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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4. 묵상글 (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 오직 다만 끝까지. 등 )
* 김찬선 신부님: 아직 / 05:29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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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4.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직 다만 끝까지>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오 17,12)
오직 믿음이
아직 아닌 세상에서
다만 믿기 때문에
불신이 비난할지라도
끝까지 믿을 수 있기를
오직 희망이
아직 아닌 세상에서
다만 희망하기 때문에
체념이 붙잡을지라도
끝까지 희망할 수 있기를
오직 사랑이
아직 아닌 세상에서
다만 사랑하기 때문에
무관심이 유혹할지라도
끝까지 사랑할 수 있기를
오직 진실이
아직 아닌 세상에서
다만 진실하기 때문에
거짓이 가릴지라도
끝까지 진실할 수 있기를
오직 정의가
아직 아닌 세상에서
다만 정의롭기 때문에
불의가 더럽힐지라도
끝까지 정의로울 수 있기를
오직 자유가
아직 아닌 세상에서
다만 자유이기 때문에
억압이 짓밟을지라도
끝까지 자유일 수 있기를
오직 평화가
아직 아닌 세상에서
다만 평화이기 때문에
폭력이 할퀼지라도
끝까지 평화일 수 있기를
오직 품음이
아직 아닌 세상에서
다만 품기 때문에
내침이 거부할지라도
끝까지 품을 수 있기를
오직 돌봄이
아직 아닌 세상에서
다만 돌보기 때문에
버림이 팽개칠지라도
끝까지 돌볼 수 있기를
오직 베풂이
아직 아닌 세상에서
다만 베풀기 때문에
탐욕이 움켜쥘지라도
끝까지 베풀 수 있기를
오직 섬김이
아직 아닌 세상에서
다만 섬기기 때문에
폭정이 삼킬지라도
끝까지 섬길 수 있기를
오직 살림이
아직 아닌 세상에서
다만 살리기 때문에
죽임이 덤빌지라도
끝까지 살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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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4.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2.14 05:23
- 제2의 엘리야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것이다.”
“(그러나 그)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나는 엘리야를 알아보고 존중하는가?
나는 엘리야처럼 바로잡는 사람인가?
엘리야처럼 바로잡는 사람이 온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 같은가?
엘리야가 와서 지금처럼 어지러운 우리나라를 바로잡아준다면,
제정신이 아닌 지도자들을 정신 차리게 해준다면 환영하겠지요.
저뿐 아니라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런데 만일 환영하지 않는 분이 있다면 여러분도 제정신이 아니겠지요.
그런데 바로잡는 그분이 내게 온다면 그때는 어떨까요? 환영할까요?
솔직히 말해서 저는 환영하지는 못하고 마지못해 맞이할 것입니다.
사실 엘리야가 남을 바로잡아주는 것은 좋지만 나를 바로잡아주는 것은 싫고,
또 내 잘못을 내가 바로잡는 것은 좋지만 남이 내 잘못을 바로잡아주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사랑일지라도 싫고 환영하지 못합니다.
문제는 내가 나를 바로잡느냐, 바로잡을 수 있느냐 그것입니다.
내가 나를 바로잡는다면 주님도 엘리야도 오실 필요가 없고, 오시지도 않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살아온 대로 살려는 관성이 대단하고 나이 먹을수록 더 그렇습니다.
바로잡는 것이 불편하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현재의 자기를 부정하는 것은 고통스럽고, 바로잡는 것은 더 고통스럽습니다.
이는 오랫동안 잘못된 습관으로 심하게 굽은 척주를 교정할 때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되는데 바로 그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인이 아니기에 이처럼 바로잡는 예언자를 환영하지 못할지라도
그러한 우리 자신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억지로라도 맞이하는 우리가 돼야겠습니다.
다음은 우리가 엘리야가 되는 경우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2의 엘리야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엘리야처럼 바로잡을 자격이 없는 우리가
그래도 엘리야처럼 하라고 파견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거절하시겠습니까?
엘리야처럼 불같이 일어날 수 없는 사람이면 그 파견을 거절할 것입니다.
왜냐면 바로잡아주려고 할 때 ‘어서 바로잡아주세요.’
‘고맙습니다.’라고 할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바로잡아주려다가 죽임을 당할 수도 있고,
죽임당하지는 않더라도 오늘 축일을 지내는 십자가의 성 요한처럼
바로잡아주려던 사람들로부터 미움과 온갖 박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다시 오는 엘리야가 되려면
자기 잘못을 고치는 데 급급한 사람이어서는 안 되고,
잘못을 같이 바로잡아가려는 열정이 불타오르지 않으면 안 되며,
그 열정이 고통을 무릅쓰고 더 나아가 삼켜버릴 정도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열정, Passion.
엘리야의 열정,
세례자 요한의 열정,
그리스도의 수난의 열정(Passion of Christ)을
이 대림절에 다시 생각하는 오늘 우리이고 제2의 엘리야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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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4.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죄와 벌,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등의 대작을 남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대작을 남긴 이유를 들으셨습니까? 다름 아닌 빚 때문이었습니다. 알코올 의존증으로 많은 빚을 졌기 때문입니다. 또 ‘고리오 영감’을 쓴 프랑스 작가 오노레 데 발자크도 도박 빚에 쫓겨서 억지로 글을 썼고 그 글로 엄청난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위대한 대작은 때로 이렇게 조급하고 불안할 때 나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위기가 기회’라는 말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따라서 위기라면서 포기하고 좌절에 빠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다가올 새로운 기회를 찾아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 아님을 당신 부활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꾸준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실제로 이 꾸준함으로 뉴스 기사의 한쪽을 채우는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쉰 살이 넘어 사이클 마니아가 되었다는 이야기, 예순 중반에 머슬 마니아 대회에 참석하신 분, 일흔이 넘어 대학교에 입학하신 분 등등 정말로 많습니다. 이분들이 탁월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탁월함보다 꾸준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사회적 시계를 중시합니다. 그래서 20대에는 취업하고, 30대에는 결혼하고, 40대에는 내 집 마련 같은 과업에 집착합니다. 그리고 6~70대에는 은퇴와 노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꼭 그럴까요? 나의 시계와 사회적 시계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꾸준함을 가지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후회 없는 삶을 살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엘리야가 이미 왔어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으며, 이제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받을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왜 사람들은 예언자 엘리야의 모습으로 온 세례자 요한을 알아보지 못하고, 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세상의 눈으로만 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꾸준함을 가지고 하느님께 집중해야 하는데, 그들은 하느님을 말하면서도 세상의 관점으로만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세례자 요한도 또 예수님도 고난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혼란으로 가득 찬 세상처럼 보입니다. 어렵고 힘든 사람은 더 늘어가는 것만 같습니다. 그렇다고 좌절하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도 직접 그 모든 고통과 시련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꾸준함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뒤에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우리의 구원이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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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사랑했던 시절의 따스한 추억과 뜨거운 그리움은 신비한 사랑의 힘으로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게 한다(그라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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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4.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타볼산에서의 거룩한 변모 후 산에서 내려올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마태 17,10)
엘리야의 재림에 대해서는 이미 <말라키서>(3,1,23)에서는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모세에게 내린 율법과 규정을 기억하라는 말(3,22)과 함께 언급됩니다. 그러니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의 관계에 대한 물음입니다.
여기에는 엘리야가 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예수님이 메시아일 수 있느냐는 율법학자들의 주장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마태 17,11)라고 엘리야의 사명을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 17,12)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로 알아보지 못했음을 말씀하시면서, 마찬가지로 이미 와 있는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한 그들은 이미 와 있는 메시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세례자 요한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26)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듯이, 이제 당신께서도 그렇게 제멋대로 다루어지고 고난 받게 될 것을 예고하십니다. 결국,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함을 말해주는 동시에, 엘리아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암시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엘리야도 메시아도 ‘이미’ 왔지만,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 가운데 와 계신 분을 알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알아보는 영적인 눈을 떠야 할 일입니다. 특히 성탄을 준비하면서 ‘먼저’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바로잡는 엘리야의 인도를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제멋대로 다루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완고함과 비뚤어진 마음과 악의로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한다면, 그분은 오늘 우리에게 그렇게 제멋대로 다루어지고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신 그분을 버림받지 않고, 박해받지 않도록 해 드려야 할 일입니다. 더 이상은 그분을 제멋대로 다루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겪으신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있기 마련인 고난에 당황하거나 좌절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음에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4,13).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2)
주님!
제 눈이 가려져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빛을 피하고 어둠을 좋아한 어리석음이었습니다.
제 가슴이 굳어져 당신을 맞아들이지 못함은
진리보다 제 자신으로 꽉 채운 완고함과 오만이었습니다.
빛이요 진리이신 주님! 저를 밝히소서.
제 어리석음과 완고함을 걷어내소서. 오만불손함을 태우소서.
