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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풀어듣는 박근혜와 최태민의 너무나 끈끈한 우연의 일치들입니다.
길지만 듣다보면 벌써 끝나? 이렇게 되더라구요. ㅋㅋㅋㅋ
박근혜가 최태민을 정말 사랑하긴 했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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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부터 1979년 유신헌법이 재정되고 긴급조치가 횡행하던 그 최악의 독재기간 동안
독재의 2인자였던 박근혜의 족적을 따라가 보려고 합니다.
그 족적은 놀랍게도 한사람과 놀랍게도 겹칩니다.
그 사람은 최태민이라는 사람이였습니다.
박근혜와 최태민 너무한 끈끈한 우연의 일치들
"구국 여성봉사단이라는 단체가 얼마나 얼마나 많은 부정을 저질러왔고
따라서 국민은 특히 여성단체의 원성이 대상이 되어왔는지는 잘 알려져있지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영(박근혜를 지칭)이 관여하고 있다는 이유로 말도 못꺼내고
중앙정보부장인 본인에게 호소할 정도였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말햇던 김재규가 항소이유서에 쓴 글이다.
물론 박근혜는 이런 김재규의 증언을 인정하지 않는다.
박근혜 :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아버지를 암살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정권에서도 저의 비리에 대해 이잡듯이 뒤졌는데
아무것도 밝혔진 것이 없지 않았습니까?
이잡듯이 뒤졌는지 아닌지는 그건 박근혜의 본인만의 주장이고요.
구국선교단 최태민과 박근혜가 주축
최태민이 이런 저런 얘기가 많았어요.
근혜: 최태민은 아주 선량한 사람인데 왜 중앙정보부에서 모략을 해서
아버지(박정희)의 생각을 흐려놓는 겁니까?
최모라는 목사가 구군선교단을 조작해서 근혜씨에게 가세했다
큰 딸이 이용될 가능성이 있어서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최태민씨가 얼마나 골치꺼리였는지는 다들 얘기를 했으나
근혜의 일이라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했다.
퍼스트레이디의 역활을 박근혜가 수행하였다.
대통령의 비서실장들조차도 최태민을 어떻게 하지 못했던 이유는
최태민이 박근혜와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이였다.
최태민은 목사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진짜 목사였을까요?
스스로를 태자마마라고 칭합니다.
사이비목사 사기 횡령 추문 이권개입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최태민은 강원도로 쫒겨났다.
그러자, 박근혜는 최태민을 육영재단으로 다시 불러들여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이에 동생 근령이 최태민의 횡령에 대해 밝혔다.
근혜 : 최씨는 재단일에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순전히 오해입니다.
이상하게도 박근혜의 측근 중에는 최태민과 관계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박근혜는 이 모든 것을 우연의 일치 혹은 몰랐다 라고 주장한다.
박근혜는 어떻게 최태민을 만났을까요?
김형욱 회고록에 나온 내용(최태민이 근혜를 처음 만나기 위해 편지를 쓴것)
"어머니가 돌아가신게 아니라 너의 시대를 열어주기 위해
어머니가 길을 비켜준것을 왜 모르겠느냐
너를 한국 나아가 아시아의 지도자로 키우기 위해 자리를 옮겼을 뿐이다.
어머니 목소리가 듣고 싶을때 나를 통하면 언제든지 들을수있다.
육여사가 꿈에 나타나
내 딸이 우매해 아무것도 모르고 슬퍼만 한다면서 이런 뜻을 전해달라고 했다."
박근혜의 최태민에 대한 이런 애착은 둘의 관계가 단순한 허구인지
혹은 소문처럼 진실인지 구분하기 어렵게 한다.
미국정보국 CIA 가 작성한 보고서에는
"박근혜의 인성 형성기에
최태민이 박근혜의 몸과 마음을 완전히 통제했으며 지배하였다."
우리의 관심은 최태민 그리고 박근혜의 사생활이 아닙니다.
공조직은 무시당하고 사조직으로 운영되는 용인술.
정권은 대통령은 혼자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박근혜의 용인술이 국가통치에 적용될 경우
어떻게 될까요?
