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4년 2월 28일 연중 제7주간 금요일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마르코 10,1-12)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
말씀의 초대 원망은 못마땅하게 느끼는 마음이다. 지나치면 미움이나 분노로 바뀐다. 그러기에 인내로 극복하라고 한다. 구약의 욥은 모든 원망을 인내로 극복하였다. 그의 행복한 결말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 말해야 한다(제1독서).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예수님께서는 혼인을 창조 사업의 한 부분으로 말씀하신다. 그것도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이다. 그러므로 일부일처와 혼인의 불가해소성은 창조 질서에 속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그것도 못 들어? 한물갔구먼.’ 김칫독을 들려는데 움직이지 않는 겁니다. ‘벌써 늙었나?’ 헛웃음을 참고 있는 남편에게 아내가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아내가 무심코 던진 말에 남편은 기분이 틀어집니다. ‘내가 한물가면 누구 손해인데…….’ 밥도 먹지 않고 혼자 불쾌한 기분을 삭입니다. 그런데 아내는 저녁 안 먹느냐며 닦달합니다. 속이 좋지 않다며 방에서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내 마음도 모르는 아내. 우린 그냥 어색했습니다.”
☆☆☆
옛말에 “참을 인(忍)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다.”고 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참고 기다려야 할 일이 참 많습니다. 결혼하여 사는 것도 예외는 아닙니다. 부부가 서로 참아야 할 일이 많습니다. 오늘날 이혼하는 부부들이 많습니다. 서로 참아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친구들 사이에도, 직장 동료들 사이에도 참고 견뎌 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밤에 돌아오는 주인을 제대로 맞이하는 종이 되려면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준주성범」은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조처하시어 우리가 서로서로의 짐을 져야 할 것을 배우게 하셨으니, 이는 아무도 결점이 없는 사람이 없고, 짐이 없는 사람이 없고, 저 스스로 만족할 자 없고, 저 스스로 족히 지혜로운 자 없는 까닭이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 참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 같이 도와주고, 서로 가르쳐 주고, 서로 훈계함이 마땅할 것이다”(16,3).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몇 년 전, 영화 '타이타닉'의 주제가를 부른 세계적인 팝 가수 셀린 디온(Celine Dion)이 가수활동 중단을 선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당시 폭발적인 가창력과 맑은 음색을 지닌 '세계 최고의 여가수'로 불렸지요. 이렇게 인기정상을 달리던 그녀가 돌연 '부'와 '명예'를 거절하고 가정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러한 사연이 있다고 해요.
캐나다 출신인 셀린 디온이 가수가 된 것은 열두 살 때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노래가 담긴 테이프를 들고 한 음반회사를 찾았지요. 그때 지금의 남편인 안젤린이 빛을 얻어 음반을 만들어 주었고, 그 후 셀린 디온의 매니저로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셀린 디온은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남편이 지금 후두암에 걸려 투병중이다. 지금은 남편에게 내가 가장 필요한 시간이다. 남편 곁에서 병간호를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려 한다. 쇼 비즈니스가 결코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이제 남편에게 진 사랑의 빚을 내가 갚을 차례다.” 인기정상의 자리에서 나와서 가정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을 위해서는 가능한 일이지요. 즉,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 사랑을 바라보면서 요즘 우리나라의 현실이 떠올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라면서 혼인의 불가해소성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사실 우리나라의 현실은 사람이 갈라놓는 혼인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결혼 대비 이혼율은 42%로 경제협력기구(OECD) 국가 중에서 3위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많은 부부가 이혼을 하고 있다는 것인데요. 그렇다면 왜 이혼을 할까요? 물론 정말로 이혼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경우 교회법에서는 혼인무효 선언을 하지요. 그런데 문제는 너무 쉽게 이혼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혼사유를 물어보면, 다 ‘성격차이’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보다는 사랑의 감정이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연애할 때의 사랑의 감정이 사라지고, 대신 다른 부정적인 감정이 커졌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 사랑의 감정은 내가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서는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유대인 어머니가 결혼을 앞둔 딸에게 보내는 편지가 인상 깊어 여러분들에게 소개합니다. “사랑하는 딸아, 네가 남편을 왕처럼 섬긴다면 너는 여왕이 될 것이다. 만약 남편을 돈이나 벌어오는 하인으로 여긴다면 너도 하녀가 될 뿐이다. 네가 지나친 자존심과 고집으로 남편을 무시하면 그는 폭력으로 너를 다스릴 것이다. 만일 남편의 친구나 가족이 방문하거든 밝은 표정으로 정성껏 대접하라. 그러면 남편이 너를 소중한 보석으로 여길 것이다. 항상 가정에 마음을 두고 남편을 공경하라. 그러면 그가 네 머리에 영광의 관을 씌워줄 것이다.” 딸을 아들로 바꾸고 또 남편을 아내로 바꾼다면, 결혼하는 모든 부부에게 해당하는 말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처럼 행복한 부부는 서로를 격려하면서 사랑의 감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서 불행한 부부는 서로를 공격하고 무시하면서 사랑의 감정을 버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행복한 가정을 꾸려 나가시길 원하시는데, 여러분은 과연 어떤 가정을 꾸미고 있나요?