제가 밝아져, 더 이상은 당신을 제멋대로 다루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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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4.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
유다인들은 메시아가 오기에 앞서 그가 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전령이요 선구자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마지막 예언서인 말라기서를 보면“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말라3,23-24).고 적혀있습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의 신앙의 바탕이 되었고, 사람들은 엘리야가 ‘이미 왔는데’,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름은 다르지만, 세례자 요한이 바로 메시아에 앞서 오기로 되어있는 엘리야인데 그를 몰라본 것입니다. 사실 누군가를 알아보려면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루카 복음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루카 1,16-17). 하고 천사의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요한은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1,23). 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요한은 하느님 나라를 위해 백성들을 준비시킨 마지막 때의 예언자로서 엘리야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시대의 표징을 알아보지 못하고 요한을 제멋대로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음에도 헤로디아의 딸에게 헛된 맹세를 하여 결국 요한의 목을 베도록 명하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마르6,26). 그러나 헤로데만이 그를 죽였는가? 생각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은 모두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요한의 외침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회를 주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헤로디아는 헤로데 동생인 필리포스의 아내입니다. 그러나 헤로데와 혼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사실 헤로디아의 마음이 우리 안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길을 거부하고 내 마음대로 하려는 욕심과 똥고집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면 우리도 요한을 죽인 공범자나 다름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대의 징표를 읽고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언자도 메시아도 결코 만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의 죽음이 단순히 한 왕의 방자한 변덕과 경솔한 맹세의 결과가 아니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요한12,24) 메시아적인 구원의 죽음이었지만, 이것을 깨우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자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삶이었습니다. 따라서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온다는 진리를 알면,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 고통의 길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예수님께서 살아간 삶을 살아가는 기회가 됩니다”(함께야). 그러므로 막연히 내가 그려놓은 주님을 기다리지 말고 주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오시든지 제대로 알아볼 수 있도록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오, 주님! 저는 당신을 몰랐나이다. 다만 지상의 일들을 알고 맛보려 했나이다. 주 하느님! 모든 것을 바꾸어 주시어 당신 안에 편히 쉬게 하소서.”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리면!”(십자가의 성 요한).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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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4.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의 유력 정치인이며, 차기 대통령 후보 지지율이 가장 높은 야당 대표에게 범죄 혐의가 있다고 기소되어서 재판받고 있습니다. 2024년 6월 12일 기준으로, 총 7개의 사건에서 11개의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이 진행 중입니다. 주요 혐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위증교사 혐의가 있습니다. 2018년 자신의 재판에서 증인에게 거짓 증언을 요구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검찰은 징역 3년을 구형했습니다. 이 사건의 발단은 2002년이니 22년 전의 사건입니다.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가 있습니다. 2024년 11월 15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전직 대통령 후보였고, 현직 대통령과 근사한 표 차이로 낙선했습니다. 낙선한 후보에 대해서 공직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이미 패했기 때문입니다.
제삼자 뇌물 혐의가 있습니다. 쌍방울 그룹의 대북 송금 과정에서 제삼자 뇌물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배임 혐의가 있습니다. 대장동 개발사업 과정에서 약 4,895억 원의 배임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되었습니다. 이 외에도 백현동 개발사업 특혜 의혹, 성남FC 후원금 의혹 등 여러 사건으로 기소 되어 재판받고 있습니다. 대부분 혐의는 10년 가까이 된 일들입니다. 야당에서는 유력 정치인에 대한 무리한 기소와 탄압이라고 합니다. 여당에서는 그런 사람은 대통령 후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검찰이 무능하거나, 유력 정치인에 대한 탄압이라고 여당의 정치인이 이야기했습니다. 300번 넘게 압수수색 했으면 결과를 가지고 빨리 결론 내려야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 재판을 끌어오니 탄압이란 명분을 준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2019년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한국의 문화와 예술이 사랑받고 있습니다. 한강은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한국의 정치도 민생과 국가를 위해 여당과 야당이 협치하는 모습을 보이면 좋겠습니다. 이번 비상 계엄 파동도 잘 마무리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독서는 참된 신앙의 길을 걸었던 ‘엘리야’를 칭송합니다. 엘리야는 바알의 거짓 예언자들과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놓고 대결하였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그 수가 많았지만 패하였습니다. 그들은 거짓된 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에 가뭄이 들었을 때 하느님께 청하여 비가 올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가난한 과부의 정성 어린 봉헌을 칭찬하며 하느님께 청하여 가뭄이 끝날 때까지 기름과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엘리사가 보는 중에 하늘로 승천하였습니다. 엘리야의 삶은, 엘리야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삶이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신앙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런 엘리야가 다시 돌아왔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돌아온 엘리야는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하라고 하였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겸손하였습니다. 자신은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자신은 점점 작아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알렐루야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우리는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대림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예수님의 탄생을 알아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왕이었던 헤로데는 많은 정보와 권력을 가졌지만, 예수님의 탄생을 몰랐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알았지만,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지 않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빼앗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율법 학자들도 예수님의 탄생을 몰랐습니다. 율법과 하느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는데,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위선과 교만으로 눈이 멀어 예수님의 탄생을 볼 수 없었습니다. 멀리 동방에서 왔던 박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께 예물을 드리고 경배하였습니다. 가난한 목동들도 예수님의 탄생을 알아보았습니다. 들판을 달려 예수님께 경배드렸습니다. 평생 성전에서 기도하던 시메온과 한나도 구세주의 탄생을 알아보았습니다.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 시기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고,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오시는 날을 꿈꾸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오시면 하였을 일들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나는 어떤 모습으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해야 하는지 돌아봅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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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4.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것이 요한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소리였습니다. 성경도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소리는 사람들에게 들려왔습니다. 사람들은 분명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소리에 귀 기울인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이제 사라졌습니다. 소리는 소리의 역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람들 앞에 보이는 하느님께서 서 계십니다. 그러나 바뀐 것은 많지 않습니다. 소리가 세상에 왔을 때처럼, 주님을 보는 사람들도 더러는 믿고 더러는 믿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볼 때는 구름처럼 몰려들었지만, 주님께서 고난중이었을 때는 주님을 떠났습니다.
오늘이 축일인 십자가의 요한은 늘 성령 안에서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늘 그분의 말씀을 듣고 보고 만났습니다. 요한은 이런 말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자칭 예수 그리스도의 벗이라는 사람들까지도 아주 조금밖에는 주님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그들이 주님께 고통 대신 위로만을 찾기 때문이다.’
세례자 요한을 알아보지 못하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이 아닌 자신의 위안만을 바라봤기에 그랬을 것입니다. 그래서 들어도 알 수 없었고 보아도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과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도 우리 마음에 말씀을 들려주시고 주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도록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영광만을 바라보고 그 영광으로 우리 사리사욕을 채우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전 시대와 달리 말씀을 듣고 변화하며 주님과 함께 기쁨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산책
저녁, 해가 뉘엿뉘엿 퇴근 준비할 때쯤
이곳 산책로를 걷습니다.
시원한 공기 한 모금을 입속 가득 품습니다.
씩씩한 나무도 만나고 잠자리 준비하는 꽃나무도 만납니다.
알록알록 새들도 만나고 바삐 움직이는 곤충도 만납니다.
얼마 전에는 도토리 들고 집으로 향하던 청설모도 만났습니다.
깜짝 놀라 방향을 바꾸는 모습은 참으로 귀여웠습니다.
문득, 바람처럼 지나가는 우리 삶이 이런 산책 같았으면….
산책 같이 살다 산책 같이 갈 수도 있을 것을….
오늘도 헉헉거리며 산길을 걸었던 모든 그대들을 위해 희망합니다.
가끔은 우리 삶이 산책 같기를….
가끔은 우리 하루가 평온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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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4.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엘리야의 재림
“나는 누구의 재림일까?”
“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어 주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시편80,4)
작금의 위기의 시대, 저절로 시편 화답송 후렴 기도를 바치게 됩니다. 참으로 어수선한 세상입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사실을 또 배웁니다. 이 또한 전화위복이 기회가 되리라 믿습니다. 똑같은 사건에 대해서도 견해가 극단적으로 갈리니 참 잘 분별해야할 것 같습니다. 이래서 현재를 알기위해 역사 공부는 필수입니다. 역사를 통해 오늘을 잘 드려다 보고 분별하여 대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만세칠창중,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기도는 절박하고 간절할 수 뿐이 없습니다. 새벽 언뜻 눈에 들어온 성구가 위로가 됩니다.
“하느님은 빛이시다. 그분 안에는 어둠이 없다”
(God is light, and in Him, there is no darkness)
괄호 안에 영어로 써놓고 다시 확인해 봅니다. 참으로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말씀의 빛, 하느님의 빛입니다. 하느님의 빛 안에서 ‘진리의 연인’이 되어 지혜로운 삶을 살 수있도록 기도와 더불어 온갖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현자의 지혜도 좋은 도움이 됩니다.