이렇기 때문에 박근혜의 용인술은 냉혹한 검증를 받아야 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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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최태민 목사 사이에 출생한 아이, 미국 애리조나州에 살고있다는데…? | ||||||
최태민 목사 오래 추적한 언론인 TV 인터뷰에서 부인-그러면-
(서울-로스앤젤레스)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와 최태민 목사 사이에 한명의 자식이 탄생했다” 는 소리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아무런 증거없이 나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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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와 16년 동고동락 ‘최태민 미스터리’
지난 40년 가량 박근혜(60)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는 최태민(1912~1994)과의 관계에 대한 의혹이 자주 따라붙었다. 1974년 어머니 육영수가 총탄에 쓰러진 뒤 ‘퍼스트레이디’ 구실을 하던 박근혜는 ‘새마음봉사단’을 대외활동의 중심으로 삼았다. 최태민과 함께 운영했던 단체다. 사이비종교 ‘교주’였다는 설도 있어 최태민의 전력이 불분명하던 터에, 아버지 박정희도 20대의 딸이 그에게 현혹됐다고 생각해 불만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80년대 후반 전두환 정권이 끝나고 대외 활동을 재개한 박근혜는 최태민과 함께 새마음봉사단의 후신인 근화봉사단을 꾸린다. 동생 근령(58)과 대립했던 1990년 육영재단 분란의 배경에도, 최태민과 그의 딸 최순실(56)의 전횡 논란이 있었다. 1998년 국회의원이 된 뒤에는, 최태민의 사위(최순실의 남편) 정윤회(57)가 비서실장이란 호칭을 달고 등장한다. 2004년 박근혜가 당 대표가 되면서 정윤회는 종적을 감췄지만, 2007년 경선 때도, 지금도 그가 박근혜의 비선 조직을 이끌며 핵심 측근으로 활약중이라는 소문이 무성하다.
유신말기 새마음봉사단 함께 운영
최태민은 흔히 목사로 불린다. 1975년 4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종합총회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은 뒤부터 생긴 호칭이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와 전두환의 합동수사본부를 거치며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수사자료’를 보면, 그는 불교 승려가 된 적도 있었고 천주교 세례를 받기도 했다. ‘태민’이란 이름도 각종 가명을 포함해 7번째 이름이다. 1912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최태민은 1942~45년 황해도경의 순사였다. 해방 뒤 남쪽에 둥지를 튼 그는 이름을 상훈으로 바꾸고 강원도, 대전, 인천에서 경찰로 일했다. 이후 최태민은 군으로 자리를 옮겨, 육군과 해병대에서 ‘비공식 문관’으로 일했다. 최태민은 1951년 군을 떠나며 이름을 봉수로 바꾸고, 대한비누공업협회 이사장, 대한행정신문사 부사장 등을 지냈다. 전쟁이 끝난 뒤 1954년엔 김아무개씨와 결혼했다가, 김씨가 그를 여자 문제로 고소하자 부산 금화사로 도피했다. 곧장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됐고, 이름을 퇴운으로 바꿨다. 1년여 뒤 김씨와의 문제가 잠잠해지자 산에서 내려와 부산에서 전 부인 임아무개씨와 다시 결합했다. ‘수사 자료’는 임씨가 5번째, 김씨는 6번째 부인이라고 표기했으나, 1~4번째 부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월간조선>(2007년 7월호)은 별도의 자료를 인용해 최태민이 6명의 부인으로부터 모두 3남6녀를 두었다며 가계도를 제시한 바 있다.) 임씨와 결합한 뒤 경남 양산에서 ㄱ중학교를 설립해 교장에 취임한 최태민은 2년 만에 교장을 그만두고, 이후 몇가지 직책을 지냈다. 1965년엔 천일창고라는 회사의 회장으로 있다가 유가증권 위조혐의로 서울지검이 그를 입건하자 도피했다. 도피중이던 1969년엔 공해남이란 가명으로 등장해 서울 중림동 성당에서 영세를 받기도 했다. 70년대 들어 최태민은 서울과 대전 일대에서 난치병을 치료한다는 등 사이비 종교 행각을 벌였다. 불교, 기독교, 천도교를 종합했다는 교리를 내세웠고, 방민이란 가명을 쓰면서 ‘원자경’, ‘칙사’ 또는 ‘태자마마’라는 호칭을 자처했다.
