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49
8월14일[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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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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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k0BHcXbLoqg
[수원교구 김정욱 마태오(고덕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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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 사람 대신 제가 가겠습니다!>
교도소나 구치소에 갈 때마다 느끼는 안타까운 일이 한가지 있는데, 재소자들의 가슴에는 하나같이 이름 대신 번호가 새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민영 소년 교도소 설립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 만일 꿈이 이루어진다면, 아이들의 가슴에 번호 대신 이름을 달아주고 이름을 불러주자는 안을 내어놓기도 했습니다.
16670번,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님의 번호였습니다. 수용소 안에서 콜베 신부님의 삶과 죽음은 한마디로 무죄한 어린양의 삶과 죽음, 속죄양으로서의 삶과 죽음이었습니다.
죽음의 수용소로 악명 높았던 나찌 수용소 안에서 콜베 신부님은 동료 수감자들에게 마지막 희망이자 위로였습니다.
한 포로가 죽음의 방으로 끌려가며 외쳤습니다. “내 불쌍한 아내! 내 아이들!” 당시 연병장 내에는 수많은 운동장에 포로들이 서 있었는데, 그중에서 한 말라깽이가 걸어 나오며 외쳤습니다.
“저 사람 대신에 제가 가겠습니다!”
그 한 마디로 인해 콜베 신부는 깊은 지하 감방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당시 열 명의 수감자가 함께 갇혀 있었는데, 물 한잔도 빵 한 조각도 없이 죽음의 순간만을 기다려야만 했던 그곳에서 콜베 신부님의 성덕은 더욱 발휘됩니다.
가장 허약했던 콜베 신부님은 의외로 가장 오래 견딥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오직 한가지였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인 동료 수감자들을 향한 극진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콜베 신부님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에 떨던 동료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자신의 몸을 추스르기도 힘든 병약했던 콜베 신부님이었지만 마지막까지 살아남아서 기도와 위로 속에 동료들을 떠나보내고 나서 자신도 떠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기적과도 같은 일이 생깁니다. 평소에 배급이라고 받던 빵 조각들도 늘 남들에게 양보해서 가장 체력이 바닥나 있던 콜베 신부님이었지만, 15일간이나 굶주림을 견디면서 동료들의 눈을 모두 감겨줍니다. 끝까지 생존해있는 콜베 신부님을 확인한 나찌들은 신부님에게 탄산 주사를 맞힙니다.
콜베 신부님, 살아 생전부터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과 원죄 없으신 성모님께 온전히 의탁한 투철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신부님의 그러한 신심은 하루하루 피 말리는 수용소 생활 안에서 활짝 꽃피어났습니다. 그 절망스럽고 고통스러운 수용소 생활 가운데서도 수감자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차라리 죽는 게 더 낫겠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콜베 신부님을 통해서 다시금 살아갈 힘을 얻곤 했습니다.
콜베 신부님은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뎌내던 그들에게 끊임없이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주었던 것입니다.
동료 수사들과 함께 나치에 체포된 후 수용소로 향하는 트럭 안에서의 일입니다. 숨 쉴 틈도 없이 끌려가는 사람들로 빽빽했던 트럭 안에서 동료 수사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기약도 없는 미래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몰랐던 것입니다.
