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의 바깥
이정호
강에 원 하나가 생긴다
아무것도 던진 적 없는데
물은 자꾸 바깥을 기억한다
붉음이 붉음을 다 쓰고
노랑은 제 안의 빛을 내려놓는다
가지 사이로 하늘이 한 칸씩 들어온다
조금 식은 햇빛의 냄새
무엇이 지나갔는지는 흐려지고
냄새만 남아 있다
강가의 벤치에서
두 사람이 일어나고 한 사람이 앉는다
온기와 온기 사이
아무도 앉지 않는 몇 초
바람이 그 자리를 먼저 지나간다
한 사람의 입술이 잠시 열린다
강의 원은 한 겹 넓어진다
벤치의 갈라진 결을 손끝으로 따라간다
나무였던 날들이 안쪽에서 둥글다
가지 하나를 잃었던 해
꽃이 유난히 많았던 해
말하지 않은 계절들이
서로의 안쪽을 감싸고 있다
철새 몇 마리가 강을 건넌다
날개 아래 물빛이 잠깐 어두워지고
빛은 조금 늦게 돌아온다
아이 하나 낙엽을 들어 햇빛에 비춘다
잎맥 사이로 가느다란 강 하나 흐른다
손을 떠난 잎은 한 번 뒤집혀
보이지 않던 면으로 눕는다
해가 낮아진다
벤치의 그림자가 강 쪽으로 길어지고
나무의 그림자가 벤치를 건너
한 사람의 발끝에 머문다
물 위에서는 원이 멀어지고
나무 안에서는 원이 깊어진다
가슴에서는
무언가 한 번
둥글게 부풀었다 돌아온다
숨을 들이마신다
마른 잎과 젖은 흙
식어가는 빛
이름보다 먼저 오는 냄새
숨을 내쉰다
강에서는 파문 하나가 이쪽으로 오고
내 숨은 저쪽으로 간다
바람이 그사이를 먼저 지나간다
카페 게시글
시 (아~하)
원의 바깥
이정호
추천 0
조회 41
26.10.05 11:06
댓글 6
다음검색
첫댓글 나무 안에서 깊어지는 원처럼
세월이 가고
새로운 원이 생기는데
원의 바깥으로 가야 할 때가 있겠지요
바람처럼~
자연은 우리에게 늘 많은 것을 깨우치게 해줍니다.
모든 근본이 거기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깊은 사유를 느낍니다
즐감했습니다
읽어주시고,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세요.
강가에서 자연과 사람 사이의 미세한 시간과 공간의 변화를 통해 마음속 깊은 울림과 연결을 느끼는 순간을 그리셨네요
즐감했습니다
오늘도 읽어주시고 읽은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활발한 활동에 경의를 표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