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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오선사 유트뷰 바로가기 https://youtu.be/8he2dnwR3Po
운문록 실중어요(室中語要) 62. 무엇이 스님의 불법(佛法)입니까?
[운문선사가 한 때 법을 보이셨다.
"티끌 하나 일자마자 온 누리를 다 받아들인다." 하신 낙포(洛浦)스님의 게송을 들려주고는 말씀하셨다.]
여기서 등장하는 낙포 원안선사는 앞에서 소개한 협산 선회선사의 동시대 살았든 선문염송에는 수많은 공안들이 등장하는 선사였지만
대중에게는 그리 알려지지 않은 무위진인이라고 보입니다.
낙포스님의 게송인 "티끌 하나 일자마자 온 누리를 다 받아들인다."는 말은 무슨 뜻을 나타낸 말씀일까요?
작은 티끌 하나가 일자마자 온 누리를 다 받아들인다라는 말씀은
신심명에서 일미진중(一微塵中) 함시방(含十方)이란 말과 같은 뜻이지요 즉 모든 색은 미진들이 모여서 이루어 진 것이라는 뜻이니 우리의 몸도 수억만개의 세포들이 인연따라 모여서 이루어 지듯이 그 각자의 세포는 내 몸이라고 하지만 사실 내가 여태 살면서 잡아 먹은 음식들의 변형된 애느지일 뿐입니다.
그럼 이 몸은 내 마음을 알아 듣숩니까? 한 세포도 내 마음되로 되지를 않습니다. 세포는 각자 나름되로 인연따라 생겼다 사라지는 것이지 나의 세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지수화풍으로 인연따라 모여든 한 집합체이지만 내 마음되로 되지 않게 때문에 아프고 살이찌고 살이 빠지고 하지만 이 삶은 작자의 세포 자체로서도 또 하나 하나가 다 자기의 생이 있고 번식하고 그 기능을 하나 지치면 소멸되는 자율신경을 가지고 활동함으로 나의 몸하나도 내 마음되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물질은 그 인연인 12연기법으로 이루지고 조금 주하다 변형하여 사라지는 것인 것처럼 모든 색을 다 인연화합의 결과물이지 그 자체의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몸을 환화공신(幻化空身)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일미진중함시방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조그마한 티끌 속에도 온 시방세계의 성품이 다 같이 들어 있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은 다 인연지소생(因緣之所生)이라 했든 것입니다. 중국 선종사에서 본다면 스승과 제자들의 선문답이 주로 인용되고 있는데 여기서 협산 선회선사와 낙포 원안선사의 선문답을 조금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옛부터 승려들의 수행방식은 여러 곳을 행각하면서 많은 스승을 찾아다니는 것이 상례였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스님을 ‘운수(雲水)’라고 부른다. 또 자신을 깨우쳐 줄 참된 스승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인연이 닿아야 한다. 현생에서 뿐만 아니라 숙세의 인연이 있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자신의 스승이 된다.
선에서의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더욱 엄밀하다. 선에서는 특히 믿음 즉 신[信]을 중요시 여기는데, 그 믿음은 스승에 대한 믿음임과 동시에 불법에 대한 믿음이다. 스승은 불법을 깨우쳐 주는 존재이기에 더욱 소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스승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법을 물려줄 제자를 잘 선택해야 한다. 이번 회에서는 선에서의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선사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것은 중국 당대(唐代)의 선자덕성(船子德誠)선사와 그 제자인 협산선회(夾山善會) 그리고 낙포원안(洛浦元安)선사에 관한 것이다.
먼저 선자덕성(船子德誠, 생몰연대 미상)선사는 성도 알 수 없고 생애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없다. 깨친 후 나루터에서 배를 가지고 사람들을 실어 나르면서 여생을 보냈기 때문에 ‘선자화상’이라고 불린다. 약산유엄의 제자에는 운암담성·선자덕성·천황도오의 세 사람이 있었는데, 이들은 유엄이 입적한 뒤에 따로 흩어져서 인적이 드문 곳에서 수행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선자선사는 도오에게 부탁하기를 ‘나는 소주(蘇州)의 화정현(花亭縣)으로 가서 조그만 배를 구해 물위에 띄우고 즐길 터이니, 그동안 영리한 이를 만나거든 그를 내게로 보내주시오’하고 말해 두었다. 몇 년 후 도오는 이미 좌주(座主: 교학에 뛰어난 승려)로서 이름 높았던 협산선회를 만나게 되었다. 협산이 뛰어난 법기임을 짐작한 도오는 그에게 선자덕성선사를 만날 것을 권하였다. 협산은 그날 밤 바로 길을 떠나 곧장 강가에 이르자 선자선사가 물었다. ‘좌주께서는 어느 절에 머무시는가?’. 협산 ‘절이라면 머물지 않고, 머무르면 절이 아닙니다’. 선자 ‘어째서 머무르지 않는가?’. 협산 ‘눈앞에 절이 없습니다’. 선자 ‘어디서 공부를 했는가?’. 협산 ‘눈과 귀로 이르지 못하는 곳입니다’. 협산이 자신의 법을 이을만한 근기임을 직감한 선자선사는 ‘날마다 곧은 낚시로 고기를 낚다가 오늘에야 한 마리 낚았도다’고 감탄하였다고 전한다.