그때 콜베 신부님은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우리는 지금 죽으러 가는 길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길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차까지 타면서 가니 이 얼마나 커다란 행운입니까? 여러분, 이제 우리는 가능한 많은 불쌍한 영혼들을 구하기 위해 더 많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성모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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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Yay2mJYsDE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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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죄부와 대사는 어떻게 다른가?>
오늘 복음은 교회의 권위에 대한 마태오 복음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며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하늘나라는 죄와 벌이 모두 사해져야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교회에서 파문 당하면 하늘나라에서도 파문 당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개신교는 그러나 교회의 이 죄사함과 벌까지 면해주는 권한을 교회에 주었음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며 가톨릭은 돈을 받고 죄를 용서해 준다는 뜻의 ‘면죄부’를 팔아 바티칸 베드로 성당을 지었다고 주장합니다. 우선 교회에 죄와 벌의 모든 용서의 권한이 주어졌음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시며 그 치유가 죄의 용서의 권한이 사람에게 주어졌음을 보여주는 표라고 하신 복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영화 ‘나라야마 무사시코’에서는 고려장과 같이 70세가 넘으면 먹을 것을 줄이기 위해 부모를 산에 버리는 옛 일본 풍습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에서는 어머니가 아들이 주저하는 것을 보고 일부러 몰래 튼튼한 앞니를 부러뜨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머니는 가족을 살리기 위해 둘째 아들이 첫 경험을 하는 날 큰아들의 지게에 실려서 산에 오릅니다. 새로 태어나면 누군가 죽어야 하는 상징을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한 일본의 전설에서는 자기 아내를 살리기 위해 노모의 간을 빼서 달리는 아들에게 어머니의 혼령이 나타나 “천천히 가라. 넘어질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내어 놓습니다. 하느님도 아드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다는 뜻입니다. 나라야마 무사시코에서는 어머니를 버리고 왔더니 슬퍼하는 기색이 전혀 없이 어머니의 옷을 이미 나누어 걸쳐 입고 있는 가족들을 바라보며 영화가 마무리됩니다. 하느님께서 교회를 낳으셨고 교회를 통해 구원의 백성이 탄생하기를 원하셨다면 ‘다’ 주셨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면죄부는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 면죄부는 죄를 사해준다는 뜻인데, 죄사함을 돈으로 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내가 천국에 갈 수 있는데 그 은총을 죄인에게 돈을 받고 팔 수는 없는 일과 같습니다. 죄와 벌은 개인의 몫이기 때문에 돈을 받고 죄를 사해준다는 식의 ‘면죄부’라는 말은 가톨릭에서는 나올 수 없는 말이고 개신교가 만들어낸 말입니다.
그들이 면죄부라고 말하는 단어는 라틴어 ‘은총의 문서’(Litterae indulgentiales)의 번역입니다. 이는 분명 ‘대사’(Indulgentia)와 차이가 있습니다. 대사는 본래 ‘은혜, 자비’의 뜻으로 로마 제국 시대 특별한 날에 이뤄지는 형벌의 사면을 가리키는 법률 용어입니다. 대사는 죄의 용서와는 관계없고 일정한 전제조건(기도와 회개, 성지순례, 자선, 교회에 대한 기부 등)을 채울 때 죄에 대한 보속을 감면하거나 전부 없애주는 은총입니다. 대사는 교회가 죽은 이들의 잠벌을 없애주려는 목적도 있지만, 더 큰 목적은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신앙인의 신심의 발전에 있습니다.
16세기에는 대사 관행이 널리 퍼졌고 종종 남용 되었습니다. 일부 성직자, 특히 독일의 요한 테첼(Johann Tetzel)과 같은 인물은 베드로 성전 재건을 명목으로 사람들이 천국에 갈 수 있는 길을 사거나 미래의 죄에 대한 용서를 살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방식으로 면죄부를 판매했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의 방침이 아닌 당시 돈으로 잘못을 되갚는 게르만족의 전통과 결합한 잘못된 관행이었습니다. 교회는 트렌트 공의회(1545~1563)에서 공식적으로 은총의 문서 판매를 금지하였고 1570년에는 대사를 거래하고자 하는 자들을 파문 시킨다는 조항을 추가하였습니다.