최태민이 박근혜를 처음 만난 것이 이 무렵이다. 최태민은 1974년 육영수 사망 직후 박근혜에게 편지를 보냈다. <김형욱 회고록>은 편지 내용을 이렇게 전한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게 아니라 너의 시대를 열어 주기 위해 길을 비켜 주었다는 것, 네가 왜 모르느냐. 너를 한국, 나아가 아시아의 지도자로 키우기 위해 자리만 옮겼을 뿐이다. 어머니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 나를 통하면 항상 들을 수 있다. 육 여사가 꿈에 나타나 ‘내 딸이 우매해 아무 것도 모르고 슬퍼만 한다’면서 ‘이런 뜻을 전해달라’고 했다.” 이른바 ‘현몽(죽은 이가 꿈에 나타남)’이다. 최태민은 이를 부인했다. 그는 <가정조선>(1990년 10월호) 인터뷰에서 “‘현몽’ 등의 말이 대학 교육을 받은 박(근혜) 이사장에게 먹혀들 것 같아요?”라며 “‘현몽’이나 정식으로 접견 신청 내용 따위는 쓰지 않았다. ‘위로 말씀을 전하며 기회 있으면 한번 만나주시길 바랍니다’는 말로 끝맺었다”고 말했다. 박근혜도 현몽설을 부인했다. 박근혜는 1975년 3월6일 최태민을 청와대로 불러 대화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최태민은 외부 활동을 적극 권한 것으로 전해진다. 박근혜를 만난 뒤, 최태민은 목사 안수를 받는다. <월간중앙>(1993년 11월호)은 “(목사 직을) ‘돈 주고 샀다’는 것이 교계 관계자들의 중론이나 이 사실이 확인된 적은 없다. 분명한 한가지는, 목사 안수는 받았지만 신학대학이나 교단이 인정하는 신학교에서 신학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는 점”이라고 전했다. ‘태민’이라는 ‘마지막 이름’을 얻은 것도 이 즈음이다. 최태민 목사는 ‘대한구국선교단’을 발족하고 스스로 총재에 취임한다. 5월 임진강에서 연 ‘구국기도회’에는 2000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박근혜도 참석했다. 최태민의 즉석 제안으로 박근혜는 명예총재로 추대됐다. 이후 박근혜는 구국선교단 행사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고, 1976년 구국선교단은 ‘구국봉사단’으로, 2년 뒤인 1978년엔 다시 ‘새마음봉사단’으로 이름을 바꾼다. 바로 박근혜의 퍼스트레이디 경력의 핵심인 새마음운동의 본산이다. 10·26 뒤 전두환의 합동수사본부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최태민에 대한 ‘수사자료’엔 “형식상 모든 업무는 박근혜가 관장하였으나 실질적으로 비공식 고문격인 최태민이 전권을 위임받아 행정부, 정계, 경제계, 언론계 등 각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 봉사단 관계자는 “한마디로 미니 청와대였다”고도 했다. 최태민 주위에선 각종 이권 개입과 횡령, 사기 및 융자 알선 등 권력형 비리, 그리고 온갖 여성과의 스캔들 의혹이 들끓었다. 소문은 박정희 전 대통령 귀에도 들어갔다. 민정비서실과 중앙정보부 보고를 잇따라 받은 박정희는 1977년 9월 직접 최태민을 심문했다. 이른바 ‘친국’(임금이 직접 죄인을 심문함)이다. 대통령 서재에서 진행한 친국엔 중정의 김재규 부장과 백광현 국장이 동석했다. 박근혜도 참석해 “그런 일 없다”며 최태민을 옹호했다는 설도 있다. 박정희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검찰에 넘긴 뒤 검찰 판단에 따르겠다”고 했다. 하지만 최태민은 새마음봉사단의 명예총재(총재는 박근혜)를 맡는 등 10·26 때까지 박근혜의 옆을 지켰다.
‘박정희 친국’ 뒤에도 살아남아
10·26 뒤 김재규는 항소이유보충서에서 최태민을 언급한다. “본인이 결행한 10·26 혁명의 동기 가운데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 한 가지는, 총재 최태민, 명예총재 박근혜양으로 되어 있는 구국여성봉사단 문제이며, 본인은 최 목사의 부정행위를 상세히 조사해 박대통령에게 보고했지만 박대통령은 근혜양을 그 단체에서 손을 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양을 총재로 최태민 목사를 명예총재로 올려놓았다.”
