데 용맹하고 다소 괄괄한 맥 병장(프랭크 실베라)은 그를 탐탁치않게 여깁니다. 적진 6마일 부근에 떨어진 그들은 무기도 변변찮은 상태에서 안전한 곳까지 이동해야 합니다. 코비는 뗏목을 만들어 강을 통해서 탈출하자고 제안합니다. 불시착한 비행기가 발견될 경우 적들이 자신들을 추격해올 것이라는 위기감 속에서 그들은 뗏목을 만들고 어두워질때까지 기다렸다 탈출하기로 합니다. 그런 와중에 적이 있는 외딴집을 습격해 겨우 먹을 것을 챙기고 무기를 강탈합니다. 그런데 강 아래쪽 건물에 장군계급의 적군이 있는 모습이 발견되고 맥은 적의 장군을 없앨 기회라고 생각하지만 코비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두 사람간에 마찰이 생깁니다. 이들 4명은 이동중 마을처녀(버지니아 리)를 발견하고 그녀가 자신들의 존재를 알릴까봐 나무에 묶어둡니다. 뗏목이 무사한지 확인하러 가면서 코비는 막내병사 시드니(폴 마주르스키)에게 감시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시드니는 그녀에게 욕정을 느끼고 결박을 풀어주었다가, 도망치는 그녀를 얼떨결에 쏘아 죽입니다. 이후 시드니는 정신이 이상해져서 사라지고 결국 3명이 탈출작전을 벌입니다. 코비는 결국 맥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맥이 뗏목으로 보초들을 유인하는 동안 콜비와 플레처가 적 장군을 죽이고 비행기로 탈출하기로 합니다. 과연 이들의 계획은 성공할 수 있을까요?
소심한 병사 시드니 역으로 출연한 인물은
나중에 감독으로 유명해지는 폴 마주르스키
이 영화가 연기 데뷔작이다.
1시간 남짓한 짧은 러닝타임의 저예산 소규모 전쟁영화입니다. 스탠리 큐브릭은 데뷔작부터 이런 작품을 만들정도로 은근 반전의식이 있는 인물이었는데 이후 그의 이력 초기의 걸작 '영광의 길'을 비롯하여 핵전쟁의 위험을 코믹스럽게 풍자한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 그리고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한 반전물 '풀 메탈 자킷' 등을 연출했습니다. 총 13편의 극영화 연출에 불과한 것을 감안하면 반전소재 영화 비중이 높은 편이죠.
이 영화에서 주요 인물 두 사람의 대립을 통해서 과연 전쟁의 의무가 중요한가 개인의 존재가 중요한가에 대한 의제를 논합니다. 코비는 자신과 부하들이 무사하고 빠르게 안전한 곳으로 탈출하는 것을 중요한 당면 과제로 삼고 그걸 실행하려고 하고 맥은 눈앞에 적 장군을 제거할 기회가 있는데 모른척 할 수 없다며 의무를 고집합니다. 심지어 코비에게 용기가 없다고 하기까지 하죠. 두 인물의 각각의 독백장면을 통해서 전쟁을 치루는 군인에 대한 복잡하고 혼란스런 심리가 보여집니다.
폴 마주르스키와 버지니아 리
버지니아 리는 로버트 와그너와 공연한
'죽음전의 키스'에서 비중있게 등장한다.
젊은 병사의 욕망
맥과 코비의 갈등은 계속 이어진다.
"눈앞에 놓인 적의 장군을 보고도 그냥 가자고요?"
"그래서 어쩌라고? 그깟 장군이 뭔데?"