정리하자면, 하느님께서는 교회에 죄를 용서하는 권한과 벌을 없애주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죄와 벌을 함께 용서해 주지 않는 이유는 죄의 영향을 조금이라도 느껴봐야 죄의 무거움을 느끼고 다시는 죄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다윗이 병적조사를 한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흑사병이 들게 하시는 벌은 주셨습니다. 교회가 벌을 사해주는 대사 제도를 시행하는데 은총은 돈을 주고 사고팔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제도는 결국 신자들의 신심을 높이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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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문사에 있을 때입니다. 제게 가장 중요한 일은 구독자를 늘리는 거였습니다. 구독자를 늘리기 위해서 본당을 찾아가서 홍보하였습니다. 홍보하면서 교우들에게 창세기의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시려고 했을 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이렇게 청하였습니다. “하느님 저 도시에 선한 사람이 50명만 있어도 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50명만 있어도 벌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50명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점점 숫자를 줄여서 이야기 했습니다.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까지 내려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10명을 봐서라도 벌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신문 구독자가 50명만 넘으면 좋겠다고 부탁하였습니다. 정 어려우면 40명만 넘어도 좋겠다고 부탁하였습니다. 이렇게 신문 구독자가 있으면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 하실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교우 분들은 저의 이야기를 듣고 기쁘게 구독신청을 하였고, 기부금도 내 주었습니다. 미국에 있는 유일한 가톨릭 신문이라고 하면서 도움을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5년 동안 팬데믹도 있었지만 그래도 임기를 무사히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후임 신부님이 10월에 신문홍보를 위해서 온다고 합니다. 저도 50명은 넘을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입니다. 선하고,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그런데 밀밭에 가라지가 자라듯이, 이 선하고 아름다운 세상에 ‘악’이 들어왔습니다. 교회는 그 악을 죄의 뿌리라고 합니다. 죄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이 하느님과 멀어지려고 하는 성향입니다. 죄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의 결과입니다. 자유의지는 두 가지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문화, 문명, 예술이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방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전쟁, 폭력, 야만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처럼 이 세상을 벌하지 않으시는 것은 선한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들이 하느님께 돌아 올 수 있도록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살신성인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몰로카이의 다미안 신부님은 나병환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였고, 본인도 나병환자가 되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자신을 저격한 청년을 찾아가서 용서하였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아프리카 수단에서 선교하였습니다. 신부님의 삶을 기록한 ‘울지마 톤즈’는 씨앗이 되어 많은 학생이 사제의 길을 가도록 이끌었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콜베 신부님은 죽어야 할 사람을 대신해서 죽음을 선택하였습니다. 1982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그를 ‘자비의 순교자’라 부르며 시성하였습니다. 신부님은 포로수용소의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였습니다. 죽음의 공포를 넘어 희망을 전하였습니다. 신부님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셨고, 천국에서 빛나는 신앙이 별이 되셨습니다. 신부님은 이웃을 위해서 대신 죽음을 선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콜베 신부님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욕망이라는 열쇠를 굳게 쥐고 있습니다. 교만이라는 열쇠를 굳게 쥐고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라는 열쇠를 굳게 쥐고 있습니다. 그런 열쇠로 세상의 문은 열 수 있겠지만 천국의 문을 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욕망은 지구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많은 생명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병들어 가는 지구에서는 인간 역시 병들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나 자신을 위해서 계획한 것들, 생각한 것들을 실천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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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8,15-20: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15절)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잘못했을 때, 그래서 고통스러웠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힘으로써 자기 자신도 심한 상처를 입게 된다. 이제 우리의 상처보다도 형제의 상처를 치료해 주어야 한다. 그가 수치심을 느끼지 않도록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야 한다. 그가 비난받는다고 느끼면 잘못해서 싸움이 될 수도 있다. 충고한다면서 몰아붙이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충고할 때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그래서 말을 들으면 형제를 얻은 것이 된다. 그러나 그가 말을 듣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불러 타일러야 한다. 공동체가 한 사람을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가 해결하도록 하라고 하신다.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17절)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이교인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처럼 대하라는 말씀이다. 그래도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여야 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8절) 교회의 말도 듣지 않는 사람이 단죄를 받으면, 이것은 하늘에 계신 어떤 분이 무효로 해 주시지 않는 한, 그는 매인 채로 있다. 