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는 준비된자에게 차례집니다”
메조소프라노 최경해(녀)는 중국조선족교향음악회에서 가장 나어린 배우이다. 그녀는 지난해 중앙민족대학 음악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중앙가극원에 합격되였다. 이번 음악회는 스승인 중앙민족대학 음악학원의 림정교수와 중앙가극원 공연부 리영태주임의 추천으로 참가하게 되였다.
음악회에서 최경해는 “까투리타령”과 “나는 조국을 사랑하네”를 불렀다. 특히 “까투리타령”은 성악과 민요를 결합시켜 새롭게 편곡해 불러 관중들로부터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최경해씨는 고향 연변에서의 첫 독창무대여서 뜻깊고 영광스럽다고 말한다.
최경해씨는 소학교 교원인 할머니때문에 성악을 시작했다. 음악교원은 아니지만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던 할머니는 맏손녀인 최경해가 노래를 잘 부른다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학교 합창단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변성기가 지난 고중부터는 연변대학 예술학원 고중부에서 림정교수로부터 성악을 체계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2004년 2등의 성적으로 중국음악학원 성악학과에 합격되여 대학공부를 시작했고 그간 중앙음악학원 곽숙진교수와 로씨야 유명 성악교수의 지도를 받았다. 2008년 대학을 졸업하면서 그녀는 한국 국립음악종합대학에 가 1등 장학금을 받으면서 석사공부를 시작했다. 또 2010년에는 중앙민족대학 음악학원에 합격되여 림정교수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석사학위를 따냈다. 그간 여러차 세계 유명 음악가들의 양성반에 참가해 부단히 기량을 닦았다.
성악도 좋지만 오페라에 흠뻑 빠져들었던 최경해씨는 기회는 준비된자에게 차례진다는 말을 굳게 믿고 련습을 꾸준히 해왔다. 결국 그녀는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지난해에 중앙가극원의 메조소프라노로 뽑혔으며 일년 남짓한 사이 십여편의 오페라에 출연했다.
오페라를 하면서 외국어로 된 가사를 외우는것이 가장 힘들지만 또한 공연이 끝나면서 막이 열릴 때 관중들로부터 받은 박수에 최경해씨는 항상 흥분되고 기쁘다면서 그것이 오페라의 매력이라고 생각하고있다.
최경해씨는 또 제15회 전국청년가수TV콩클 대상, 제39회 이딸리아 베르니국제성악콩클, 제9회 중국음악 금종상, 제6회 북경 국제성악콩클 등에 참가해 우수한 상적을 따내면서 자신의 경험을 쌓아가고 실력을 늘여가고있다.
“고향의 농후한 음악분위기와 노래를 잘 부르고 춤을 잘 추는 우리 민족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메조소프라노의 역할을 적극 쟁취하여 좋은 모습을 보여주도록 노력할것입니다.”
“조선족가수 김미아입니다”
“올해는 왕년에 비해 여러번 고향을 찾게 되네요. 얼마전 훈춘 방천에서도 공연이 있었구요. 나이가 들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깊어지는듯 해요. 어디에 가든지 고향만큼 좋은 곳은 없다는 생각이 더욱 들구요.”
중국조선족교향음악회 참가차 고향땅을 다시 밟게 된 김미아씨, 음악회 참가는 마치 고향의 어머니를 보러 오는 기분이다.
음악회에서 김미아씨는 “등대”와 “겨울의 홰불”을 불렀다. “등대”가 어떤 년령층에게나 힘을 주고 희망을 줄수 있는 노래이기에 고향인민들이 힘든 일이 있어도 꿋꿋이 이겨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고 “겨울의 홰불”은 다함께 대박 나자는 희망에서 선곡했다고 설명했다.
김미아씨가 전국에 이름을 날린것은 “성광대도”에서 우승하면서부터다. 음악을 좋아하다보니 더 큰 꿈을 실현하고싶어 무작정 상경했고 지금까지 북경을 중심으로 활동하고있지만 쉽지만은 않았다.
요즘 들어 “겨울의 홰불”은 원곡자 비상(?翔)보다도 김미아씨의 버전이 많이 들려진다. 2012년 CCTV음력설야회무대에서 김미아씨는 “겨울의 홰불”로 팝가수로서의 실력을 인정받았다. 몇분 안되는 무대였지만 그 무대에 오르기 위한 경쟁은 치렬했다.
2012년이 CCTV 음력설야회 30회가 되는 해였기에 그동안 불리워진 대표곡들을 선정해 부르는 부분이 마련되였는데 “겨울의 홰불”도 그중의 한곡으로 선정되였다. 원곡자 비상을 초청했지만 그는 감독팀에 김미아씨를 추천했다. 그렇다고 절대 쉽게 오를수 있는 무대는 아니였다. 당시 중국가요계에서도 나노라 하는 쟁쟁한 가수들이 앞다투어 이 곡을 부르겠다고 나섰다. 그만큼 경쟁도 치렬했지만 그가운데서 최종 김미아씨가 발탁됐다. “원곡자앞에서 어떻게 부르냐?”는 의문도 많이 받은것으로 알려진다.