스탠리 큐브릭은 혼자 제작, 촬영, 편집, 연출을 모두 담당하는데 저예산으로 만들어야 하는 형편상 부득이하게 그렇게 한 것입니다. 스탭진 자체가 몇 명 안된 영화이고 전쟁영화임에도 규모가 매우 작습니다. 하지만 그런 열악한 저예산으로 이렇게 괜찮은 장면 묘사와 각각의 인물들의 심리묘사를 잘 표현한 것은 과연 떡잎부터 알아볼 수 있는 명감독의 기질이 엿보입니다. 적, 동료, 살상, 돌발적 살인, 갈등, 임무, 광기, 공포, 욕망 등 여러가지 요소를 나름 다양하게 잘 묘사한 영화로 전쟁터에서 적진 인근에 고립된 4명의 병사의 모습을 통해서 여러가지 주제를 던지고 있습니다. 특히 장군이 대위와의 대화에서 독백처럼 말하는 죽음과 살상, 공포에 대한 고백이 인상적입니다.
20대 무명 감독의 습작같은 데뷔작이지만 의외로 전문 배우들이 등장합니다. 당연히 스타급 배우는 없지만 주요 인물인 병사 4명중 시드니 역의 인물이 나중에 감독으로도 활약하게 되는 폴 마주르스키이며(이 사람의 연기 데뷔작이지요) 군인들에게 생포된 마을 처녀 역의 버지니아 리는 메이저 영화 조연배우로 활동하는게 되는데 로버트 와그너 주연의 '죽음 전의 키스'에서 꽤 비중있게 등장하기도 합니다. 물론 결과론이지는 하지만 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이 그래도 전문 프로배우로 활동하게 된 것이지요. 맥 역의 프랭크 실베라는 스탠리 큐브릭의 차기작 '살인자의 키스'에도 다시 출연합니다.
장군의 괴로운 독백이 인상적이다.
"그가 돌아올까요?"
"우린 과연 돌아온건가? 뭔가를 확신하기에는
우린 너무 자기 영역에서 먼 여행을 한거야"
자신 가족, 친척의 돈을 끌어 모아서 이렇게 극영화 데뷔작을 마친 스탠리 큐브릭은 이후 '킬링' '영광의 길' '스팔타카스'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계태엽 오렌지' '샤이닝' 등 만드는 영화마다 매번 미친 걸작 수준으로 탄생하여 세계적인 명감독으로의 반열에 무난히 오릅니다. 15편도 안되는 작품을 연출한 것이 아쉽지만 그래도 한 편 한 편 정말 보석같은 작품을 남긴 명장이지요. 완벽주의자 같은 성향이 있어서인지 이 정도 수준으로 완성된 데뷔작조차 부끄럽게 생각하여 세상에 본격적으로 드러내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 셈입니다. 영화 한편이 완성되는데 오로지 감독의 역할만이 있는게 아닌데 애꿎게 폴 마주르스키는 자신의 연기 데뷔작을 제대로 알리지 못한 셈이 되었고, 함께 출연한 다른 배우들도 애써 연기한 작품이 사실상 오래 사장된 셈입니다.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이며 거장의 '데뷔작과 유작'은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있는 소중한 목록입니다. '공포와 욕망'에서 '아이즈 와이드 샷'까지 스탠리 큐브릭의 찬란한 역사는 이 영화로 시작된 것입니다.
ps1 : 전쟁에는 적을 죽이고 살아남느냐 아니면 내가 죽느냐의 문제만 있을 뿐, 영웅, 애국따위를 강조하는 전쟁영화는 다 위선적이고 거짓이라고 보여집니다. 이 영화는 짧고 간결했지만 그런 심리를 깊이있게 잘 묘사했습니다.
ps2 : "그가 살아돌아올까요?" 라는 플레처의 질문에 "모르겠어, 우리조차 돌아온게 맞는지 모르겠군, 우린 각자의 영역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서 여행하는 바람에 어떤 판단을 올바르게 내릴 수 없게 된 것 같아' 이런 코비의 대사가 인상적입니다. 조금은 우회적으로 전쟁을 비판한 내용입니다.
[출처] 공포와 욕망(Fear and Desire, 53년) 스탠리 큐브릭 극영화 데뷔작|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