†♡†♡†♡†♡†♡†♡†♡†♡†♡†♡†♡†♡†♡†♡†♡†♡†♡†♡†♡†♡†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 -양승국신부- <때로 쓰디쓴 현실, 결혼>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를 연구하던 한 학자가 기막힌 내용의 글귀를 발견했답니다. “요즘 아이들, 정말 버릇도 없고 문제가 심각하다.” 참 재미있습니다. ‘청소년 문제’, 오늘 우리 시대만 심각한 것인 줄 알았는데, 이미 수천 년 전 어른들도 머리 싸매고 고민했던 문제가 청소년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혼 문제도 마찬가지임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가 씌어 진 후 벌써 2천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요즘 우리 시대만 이혼문제가 심각한 줄 알았는데, 예수님 시대 당시뿐만 아니라, 더 거슬러 올라가서 모세 시대 역시 이혼문제는 큰 골칫거리였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혼인의 불가해소성’을 완화시키고, 이혼을 합리화시키려는 경향이 모세 시대뿐만 아니라 예수님 시대에도 만연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모세가 이혼장을 써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해주었는데, 그렇다면 살다가 마음에 안 들면 이혼해도 큰 문제없지 않겠느냐’고 예수님께 따집니다. 사람들이 가만히 있는데, 괜히 모세가 앞장서서 이혼을 허락했겠습니까? 또 별 이유도 아닌데 이혼을 허락했겠습니까? 사람들이 당시 백성들이 지도자였던 모세에게 갖은 협박을 가하고 괴롭히니 할 수 없이 특별한 케이스에 한해서 선별적으로 허락을 해준 것을 가지고 바리사이들은 이토록 물고 늘어진 것입니다. 이혼하는 부부들, 그들 나름대로의 사정을 들어보면 참으로 ‘기막힌’ 케이스들이 많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헤어지는 것이 서로가 사는 길인 부부도 있습니다. 속아서 결혼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혼사유로 ‘성격차이’를 내세우는 분들도 있는데, 이것만큼은 재고되어야 합니다. 30년 가까이 서로 다른 가정환경, 문화, 분위기, 가족관계 안에서 살아오던 두 사람이 결혼을 통해서 한배를 타게 됩니다. ‘성격 차이’는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성격이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합니다. 결혼은 어쩌면 또 다른 하나의 세상을 만나는 것입니다. 결혼은 어쩌면 또 다른 하나의 우주를 만나는 것입니다. 결혼은 어쩌면 스승 한분을 만나는 것입니다. 결혼을 통해 부부는 긴 항해를 시작합니다. 결혼을 통해 부부는 공부를 시작합니다. 어쩌면 배우자는 신천지입니다. 갖은 다양한 탐구거리로 가득 찬 새로운 대양이 배우자입니다. 결혼생활을 영위하시는 분들, 상대방을 내 소유물로 설정하지 마십시오. 상대방을 내 성취의 도구로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상대방을 내 욕구충족의 대상으로도 여기지 마십시오. 그는 멀고먼 은하계에서 오직 나만을 찾아 정확하게 내 안에 떨어진 하나의 별입니다. 그는 나의 성장을 위해, 나의 구원을 위해 다가오신 또 다른 하느님입니다. 슬픈 일이지만 결혼은 현실입니다. 사람은 이슬만 먹고 살지 않습니다. 결혼은 사랑에 밥 말아서 먹고 사는 것 일거라는 환상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는 것이 좋습니다. 텔레비전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입니다. 결혼은 때로 쓰디쓴 현실입니다. 길고 험난한 자신과의 투쟁입니다. 결혼은 수도생활 못지않은 오랜 자기 수련과 고행의 길입니다.