훈계를 받아들이고 공동체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하면 그때는 풀리는 것이다. 매이는 사람은 충고를 한 사람이 아니라,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이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19). 하나가 되는 것은 사랑의 일치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무엇을 청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두 사람이 참으로 일치하지 못했거나 하느님의 뜻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의 탓이다. 하느님께서는 형제들의 평화와 일치와 화합보다 기뻐하시는 것은 없다. “내 마음에 드는 것이 세 가지 있다. 형제들끼리 일치하고 이웃과 우정을 나누며 남편과 아내가 서로 화목하게 사는 것이다.”(집회 25,1) 주님께서 둘이나 셋이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아버지께서 다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당연하다. 기도를 이루는 것은 사람의 수가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들의 신심과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크기에 달려있다. 하느님께서 기꺼워하시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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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오늘 독서에서는 “주님의 영광이 주님의 집 문지방에서 나와”(에제 10,18) 떠납니다. 바빌론에 유배 가 있던 에제키엘이 본 환시이고, 예루살렘의 함락을 설명하는 장면입니다.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에서, 심지어는 성전 안에서도 하느님께 등을 돌리고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기에 하느님께서는 심판을 선고하시고, 그 선고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때 결국 하느님께서는 성전을 떠나가시고 성전은 파괴됩니다.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형제가 잘못할 때 일깨워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만, 그가 “교회의 말도”(요한 18,17) 들으려고 하지 않을 때는 그를 더 이상 공동체의 한 사람으로 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땅에서 교회는 푸는 권한만이 아니라 매는 권한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풀기만 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복음에서 내 마음에 드는 구절만 골라 읽는 것입니다.
들으려고 하지 않을 때, 그것이 차이를 가져옵니다. 예언자를 보내시어 경고하시고, 형제를 통하여 일깨우시는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닫아 버릴 때, 남은 길은 멸망밖에 없습니다. 현실에서는 그보다 더 심각한 경우도 있습니다. 듣지 않을 것을 이미 알기 때문에 아예 경고조차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다면, 분명 다른 사람도 나에게 그렇게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에, 귀를 막아 버린 나는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의 잘못을 알려 줄 때에 어떻게 대응하였는지 돌아봅시다. 이것은 나를 회심의 길로 이끌거나, 아니면 교회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는 길로 이끌 것입니다. 아직 기회가 있을 때에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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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공동체에서는 내 몸이든 형제의 몸이든 모두 내 몸입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5-20)
1) 이 말씀은, ‘공동체의 형제애 실천’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을, 이 말씀에 대한 설명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각의 지체들을 그 몸에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1코린 12,14.18.26)
몸의 일부가 병들었다면, 그것은 몸이 병든 것입니다. 손가락도 내 몸이고, 발가락도 내 몸입니다. 어느 지체가 무슨 병에 걸렸든지, 어떻게 얼마나 다쳤든지 간에 그것은 내 몸이 병들거나 다친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애를 실천해야 하는 것은, 공동체로서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내 몸이든 형제의 몸이든, 공동체에서는 모두 내 몸이고,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나 자신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내 몸에 병이 들었거나 어딘가를 다쳤다면, 가장 먼저 나 자신이 치료를 하려고 애를 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라는계명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 계명은 “네 이웃은 너 자신이니 당연히 사랑해야 한다.”라는 계명입니다.>
2) 예수님 말씀에서,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이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네 형제가 죄를 지은 것을 네가 알았거든”입니다. <죄는 하느님께 짓는 것입니다. 만일에 표현된 그대로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지었다면, 그를 용서하거나 처벌하는 일은 나의 권한이 되어버리는데, 우리에게는 용서할 의무만 있을 뿐이고, 다른 사람을 심판하고 처벌하는 권한이 없습니다. 그 권한은 오직 주님께만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네 형제가 주님께 죄를 지은 것을 네가 알았거든”으로 읽는 것이 옳습니다.>
단둘이 만나든지,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만나든지 간에, 죄를 지은 형제를 타이르는 것은, “나는 의인이고, 그는 죄인이니까, 의인으로서 죄인을 타이른다.”라는 생각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같은 죄인’으로서 함께 회개하자고 권고하는 일입니다. <“너, 회개하여라.”가 아니라, “우리 함께 회개하자.”입니다.>
3)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라는 말씀은, 개인적으로, 또는 사적으로 노력해도 성과가 없다면, 공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자기 혼자서 자기 몸을 치료하려고 애써도 소용이 없어서 병원에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순서의 문제가 아니라 일의 경중에 관한 문제입니다. 작은 상처라면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되지만, 반드시 병원에 가야 하는 큰 부상이나 큰 병이 있습니다.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는, “파문하여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파문’은 ‘최종 선고’가 아닙니다. 파문은, 영구 추방이 아니라 죄인을 회개시키기 위한 방법일 뿐입니다. 따라서 파문당한 죄인이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교회는 그를 다시 받아주게 됩니다.
