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봉님의 카톡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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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영웅 몽클라르 장군
6.25전쟁 당시 지평리전투의 영웅 몽클라르를 기억하세요!
프랑스 랄프 몽클라르(Ralph Monclar·1892~1964)는 1951년 지평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내어 유엔군의 북진을 가능하게 한 프랑스 군인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UN군 일원으로 파병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시 독일군에게 나라가 심각하게 파괴되므로서 복구가 한창일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UN의 요청으로 파병을 하기는 하지만 그 당시 프랑스의 사정으로 600명의 대대병력을 파견하기로 결정, 대대장을 물색하던 중 당시 중장으로 예편해 있던 랄프 몽클라르 씨가 자유를 위해 자신이 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600명의 대대병력은 중령이 맡는법이라 중장은 안 된다고 통보를 했다.
이에 랄프 몽클라르 중장은 프랑스 국방부에 찾아가서 "계급은 중요하지 않다. 곧 태어날 자식에게 유엔군의 한사람으로서 평화라는 숭고한 가치를 위해 참전했다는 긍지를 무려주고 싶다."고 국방차관에게 말했다.
그러나 임신한 아내는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그 자리에서 중장 계급장을 떼어내고 강한 어조로 나에게 중령 계급장을 달아주시요.
나는 지금부터 계급이 중령입니다.
주변의 고위관리들이 입을 벌리고 다물줄을 몰랐다.
그래서 새로운 참전대대를 창설하기 위해 전국에서 참전할 군인들을 모집했고, 100% 지원병으로 프랑스대대 600명을 이끌고 한국전쟁에 참전, 미 제10군단(알몬트소장) 제2사단, 제 23연대, 프랑스대대에 배속되었다.
1950년 7월, 당시 프랑스 막스 르젠 국방차관에게 육군 중장 몽클라르가 던진 말이다.
현역 시절 중장이었던 그가 계급장까지 떼며 이렇게 말한 이유가 있었다 한다.
당시 프랑스의 국방차관이, “미국의 대대는 육군 중령이 지휘하는데 프랑스군은 중장인 당신이 대대장을 맡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반대하자 몽클라르 장군은 중장 계급장을 떼고 중령의 신분을 자처했던 것이다.
공산군의 침략으로 백척간두에 놓인 한국을 돕는 일이라면 몽클라르 장군에게 강등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몽클라르 장군이 한국에 왔을 때 나이는 58세였다.
그는 목숨을 걸고 한국전쟁에 참전해 경기도 양평의 지평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몽클라르 장군은 당시에 만삭의 부인과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두고 6·25전쟁에 참전했다는 것이다.
지평리전투는 1951년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벌어진 산악 전투이다.
당시 중공군은 국군과 유엔군의 전선을 밀어내며 파죽지세로 남진하고 있었다.
그 당시 지평리까지 무너지면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몽클라르 장군이 이끈 프랑스 대대가 중공군을 강타했다.
몽클라르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총탄이 완전 바닥나자 총검술로 중공군과 맞섰다.
결국 중공군은 프랑스군에 밀려 패퇴했다.
지평리전투에서 승기를 잡게 되자 사기가 높아진 유엔군은 다시 북진을 재개할 수 있었다고 한다.
몽클라르 장군은 1951년 12월 지휘권을 인계하고 프랑스로 돌아갔다.
그 후 그는 프랑스 파리에서 1964년 작고했다.
※ 몽클라르 자서전 : ‘한국을 지킨 자유의 전사’, 파비안 몽클라르 지음.김성수 편역, 한국에너지법연구소, 2013년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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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 몽클라르 중령
https://youtu.be/QrdPs5C58YI
첫댓글 이에 랄프 몽클라르 중장은 프랑스 국방부에 찾아가서 "계급은 중요하지 않다. 곧 태어날 자식에게 유엔군의 한사람으로서 평화라는 숭고한 가치를 위해 참전했다는 긍지를 무려주고 싶다."고 국방차관에게 말했다.
그러나 임신한 아내는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그 자리에서 중장 계급장을 떼어내고 강한 어조로 나에게 중령 계급장을 달아주시요.
나는 지금부터 계급이 중령입니다.
주변의 고위관리들이 입을 벌리고 다물줄을 몰랐다.
그래서 새로운 참전대대를 창설하기 위해 전국에서 참전할 군인들을 모집했고, 100% 지원병으로 프랑스대대 600명을 이끌고 한국전쟁에 참전, 미 제10군단(알몬트소장) 제2사단, 제 23연대, 프랑스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