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자동차 업계가 전동화 전략을 쏟아내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바람은 포르쉐도 피할 수 없었다. 포르쉐는 지난 2019년 9월 브랜드 최초 순수전기차 타이칸을 전격 공개했다. 당시 대중은 포르쉐의 첫번째 전기차에 열광하면서도, 2톤이 넘는 육중한 무게와 짧은 주행거리를 두고 우려의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직접 만나본 타이칸은 전기로 움직인다는 점만 새로울 뿐 여전히 포르쉐 그 자체다. 더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 초여름, 강원도 인근에서 포르쉐 타이칸 4S를 시승했다.
시승차는 기본 가격 1억4560만원에 퍼포먼스 배터리 플러스 950만원, 히트 펌프 110만원, 21인치 익스클루시브 디자인 휠 620만원, 조수석 디스플레이 150만원, 보스 서라운드 사운드 시스템 200만원 등 4400만원치 옵션이 장착되어 총 1억8960만원의 몸 값을 자랑한다.
사실 처음 타이칸이 공개됐을 때는 독특한 모양의 헤드램프를 비롯해 그와 연결된 에어 인테이크와 짧은 C필러까지 곳곳이 낯설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오래 만나온 친구처럼 익숙해졌다. 넓고 평평한 전면과 뒤로 갈수록 완만하게 떨어지는 루프 라인, 한 줄로 이어진 리어램프까지 곱씹어 보면 포르쉐 디자인 아이덴티티가 느껴진다.
실내는 4개의 디스플레이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10.9인치 인포테인먼트 디스플레이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16.8인치 커브드 디스플레이가, 오른쪽에는 10.9인치 디스플레이가, 아래는 8.4인치 디스플레이가 각각 자리잡고 있다. 투명한 유리창으로 햇빛이 그대로 들어왔지만 모든 디스플레이가 하나같이 선명하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16.8인치 커브드 디스플레이는 기본 계기판 역할을 수행한다. 911을 연상케 하는 원형 계기판부터 간결하게 꼭 필요한 정보만 표시할 수도 있고, 내비게이션의 화려한 그래픽도 띄울 수 있다. 이어 계기판 좌우에는 터치 버튼이 위치해 헤드램프나 서스펜션 높낮이 등을 직관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
중앙 10.9인치 디스플레이는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역할을 수행하고, 아래쪽 8.4인치 터치스크린은 공조 장치 조작을 담당한다.
실내 공간의 백미는 조수석 앞에 위치한 보조 디스플레이다. 보조 디스플레이는 옵션으로, 150만원이면 추가할 수 있다. 센터 디스플레이와 동일한 크기의 보조 디스플레이는 별도로 동작해 음악을 조작하거나 내비게이션을 확인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차량을 간단히 살펴본 후 운전석에 앉아 전원을 켰다. 타이칸은 전기로 움직이지만, 여느 포르쉐와 마찬가지로 왼쪽에 전원 버튼을 배치해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살렸다.
시승차는 950만원짜리 퍼포먼스 배터리 플러스 옵션이 장착됐다. 이는 비단 배터리 용량이 79.2kWh에서 93.4kWh로 늘어나는 것만 뜻하지 않는다. 모터 출력도 320kW(435ps)에서 360kW(490ps)로 상승한다. 런치컨트롤 사용 시 오버부스트가 작동해 순간 최고출력은 420kW(571ps), 최대토크는 66.3kgㆍm에 달한다.
이날 시승 코스는 강원도 고성을 출발해 양양, 홍천, 평창, 강릉 등을 거쳐 다시 고성으로 돌아가는 약 350km 구간이다. 신호가 많은 시내부터 세 개의 령(嶺)을 넘어가는 와인딩 코스, 고속도로까지 각종 도로 상황이 골고루 섞여있다.
출발하기 전 배터리 충전량은 98%, 주행 가능 거리는 459km(노멀 모드 기준)를 표시했다. 타이칸 4S의 환경부 공인 인증 주행거리가 289km임을 고려하면 1.5배가 넘는 수치다. 주행 모드는 타 브랜드의 에코 모드에 대응하는 레인지 모드부터 노멀, 스포츠, 스포츠 플러스, 인디비주얼 등 5가지가 마련됐다. 주행모드를 바꿀 때마다 주행 가능 거리는 실시간으로 변화한다.
가장 먼저 시내 구간에 올랐다. 시내 구간에서는 노멀 모드로 주행했다. 타이칸은 레인지 및 노멀 모드에서 기본적으로 회생 제동이 작동하지 않는다. 가다서다를 반복하는 시내에서 회생 제동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배터리를 아끼는 타 브랜드와는 다르다. 회생 제동은 스티어링 휠에 달려있는 버튼을 누르면 그제야 작동하기 시작한다.