†♡†♡†♡†♡†♡†♡†♡†♡†♡†♡†♡†♡†♡†♡†♡†♡†♡†♡†♡†♡†
하느님이 정한 것 -김상조 신부-
진도아리랑에 나오는 ‘아리랑’과 ‘스리랑’의 어머니가 누굴까?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낳았네….”하고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 랑 응~응~응응 아라리가 낳았네….” 여기서 우린 ‘아리’가 애들의 아빠이자, ‘아라리’의 남편인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아직까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남자 여자는 하느님이 정한 구분이다. 그것은 하느님이 정한 것이다. 그러니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생김새는 변화가 없는 것 같지만, 어제와 오늘의 내가 다른데 너와 나, 남녀가 다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
이혼, 그 뜨거운 감자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
혼인 서약 -조명준 신부-
창세기 안에서 남편과 아내의 결합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동사 ‘바카드’는
†♡†♡†♡†♡†♡†♡†♡†♡†♡†♡†♡†♡†♡†♡†♡†♡†♡†♡†♡†♡†
혼인의 진정한 의미 - 이상각 신부-
너무나 큰 고통과 번민·좌절 속에서 “도저히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습니다. 미움과 원망만이 가득합니다. 제 상황이 이 정도인데도 혼인관계를 계속 유지해야만 하는 건가요?”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
가만히 있어라, 그리고 가라 앉히라 -김찬선신부-
살다보면 억울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
새벽을 열며 30초 규칙을 따라봅시다. 빠다킹 신부
하느님과의 인연 -이철구 신부-
우리는 수많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양창순(양창순 신경정신과 대인관계 클리닉)
◆호스피스를 담당하고 있는 선배 의사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배우자가 불치병으로 앓아 누웠을 때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고 합니다. 배우자에게 매우 다정다감하고 헌신적인 유형과 무뚝뚝하고 냉담해 보이기까지 하는 유형으로.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배우자가 죽으면 곧장 따라 죽을 것처럼 보이던 사람일수록 실제로 배우자가 죽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당장 재혼시켜 달라고 조른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무뚝뚝해 보이기만 하던 사람들이 오히려 혼자서 꿋꿋이 잘 살아가는 예가 더 많다고 합니다.
-원정학 신부 -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이혼’에 관한 내용을 가지고 질문을 던집니다.
무촌 !!! - 이찬홍 신부-
성씨, 족보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회에는 촌수가 있습니다. 부모님과 자녀와의 촌수는 1촌 입니다. 형제자매간의 촌수는 2촌입니다. 이를 기준으로 3촌, 4촌, 5촌으로 계속 확대되어 갑니다. 그런데, 부부사이에는 촌수가 없습니다. 왜 없는 것일까요? ‘도로남’이란 노랫말처럼, 님이라는 글자에 점하나만 찍으면 도로남이 되어 버리기 때문일까요? 혹시, 그 이유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아시면, 좀 알려주십시오. 저는 그 이유를 오늘 복음 말씀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바리사이파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이에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은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8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제 그들은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결혼을 한 부부는 더 이상 둘이 아니라, 한 몸입니다. 결혼 전에는 각자 개별적인 고유한 몸이었지만, 결혼을 통해 둘이 하나가 되어, 더욱 완전하고, 성숙한 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둘이 아니라, 하나, 한 몸이기에, 부부사이에는 촌수가 없는 것입니다. 촌수가 있다는 것은 하나가 아니라, 둘을 의미합니다. 나와는 다른,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결혼에는 이런 의미가 있기에... 아니, 이 의미가 가장 크고 중요하기에, 우리 선조들은 결혼을 ‘이성지합’이라고 말했나 봅니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둘이 한 몸이 되어 살아간다는 것은, 늘 행복하지만은 않습니다. 