“나무는 먹줄을 따르면 반듯해지고, 군주는 간諫하는 말을 들으면 거룩해진다.”<서경>
“막막한 바다와 같은 삶을 헤매지 않도록, 길잡이가 되어주는 자신만의 별자리를 마련하라.”<다산>
길잡이의 스승과 주변의 의견에 경청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삶의 좌표가 되는 자신만의 별자리 같은 영적스승을 영적도반을 마련하자는 것입니다. 저의 별자리가 되는 분들은 교회내의 별같은 성인들입니다. 오늘 기념일 미사를 봉헌하는 중세기 스페인의 아빌라의 대 데레사와 쌍벽을 이루는 위대한 신비가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역시 제 별자리가 되는 분입니다.
1563년 21세 되던 해, 가르멜회에 입회해 1567년 사제가 된 후, 여성 가르멜회 개혁에 성공한 아빌라의 데레사와의 만남을 계기로 ‘맨발 가르멜회’를 창립하여 개혁을 시도하나 거부되어, 1577년 가르멜회 수사들에 의해 톨레도의 수도원에 유폐되었고, 9개월후 탈출에 성공합니다.
그 뒤 1581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에 의해 맨발 가르멜회가 공인되지만, 1591년 마르리드에서 개최된 수도회 총회에서 비판을 받아 은자가 되었고, 그해 우베다의 한 수도원에서 쓸쓸히 향년 49세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평생 고통과 수난의 삶이었지만 성인의 영적체험과 주옥같은 시편들은 그 누구의 추종도 불허합니다. 십자고상의 예수님과 대화의 신비체험도 유명합니다.
“요한아, 너의 이 모든 수고에 대한 대가로 무엇을 원하느냐?”
“주님, 당신을 위해 고통을 받고 경멸을 받는 것입니다.”
얼마나 깊고 멋지 주님과 사랑의 만남인지요! 이런 영적 환시 체험이 연속된 고난을 이겨낸 힘이 되었음을 봅니다. 이와 비슷한 체험을 했을 때 도미니코회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님, 당신만으로 충분합니다. 당신을 제외한 어떤 것도 원치않습니다.”라는 고백도 연상됩니다. 두분 다 바오로 사도처럼 예수님이 삶의 전부였을 정도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성인의 영성고전에 속하는 대표 작품으로는 ‘가르멜의 산길’, ‘어두운 밤’, ‘영혼의 노래’가 있습니다. 1726년 교황 베네딕도 교황 13세에 의해 시성되고, 1926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됩니다.
과거를 알아야 현재를, 현재의 나를 알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통해 엘리야의 재림을 알아채는 예수님의 혜안이 놀랍고 배워야 함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은 영광스러운 변모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 대화를 나눈후 일어난 엘리야의 재림에 관한 내용입니다.
새삼 시공을 초월하여 빛이신 하느님 안에서 옛 성인들과 깊은 내적 통교를 나눴던 예수님임을 깨닫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보나벤투라를 스승으로 삼았던, 또 ‘진리의 협조자’로 불리기를 좋아했던 교황 베네딕도 16세도 생각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물음에 명쾌한 답을 주십니다.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의 뿌리에 닿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뤘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망각의 병이 문제입니다. 망각의 무지로 인해 반복되는 악순환의 역사이고 인류역사가 지속되는 한 계속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고난에서 자신의 고난을 예견하는 예수님입니다. 엘리야의 재림이 세례자 요한이라면 대림시기를 맞는 작금의 현실에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재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엘리야가 누굽니까? 구약에서 에녹과 모세와 더불어 승천한 분으로 꼽히는 분입니다. 얼마나 하느님과 깊은 일치의 삶을 살았는지 오늘 제1독서가 잘 보여줍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참으로 통쾌한 집회서의 말씀 안에 얼마나 백성들의 사랑과 신뢰를 한몸에 받은 엘리야인지 그 진면목이 잘 드럽납니다.
“엘리아여, 당신은 놀라운 일들로 얼마나 큰 영광을 받았습니까? 누가 당신처럼 자랑스러울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불 소용돌이 속에서, 불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습니다. 당신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의 재림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정해진 때가 되자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 바로 은총의 대림시기 우리 모두 엘리야의 재림이, 세례자 요한의 재림이 되어, 주님의 분노를 진정시키고 어른들의 마음을 젊은 이들에게 되돌리며 공동체내의 안정과 평화를 구축하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후반부 말씀도 참 좋은 힘이 됩니다.
“당신을 본 사람들과, 사랑 안에서 잠든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우리도 반드시 살아날 것입니다.”
그대로 우리의 고백으로 삼아도 좋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만나는 참 좋은 성인들이고, 우리를 떠났지만 우리가 사랑했던 주님 안에서 잠든 행복한 분들이요, 우리도 반드시 살아나 만날 것을 믿습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대림시기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과 함께 우리 모두 재림한 세례자 요한이 되어 주님의 길을 마련하게 하십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3,4.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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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4.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 17,12)
엘리야의 일을 한 사람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것은 제자들이 성경을 읽어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율법 학자들이 늘 그들에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에 관한 말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군중 사이에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도 “저
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 (요한 4.25) 하고 말했고, 사람들이 요한에게 ‘당신은 엘리야요? 아니면 그 예언자요?’(요한 1,21 참조) 하고 물은 것입니다 .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리스도나 엘리야에 관한 이런 견해가 널리 퍼져 있었지만, 그것은 옳은 해석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두 번 오신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미 일어난 지금의 오심과 앞으로 있을 재림이 그것입니다. 바오로는 이에 대해 ‘과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줍니다." (티토 2,11-12) 하고 말했습니다.
첫 번째 오심을 잘 보고 두 번째 오심에 대해 바오로가 뭐라고 하는지 잘 들으십시오. 그는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우리"(티토 2,13) 라고 합니다.
예언자들도 두 번의 오심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로 오실 때에는 엘리야가 선구자로 올 것이라고 합니다. 첫 번째 오심의 선구자는 요한이고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을 엘리야라고도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요한이 엘리야라서가 아니라 그가 엘리야의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두 번째 오심의 선구자일 것이듯이, 요한은 첫 번째 오심의 선구자였습니다.
그러나 이 일들을 혼동하고 사람들을 나쁜 길로 이끄는 율법 학자들은 두 번째 오심에 대해서만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서 ‘이자가 그리스도라면, 엘리야가 먼저 왔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4
하느님이 그대 안에서 하느님 되게 하라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1요한 4,9)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은, 당신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 주시어, 우리가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도록 하셨습니다"(1요한 4,9). 아들을 통해 살지 않는 사람은 모두 자신이 살아야 할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에 한 부유한 왕이 아리따운 딸과 함께 살다가, 가난한 사람의 아들에게 시집을 보냈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그 가난한 집의 온 식구도 결과적으로 신분이 높아지고 고귀해질 것입니다. 영성의 대가는 말합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 그 결과로 모든 사람의 신분이 상승되고 고귀해졌다. 실로 우리는 기뻐 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형제인 그리스도가 자신의 능력으로 천사들의 합창대를 넘어 아버지의 오른쪽에 앉으셨기 때문이다." 이 대가의 말은 실로 옳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떠받들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나에게 부유한 천구가 있다고 한들,내가 가난하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나에게 지혜로운 벗이 있다고 한들, 내가 어리석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296)
✝️ 토요일 이웃 종교(생태)의 날✝️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한국 고대사에 나타난 하느님 신앙과 풍류도
하느님 신앙과 불교와의 지평 융합
원효 연구 전문가인 은정희는 원효는 <대승기신론>의 성격을 중관(中觀) 사상과 유식(唯識) 사상의 지양 종합으로 보았다고 갈파했다. <대승기신론>의 기본 구조 중 일심이문(一心二門) 중에서 중관학파는 심진여문(心眞如門)을 강조하고 유식학파는 심생멸문(心生i滅門)을 강조하지만, 일심에로 이문(二門)이 종합 지양됨을 밝힘으로써 성과 속을 독립된 별개의 실제로 보려는 위험을 비관적으로 극복하고 종합 지양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원효와 야스퍼스 사상의 비교 연구에 일생을 바친 신옥희는 <일심과 실존>이라는 책에서 원효의 일심을 자세하게 논하고, 특히 우리가 관심을 갖는 주제인 일심과 원효의 신앙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기신론>에서 블신론(佛身論)은 일심진여(一心眞如)의 체(體), 상(相), 용(用)의 삼대(三大)를 논하는 부분에서 전개되고 있다. 여기서 전개되고 있는 불신론(佛身論)은 대승(大乘)으로서의 일심의 실천적 . 구원론적 측면, 즉 중생의 능력에 따라 그들에게 작용하여 그들을 각(覺)의 해탈로 이끌어주는 일심의 신비로운 정용(淨用)을 보여주는 이론이다. 이와 같은 <기신론>의 사상을 신앙의 기초로 삼고 있는 원효에게서 일심은 각(覺)의 본체로서 평등무이(平等無二)의 진여 자체일 뿐 아니라 생동하는 각(覺)의 주체로서, 생멸의 세계로 전락한 중생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진여의 훈습을 일으켜 그의 본래의 모습인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게 하는 신비스러운 힘으로서 작용한다.”(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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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4.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 [fisherpeter] 2024-12-14 ㅣNo.178472
오늘 복음도 몇 줄 안 되는 짧은 복음입니다. 오늘은 복음을 바탕으로 해서 좀 다른 각도로 복음을 묵상했습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말씀을 가지고 오늘 복음 전체를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어떤 사람을 판단하는 게 아니라 평가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평가를 했는데 그 평가가 나중에 시간이 흐른 후에 잘못 평가를 했다고 자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비록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인품이라든지 어떤 성격과 그 사람 전체를 평가할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좀처럼 드물긴 하지만 말입니다.
