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도 사랑도 懷疑도 버리고
여기에 굳이 立命하려는 길에
曠野는 陰雨에 바다처럼 荒漠히 거칠어
타고 가는 망아지를 小舟인 양 추녀 끝에 매어두고
낯설은 胡人의 客棧에 홀로 들어 앉으면
嗚咽인 양 悔恨이여 넋을 쪼아 시험하라
내 여기에 소리없이 죽기로
나의 人生은 다시도 記憶치 않으리니
-----―유치환「절명지」전문
이 작품은 유치환(柳致環, 1908∼1967)의 제2시집 『생명의 서』(행문사, 1947)에 수록되어 있다.
『생명의 서』에 수록된 작품들은 대부분 작자가 만주라는 낯선 이국에서 체험한 것들의 기록이다.
청년기의 청마(靑馬)의 삶은 별로 평탄하지 못했던 것 같다.
평양에서 사진관을 경영해 보기도 하고, 부산에서 잠시 백화점에 근무하기도 했다.
그리고 고향 통영에서 상업학교 교사를 지내다가 그것도 여의치 않았든지 1940년 봄 가솔들을 이끌고 만주 연수현(煙首縣)으로 떠난다.
그는 농장 관리인 등의 일을 하면서 1945년 광복 직전까지 광야의 체험을 계속한다.
소위 청마시의 특징으로 지적되고 있는 '허무와 의지'의 작품들이 주로 여기에서 생산된다.
당시 고향을 등지고 황량한 만주 벌판으로 유민의 길을 떠나간 백성들이 많았다.
일제에 농토를 빼앗긴 가난한 농민들이 대부분이었다.
얼마나 생활이 곤궁했으면 삼십대 초반의 청마도 이들 틈에 끼었겠는가.
만주 땅을 밟는 그의 각오가 어떠했겠는가 짐작이 간다.
그 땅에서 죽고야 말겠다는 비장한 결의를 '절명지'라는 제목에서 읽을 수 있다.
그는 지금 정든 고향도 그리운 사람들도 그리고 젊은 날의 사치스런 사색[懷疑]도 다 팽개치고 낯선 이국의 벌판에 와 있다.
천명으로 생각하고[立命] 새로운 둥지를 틀려고 찾아갔던 그 땅은 처음부터 그를 순탄히 맞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힘겨운 앞날을 예고라도 하듯 음침한 비는 연일 계속 내려 광막한 벌판이 바다처럼 젖어 있다.
화자는 배를 매듯 타고 온 작은 망아지를 여인숙[客棧]의 처마 밑에 묶어 두고 홀로 방에 든다.
그러자 회한(悔恨)이 물밀 듯 밀려와 흐느낌[嗚咽]을 억제할 수 없다.
회한―무엇에 대한 뉘우침과 한탄이었을까.
만주 땅에 잘못 왔다는 후회였을까.
아니면 잘못 살았던 젊은 날에 대한 참회였을까.
민족적인 통한이었을까.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이 회오리처럼 함께 밀려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들은 지금 화자의 능력으로써는 어찌할 수 없는,
돌이켜 고칠 수도 없는 과거지사― 그러니 화자는 피나는 울음으로 자책할 수밖엔 없다.
嗚咽인 양 悔恨이여 넋을 쪼아 시험하라
그러나 '오열인 양'으로 보면, 실제로 목메어 우는 것이기보다는 그 울음을 참고 견디는 것 같다.
울음조차 제대로 울지 못하고 안으로만 삭이는 처연한 정경이다.
그 괴로움은 육신의 아픔을 넘어 영혼(넋)에까지 이른다.
그래서 화자는 운명에게 넋마저 찢을 대로 찢어 자신의 의지를 시험해 보라고 부르짖는다.
극단적인 자학의 역설적 독백이다.
그리고 화자는 다음과 같은 각오를 보인다.
내 여기에 소리없이 죽기로
나의 人生은 다시도 記憶치 않으리니
내가 비록 이곳에서 아무도 몰래 죽는다 하더라도,
후회막급한 내 인생에 관해 다시 돌이키고 싶지 않다.
아니, 돌이키지 않겠다.
이 얼마나 무섭고 비장한 결의인가.
생명을 내걸고 운명과 꿋꿋이 대결하는 불굴의 의지 앞에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이처럼 강인한 의지도 광야와 맞서기는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절박한 노래를 부른다.
내 열 번 敗亡의 人生을 버려도 좋으련만
아아 이 悔悟의 앓임을 어디메 號泣할 곳 없어
말없이 자리를 일어나와 문을 열고 서면
나의 脫走할 思念의 하늘도 보이지 않고
停車場도 이백 리 밖
암담한 진창에 갇힌 鐵壁 같은 絶望의 曠野
----------―「광야에 와서」부분!
많은 실패로 점철된 내 인생 포기해 버려도 무방하련만 차마 그럴 수는 없다.
회오의 고통에 못 이겨 어디 목놓아 울 곳도 찾을 수 없다.
밖으로 튀쳐나오지만 그 괴로움을 벗어날 수 있는 사념의 세계도 보이지 않는다.
현실적으로도 외부와 멀리 격리되어 있는 이 광야에서 화자는 철벽 속에 갇힌 것 같은 절망감을 느끼고 있다.
이 작품은 「절명지」의 연작이라고 해도 무방할 동일한 시상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청마 시의 맛은 역설에 있다.
의지의 산물인 역설을 청마는 그의 비극적 세계관을 극복하는 방편으로 삼는다.
이러한 구조는 청마 시의 남성성을 형성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