최태민은 합수부가 진행하는 수사를 받는다. 전두환의 지시로 수사를 맡았던 당시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은 <신동아>(2007년 6월호) 인터뷰에서 “(최태민을) 강원도로 보내 활동하지 못하도록 했다. 조용하게 자숙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강원도에 그리 오래 두지는 않았다. 구체적 비리 혐의는 기억나는 것이 없고, 그가 기업체로부터 돈을 뜯어낸 것으로 확인된 게 얼마나 되는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박근혜의 연루 의혹은 없었다.”고 말했다. 새마음봉사단은 1980년 11월 강제해산 당한다. 박근혜는 육영재단과 영남대 등을 통해 사회활동을 이어간다. 최태민도 다시 등장한다. 박근혜는 1983년 1월 육영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3년 뒤 1986년부터 육영재단의 어린이회관에선 최태민의 전횡이 입길에 올랐다. <여성중앙> 1987년 10월호를 보면, 최태민에게 우선 보고를 해야 이사장(박근혜) 결재를 받을 수 있었으며, 최태민의 5번째 딸 최순실도 회관 운영에 개입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무렵 재단 잡지사 기자들의 파업과 직원들의 농성도, 모두 ‘외부 세력’이라고 표현된 최태민·최순실 부녀의 간섭이 원인이 됐다. 분란은 1990년 11월15일 박근혜가 동생 근령에게 이사장직을 넘길 때까지 계속됐다. 물러나는 박근혜는 “내가 누구에게 조종받는다는 것은 내 인격에 대한 모독”이라며 최태민의 전횡 의혹을 일축했다. 최태민은 이후 서울 역삼동 자택에 칩거한 것으로 전해지며, 1994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1994년 노환으로 세상 떴으나
최태민 사후에도 그의 그림자는 박근혜 곁에 남았다. 최순실의 남편 정윤회가 박근혜의 정계 입문 때부터 등장했다. 2002년 박근혜가 한나라당을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을 때는 비서실장을 맡았다. 박근혜가 한나라당 대표가 되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곁을 떠난 것으로 알려진 2004년 6월~2006년 5월에는 국회 입법보조원으로 등록했다. 한 전직 기자는 “최순실은 박근혜가 장충동에 살던 시절부터 말동무로 지낸온 것으로 들었다”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박근혜 의원실의 보좌진을 구성한 것도 정윤회인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박근혜는 2007년 후보 검증 청문회에서 정윤회의 등용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1998년 보궐선거에서) 대구 달성구에 국회의원으로 처음 나왔을 때다. 개인적으로 캠프를 차려 선거를 치르려니 전혀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상대 후보가 안기부 기조실장으로 실세의 기세가 등등했고 위협적인 상대였다. …그런 상황에서 정윤회씨가 돕겠다 해서 순수하게 도운 것이다. 그게 인연이 돼 국회의원 됐을 때 입법보조원으로…, 이후 당 대표 때 그만뒀다.” 2007년 7월 이명박 캠프에선 ‘박근혜의 국회 보좌진이 최태민과 친인척 관계다’, ‘박근혜 캠프의 홍윤식 전문가네트워크 위원장과 정윤회가 밀접한 관계다’ 등의 의혹을 제기했다. 전자에 대해선 해당 보좌진이 즉각 부인했고, 후자에 대해선 홍윤식이 최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지금까지 정윤회를 만나본 적도 없고 얼굴도 모른다”고 말했다. 박근혜는 최태민에 대해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힘들었을 때 흔들리지 않고 바로설 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분”이라고 말한다. 각종 의혹에 대해선 “의혹은 많이 제기됐지만 실체가 없었다. 한가지라도 사실이었다면 내가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겠나”라며 일축한다. 그러나 박근혜가 다시 대통령에 도전하는 오늘도 정윤회의 이름은 여의도를 떠돈다. 친박 내부에선 친박끼리 “내가 모르는 보고서가 올라간다”며, 정윤회 라인을 의심한다. 반대파는 박근혜나 친박의 결정이 이상하다 싶어서 또 정윤회 라인을 의심한다. <한겨레>는 각종 의혹에 대한 해명을 듣고자 6월부터 다양한 경로로 정윤회와의 접촉을 시도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2007년 경선 시기부터 많은 기자들이 그를 만나고자 했지만 성공한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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