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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고문치사사건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중 고문, 폭행으로 사망한 사건입니다.
경찰은 단순 쇼크사로 발표하였으나, 물고문과 전기고문의 심증을 굳히게 하는 부검의의 증언으로 사건 발생 5일 만인 19일 물고문 사실을 공식 시인하고, 수사경관 조한경과 강진규를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한 혐의로 구속하였습니다.
이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설명을 통하여 치안감 박처원과 경정 유정방, 박원택 등 대공간부 3명이 이 사건을 축소 조작하였고, 고문가담 경관이 5명이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습니다.
이 사건과 관련된 일련의 추모집회와 규탄대회는 개헌 논의와 연결되면서 6월 항쟁으로 이어져 1987년 민주화운동의 촉발제가 되었습니다.
↑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고 박종철 군 100일 추모제에 참석한 박군의 어머니 장차순 여사와 누이 은숙씨. 1987년 4월 24일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회장이었던 박종철씨가 죽었다.
고인은 1987년 1월 13일 자정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됐다.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서울대 학생운동 비공개 조직인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던 박종운씨를 잡기 위해 연행된 것이다.
↑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이 고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은폐,조작사건의 재수사를 받기 위해 검찰에 소환되고 있다. 1988년 1월 14일
고 박종철 씨 죽음에 의문을 품은 건 언론이었다.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가 한 검찰 간부의 "경찰, 큰일 났어"라고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에 단서를 잡고 1월 14일 '경찰에서 조사 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기사가 나간 다음날, 당시 강민창 치안 본부장은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 군의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 유명한 '탁 치니 억'은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입을 통해 나온 발언이었다.
↑ 박종철 군이 사망한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공안 당국은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고 박종철 씨에게 박종운 씨 행방을 물으며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했고, 고인은 14일 오전 11시 45분 경 중앙대 용산병원으로 옮겨졌을 당시 이미 숨져 있었다.
↑ 오연상, 황적준, 최환
그러나 1987년 1월14일 오전 11시45분쯤 외부인으로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수사 분실 509호실에서 박종철을 최초로 본 사람은 중앙대 부속병원 전임강사 오연상씨(내과 전문의)였다.
용산병원으로 달려간 윤상삼 기자(작고)는 오연상씨로부터 "내가 대공분실 509호 조사실에 갔을 때 박 군은 이미 숨져 있었다. 물 고문의 흔적이 있었다" 는 진술을 들어 이를 특종 보도한다.
"30분간 응급조치를 했지만 박군은 이미 사망한 뒤였다." 그 뒤 철저한 감시를 받던 오 교수는 화장실에서 만난 한 기자에게 "박군의 복무 팽만이 심했고 폐에서 수포음이 들렸다"며 '물고문' 정황을 전했다.
나중에 몰려 온 기자들에게도 물고문 정황을 말해줬고 검찰과 경찰 조사를 번갈아가며 받았다.
훗날 오연상 교수는 "머리 속이 복잡했고 상황이 어렵다는 것은 알았지만 사실대로 얘기하는 것이 옳다고 결심했다"고 회고한다.
경찰은 14일 밤에 은폐를 위하여 화장할 계획이었으나 최환 부장 검사는 사체 보존 명령을 내렸다. 사건 지휘는 그날 밤 당직이었던 안상수 검사가 맡았다
1987년 1월 15일 오후 6시가 넘어 한양대 병원에서 부검했다. 부검 결과 온 몸에 피멍이 들고 엄지와 검지간 출혈 흔적과 사다구니, 폐등이 훼손되어 있었으며 복부가 부풀어 있었고 폐에서 수포음이 들렸다.
부검은 국립 과학 수사 연구소 부검의 황적준 박사와 한양대 박동호 교수가 맡았다. 경찰의 협박과 회유를 물리치고 1월 17일 황적순 박사는 보고서를 작성하였으며 1년 뒤 부검 과정에서 받았던 경찰의 회유와 협박을 받은 내용을 적은 일기장을 언론에 공개하여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구속되었다.