타이칸의 회생 제동 충전 성능은 최대 270kW에 달하지만, 다른 전기차와 달리 원 페달 드라이빙은 불가능하다. 속도를 줄이거나 멈추기 위해서는 운전자가 확실히 브레이크를 밟는 의사를 보여야 한다.
곧이어 와인딩 구간과 마주했다. 산길에서는 과감하게 스포츠 플러스 모드를 체결했다. 스포츠 플러스 모드에서는 회생 제동이 기본적으로 작동하며, 일렉트릭 스포츠 사운드 시스템이 활성화된다.
업힐 구간에서 강하게 가속 페달을 밟았다. 우주로 빨려 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지면을 강하게 박차고 나간다. 가파른 오르막길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더 강하게 튀어나가는 힘에 놀라 급히 브레이크를 밟자 차량은 언제 움직였냐는 듯 칼같이 멈춘다. 공차중량이 2.2톤을 넘지만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금세 적응이 끝나고 본격적인 와인딩 코스에 올랐다. 3 챔버 어댑티브 에어 서스펜션이 포함된 포르쉐 액티브 서스펜션 매니지먼트(PASM) 시스템이 스스로 복잡한 계산을 시작한다. 타이칸 섀시는 중앙 네트워크화된 컨트롤 시스템을 사용해 모든 섀시 시스템을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동기화한다.
덕분에 험난한 강원도 산길에서도 차체는 균형을 잃지 않고 평온함을 유지한다. 타이어는 비명을 질러대고 몸은 이리저리 흔들려도 안정감을 유지하는 느낌은 언제나 새롭다. 파나메라와 비슷한 크기이지만, 훨씬 작은 911이나 718처럼 경쾌한 몸놀림을 구현한다.
지면을 박차고 오르는 박진감과 운전에 매력적인 가상 사운드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대관령 꼭대기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는 회생 제동 능력을 테스트하기로 마음먹었다.
대관령 휴게소를 나설 때 배터리 잔량은 51%다. 내리막길에서는 노멀 모드로 설정한 다음 회생 제동 모드만 활성화하고, 최대한 브레이크를 밟지 않는 데 집중했다. 오르막길보다 박진감은 덜하지만, 타이칸은 내리막길에서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배터리를 충전하고 있다는 심리적 만족감이 더해지며 운전의 즐거움이 더욱 크다.
약 15분 동안 내리막길을 내달린 다음 배터리 잔량은 53%까지 늘었다. 2%라는 수치가 크지 않게 보일 수 있지만, 배터리 용량이 93.4kWh에 달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한 충전량을 보인 셈이다. 주행 가능 거리는 215km에서 234km로 19km나 늘었다.
곧이어 고속도로에 올랐다. 고속도로에서는 테스트를 위해 레인지 모드부터 스포츠 플러스 모드까지 각 모드를 두루 사용했다. 스포츠 플러스 모드에서 가속 페달을 가볍게 밟자 타이칸은 순식간에 제한 속도에 도달한다. 에어 서스펜션은 자동으로 차고를 낮춰 공기 저항을 더욱 줄인다. 속도를 더 높이면 가변 스포일러가 작동해 다운포스로 안정감을 더해준다.
타이칸은 공기역학적으로 최적화된 설계를 통해 0.22Cd라는 탁월한 공기저항 계수를 확보했다. 이는 911의 0.29Cd보다 뛰어난 수치다. 그 덕분인지 속도를 한껏 높여도 풍절음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타이어 폭이 넓은 만큼 노면 소음이 훨씬 더 크게 들린다.
이 덕분에 고속도로에서 주행가능거리가 더 빠르게 떨어지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배터리를 더 아끼고 싶다면 레인지 모드로 설정하면 된다. 레인지 모드에서는 가능한 앞바퀴만 굴리며, 공기 저항을 줄이기 위해 차고를 낮추고 섀시 세팅과 열 관리 시스템도 효율을 위해 동작한다. 이때 최고 속도는 140km/h로 제한된다. 심지어는 전력을 아끼기 위해 보조 디스플레이를 끄라고 안내하기까지 한다.
이날 7시간에 거쳐 350km를 달렸다. 인증 주행거리를 훨씬 넘는 거리를 달렸음에도 배터리는 10%나 남았고, 주행 가능 거리는 91km를 나타냈다. 배터리를 끝까지 사용했다면 440km가량을 달릴 수 있다는 뜻이다.
포르쉐가 타이칸을 공개했을 때 사람들은 브랜드 정체성이 희미해지진 않을지 걱정했다. 여기에 국내 인증 주행거리가 289km에 불과하다는 소식에 테슬라 모델S와 비교되며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직접 경험해본 타이칸은 세간의 걱정과 달리 가속 능력부터 코너링 성능, 주행거리까지 모두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이 정도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평가해도 되겠다. 경쟁자들이 일반 전기'차'라면, 타이칸은 전기 '포르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