언제나 달콤하고, 꿈속을 헤메는 듯한 신혼이 아닙니다. 신혼의 달콤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만약 신혼이 달콤함이 오래간다면... 결혼의 끝남을 의미하는 죽는 그 순간까지 이어진다면... 왜, 이혼하는 부부가 생겨나겠습니까? 왜, ‘사랑은 2-3년 정도면 식는다. 그 후에는 정으로 살아간다.’는 말이 그토록 마음에 와 닿겠습니까? 이는 자기식대로만 하려는... 자기 마음대로만 생각하고 살아가려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둘이 아니라, 한 몸이 된다.’고 할 때, 이는 두개가 하나로 합쳐지는 흡수가 아닙니다. 자신의 개성, 성격 등 하느님께 받은 고유한 본성을 없애고, 무조건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상대방을... 자신의 배우자가 자신과 똑같은 존재요, 인격체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바라고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해주는 것이요,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전에는 다른 집에서 살고, 다른 이불을 덮고 자며, 다른 고민을 하며 살아갔지만, 이제는 같은 집에서 살고, 같은 이불을 덮고, 같은 고민을 하며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실제 결혼생활은 이러지 못하고, 상대방을 자신에게 맞추려 하고, 자기 식대로만 살아가려 하다보니, 미움과 다툼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아이고, 내가 미쳤주, 눈에 콩깍지가 끼엉 참 모습을 못봤주...’ 라고 탄식하며 해서는 안 되는 이혼까지도 생각하게 되고, 실제 스스럼없이 이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이론적인 내용입니다. 결혼을 하지 않는... 결혼의 참 맛을 온 몸으로 체험하지 못한 제가 말하는 결혼의 의미일 뿐입니다. 그저 결혼의 중요성과 이상향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때문에, 저의 말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고,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결혼 생활의 의미, 목적, 완성은 이러저런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 있습니다. 많은 아픔, 고민, 갈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결혼 역시, ‘성소’이기 때문입니다. 사제, 수도 성소만 성소가 아니라, 결혼 성소 역시 하느님 친히 당신의 강복으로 맺어 주셨고, 하느님만이 떼어놓을 수 있는 완전한 결합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둘이 아니라, 한 몸이 되어 살아가야 하는 거룩한 성소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경험은 삶에서 나옵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다는 것은, 인생의 막바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살다보니, 그냥 얻어진 결과가 아닙니다. 젊은 날의 기쁨과 행복만 담겨있는 것이 아니라, 아픔과 상처, 고통까지 모두 고스란히 담겨 있는 소중하고 값진 결실입니다. 이에, 혹 주변에 가정의 불화가 있는 분이 계시다면... 이혼하려고 하는 부부가 있다면.. 단순히 ‘아이들도 있고, 그냥 참으라. 다덜 겅 참으멍 살았져... 살다보믄 살아진다.’는 식의 말로 위로하지 말고, 여러분들의 삶의 여정을.. 결혼생활의 아픔과 상처를 말씀드리며 ‘우리는 이렇게 극복했다. 이런저런 노력을 하며 여기까지 왔다.’고 말씀해 주시면 어떨까 합니다.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알 수 없는 바로, 여러분들의 삶의 경험과 결실을... 젊은 날의 초상을 알려준다면, 불화가 끊이지 않는 가정에 참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한 몸을 둘로 나누려는 부부들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될 것입니다. 가정의 소중함과 결혼의 신성함, 성소의 의미가 파괴되는 오늘날의 현실에 여러분들의 결혼생활과 그 삶의 주는 결실은 진정 그 무엇으로도 대신 할 수 없는 해결책이요, 가장 좋은 처방입니다. 아멘.
결혼은 미친 짓이다??? -오상선신부-
어느 영화의 제목이다. 나는 영화를 잘 보지는 않지만 현 세태를 반영해 주는 것이기에 나름대로 관심은 갖고 있는 편이다. 이 영화 또한 구속받기는 싫으면서도 자신의 필요와 욕구는 충족시키고 싶은 젊은 세태의 단면을 잘 표현해 주고 있는 듯하다. 이혼율이 급증하고 있고 젊은이들 사이에 계약결혼 내지는 동거가 많아지고 살아보고 맘에 들지 않으면 헤어지는 등의 사고도 늘어만 간다고 한다. 우리 주위에 이혼한 젊은 부부들을 보는 것은 이제 아주 쉬운 일이다.