처음에 사람이라는 건 평가가 어렵다고 한 이유는 속담에도 있지 않습니까?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마음은 모른다고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금전에 표현한 사람도 사람인데 왜 그런 사람은 어느 정도 알 수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건 뭔가 보이지 않는 그 사람만의 카리스마가 있습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아우라 같은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아우라라고 하니 모순형용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아우라라는 것은 보여야 그게 아우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아우라라는 이 표현을 잘 보셔야 합니다. 이건 이렇게 표현을 해보고 싶습니다.
실제 어떤 사람은 그 사람만의 광채와 같은 아우라가 나오지만 그걸 보는 사람이 실제는 그 아우라가 존재하지만 그 아우라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설명을 좀 쉽게 하기 위해 이렇게 표현을 하겠습니다. 아우라가 없는 사람은 그저 평범한 사람이고 아우라가 나오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라고 표현하겠습니다. 실제는 아우라가 나와서 대단한 사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보는 사람이 그 아우라를 보지 못해서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 사람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알게 될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 왜 그땐 그 사람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알지 못했을까요? 이유야 다양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걸 알 수 있는 안목이 좁다는 게 가장 큰 이유입니다.
2002년 월드컵 때 우리나라를 4강의 기적을 일으킨 히딩크 감독에 관한 자료를 보면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히딩크 감독은 선수 시절에는 크게 빛을 발하지는 못했는데 감독으로서는 위대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운이라고도 치부할 수도 있을 수 있지만 히딩크 감독이 뛰어난 감독으로서의 자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어떤 선수를 발굴할 때 남들이 보지 못하는 면을 본다는 게 특징입니다. 다른 점도 뛰어난 점이 많겠지만 히딩크 감독은 그러한 능력이 뛰어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고 합니다. 이런 내용을 감안해서 저는 이런 걸 묵상해보고 싶습니다. 우리의 신앙 공동체에서 우리는 이런 행동을 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내용을 언급하지만 우리도 이처럼 세례자 요한처럼 위대한 사람은 아니더라도 교회 내에서 요한처럼 마치 예언자는 아니지만 예언자 역할을 하며 선구자적인 그런 의식과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 있어도 그런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마치 200년 전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이런 사례가 많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교회는 이전의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이젠 성소자도 많이 감소하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지만 저는 이런 것도 문제지만 만약 이런 게 문제가 돼 나중에 현실적으로 어떤 문제가 될지는 그때 가봐야 알 수 있겠지만 그와는 별도로 설령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한다고 해도 그런 문제에 대한 다른 보강책을 교회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 제 나름대로 생각한 게 있습니다. 오늘 제가 서두에 언급한 내용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평신도 중에서도 물론 신분은 평신도이지만 뛰어난 인재가 있다면 평신도의 신분이지만 성직자의 역할은 할 수 없어도 그와 같은 위치에서 성직자 역할을 보조할 수 있는 인재를 키울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미래의 우리 교회의 앞날을 생각해보면 이런 것도 충분히 고려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성직자 역할은 하지 못해도 그런 인재를 발굴해 인재를 양성하게 되면 반드시 우리가 생각하는 성소자 부족 때문에 생길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나마 문제를 최소화시킬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제가 듣기로는 제주교구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보면 제가 하는 말씀이 설득력이 있습니다.
제주교구에는 선교사가 좀 있다고 들었습니다. 일반교리교사보다 좀 더 실력이 있는 그런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현실적으로 제주교구와 같은 현실이 앞으로 장차 우리 천주교 내에서도 머지않아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에 한국천주교도 이런 면을 고민해봐야 할 것입니다. 그때 가서 사후약방문을 찾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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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4.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제 십자가 지고 예수님을 /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1204](루카 14,25-33)
박윤식 [big-llight] 241213. 18:15 ㅣNo.178454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1542년 무렵 에스파냐 아빌라의 폰티베로스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매우 가난했던 그는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하여 수도 생활을 하다가 사제가 되었다. 이후 요한은 ‘아빌라의 성녀’로 잘 알려진 예수의 데레사 성녀와 함께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을 추진하면서 영성 생활의 스승 역할을 하였다. 1591년 세상을 떠난 그는 1726년에 시성되었고, 1926년에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다. 교회의 위대한 신비가인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자신의 체험을 쓴 ‘가르멜의 산길, 어두운 밤, 영혼의 노래’ 등은 영성 신학의 고전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이 ‘버림과 따름’은 군중, 곧 예수님의 과거와 현재 제자들과 미래의 제자들 전부를 대상으로 한다. 여기에는 제자의 조건에 관한 예수님의 여러 가르침이 모아졌는데, 그것들은 모두 ‘버림’이라는 주제에 집중되어 있다. 그렇다고 다 예수님을 떠남은 아니다. 그보다는 따름이 더 많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따르는 신앙인이 된 게 아닐까? 이는 예수님 ‘제자 될 자격’이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히브리 말에는 ‘더 사랑하다, 덜 사랑하다’와 같은 비교급이 없단다. 따라서 ‘미워하다’를 이러한 언어 현상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나. 그러기에 ‘덜 사랑하다’라고 표현할 길이 없기에 그 대신에 ‘미워하다’로 표현한다는 것이라나.
따라서 여기서의 ‘미워하다’는 ‘덜 사랑하다’라는 의미란다. 이는 예수님께서도 십계명에 있는 ‘부모 공경’을 여전히 지켜야 할 중요한 계명으로 제시하기에. 그래서 위의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을 ‘목숨보다 나를 더 좋아하지 않으면’, 또는 ‘목숨을 나보다 하찮게 여기지 않으면’으로 보는 게 타당할 게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이러한 ‘무정한’ 말씀을 약화시켜서도 안 된단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근본적이고 무조건적인 추종을 요구하신다. 이러한 예수님과 마주하는 사람에게 다른 인간적 관계들은 모두 부차적일 수밖에 없다. 이는 예수님께만 전적으로 구원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대단한 역설이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 여기서 ‘탑’은 포도밭에 있는 망대나 여타의 농사일을 위해 주로 돌로 세운 건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아무튼 가난한 농부로서는 지어 보겠다고 섣불리 달려들 수 없는, 경비가 다소 드는 구조이다.