전기 고문과 물고문에 의한 살인 사실을 숨길 수 없게 된 경찰은 서둘러 조한경등 2명이 박종철군을 물고문하여 살해했다고 이 사건에 관하여 축소 은폐 보도를 하고 가족 허락도 없이 벽제 화장터에서 시신을 화장해버리는 등 증거 인멸을 시도했다.
사건 수습을 위해 내무부 장관에 임명된 정호용은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며 고문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했는데, 그는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지목되던 사람이었기에 이 말 역시 한동안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사건 당시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으로 재직하던 안유 전 청장은 사건의 내막을 교도소에 수감중이던 이부영(전 열린우리당 의장)에게 알린다.
이부영은 87년 2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영등포교도소에 수감중이었고, 박종철을 죽인 사람이 3명(치안감 박처원, 경정 유정방, 박원택) 더 있음을 한재동 교도관에게 전했고 이것은 다시 김정남(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 수석)에게 전달됐다
↑ 김승훈 신부님
당시 전민련 상임의장이였던 이부영과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의 노력으로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 운동 7주기 주도 미사 도중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의 진상이 소작되었음을 폭로하였다.
↑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 미사
대공 경찰의 대부라는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의 주도아래 모두 5명이 가담한 고문 치사 사건을 단 2명만이 고문에 가담한 것으로 꾸미고 총대를 멘 2명에게는 거액의 돈을 주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당시 각계 각층의 인사들은 "우리 모두가 상주다"라고 외치고 정권규탄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국회 내무위 신순범 평민당 의원(오른쪽)등 야당 의원들이 박종철군이 물고문을 받다 사망한 현장을 돌아보고 있다.
당시 동아일보 만평
1987년 2월 7일 부산 민주 시민 협의회 주최의 고 박종철군 추모 시민 대회가 열린 부산 제일 극장앞에서 경찰이 시위대를 끌어내고 있다.
↑ 서울대 졸업생과 재학생 등 6백여명의 학생이 반정부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와 고 박종철 군의 대형영정을 앞세우고 박 군의 명예 졸업상 수여를 요구하며 졸업식장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1988.2.26
↑ 1990년 1월 14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박종철 3주기 추모식 모습
서울 갈월동 옛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 보호 센터)
<안상수>
당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세상에 알린것이 본인의 정의감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안상수 대표.
1995년 출간한 <안검사의 일기>에서 자신과 박종철씨의 인연을 소개하면서 유명해졌으며, 이듬해인 1996년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됐다.
하지만 당시 남영동 대공분실 형사들이 서울지검 공안부로 와서 바로 화장하라고 주장했을때
은폐를 저지하고 당시 안상수 검사에게 부검을 하라고 강력히 지시한 사람은 안상수의 상관 '최환' 부장검사였다
최환 부장검사는 고위당국자, 안기부, 청와대등을 통해 들어오는 압박을 막아내고 안상수에게 부검을 지시했다. 이후 최환검사는 수사 일선에서 배제되기까지 했다.
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09년 채택한 진실 화해 위원회의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박종철 고문치사를 밝혀낸 것은 안상수 대표가 아닌 공안부장이었던 최환 검사였으며, 안상수는 고문 가담자가 구속된 2명 외에 3명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관계기관대책회의, 안기부 관계자의 요구에 따라 침묵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박종철기념사업회에서도 성명을 내 '모든 인세를 박종철기념사업회로 기증하겠다'는 것을 거부했으며, “안 대표는 자신의 입신을 위해 박종철 열사의 의로운 죽음을 이용하는 행위를 즉각 중단하고 당시 담당검사로서 진실을 고백하고 유족과 국민에게 사과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 박종철이 목숨걸고 보호하려했던 박종운
군사독재를 옹호하던 한나라당에, 박종철 고문에 적극 가담한 걸로 알려진 정형근이 있는 그 한나라당에, 박종철이 목숨을 잃어가면서 보호해 주려했던 그 박종운이 한나라당에 503 박근혜의 지원을 받고 입성했다.
1987년 당시 '박종철(朴鍾哲)군 고문치사사건' 당시 수배학생이었던 서울대 박종운(朴鍾雲), 정태근(鄭泰根) 전 연세대, 고진화(高鎭和) 전 성균관대, 오경훈(吳慶勳) 전 서울대 총학생회장 등 학생운동권 출신 4명은 나중에 한나라당에 입당하게 된다.
