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은 있다
이 우주는
시작과 끝이 없는 무한의 세계인가.
아니면
시작과 끝을 가진 유한의 세계인가
하는 것은
종교 문제의 근본 토대를 이룬다.
생명과 죽음, 영혼과 사후 세계의
실상은 우주론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즉 우주가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이라면
신의 존재도
시작과 끝이 있을 것이고,
윤회라는 것도
시작과 종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주가 무한히 존재한다면
창조주로서
신의 의미는 상실된다.
창조라는 것은 어떤
시점에서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영혼 불멸설은 각종 종교가
내세우는 근본 교리이다.
그러나 그 영혼이
불사의 존재라면
그것은 생멸의 법칙을
넘어선 특별한 개체이며,
또한 그것은
태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미래에 영원히 존재한다면,
그것은 과거에도 영원히
존재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는
탄생이라든가 죽음이라는
말로 구획되는 생물적 경계는
단지 영원한 비물질적 영혼의
곁모양 내지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수많은 종교들은
각각의 영혼설을 앞세워
그들의 교세를
화장하는데 활용했으며,
그 사실적 관계와 유대에서
인류의 문화는 진화해 왔다.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이자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인 칼융은
----"환생이라는 것은
인류가 태초이래 지녀온
확신 중에서 특히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확신이다."라고 말했다.
환생론은 영혼 불멸설에
근거한 우주론이다.
이런 견해를 근대의 기독교에서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지만,
초기 그노시스파의
기독교에서는 그 학설을 인정했다
'환생' 에 해당하는 팔리어는
punabbhava 인데,
문자 그대로
'다시 존재함' 을 의미한다.
하지만 불교인들은 임종시에
지니고 있던 기본 생각이
새로운 존재의 뇌관에
그대로 불어넣어진다고 본다.
교리적인 상이점을
제외하고 보면,
힌두교와 불교는
계속 육체를 부여받으면서
고통스럽도록 점진적인
정화의 과정이 이어진다고
보는 점에서는 비슷한 개념을 갖는다.
힌두교는 아트만이라 부르는
영원한 실체(영혼)를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긴 일련의
윤회를 거친다고 말한다.
한 영혼이 계속적인
화신을 통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우리가 즐겨 부르는
영혼이라는 것은
단지 변화하기 마련인 습관과
애착의 혼합물이라고 말하면서
실제로 불멸의 영혼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한다.
욕망과 애착 때문에
환생을 하고
또 차례가 되어 환생할 다른
자아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그 자체의 개성도 전체 안에서
궁극적으로 상실되고 마는
그런 현상을 계속 이어가는
망상적인 자아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의 목적은
이런 자유와 재흡수
상태를 달성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가
자신의 영적 자아가 경험해온
전생의 흔적들을 가지고 있다.
그 사실이 참이든 거짓이든
리딩은 그렇게 말한다.
다만 사람들은 자연의 배려인
망각의 법칙 때문에
시간 저편의 전생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윤회에 대해 보다
섬세한 회의론자들은
이렇게 반문한다
---- "만약 우리가 그처럼
많은 전생을 가지고 있다면
왜 그 중의 어느 것도
기억에 없느냐."고 반복하여 묻는다.
그 물음에 대해 인도의 위대한
철학자이자 비폭력주의를 선도한
모한다스 K. 간디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자연의 은총이다
만일 그 엄청난 분량의 기억을
모두 젊어지고 다녀야 한다면
삶은 감당하기
힘든 짐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는
이 희미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깊이를 알 수 없는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어떤 심리요법(최면)을 통해서나
수행이나 기도를 통한 명상에서
자신의 전생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우리 주위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어떤 젊은 청년은
우연히 사진으로 본
인도의 타지마할 궁전
----(무굴 제국의 황제인
'샤 자한' 이 왕비를 위해 세웠다고 함)의
그림을 대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온몸으로 전해져 오는 강렬한
전율과 슬픔을 느꼈다고 하는데,
그 감정의
느낌들이 너무 깊어지자
알 수 없는 그 느낌에
대한 정체를 궁금해했다.
리딩에 의하면
그 경험의 뒤편에는
그 당시 '뭄타즈' 왕비를 사모했던
어느 장군의 삶의
기억들이 연결되어져 있었다.
그리고 또
어떤 스님은 김천에 있는
어느 고찰을 방문 했을 때,
절 안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일순 주위의 풍경들이 바뀌면서
다른 시대의 다른 모습의 자신을
보고 의아해 했다고 하는데,
그때의 순간적인 경험이
전생의 어느 시절의 기억과
연결되어진 것을
나중에 알았다고 했다.
또 다른 경우로는
병든 홀어머니의 부양 때문에
혼기를 놓친 어느 남성은,
현생의 어머니가 어느
과거생에서는 자신의 딸이었는데,
그 때 홀로 남겨진
병든 아버지 때문에
시집을 가지 않고 평생을 바쳐
병상을 지켰던 그때의 인연을
깊은 명상 속에서 찾아내고,
그 고마움을 지금의
정성으로 대신한다고 했다.