결혼생활이나 수도생활이나 삶 자체는 언제나 <서약>을 전제로 한다. 결혼이 <구속>인가 아니면 <더 큰 자유>인가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수도생활에서도 수도서약이 <구속>이라면 할 필요가 없는 삶일게다. 결혼서약이든 수도서약이든 공통점은 당사자의 <자유로운 의지와 결단>이다. 그 누구의 강요나 방해에 의해 서약이 이루어진 것이라면 이는 <결혼무효소송>,<서약무효소송>이 가능할 정도로 교회에서는 이 결혼과 수도생활에 있어 서약의 <자유로운 결단>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이혼문제와 수도생활을 쉽게 파기하는 등의 문제는 결혼과 수도서약의 이 자유로운 의지와 결단이 빈곤함에서 생기는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수도서약을 위해 오랜 기간을 숙고하고 생활을 해보듯이 온전한 자유의지와 결단을 통해서 서약을 발한 사람은 그 서약에 대부분 충실하게 된다. 자신은 준비가 덜 되었는데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해야지, 혹은 서약을 하면 좀더 달라지겠지 등의 생각으로 서약을 발한 사람은 어려운 상황이 도래하면 쉽게 무너지기 십상이다.
마찬가지로 결혼서약에 있어서도 연애와 만남 등을 통해서 서로를 깊이 알아가면서 온전한 자유의지와 결단을 통해서 결혼을 결심한 사람은 어떠한 여건이 오더라도 그 서약에 충실한 법이다. 결혼을 배우자의 조건을 보고 선택했다던가, 별로 마음에 안드는 구석이 있지만 결혼하면 좀 나아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결혼을 신중한 준비와 결단 없이 하게 된 사람은 이내 결혼생활이 그런 꿈같은 생활이 아님을 접하고 실망하고 만다.
서약생활은 <사랑>을 전제로 한다. 서약생활은 <조건>을 전제로 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 수도자가 주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그리고 교회와 세상에 대한 사랑 때문에 부족한 가운데서도 부르심에 응답하여 서약의 삶을 살아가야지, 사회적 신분 상승이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등의 세속적인 사고에서 출발해서는 올바로 서약의 삶을 성취할 수는 없는 법이다. 결혼생활도 배우자에 대한 <사랑>이 전제되어야지 다른 조건들이 우선시 되는 한 결혼이 미친 짓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랑 때문에 발한 서약은 상황이 아무리 달라져도 영원하게 된다. 그러나 다른 세속적인 조건 때문에 발한 서약은 그 상황이 달라지면 조건 또한 영원할 수 없기에 파기될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커지게 되는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오늘 내가 발한 서약에 대해 다시한번 숙고해 보자. 내가 발한 서약의 시작은 <사랑> 때문이었을텐데 지금은 어디에 와 있는가? 수도자로서 내 서약 생활에 만족치 못한다면 이는 내가 발한 그 <사랑의 서약>에 둔감해져 있기 때문이리라. 결혼한 사람으로서 결혼생활에 만족치 못한다면 이는 내가 발한 그 <사랑의 서약>에 둔감해져 있기 때문이리라.
그 때 그 시절, 결혼의 기쁨과 수도서약의 기쁨에 충만했던 그날을 다시 회상해 보자...
결혼과 이혼 ( 10, 1- 12) -유 광수신부-
그런데 천지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하하여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 집에 돌아 와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물으니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그 여자와 간음하는 것이며 또 아내가 자기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도 간음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왜 이혼이 허락할 수 없는 것인 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천지창조 때로 거슬러 올라가서 설명해 주신다. 결혼과 이혼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인간이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혼은 안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계획이고 따라서 인간은 오직 그 법을 따라야 할뿐인 하나의 원칙이라는 것이다. 내가 남자이든 여자이든 나의 존재는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다. 따라서 나의 생명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 관계를 이해하는데 그리고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가장 기초적인 것이고 기본적인 원리이라는 것이다. 이 원리에서부터 모든 문제는 풀어 나가야 한다. 내가 창조주처럼 생각하는 착각에서 벗어나서 피조물이라는 입장에서 모든 문제를 풀어야 한다. 두 번째 원칙은 사람은 부모를 떠난다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찾아 부모를 떠난다는 것이다. 부모는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도록 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감사드려야 할 분이시기는 하지만 한 몸을 이루어 함께 사랑을 나눌 짝은 아니다. 따라서 사람은 자기를 존재하게 하신 부모를 떠나 자기 짝을 찾아가는 것이 하느님의 계획이다. 즉 사람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에 의해서 그렇게 살아가도록 만들어진 피조물인 것이다. 사랑스런 자식이 부모를 떠나는 것은 못내 아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 순리를 막을 수는 없다. 이 순리를 막는 것은 부모에게나 자식에게나 불행한 일이다. 자식은 어차피 부모를 떠나 자립해야 할 존재이기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떠남은 시작되는 것이다. 이 떠남은 어머니의 자궁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해서 서서히 진행되다가 사춘기의 격변기를 거쳐 결혼기가 되면 짝을 찾아 부모를 떠나 자기들만의 둥지를 틀고 자리 잡는 것이다.