“이와 같이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이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사실 우리는 원수마저 사랑해야하는 예수님 제자이지만, 구원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데 방해가 된다면 자기 가족까지도 미워해야 한단다. 그렇다고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그들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만큼 당신을 따르는 제자 됨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라나. 더군다나 당신 제자로서의 가장 큰 자격요건은 소유마저 다 버리는 마음의 가난함이다. 이처럼 제 십자가 짐으로서 예수님 제자가 되려한다면 순수 마음을 갖추는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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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분 오심 준비할 우리는 / 대림 제2주간 토요일(마태 17,10-13)
박윤식 [big-llight] 241213. 18:15 ㅣNo.178453
대림시기 중간 시점에 다다른 지금, 가만히 돌이켜 보면 이리저리 바쁘게 보낸 시간뿐인 것 같다. 한 해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마음에 수많은 모임에다 선물 준비가 더해져 차분한 분위기가 아니라 하루하루가 더할 나위 없이 조급 그 자체이라나. 그러다보니 막상 성탄절이 눈앞이라도 기쁘고 뿌듯한 마음보다는, 뭔가를 준비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앞설 때가 훨씬 더 많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라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엘리야가 먼저 와 모든 것을 바로잡는다. 그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사람의 아들도 그들께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제야 제자들은 이 ‘엘리야 재림’ 그것이 바로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엘리야에 대해 이르셨다. 그는 기원전 9세기경에 활동한 예언자이다. 유다인들은 그를 모세와 동등한 서열에 둘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남긴 이다. 북이스라엘의 일곱 번째 임금이었던 아합 시절에 등장한 그였다. 당시는 다들 물질 숭배와 바알 우상에 빠져 있었다. 그는 카르멜 산에서 바알의 제관들을 제거하며 하느님의 힘을 드러냈다. 이후 그는 회오리바람에 실려 승천한다. 그래서 그 백성은 종말이 가까워지면, 엘리야가 다시 오리라 믿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두고 그가 이미 왔다면서,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라고 대답하셨다. 마음이 완고한 율법 학자들은 여전히 마음의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이 곧장 열렸다면, 그가 전한 회개의 메시지를 받아들여 엘리야가 돌아왔음을 깨닫고는, 곧 요한이 새로운 엘리야였음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이 엘리야에 비유하셨다. 당신 오심을 준비했던 그에 대한 평가였다. 위대한 이 뒤에는 항상 숨겨진 누군가가 있다. 주인공을 돕는 이름 없는 조연들이다. 그들이 있기에 주연이 빛난다. 요한은 자신의 그 위치를 깨달았다. 그러기에 “나는 그분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라고 외쳤다. 진정 겸손한 이는 이처럼 자신을 너무 잘 아는 이일 게다. 이러니 요한은 예수님의 칭찬을 받을 만한, ‘으뜸인 조연’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 말씀을 전하며 회개할 것을 촉구했다. 그가 하느님의 정의를 세우고자 오실 그리스도를 맞이하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설파했지만, 그 잘난 백성들은 그들의 메시아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조건부 신앙만을 지녔고,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보다 오직 요구 사항만을 나열했기에. 사실 우리도 주님께 그 무엇을 바라기보다, 그분께 무엇을 해 드릴지를 늘 생각하고 실천해야만 한다. 그럴 때에 주님께서 우리 부족한 점을, 다 채워 주실 것이니까.
이제 대림시기가 열흘 남짓 앞으로 다가왔다. 매번 분주한 일상이지만, 우리 마음을 주님께 대한 ‘그리움’으로 다시 불타오르게 하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겠다. 그것이야말로 성탄을 기쁘게 맞이하는 데 필요한 큰 준비일 게다. 구세주를 기다리는 삶은 신앙을 지키고 쇄신하는 거다. 구원의 은총은 거저 주어지지만, 구세주를 맞이할 자세는 필요하다. 불의에서 빠져 나와 하느님 계명을 지키는 삶, 마음을 비워 하느님 은총이 채워지기를 갈망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연말에 많은 것을 정리한다. 신앙에 방해되는 것들을 정해, 치울 ‘목록’에 차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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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4.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2).
믿음이 없는 이들에게 세례자 요한은 엘리야로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집회 48,10)라는 말씀이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그가 구세주 예수님을 준비시키고자 왔다는 사실도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 17,12).
예수님 또한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세례자 요한처럼 다루어질 것입니다.
죄인들이 그분께 돌아와 회개하는 모습을 보여도, 그분의 말씀과 기적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드러나도,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구원자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도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카야파라는 대사제의 저택에 모여,
속임수를 써서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려고 공모하였다”(26,3-4).
정작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던 사람들은 바로 ‘하느님의 일을 하던 사람들’,
‘하느님과 아주 가까워 보이는 이들’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중요한 일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늘 하느님 구원의 신비를 알아볼 수 있는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성체 앞에 머물며 기도하는 삶,
주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 삶 안에서 믿음은 자라고 커 나갑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며 그분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면 좋겠습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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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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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4.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생각이 옳다고 인정하시며
더 나아가 그 엘리야는 이미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단지 사람들이 다시 온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해서
제멋대로 다루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왔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모습으로 그는 다시 왔지만
사람들은 요한을 엘리야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엘리야의 역할
모든 것을 바로잡는 일을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통해서 이루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것에 호응한 것은 아닙니다.
요한을 거부한 사람들은
요한에게서 모든 것을 바로잡는 역할을 보지 않고
자신들이 생각한 엘리야의 모습만 찾았습니다.
그것이 어떤 모습이던
그들이 생각하는 모습을
요한에게서 발견하지 못했기에
요한을 엘리야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 일은 예수님에게서 똑같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의 모습을
그들은 예수님 안에서 찾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메시아의 모습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메시아의 모습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엉뚱한 방향에서 찾아 헤멜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방성입니다.
내가 생각한 것만 옳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생각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은
그를 무시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는 결과를 만들게 됩니다.
즉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하느님을 찾기 위해서
우선 내가 생각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찾아야 합니다.
나는 하느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돌아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모습은 우리가 하느님을 찾는 과정에서
조금씩 바뀔 것입니다.
우선 나라는 사람이 바뀌고
하느님에 대한 지식도 바뀌며
그렇게 하느님과의 관계도 조금씩 바뀌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변하지 않으시지만
내가 바뀐다는 것은
내가 살아있는 사람임을 말하고
그렇게 하느님과의 관계도 살아 움직입니다.
즉 처음에 생각한 하느님의 모습만 옳다고 말하면
그것은 살아 움직이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며
하느님과의 관계도, 나 자신도
살아 있지 않은 것으로 만듭니다.
고집은 단순히 내 주장으로 끝나지 않고
나 자신을 스스로 거부하는 결과를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는 늘 과정 속에 있음을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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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4.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 12)
저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지닌 것을
떨구어
내어야만
확연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하느님의
자유입니다.
있는 만큼
부자유로운
우리들
삶입니다.
그래서
있음은
있다고
착각하는
없음으로
깨달음의
빛이 됩니다.
헛된 자아가
없어지면
하느님만
있을 뿐입니다.
바로 여기에
계시는
하느님의
실존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의
자유입니다.
제멋대로
다루어도
사랑을
빼앗기지 않는
십자가 성 요한의
자유입니다.
원래부터
존재하시는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기쁨입니다.
있음으로부터의
자유가
없음으로
다시
정화됩니다.
끝없는
하느님의
길만
있을 뿐입니다.
한마음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누려야 할
자유입니다.
아무도
그 자유를
속박할 수
없습니다.
참된 자유를
깨닫는
참된 사랑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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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4.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십자가는 우리를 주님께로 더욱 가까이 인도하는 도구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1542~1591)이 살았던 중세 시대는
수도 생활의 부흥기를 지나 쇠락기에 접어든 시기였습니다.
더 이상 수도자들에게 있어 완덕에 대한 열망이나 하느님 중심의 삶은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타성에 빠진 수도자들의 얼굴은 냉랭했고, 게을러빠진 수도자들은 자꾸만 회칙을 완화시켰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충실하고 올곧은 가르멜 수도자 요한은 원칙대로! 를 강조하며 고난과 형극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안토니오 수사를 비롯한 마음이 맞는 수도자 몇 명과 더불어 엄격한 금욕과 극기, 기도와 고행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안락하고 쾌적한 대 수도원 건물을 뒤로하고 다리를 뻗기도 힘들고 서 있기도 힘든 작은 방에서 함께 생활했는데, 여기저기 비가 새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얼굴로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지냈습니다.
외출을 할때는 신발도 신지 않고 맨발로 다녔습니다.
이러한 쇄신된 삶을 살아가면서 끝끝내 회개하지 않는 동료 수도자들을 회개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자연스레 얼굴과 뱃속에 기름이 가득한 게을러빠진 동료 수도자들에게 미운털이 깊이 박혔습니다.
자신들의 비행이나 과오는 덮어둔 채, 갖은 방법으로 요한 사제를 괴롭혔습니다.
총회가 개최되자 요한 사제를 오해한 총장은 그를 톨레도 수도원의 깊은 지하 감방에 가두었습니다.
그가 총회에 나타나서 어떤 행패를 부릴지 몰라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 사제는 갖은 학대와 모욕을 묵묵히 견뎌냈습니다.
사악하고 매정한 동료 수도자들을 향해 일언반구도 항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을 바꾸었습니다. 부족한 내게 겸손의 덕을 쌓게 하는 은인!
이토록 탁월한 성덕은 오래가지 않아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머지않아 요한 사제의 결백과 인품이 알려졌고, 비오 5세 교황과 그레고리오 13세 교황은 그의 이상을 추구하는 수도자들을 위한 특수한 가르멜회를 정식으로 인준했습니다.