사람들은 어떤 장소나
초면의 사람에게서
언젠가 본적이
있는 것만 같은 친밀감이나
익숙한 감정을 느낄 때가 있는데
---그런 감정을 '데자부
Dejaru' 현상이라고 한다.
'데자부' 는 불어로
이미 봤다는 뜻인데
영적 의미에서의 해석은
'데자부' 현상은 모든
인생의 체험이 처음이 아니며,
전생에서 온 잠재적 기억이
일어나는 것임을
암시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현재 기억이
과거에서부터
이월되어 왔음을보여주는
유명한 사람들의 이야기 중에는
독일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 의 일화가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일리아드 (고대 그리스의 작가
호메로스가 지었다고 하는 그리스
최고급 최대의 영웅 서사시)' 의
이야기에 매료되어,
고대 트로이의 역사를 쓴
호메로스의
이야기를 진실로 믿고
그 유적을 발굴,
확인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는 사업가로 성공하고 난 뒤에
평생의 숙원이었던 트로이의
유적을 찾기 시작했는데,
마침내 그는 땅에 묻힌
트로이의 폐허를 발견하고
그에 따라 위대한 서사시를
역사적으로 밝혀낸 사람이다.
그는 왜 그토록 일리아드의
이야기에 매료되었으며
왜 평생의 꿈으로 그 이야기의
진원지를 찾겠다는 원을 세웠을까?
어떤 특정한 장소에 대해
강한 매력을 느끼는
사람 중에는 그 사람이 전생에
그곳에서 살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 사람의 잠재의식 속에
남아있는 그때의 기억의 입자가
어떤 사물을 대하거나
그와 관계되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무의식적 사고에서
그때의 기억의 입자들이
강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그 말을 전제로 한다면 어쩌면
하인리히 술리만은
'일리아드' 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자신의 전생을 따라
그렇게 트로이의
유적들을 찾아갔는지도 모른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의 영웅이었던
조비 패튼장군의
이야기가 있는데,
자신의 전생이 있음을
확신하게 된 가장 결정적 경험은
전시에 프랑스 랑그레
마을에서 있었던
'데자부' 의 경험 때문이라고 한다.
패튼이 프랑스에서
사령관직을 맡았을 때
프랑스인 연락 장교가 그에게
로마의 유적을 보여주기로 했는데,
패튼은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그 지방의 유원지(원형극장,
연병장,대광장,
마르스와아폴로 신전)에
대해서 훤히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전생에 시저의
군대와 싸운 적이 뿐만 아니라
다른 생에서도 여러번
무장으로 살았다고 주장했다.
이 확신은 그가 죽기 전
해인 1944년에 쓴
---'유리를 통해 희미하게
(Through Glas Darkly)라는
시 구절에 강하게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유리를 통해 보듯이
희미하게 긴 세월동안
싸워왔던 나의 모습을 본다.
여러 가지 모습과 여러 가지
이름으로 싸우던 모습을
그러나 그것은 항상 나였었네."
사람들이 자신의 전생에 대한
기억을 잘 떠올리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 영혼은 기억을 가지고 있으나
그 영적 자아의 의식이
육체라는 외피에 가려서
그 기억이 가지고
있는 파동의 입자를
그 자체의 면에 충분히
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전생을 기억하지도
또한 알지도 못한다.
그래서 전생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태어나 살아오면서
자신의 옆을 분명 스쳐간
많은 이야기들을
다 기억하지 못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므로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증거는 되지 못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5년 전의 오늘 바로 이 시간에
당신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하고 묻는다면
그 물음에 대한 정확한 답을
하는 사람은 아마 드물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그 사실들을
기억해 내지 못한다고 해서
결코 그 사람이 그 시간을
거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분명 강물이 흐르듯
그 사람의 곁으로
그때의 시간들이 지나갔어도
단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때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예외적인
사항으로 그 중에서
현재의식의
기억이라는 영역에는
세밀한 것은 잊어도 어떤
사건의 큰 줄거리는 남아 있어
그 기억인자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인간의 망각과 기억의 퇴화층에
살아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그 기억인자가
어떤 특별한 수련이나
수행을 통한 공간,
또는 꿈으로 표현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지 못해
그 사실 유무를
알지 못한다고 해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전생이 있다.
죄인이 잘살고 착한 사람들이
가난하게 사는 세상을 보면
정의가 부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러 생을 함께 놓고 보면,
정의는 확실히
존재하는 것을 알수 있다.
이와 같이
수많은 생을 고려해야만
인생의 기쁨과 고통 그리고
불평등이 정당화될 수 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우리 자신이 일으켰다는
것을 인정 한다면
--- '우연의 일치'...
'뜻밖의 사고'... '불공평함' 과
같은 말들은 사용할수 없게 될 것이다.
인간의 영혼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환생이라는 계단을 따라
수많은 생을 거쳐
자아실현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오늘도 착하고
선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열심히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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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은 있다 ----박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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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5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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