“무대는 요만한데 가수는 이만큼이나 있어요. 그래서 항상 남보다 더 노력하고 남들이 할수 없는것을 내가 해야만 그 사람의 앞에 설수 있거든요. 무슨 일이든 하루만에 완성될수 없어요. 또 내가 노력한만큼 그것이 결과로 보여지지요. 그래서 한발작을 내디뎌도 착실히 하려고 노력하고있어요. 지금까지 견지해온 원칙이기도 하죠.”
김미아씨는 항상 “조선족가수 김미아”로 활동하는것을 견지하고있다. 중국가요계에서 활동하다보니 비록 민족가요를 부르는 기회가 적지만 “모두로 하여금 내가 조선족인것을 알게 하는것이 내가 민족을 사랑하는 방식이라고 생각된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언제든지 고향에서 부르면 다른 공연이 있어도 달려오게 되였다고 덧붙인다.
요즘 김미아씨는 신곡을 준비하느라 바삐 보낸다. 다음달말쯤이면 선보일 예정인데 기대해도 좋을듯하다면서 완벽하든 완벽하지 못하든 항상 리해하고 지지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음악은 나에게 신앙과 같은 존재”
동북사범대학 음악학원 부교수 테너 김용은 교하출신이지만 연변을 고향처럼 생각한다. 16살때 연변예술학원 정정무선생으로부터 2년간 성악지도를 받은게 다다. 하지만 그는 “고향”에서 열린 중국조선족교향음악회를 통해 오랜만에 민족의 노래를 부를수 있어 기쁘다고 말한다. 다년간 가극에 많이 출연하면서 남아있던 아쉬움도 이번 기회에 풀었다.
음악회에서 그는 “어머니”와 “고향산기슭에서”를 불렀다.“어머니”를 부르면서 부모생각을 다시 하고싶었고 고 안국민선생도 기리고싶은 마음에서였다.
김용씨는 전문대학출신이 아니지만 지금 동북사범대학 음악학원에서 석사생 지도교원으로 있다. 1945년 동북사범대학이 세워져서부터 지금까지 학벌 없이 석사생 지도교수로 된 첫사람이라고 웃으며 말한다.
어릴적 방송을 통해 강대위, 리쌍강의 노래를 들으며 음악에 대한 호기심을 가졌던 그는 12살쯤 되자 자기도 해보고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16살때 연변예술학교 정정무선생으로부터 2년간 성악지도를 받았다. 하지만 부모가 없이 자라온 김용씨는 어려운 가정형편때문에 성악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했고 콩클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1990년 전국농민가수콩클에서 1등상, 1992년 전국음악무용콩클에서 성악부문 개인 금상을 차지하면서 그는 길림성가극원의 초청을 받고 정식 배우가 됐다. 그뒤로 1995년 할빈의 여름음악회에서 성악부문 1등상, 1999년 “공작새”컵 전국소수민족가수콩클에서 금상 등 수많은 묵직한 영예를 차지하면서 가창력을 인정받았다.
길림성가극원에 있는 기간 김용씨는 성특수인재양성프로젝트에 뽑혀 중국음악학원에서 4년간 공부했고 또 상해 주소연가극중심에서 5년간 공부하면서 성악실력을 다졌다. 40이 되기까지 성악공부를 해온만큼 스승도 많다. 그동안 21명의 스승을 만났다며 “좀 더 일찌기 공부했더라면” 하며 아쉬워하는 스승도 있었다.
“성악에는 프로든 아마추어든 차별이 없이 꾸준히 련습하면 될수 있다고 생각해요.”
눈을 뜨면 성악이고 눈을 뜨면 제자들이다보니 외로울 때도 있지만 신앙과 같은 존재로 느껴지는 음악때문에 여직껏 버텨왔다.2005년부터 동북사범대학 예술학원에서 성악을 가르치면서 김용씨는 실천으로 뽑아낸 자기의 무대경험을 남김없이 학생들에게 전수하고있다.
그간 김용씨는 장국용, 장춘화, 강금일 등 유명 지휘가들과의 합작으로 “공주는 잠 못 이루고” 등 명곡들을 열창했으며 주소연교수 제자음악회, 문화부와 국가대극원에서 조직한 중국교향음악절에 참가하기도 했다.
뿐만아니라 중국, 한국, 조선 등 26개국에서 펼쳐진 공연에 참가했고 독창음악회만 17차 가졌다. 또한 “외국가곡 영탄조”, “모든것을 당에 바치다” 등 개인CD로 출판하기도 했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