한나라당 이사철의원은 연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정태근이 검찰에 잡혔을때 그를 담당했던 공안 검사였다.
서슬퍼렇던 공안검사와 운동권 학생이 이젠 같은 한나라당에 속해 같은 편이 되어 버렸다
왼쪽부터 김윤석 (영화 속 박처장 역할), 박종부 (故 박종철의 형), 여진구 (영화 속 故 박종철 역할), 김종수(영화 속 故 박종철의 아버지 역할)
故박종철 열사의 형인 박종부는 “감독, 배우 그리고 모든 스탭 여러분들 영화 만드시느라 고생하셨다. 좋은 영화 만들어주신 제작사에도 감사드린다. 흥행에도 성공하고, 특히 젊은 세대가 많이 관람하여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역사의 한 페이지를 소중히 간직해주길 바란다”며 진심 어린 감사 인사를 전했다.
하정우 (영화 속 최검사 역할), 최환 (실제 최검사 캐릭터의 모티브가 된 인물)
유해진 (영화 속 교도관 '한병용' 역할), 한재동 (실제 한병용 캐릭터의 모티브가 된 인물)
이희준 (영화 속 윤기자 역할), 엄영숙 (실제 윤기자 캐릭터의 모티브가 된 故윤상삼 기자 아내)
故 윤상삼 기자의 아내 엄영숙은
“정말 잘 만든 좋은 영화다. 제 또래의 사람들은 30년 전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고, 2,30대 젊은이들은 꼭 보기를 권하고 싶다. 끝으로, 영화를 만들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며 1987년 격동의 시간을 진정성 있게 담은 영화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고(故)문익환 목사의 아들 문성근, 고(故)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을 이끌었던 우현
고(故)문익환 목사의 아들인 문성근 배우가 당시 정권 실세인 안기부장 역을 맡은 점 역시 눈길을 끈다. 문익환 목사는 군부독재시절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으며 이후에도 꾸준히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매진했던 인물로, 영화 '1987' 엔딩 영상에서 오열하며 “박종철 열사여, 이한열 열사여!”를 외치는 인물이 바로 문익환 목사다. 문성근은 “국민이 직접 공동체를 발전시키는 과정을 그리면서 우리 스스로에게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영화가 되면 좋겠다”며 영화에 대한 애정과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
“어떤 역할로라도 참여하고 싶다”, ‘셀프 캐스팅’ 조우진, 정인기
박종철 삼촌 역으로 등장한 조우진, 진실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하는 김승훈 신부 역할의 정인기 역시 ‘셀프 캐스팅’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같은 배우들의 이례적인 참여는 배우들부터 알아본 영화의 진정성과 배역의 크고 작음에도 상관없이 펼쳐진 열연에 대한 기대감을 높인다.
고(故)박종철 열사 고등학교 후배 김윤석·오달수
사건의 은폐를 지시하는 대공수사처장 역의 김윤석 배우는 고(故)박종철 열사의 고등학교 2년 후배로 알려졌다. 따라서 명실상부 연기파 배우인 그에게도 '1987'에 임하는 무게감과 진정성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김윤석은 “'1987' 출연이 내가 올해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라고 만족감을 표하면서도, “고(故)박종철 열사의 후배로서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라는 대사를 할 줄 몰랐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일간지 사회부장으로 짧게 얼굴을 비췄던 오달수 배우 역시 박종철 열사의 후배인 것으로 알려져 작은 배역에도 출연을 결정했던 그의 진정성을 짐작하게 한다. 오달수 배우는 또한 자발적으로 “작은 배역이라도 맡고 싶다”며 제작진을 찾아가 이른바 ‘셀프 캐스팅’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오연상 의사
장세동 안기부장
유해진:한병용(한재동+전병용) - 한재동 님
김승훈 신부님
이부영 해직 기자
김정남
최환 검사
강민창 치안본부장
박처원 치안감
이한열 열사
박종철 열사
함세웅 신부
안윤 보안계장
윤상삼 기자
첫댓글 실제 사진과 더불어 영화 뒷얘기까지 잘 정리해주셨어요 감사히 잘 읽었네요👍👍
따듯한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