남녀가 부모를 떠남은 자기 짝과의 결합을 위한 것이다. 혼인 예식서에 보면 혼인 계약문이 있다. "나---는 당신을 아내(남편)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일생 신의를 지키며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약속합니다" 고 되어 있다. 이것은 두 사람과의 계약이다. 즉 결혼의 내용은 어디에서나 어떤 처지에서나 나는 당신을 사랑과 존경으로 결합하여 함께 살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두 사람과의 약속이면서 또한 하느님과의 약속이기도 하다. 즉 당신을 내 아내로 남편으로 결합하겠다는 약속이기 때문에 이 계약은 서로에게 주는 결혼 선물인 것이다.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일생 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더 이상 결혼 생활이라고 할 수 없다. 결혼생활이란 죽을 때까지 이 약속을 지켜 나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것도 하느님의 역사이셨고 또 그와 짝을 찾아 짝지어 주시는 것도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십억의 사람들 가운데에서 단 한 사람의 자기 짝을 선택하는 일이 어찌 인간의 일인가? 고무신도 다 제 짝이 있듯이 모든 인간에게는 자기에게 맞는 짝이 있다. 하느님이 창조 때부터 짝지어 주신 짝이 있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 누가 나의 짝인지는 오직 창조하신 분만이 아신다. 우리는 짝을 만나는 것을 인연이라고 한다. 인연이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힘에 의해 이끌림을 받는다는 뜻이다. 즉 전생에서부터 둘이 짝이 되어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런 일은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섭리이다. 즉 서로의 짝을 만나게 해주신 분은 바로 창조주이신 하느님이 하신 일이다. 따라서 하느님이 맺어 주신 결혼을 인간이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 결혼은 하느님의 일이지 인간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이혼율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이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러 가지 원인을 들겠지만 근본적인 것은 서로간의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창조에서 하느님은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고 하셨다. 하느님은 원래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우리 모습을 닮은"인간을 창조하셨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사랑자체이신 하느님을 닮은 모습이 있다. 이 아름다운 모습이 깨어진 것은 사랑으로 하느님을 닮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창세 3, 5)되고자 하는 탐욕으로 따먹지 말라는 나무 열매를 따먹었기 때문이다. 혼인성사는 탐욕으로 잃어 버렸던 하느님의 모습을 원상시켜 주는 것이다. 즉 사람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참 좋더라!" 고 하셨던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 주신 것이다. 그 모습은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의 모습이다. 하느님을 닮은 "우리"라는 말에는 남자만도 아니고 여자만도 아닌 남자와 여자가 포함된 것을 말한다. 따라서 결혼은 남자만의 것도 또는 여자만의 것도 아닌 "우리"라는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이혼은 하느님이 만들어 주신 이 원초적인 공동체를 피괴시키는 행위이다. 그것은 부부간에 서로의 계약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혼인 계약서에는 "나는 평생동안 언제나 ..... 신의를 지킬 것을 약속합니다."라고 서로가 서로에게 약속하였다. 이 약속은 남자와 여자가 공동으로 지켜야 할 의무이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혼은 서로가 이런 노력을 하지 않는 데에서 빚어지는 불행이다. 대부분의 이혼은 "우리"라는 개념이 없이 마치 아담과 에와가 하느님과 같아지기 위해 선악과 나무 열매를 따먹었듯이 "너는 나의 것"이라는 일방적인 소유욕에서 빚어진다. 그 누구도 상대방의 소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즉 누구에게 예속되어져서는 안 된다. 서로가 서로의 인격을 존중해주는 그래서 "너"와 "나"의 두 인격이 "우리"라는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면서 하느님을 닮은 "우리"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라는 단위는 하나의 공동체를 말한다. 인격 공동체인 가정은 최초의 인간 사회이다. 인간 사회는 친교의 사회이다. 친교는 서로 나누는 것이다.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해주고 갖은 것을 서로 나누는 것이다. 이혼은 하루 아침에 오는 것이 아니라 친교가 없는 삶이 계속되었을 때 오는 하나의 결과이다. 따라서 이혼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서로의 친교를 통해서 "우리"라는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와 "너"라는 두 인격체가 하나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함께 노력해 나가야 할 작업인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