혹독한 고통과 십자가 속에서도 요한은 항상 초긍정 마인드로 일관했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십자가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십자가의 무게가 커지면 커질수록, 더욱 십자가를 꼭 끌어안았으며, 십자가 안에 유일한 구원의 길이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토록 은혜롭고 신비스러운 성인을 우리에게 보내주심에 깊이 감사드리며,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는 십자가를 보다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봐야겠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주님께로 더욱 가까이 인도하는 도구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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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4.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엘리야는 이미 왔으나 알아보지 못하였다
오늘 복음에서는 엘리야의 재림에 관해 이야기한다. 예수께서는 방금 제자들에게 당신의 거룩한 변모를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영광스러운 변모가 그분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왜 선구자인 엘리야가 나타나지 않는지 물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10절) 예수님은 요한 세례자를 엘리야로 소개하시지만,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의 화해와 재건을 이룩하지 못하고 참수당했기 때문에 재림한 엘리야일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엘리야가 아직 재림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다음에 오실 메시아도 오지 않았다고 한다. 예수님은 메시아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자 요한을 재림한 엘리야로 생각하였다(11,14 참조). 그러나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 헤로데에게 죽임을 당했다(14,3-12). 이렇게 메시아의 선구자가 배척을 당한 것처럼, 메시아이신 예수께서도 배척을 당하셨다(11,16-19 참조).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12절) 그를 감옥에 가두고 처형한 헤로데와 그들이 공범자였다.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12절)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그들이 엘리야에게 한 것과 같은 일을 당신도 당하실 것이라고 하신다. “엘리야가 이미 왔다.”(12절)는 말과 그에 대한 구원자의 설명을 듣고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임을 깨달았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두 번 오신다고 말한다. 첫 번째 오심은 지금 오심이다. 바오로 사도는 “과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줍니다.”(티토 2,11-12)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우리에게 오시는 그분을 잘 맞을 수 있도록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두 번째 오심에 대해 바오로는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우리”(티토 2,13)라 한다. 엘리야나 메시아의 참모습은 희생적인 사랑과 봉사를 통해서 드러난다. 우리 자신이 엘리야가 되고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은총의 선물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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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4.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세례자 요한의 역할을 이해 못 할 때; 부모도 자녀에게 사이비 교주가 될 수 있다
오늘도 세례자 요한에 관한 복음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타볼산에서 변모하시고 내려오는 중에 제자들이 묻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이 틀린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그 엘리야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라고 설명하십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그리고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하면 당신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시며 이렇게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율법 학자(모세) – 엘리야 – 메시아’에 관한 순차적인 구원의 과정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율법학자는 타볼산에서 만난 모세이고 모세는 율법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다음 엘리야가 필요하고 마침내 이 두 단계를 거치면 메시아가 구원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명확히 알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 종교 안에서도 하나에 지나치게 집중하거나 약간
교리를 바꾸어 돈벌이하는 사이비들을 구별할 수 없게 됩니다.
오늘은 모세-엘리야-메시아의 순차적인 구원의 과정을 통해 어떻게 우리 종교 안에 스며들어있는
사이비적인 요소를 찾아낼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자매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딸이 어렸을 때 받은 상처에 대한 탓을 너무
부모에게만 돌린다는 이유였습니다.
물론 부모로서 키우면서 딸에게 부족한 사랑을 준 것은 인정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힘든 이유를 지나치게 부모 탓만 하니 더는 견디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몇 년 동안 가톨릭 신자들로 구성된 영성 심리 학회에서 교육도 받고 피정도 하고 상담을 한 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당연히 지금 상태가 좋지 못한 이유는 어렸을 때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영향이 가장 크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저도 모든 심리적 문제는 사랑을 부족하게 받아서라고 말합니다.
율법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방법에 머물게 만드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엘리야는 사랑하지 못하는 탓을 남에게 돌리게 하지 않습니다.
자아와 삼구에 돌립니다.
심리학에서는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방법을 따라야 하며 부모에게 용서를 받게 하고 자기 자신을 믿고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역할이 강조된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이고 모세입니다.
그러나 이것에만 머물면 율법주의자가 됩니다.
이제 초점을 나 자신에게 돌려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용서를 청해서 그 상처가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그 상처 받은 자아를 죽이기 위해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알려주는 것이 엘리야의 역할입니다.
왜 이미 성인이 되었으면서도 그래도 할 만큼 한 부모 탓을 하게 만듭니까?
부모가 부족했어도 부모는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세상에 누가 완벽합니까?
엘리야는 우리 시선을 자아로 이끌고 그 자아를 없앨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음을 깨닫게 만드는 중요한 자리입니다.
엘리야는 가르멜산에서 우상 숭배자들에게 이끄는 예언자들의 목을 쳤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는 시합에서 승리하였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우리 문제가 그리스도의 피, 곧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없음을 명확히 일러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이비들은 무상으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자아와 삼구를 죽이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자신들이 하는 기도회나 상담, 피정, 그리고 자신들이 하는 어떤 방법들을 통해서 어렸을 때의 상처를 치유하라고 하며 그리스도의 피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을 자신들이 없으면 안 되는 것처럼 치장합니다.
그렇게 돈을 버는 것입니다.
혹은 자기 존재감을 느끼는 것을 즐깁니다.
모든 것은 나의 문제고 그리스도의 피로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알리는 엘리야의 역할을 본인들이 하려고 하는 이들이 사이비입니다.
자신들의 역할을 강화하며 그리스도의 역할을 감소시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자신들의 노예로 만듭니다. 대부분의 사이비는 이렇게 엘이야가 와야만 하는
필요성을 무시합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사이비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나 없으면 어쩔 뻔했냐?”라고 말하는 사이비들을 조심하십시오.
엘리야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서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표지판과 같은 존재입니다.
요한은 자신 안에 사람들을 잡아놓지 않습니다.
어린양께 자기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을 보냅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요한의 제자들이었고 요한은 그들이 예수님께 떠나는 것을 기뻐합니다.
자신은 작아지고 그분은 커지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이비는 자기가 커지며 예수님의 역할을 줄입니다.
그래야 사람들을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이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자유를 구속합니다.
영화 ‘새크라멘트’(2014)는 마약에 빠진 누나가 어느 종교단체에 들어가는데 친동생에게 이곳이 너무 좋다고 한번 오라고 초대장이 와서 친구 두 명과 함께 누나가 있는 곳으로 가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렸습니다.
이는 남아메리카 가이아나 존스타운에서 실제로 벌어진 사건입니다.
그곳의 교주 짐 존스는 900여 명의 신도에게 에덴동산과 같은 그곳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엄청난 추앙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그런데 무장한 사람들에 의해 보호되고 있었습니다.
일정을 마치고 동생과 기자들이 떠나는 날이 되자 그곳에서 소란이 일어납니다.
행복하기만 하다고 말하던 그들이 자신들도 데려가 달라고 청하는 이들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자 짐 존스는 무장한 부하들에게 그곳을 떠나려는 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였고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질 것이 당연시되자 남아있는 이들 또한 독극물을 마시고 자살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렇게 수백 명의 아이와 함께 900여 명이 자살하거나 피살된 이 사건은 911 테러 이전까지 미국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왜 9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사이비에 빠져 목숨을 잃게 된 것일까요?
그들이 엘리야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모든 문제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 있고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의 십자가 희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인도자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자기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마치 자기를 통해서만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하면 그것은 사이비입니다.
엄마도 사이비 교주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역할을 강조하는 이들은 필연적으로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게 되는데 자녀의 종교적 자유를 주지 않는 부모도 어느 정도는 사이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영성체를 했다면 이제 자녀와 부모는 하느님 앞에서 같은 형제·자매들입니다.
서로에게 무언가를 강요할 수 없습니다.
선을 지켜주어야 합니다.
여기서까지 부모가 자녀들에게 종교를 강요한다면 부모가 사이비 교주가 됩니다.
사랑은 강요하지 않는데 본인도 구원에 들지 못했으면서 본인들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너희는 나 없으면 어쩔 뻔했니?”입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어쩔 뻔했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본인이 예수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항상 자신은 작아지고 그분은 커지게 해야 합니다.
엘리야의 역할을 하는 이들이 커지면 그것이 곧 사이비가 되는 것입니다.
사이비에 빠지지 않도록 ‘율법 – 엘리야 – 메시아의 고리’를 명확히 이해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모두 엘리야고 요한입니다.
우리는 작아지고 그분은 커지셔야 합니다.
구원은 내가 아니라 그분에게서 옵니다.
그리스도 앞에 서 있으면서 나의 역할을 줄여가지 않는 사람은 사이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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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4.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을 왜 믿는가?”부터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마태 17,10-13).”
1) 이 이야기의 바로 앞에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이야기’가 있습니다(마태 17,1-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 체험하면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는데, 그래도 의문이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은 믿지만, 엘리야 예언자가 메시아보다 먼저 온다는 예언은 실현되었는가?
실현되었다면 누가 엘리야 예언자인가?”
예수님의 답변은 “엘리야는 이미 왔고, 자신의 사명을 수행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엘리야라는 것을 믿지 않고
그를 죽였다.
엘리야 예언자를 죽인 자들은 메시아도 죽일 것이다.”입니다.