"어떤 것이 협산의 경지입니까?"
"원숭이가 새끼를 안고 푸른 산으로 돌아가니
새가 꽃을 물고 푸른바위 앞에 떨어뜨린다."
선자선사가 도오에게 미리 ‘영리한 이를 만나거든 내게로 보내주시오’라고 부탁해 둔 것은 협산선사와의 만남을 예견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위에서 선자선사가 매일 낚시를 한 것은 훌륭한 제자를 낚기 위한 것이라는 구절은, 통일신라시대의 순지(順之) 선사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형상화한 사대오상(四對五相) 가운데 조입색속상(釣入索續相)을 연상시킨다. 조입색속상이란 낚시대를 드리워서 후계자를 구하는 것을 말한다
《조당집》에서는 선자선사와 협산선사의 만남을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에 비유해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작은 배 띄운 지 몇 십년동안 일범경주삭십년(一泛輕舟數十年)
바람과 파도 따라 인연에 맡기었네.수풍축낭임인연(隨風逐浪任因緣)
그저 종자기가 풍류를 안다는 말을 할 뿐 지도자기능변률(只道子期能辨律)좌주가 선을 참구할 줄이야 뉘 알았으리오 수지좌주장참선(誰知座主將參禪)
종자기와 백아의 고사에 대해서는 지면관계상 서술하지 않겠지만,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지음(知音)’이라고 하는 것은 이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제자인 협산을 만난 선자선사는 그 후 배를 버리고 잠적해 버렸다고 한다.
협산선회(夾山善會, 805~881)선사의 속성은 요(寥)씨이며, 오늘날의 광주(廣州)사람이다. 선자덕성의 법을 이어받고는 예주(澧州) 석문현(石門縣) 협산(夾山)에 영천원(靈泉院)을 개당하여 제 1세가 되었다. 협산 영천원은 원오극근이 《벽암록》을 강의한 곳으로도 유명한데, 원오가 후대 협산 영천원에 거주하면서 설두중현이 편찬한 《설두송고(雪竇頌古)》를 강의한 것이 바로 《벽암록》이다. 그런데 벽암(碧巖)이란 이름은 바로 협산선회가 읊은 다음의 시에서 유래한다. 《조당집》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나수재(羅秀才)가 어느 날 선사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협산의 경지입니까?” 그러자 협산선사가 읊기를 “원숭이가 새끼를 안고 푸른 산으로 돌아가니, 새가 꽃을 물고 푸른 바위 앞에 떨어뜨린다.”[원포자귀청장리(猿抱子歸靑嶂裏), 조㣲화낙벽암전(鳥㣲華落碧巖前).]
《벽암록》은 송대의 대표적인 공안집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읽혀지지 않았지만, 일본에서는 대단히 중시되었다. 그런데 협산도 스승인 선자선사와의 첫 만남을 대단히 중시하고 있다. 특히 선자선사와의 문답 중 ‘눈앞에 절이 없습니다’를 ‘눈앞에 법이 없습니다목전무법(目前無法)’로 고치고 이를 게송으로 만들고는, 자신을 찾아오는 수행자에게 항상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눈앞에 법이 없음은 목전무법(目前無法)
뜻이 눈앞에 있음이니 의재목전(意在目前)
그는 눈앞의 법도 아니며 타부시목전법(他不是目前法)
귀와 눈으로 미칠 바도 아니다. 비이목지소도(非耳目之所到)
“내 그대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으나 이것이 내가 은사를 뵙던 인연이며 주머니 속의 보물이다. 가지고 가서 제방에 이야기하여 누군가가 따져서 깨뜨리면 다시 오지 말고, 만일 아무도 따져서 깨뜨리는 이가 없거든 돌아오라.”
그런데 이 ‘눈앞에 법이 없다’는 선자선사의 설법을 협산은 제자인 낙포원안(洛浦元安, 834~898)을 시험하는 데도 사용하고 있었다.
