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양직공도는 화가의 이름이 없습니다. 화가의 이름이 없더라도, 중요한 그림은 그림만으로도 소개하겠습니다.
중국화가(7) - 양직공도
양직공도는 화가의 이름을 모르지만 여기에 소개하는 이유는, 양나라에 사신으로 온 외국인을 그린 것인데, 우리의 삼국시대 인물이 그려저 있기 때문이다.
526∼536년 무렵 양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사절을 그림으로 그려 해설한 것이다. 일부가 소실되어 현재는 12국의 사신 그림과 기록이 남아 있다. 사신의 모습과 복식은 각국의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삼국시대 백제 사신의 모습과 이에 대한 기술은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기 때문에 일찍부터 우리 나라 학계의 주목을 받아 왔다.
백제국 사신(百濟國使)에 관한 부분은 사신도와 7행 160여 자의 짧은 글로 구성되어 있다.
사신도에 따르는 기록은 백제가 중국과 통교한 내용이 전체의 3분의 1로서,『양서(梁書)』의 기록과 구성·내용이 대체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몇 가지 중요한 기사를 담고 있다.(그림의 기록에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있으나, 우리는 역사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므로 생략합니다. 궁금하신 분은 인터넷에서 자료를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양직공도가 6세기 초반의 사실을 담고 있다면(그림의 사신을 설명하는 글에서 )백제는 섬진강을 넘어 다른 지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매우 강대한 나라였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역사 정설은 그렇지 않다, 추측컨대 양나라에 간 백제 사신이 자기의 나라를 과정하여 선전하지 않았을까 한다. 양직공도에서 나타나는 백제는 한반도 남부 지역을 대표하는 나라임을 강조하여 국제적 지위를 인정받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주변국가에 대한 영토확장 내지 영향력 확대의 야심을 드러내고 우월의식 특히 신라와의 대항의식을 대외적으로 과시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 당시 무령왕(武寧王)은 영산강과 섬진강 유역 및 가야 접경지역에 대한 진출을 시도하였고, 더욱 확대해가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신라와 충돌하였던 것이 역사적 사실이었다.
이 양직공도의 백제국사도(百濟國使圖)는 6세기 초 웅진(熊津) 시대의 백제사(百濟史) 연구, 특히 백제의 대외관계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현재 중국의 남경박물원(南京博物院)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대만 국립 고궁박물원이 소장하고 있는 ‘왕회도’(폭 238.1㎝, 높이 28.1㎝)는 양직공도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하다. 이 그림은 1995년에 처음 공개되었는데, 현재 당나라 때의 화가 염립본(?∼673)이 양직공도를 모사한 것이라는 견해와 당 태종(太宗) 때 중국에 온 주변 23개국의 사신을 그린 것이라는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사신 모습을 세밀하게 그리고 채색하였기 때문에, 양직공도와 더불어 당시 3국의 복식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첫댓글 백제 복장 연구에 도움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