이 말씀은, 세례자 요한이 바로 엘리야 예언자라는 것을 확인해 주신 말씀이기도 하고,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는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을 알아들었고, 그래서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고,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더욱더 굳게 확신하게 되었다.”입니다.
2)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사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 줄 때, 교묘하게 꾸며 낸 신화를 따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위대함을 목격한 자로서 그리한 것입니다. 그분은 정녕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존귀한 영광의 하느님에게서,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하는 소리가 그분께 들려왔을 때의 일입니다.
우리도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2베드 1,16-18).”
예수님이 메시아(구세주)라는 사도들의 증언은, 무슨 공부를 통해서 얻은 지식도 아니고, 누군가에게서 배운 것도 아니고, 사도들 자신들이 직접 체험하고 믿은 일에 대한 증언입니다.
“우리는 직접 보았다. 그래서 믿는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언도 같습니다.
오늘날의 우리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은, 사도들의 증언을 믿기 때문입니다.>
3) 그렇지만 사도들이 믿었으니 우리도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 다시 표현하면, “우리가 찾는 메시아가 예수님이라고, 또 우리가 원하는 구원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다고, 사도들이 알려 주었다.”입니다.
신앙이란, 강제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믿고 싶지 않다는 사람을 억지로 믿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처음에 예수님을 만난 일과 믿게 된 일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그곳에 다시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요한 1,35-41).”
안드레아 사도가 베드로 사도에게 가서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라고 증언한 것을 근거로 해서,
제자들은 원래 메시아 강생을 갈망하면서 기다리고 있었고, 메시아께서 주실 구원을 얻기를 희망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시다.” 라고 알려 주었고, 그들은 그 말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는
“예수님의 삶을 보고, 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입니다.
만일에 사도들이 메시아를 기다리지 않았다면, 또 구원이 아닌 다른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면, 세례자 요한의 말을 흘려들었을 것이고, 예수님을 따라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만일에 하느님 나라, 구원, 생명 등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세속의 부귀영화나 출세나 성공 같은 것만 원한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을 것이고, 종교나 신앙을 가질 생각 자체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그런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것을 얻기만을 희망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그것은 메시아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신앙이 아닙니다.
대림 시기는, “나는 지금 무엇을 찾고 있는가?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께 무엇을 청하고 있는가?”를 다시 반성하고 점검하는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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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4.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17,10-13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오늘의 제1독서는 집회서의 후반부로서, 모든 유다인들이 존경하며 기다리는 대예언자 엘리야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룩한 주요 업적들을 언급한 후, ‘정해진 때’ 즉 하느님께서 정하신 종말의 날에 그가 다시 이 세상에 내려와 수행하게 될 소명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맡겨진 소명은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는 것이지요. 즉 종말의 날에 엘리야 예언자가 나타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멸망을 예고하는 두렵고 무서운 표징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들을 부활시키시어 참된 행복의 나라로 데려가신다는 구원의 약속이자 기쁨의 표징인 겁니다. 그와 비슷한 메시지가 구약의 마지막 예언서인 말라키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말라3,23-24).
그렇기에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메시아를 보내시기 전에 엘리야 예언자를 먼저 보내시는 것은 당신 백성을 한 명이라도 더 구원하시기 위해 미리 준비시키시려는 의도입니다. 그러니 엘리야 예언자로 여겨지는 사람을 보았다면 종말의 날이 임박했음을 떠올리며 지금 즉시 구원받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화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하면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특히 대사제나 율법학자 같은 종교 지도자들과 기득권층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구약성경에 적힌 예언에 따라 메시아보다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함을 강조하면서, 아직 엘리야가 나타나지 않았으니 메시아도 오지 않은 거라고, 그러니 수많은 군중들이 추종하는 예수라는 자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억지를 부립니다.
이미 세례자 요한이라는 대예언자가 나타나 종말의 날이 임박했음을 알려주고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함으로써 사람들을 구원받도록 준비시키는 소명을 다 하고 있었음에도,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 그를 ‘엘리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은 그가 헤로데에게 붙잡혀 참수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진짜 엘리야라면 남북으로 갈라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화해시키고 무너진 국가의 재건하는 소명을 완수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죽어버렸으니 그런 무능하고 약한 이가 엘리야 예언자일 리가 없다는 논리이지요. 즉 아직 이 땅에 엘리야가 재림하지 않았으니 메시아도 안오셨다고, 그렇기에 예수라는 자는 절대 메시아일 수 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른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으시고자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여기서 예수님이 언급하신 엘리야는 세례자 요한을 가리키지요. 즉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의 사명을 띠고 이 세상에 왔지만 나태함과 안일함에 빠진 유다인들은 그가 전한 회개와 극기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헤로데를 필두로 한 권력자들이 그를 자기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눈엣가시로 여겨 제거했다는 뜻입니다. 또한 유다인들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마저 자기들이 기대하고 바랐던 모습과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며 핍박할 거라고 예고하시지요. 우리도 얼마든지 그들과 같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그분 뜻을 따르기보다 내 뜻을 앞세운다면, 그분께서 말씀하신 계명과 가르침대로 살지 않고 탐욕과 집착에 휘둘려 산다면, 다시 또 다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을 제멋대로 다룰 생각 말고 그분 뜻에 순명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작고 약한 이의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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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4.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
집회서는 기원전 3세기에서 2세기 사이에 번역된 희랍어 번역본인 셉투아진타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저자는 이미 엘리야가 불마차를 타고 올라갔던 사실을 회상하며 엘리야를 찬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메시아와 부활사상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당신을 본 사람들과 사랑 안에서 잠든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우리도 반드시 살아날 것입니다.”(집회 48,11)
이스라엘 전반의 구원의 역사에서는 엘리야가 불마차를 타고 하늘에 올라 갔듯이
언젠가는 때가 되면 메시아로 다시 오리라른 희망을 가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나라도 없는 암울한 미래를 향해 견딜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메시아사상이었지요. 학자들은 유대인들이 가졌던 메시아는 영성적인 것보다 다분히
정치적이라고 합니다. 당장은 나라의 주권도 없지만 언젠가는 메시아가 나타나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메시아 사상을 가지고 있던 터에 스승에게 질문을 합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마태 17,17)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는 되어 있지 않지만 사실대로 주님께서는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11-12절)
마태오 복음사가는 주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주님께서도 사람들이 함부로 대하고 수난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기 멋대로 비난하고 함부로 대했던 것입니다.
가끔씩 이런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마음 쓰지 말고 편하게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한편으로 보면 참 고마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라 나선 우리에게는 그럴 수만은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신 길이 꼭 환영 받는 일만이 아니라 배척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길이 순탄하거나 무사안일주의가 아니라는 사실을 가슴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보람된 일을 위해 때로 함께 하지 않는 사람, 또 비난을 받는 일이 있더라도 두려워해서는
안 되겠지요.
뜻이 있는 길에는 보람도 있겠지만 고통도 따르는 법이지요. 그렇지만 희망의 끈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대로 주님의 수난과 죽음 후에 부활이 있듯, 당장은 힘들고
어려운 것도 보람이라는 풍성한 결실이 있는 법입니다.
신앙의 삶에도 얼핏 보기에는 고통 받고 또 실패한 것 같은 일들 속에도 이미 주님의 힘과
위로가 있고 그리고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영광이 있기 마련입니다.
대림시기에 세상의 것에서 가난하게 오시는 주님을 맞기 위해서 깨어 기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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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4.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거룩한 중심 이동
엘리야는 산 채로 승천해 있다가(2열왕 2,11)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이스라엘에 다시 와서 백성을 화해시키고 열두 부족을 다시 일으켜 세우리라는 믿음이 있었다(말라 3,1. 23 참조). 율법학자들은 이런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하였다(마태 17,10). 그토록 위대한 예언자로 칭송받았던 엘리야 예언자가 먼저 와야 한다고 믿은 것은 현실적인 자기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17,11-12)고 하신다. 곧 두 번째 엘리야인 세례자 요한이 주님의 길을 준비하러 왔는데도 주님의 구원과 사랑을 알아채지 못한 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함부로 다루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당신도 세례자 요한처럼 사람들에게 고난을 받으실 것이라고 예고하신다(17,12). 엘리야와 세례자 요한 그리고 예수님 모두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고 고난을 받았다. 엘리야는 횃불처럼 타오르는 불이 되어 주님의 영광과 말씀을 전했다(집회 48,1. 4).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먼저 와서 사람들에게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였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오신 하느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랑을 보여주시고 하느님 뜻을 전파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여 모두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렸고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길 열망한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요한과 메시아를 배척하여 죽음으로 내몰아버렸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닌 명예와 권력과 재물을 이용하여 자신의 뜻대로 살면서 그것이 참 행복인양 착각에 빠져 있었다. 따라서 그와는 정반대로 자유와 행복을 위해 모든 것에서 떠나라고 가르치는 예수님의 그 말씀과 처신이 그들에게는 당연히 달가울 리 없었던 것이다.