낙포는 협산선사를 뵙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랫동안 종풍을 흠모하였습니다. 한 말씀 내려주십시오.” 그러자 협산이 말했다. “눈앞에 법이 없느니라.” 낙포가 이에 “비껴가지 마십시오.”하니 협산은 “산과 개울이 각각 달라 그대 마음대로 천하사람의 혀끝을 자르지만, 혀 없는 사람이 말을 하는 것이야 어찌하겠는가? 그대는 다만 살인도(殺人刀)가 있는 것만 알 뿐 활인검(活人劍)은 없구나. 노승에게는 살인도도 있고 활인검도 있다.”했다.
여기서 보면 ‘눈앞에 법이 없다는 목전무법[目前無法]’의 구절을 스승인 선자덕성과 제자인 협산선회가 모두 중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협산의 제자인 낙포원안도 이 구절을 중요시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들처럼 스승과 제자가 인연이 맞아서 부자(父子)의 연을 맺으면 다행이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그래서 선림에서는 ‘모르는 사람 앞에서는 법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한다. 낙포원안은 임종할 때 문답으로 시험한 끝에 종상좌(從上座)에게 법을 물려주고자 하여 밤에 조용히 불렀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이 게송을 들려주고는 ‘이 네 구절에서 중심이 되는 중요한 구절은 무엇인가?’하고 물었다. 그러나 종상좌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낙포는 가슴을 치면서 곡을 하였고, 법을 물려받지 못한 종상좌는 바로 절을 떠난 뒤 소식이 끊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낙포의 법을 이은 제자 가운데 종상좌는 보이지 않는다. 선림에서의 사제관계는 이와 같이 준엄한 것이었다.라고 솔로라는 학자는 말하고 있다,
위에서 운문선사가 제시한 낙포스님의 게송을 들려주시고는 이와 같이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바로 깨달아 아는 것이 바로 조사선의 기풍이니 아무도 대답이 없자 운문선사는 또한 깨달음의 경지를 예시하였다.
["조과(鳥寡)*스님이 실 한 오라기를 뽑아드니 누군가가 그 자리에서 깨닫는군."]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일언지하에 깨달았습니까? ㅎㅎㅎㅎㅎㅎㅎㅎㅎ
이 한 마디의 실상은 이러합니다, 그 내용을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과 도림(鳥寡道林)스님에게 회통(會通)시자라는 이가 있었는데, 하루는 떠난다고 하직을 하니 도림스님이 말하였다.
"어디로 가려는가?"]
여기서 왜 이런 말이 나왔을까요? 조과 도림스님은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를 깨달은 뒤에 수행을 했어 깨달음이 얻어지는 것이 아닌것이며 자연의 법칙인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가 오직 진실여상한 도임을 현실적으로 삶자체에 적용하면서 홀로 밀림속에서 나무위에다가 집을 짖고 마치 새들이 둥지를 틀어 지은 까치집같이 짖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공기로 숨쉬고 배고프면 산나물이나 약초뿌리를 케어서 먹고 그렇게 자연과 하나가되어 살아가는 진정한 도인이였든 모양인데 회통이란 시자가 있었는데 도인이라 해서 찾아왔는데 매일 일이나 시키고 불법에 대하여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불법을 배우려고 왔는데 경전이나 신통술이나 아니면 비범한 무슨 행위를 하는 것도 아니고 매일 나무위에 올라가 잠이나 자는 스승 밑에서는 배울것이 없다고 판단하여 다른 곳에 계시는 큰 스님을 찾아가 불법을 배워야겠다고 이렇게 조과 도림선사에게 작별을 고하는 찰나인 것입니다.
그러니 조과스님은 "어디로 가려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니 회통시자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저는 법을 알기위해 출가하였는데 스님께서 가르쳐주시지 않으므로 이제 여기저기 다니면서 불법(佛法)을 배우고자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시자가 한 말은 여기저기 다니면서 불법(佛法)을 배우려 한다는 말을 끄네 들었다.
이 소리를 들은 조과선사는 이렇게 답을 합니다.
["불법(佛法)쯤이라면 내게도 약간은 있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불법(佛法)이 무엇입니까? 불법은 진리(眞理)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럼 진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부처님도 무유정법(無有正法)이라 본래부터 정해진 법이 없다라고 하시였습니다.
즉 진리란 무엇을 진리라고 합니까? 진리는 삼라만상의 펼쳐져 있는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가 진리인 것입니다. 크게 본다면 우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이치가 진리이며, 산하대지 비금조수 초목총림 일체시 일체처가 있는 그대로 진리인 것입니다.