예언자들이 전한 하느님 말씀은 이기심과 탐욕에 갇혀 있던 그들에게는 듣기 싫은 ‘불편한 진실’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선이 아니라 ‘자기가 정해놓은 자기식의 선’이었으며, 자신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는 모두의 행복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채워주고 자기 문제를 해결해주는 분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하느님의 주도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하느님 위에 두고 하느님을 조정하여 자신이 필요할 때 이용하는 근원적인 착각에 빠져버렸던 것이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자! 우리는 가까이 와 계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이미 들리는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며, 생의 시초부터 내 안에 생생하게 살아계시는 그분을 소외시킨 채 밖에서 찾곤 한다. 왜 그럴까? 아마도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보기보다는 내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려고 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내가 듣고 싶은 것만을 들으려 하고, 내 밖의 것을 소유함으로써 행복해진다는 현세 의존적인 사고방식과 삶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든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받으려 하는 것은 눈앞의 메시아 예수님을 내치고 죽은 엘리야의 과거 영광에 애착하는 어리석은 태도인 것이다. 모든 것을 내 뜻과 자기중심적으로 보고 생각하는데서 주님께로 중심을 이동해야 하리라!
그런 삶에 젖어 있는 이들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 활동을 하는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은 늘 취하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계륵(鷄肋)과 같을 것이 분명하다. 이 틀을 깨는 길은 말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는 말씀을 한귀로 흘려듣는 일이 없었고 들은 것은 부단한 정열로 묵상하였다.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분과 더불어 진리와 사랑과 선을 거슬러 도전해오는 온갖 고난을 믿음 안에서 이겨내도록 하자. 거룩하신 하느님께로 내 온 존재의 중심을 옮겨 자기중심적인 틀과 행동을 버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기쁘게 살아가도록 하자! 대림시기는 중심이동의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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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4.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사랑
오늘 미사의 독서와 복음에는 엘리야가 언급됩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꼽는 대표적 예언자 중 한 사람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마태 17,10)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 이후 산을 내려오던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쭙니다. 그들은 방금 엘리야와 모세를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였지요. 엘리야의 출현으로 제자들은 스승이신 예수님의 예언자적 소명의 정통성과 연속성을 확인합니다.
제1독서는 엘리야 예언자에 대한 집회서의 대목입니다. 길지 않은 내용 중 "불"이란 말씀이 다섯 차례나 등장합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섰는데"(집회 48,1).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집회 48,1).
"세 번씩이나 불을 내려보냈다"(집회 48,3).
"당신은 불 소용돌이 속에서"(집회 48,9). "불 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습니다"(집회 48,9).
엘리야의 표상인 "불"은 정화와 열정, 사랑을 상징합니다. 죄와 악습을 태우고 살라 버려 정화시키고,
마음을 뜨겁게 하여 주님을 향하게 만들며, 성령 안에서 사랑이 되게 합니다. 그 자신이 곧 "불"인 엘리야의 사명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집회 48,10) 백성을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2).
엘리야의 그 사명을 부여받은 이가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아합 왕의 아내인 바알 숭배자 이제벨의 손아귀를 벗어나 불마차에 태워져 승천한 것과 달리(1열왕 17장 -2열왕 2장 참조),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가 취한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부추김과 그 딸의 춤값으로 목이 베어져 순교하지요(마태 14,1-12 참조).
'아는 것'과 '알아보는 것'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요! 율법 학자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사실은 머리로 알고 있었지만, 메시아에 앞서 길을 준비하러 온 세례자 요한에게서 엘리야를 알아보지는(관상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니 세례자 요한이 "내 뒤에 오시는 분"(마태 3,11)에 대해 아무리 증언하고 선포해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볼 눈이 열릴 수 없었지요.
마침 오늘은 주님 향한 사랑의 불꽃으로 이글이글 타올랐던 십자가의 성 요한 기념일입니다.
덕분에 오늘 우리는 엘리야와 세례자 요한, 십자가의 성 요한이라는 세 개의 불덩이를 한 자리에서 만났네요. 하느님께서 때에 맞춰 우리에게 보내 주신 성인들을 통해 우리는 정화되고 열정을 되찾아 열렬한 사랑으로 주님께 뛰어들게 됩니다. 이들은 우리가 주님을 알아보도록 눈을 열어 주는 불꽃입니다.
대림 제3주일을 앞두고 다시금 사랑의 불을 지피는 하루 되시길 빕니다. 여러분이 불타는 사랑으로 불이신 주님을 맞이하여 하나의 불길로 함께 타오를 수 있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루카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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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4.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심판의 광주리에 담기지 않는 삶
<2024.12.14> 아침을 여는 묵상 (암 8:1~14절)
❝심판의 광주리에 담기지 않는 삶❞
❚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고 교만하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심판의 광주리에 담으실 것입니다.
✔ 심판을 받지 않는 길은 무엇입니까?
➲ 회개할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1~3절).
하나님은 아모스에게 ‘여름 과일 한 광주리’의 환상을 보여주십니다(1절). 환상을 보여주신 하나님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은즉 내가 다시는 그를 용서하지 않겠다...”(2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돌이킬 수 없는 끝을 선포하시고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다시는’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이 오랫동안 여러 번 용서하시다가 마침내 용서의 문을 닫는 느낌을 줍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많은 회개의 기회를 제공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수많은 기회를 거부하고 오히려 하나님께 더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의 인내도 끝이 났고, 심판의 때가 왔음을 선포하십니다. 시체가 곳곳에 널리게 될 것이며, 침묵만이 가득할 것이다. 그날에 왕궁에서 부르는 노래가 장송곡으로 바뀌게...(3절,쉬운성경)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각 사람이 일상의 삶에서 선한 열매를 맺길 기대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에서 선한 열매가 아닌 죄악의 열매를 맺고 살아간다면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존재가 될 수 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에 대하여 영원히 기다리지 않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고 자비를 베푸실 때에 돌이키고 구원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차고 넘칠 만큼 충분히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라는 말씀을 기억하여 돌이켜야 할 때 돌이켜야 합니다. 심판의 광주리에 담기지 않는 삶이 되도록 회개할 기회를 놓치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거짓된 습관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4~10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지도층과 부자들의 죄에 대하여 언급하십니다. 그들은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을 짓밟았고, 가난한 사람들의 것을 부당하게 착취하였습니다(4절). 타락한 이들은 오직 물질적인 욕심으로만 가득했고, 하나님이 지정하신 절기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5절). 거짓 저울로 사람을 속이고,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고파는 등 인권을 유린하며 하나님의 법과 공의를 서슴없이 짓밟았습니다(6절). 이에 하나님은 그들이 한 짓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고 야곱의 자랑인 주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셨습니다(7절). 결국 그들은 철저히 심판을 받을 것인데, 그날 태양은 정오에 빛을 잃을 것이며 땅도 어두워질 것이며, 이들의 형식적인 종교 절기가 마침내 곡소리로 바뀔 것(8~10절)이라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삶으로 우리 자신을 증명해 내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더 많은 이익을 누리기 위해 거짓을 말하고, 남을 속이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리면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는 타인에게까지 막대한 피해와 상처를 남길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물질 만능이라고 해도 물질이 사람보다 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약자를 착취하는 자들을 심판의 광주리에 담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장의 이익을 위해 거짓을 일삼은 적이 있다면 회개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정직히 행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심판의 광주리에 담기지 않는 삶이 되도록 거짓된 습관에 빠지지 않도록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말씀의 기근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11~14절).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거룩한 삶을 상실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말씀의 기근을 내리십니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양식의 기근이 아니고, 물이 없는 기근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말씀의 기근입니다(11절).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지 않으니 사람들은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으로 여호와의 말씀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나 찾지 못할 것(12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상실한 자들은 곧 생의 소망과 비전을 잃어버리고 무기력하게 쓰러질 것입니다(13절). 결국 이들이 이러한 처지에 이르게 된 원인은 단과 브엘세바에서 우상을 두고 맹세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음성을 찾는 혼합주의 때문(14절)이었습니다. 말씀의 기갈은 곧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포기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싫어하는 자들에게는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에게 육의 양식이 필요하듯 영에는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고, 사람의 진리의 길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기갈은 하나님과의 소통이 끊어지고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은 인생이 됩니다. 아무리 물이 많고 양식이 풍족해도, 말씀을 잃어버린 하나님의 백성은 한순간에 황무한 땅과 같아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도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이 됩니다. 심판의 광주리에 담기지 않는 삶이 되도록 말씀의 기근에 빠지지 않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심판의 날이 임박한 이 때에 모든 죄악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소통이 끊어져 하나님께 버림받은 인생이 되지 않도록 생명의 말씀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암 8:1~14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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