오직 중생들이 이것을 모르니 진리라는 것이 어디에 정해진 법이 있다고 믿고 따르는 미련한 동물이나 식물이나 유정물들이 이 진리의 자체를 모르니 배우고 익히고 수행하여 찾아지는 것이 원래부터 정해진 진리인 줄 착각하고 살아간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조과선사는 자연의 법칙인 비금조수(飛禽鳥獸) 초목총림(草木叢林) 그 자체가 진리의 화현임을 다 깨달아 마음마져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을 실천하고 있는데 지금 여기를 떠났어 불법이 있는 곳을 찾아 떠난다는 제자에게 불법이라니 불법이 그대로 진리이고 진리는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가 진리인데 불법을 찾으려 간다니 자기에게도 불법이라면 나에게도 있다고 말씀을 하시니 시자는 다시 이렇게 묻습니다.
["무엇이 스님의 불법(佛法)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니 조과선사는 이렇게 행동으로 보여주는 직설적인 방편을 베품니다.
{도림스님은 몸에서 실올을 하나 뽑아서 불어 날리니 회통시자는 여기서 묘(妙)한 이치(理致)를 깨달았다. 그리하여 포모시자(布毛侍者)라는 별명이 붙었다.}라고 하십니다.
도림스님은 몸에서 실올을 하나 뽑아서 불어 날리니 회통시자는 여기서 어떻게 묘한 이치를 깨달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진리는 진실여상한 이치이며 논리이니 이치는 들어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진행되는 법칙이 자연적으로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것이 그 이치이고 불이 떠겁다는 것이 이치이며 성품인 것입니다. 그렇게 이치는 그 모든 것인 자연의 이치가 정확하게 그렇게 되어 있었드라는 것을 아는 것이 이치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주의 법칙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 모든 것이 원래의 성품이 그대로 이치인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움직임 자체가 이치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드러남의 모든 것이 다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가 진리이며 진실여상한 형상인 것입니다. 이 형상으로 이치를 터득하는 것이 진리를 터득하는 길입니다.
여기서 재가 불자인 백낙천이라는 중국의 고관대작이 조과스님과의 대화에서 깨달음을 얻었든 한 이야기를 해 드리고 슆습니다.
한 때 고관대작인 백남천이 조과선사의 이름을 듣고 조과선사를 찾아 갔습니다.
그런데 조과스님은 백낙천이 왔느데도 처다도 보지 않고 소나무 위에서 백낙천을 내려다 보면서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습니다.
항주 자사가 된 시인 백낙천이 도림에게 방문을 요청합니다.
도림은 백낙천의 거듭된 요청에도 냉정히 거절할 뿐입니다.
오기가 동한 백낙천이 도력을 점검하고자 도림을 찾아 나섭니다.
백낙천을 맞아 나무에서 내려오는 고승의 모습이 볼품이 없습니다.
백낙천은 혼잣말로 ‘막상 보니 별 볼품도 없군’이라 중얼거리면서도 정중하게 ‘선사께서는 왜 위험한 나무 위에 계십니까?’라 묻습니다.
이에 도림은 ‘그대는 귀는 귀하게 여기면서 눈은 천히 보는가?’라며 ‘내가 보기에 나무 위 나보다는 세상지식으로 교만해져 번뇌·탐욕이 가득한 그대가 진정 위험합니다.’라고 답을 합니다.
도림의 기개에 눌린 백낙천은 스님에게 불법의 대의를 묻습니다.
도림이 답하길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重善奉行) 자정기의(自淨己義) 시제불교(是諸佛敎)’라는 답을 내립니다.
나쁜 짓 말고, 착한 일 받들며, 자기 마음 맑게 하면 이게 부처다!
백낙천이 실망하여 ‘삼척동자도 아는 것 아닙니까?’ 라 말합니다.
도림은 ‘다만 팔십 노인도 행하기는 어려운 일이지요.’라 답합니다.
이 말을 들은 백낙천이 비로소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도림(道林 741~824)은 나무 위에서 지내 조과(鳥窠)선사로 불린 고승, 백낙천(樂天 772~846)은 백거이(白居易)라고도 합니다.
성불인연 맺으소서 옴 바아라 믹~~~~~~~!!!!!!!!!!
조사선(祖師禪) 운문록(雲門錄)을 들어시어
인연성불(因緣成佛) 하시어서 붓다(佛陀) 같이 살아가소!
일승법문을 시절인연삼아 인연성불 하옵시고 대원성취 하옵소서 !
원오선원 명상쉼터 천안시 두정동 611_1번지 5층(041)551 8546
무명 납승 원오선사 010 8748 6006 옴~바아라 믹!!!_()_
탁발성원 보시구좌 농협 351 1042 1598 93 대한불교 정토회

첫댓글 조사선(祖師禪) 운문록을 통하여 한국불교 1300년의 선사중에서 선어록의 해설서를 쓰신분은 처음입니다. 조사선(祖師禪)의 보설을 통하여 인연성불 하시어서 본불본락 하옵소서 옴~바아라 믹!!!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