4) ‘공동체’, 또는 ‘형제애’ 라는 말 때문에 무의식중에 ‘남의 일’로 여길 때가 많은데, 만일에 죄를 지은 그 사람이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나의 부모’라면? 또는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나의 자녀’라면? 그러면, 예수님 말씀이 완전히 새롭게 다가오게 됩니다. 사랑하는 나의 부모나 자녀나 연인이 죄를 지어서 주님의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가는 것을 본다면? 그런 일을 보면서, 죄인의 심판이 이루어짐으로써 주님의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기뻐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것을 크게 슬퍼하고, 안타까워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하늘나라는 ‘슬퍼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나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늘나라 자체는 ‘지극히 행복한 나라’인데, 그 나라에 함께 들어오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진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슬퍼하는 사람들 때문에 ‘지극히 슬픈 나라’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나중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지금의 나를 보면서, 또 우리를 보면서, 하늘나라의 성인 성녀들과 가족들이 몹시 슬퍼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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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마태오는 다른 복음사가들과 달리 복음서에서 다음의 두 가지를 유독 강조합니다. 먼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을 지닌 ‘임마누엘’입니다.(마태오 1,23 참조) 이는 천사가 요셉에게 알려 준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임마누엘은 복음서의 마지막인 예수님의 승천에도 언급됩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오 28,18ㄴ-20).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또 한 번 쓰입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특히 강조하는 두 번째는 ‘교회’라는 용어입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 이후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며 하늘나라의 열쇠를 그에게 주셨던 예수님의 말씀에서 처음 언급되었고(마태오 16,18 참조),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라는 오늘 복음에서도 사용됩니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그렇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교회에 주어진 권위와 권리에 대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베드로 위에 세워진 교회가 가지는 권위는 파문을 결정하거나 취소하는 힘이 있음을 말합니다.
교회는 형제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잃지 않으시고자 언제나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죄를 저지르는 형제들이 회개하도록 끊임없이 타이르고 기도해야만 합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중요한 것은 머릿수가 아니라 모인 이들의 하나 된 마음입니다. 언제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큰 희망을 품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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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김호균 마르코 신부님]
<침묵>
마태오 복음 18장은 공동체를 위한 예수님의 연설문입니다.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가 겸손한 공동체,
둘째가 헐벗은 사람을 보살피는 공동체,
셋째가 충고하는 공동체,
넷째가 서로 용서하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이러한 부분이 잘 반영된 공동체는 건강한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러한 공동체를 만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어느 공동체건 모난 사람, 부족한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저 인간만 없으면 우리 집안이 화목한데…”
“저 인간만 없으면 우리 동네 살 만한데…”
“저 인간만 없으면 우리 성당 다닐 만한데…”
“저 인간 때문에 죄 짓는다”며 불평하면서
고달프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머무는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자신 있게 그 사람 앞에서는 말도 못하고 있다가 뒤에서 수군거리고, 비아냥대고, 헐뜯으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차라리 그럴 바에야 입 꾹 다물고 묵묵히 자신을 닦아가는 것이 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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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우리가 생활하면서 많이 겪게 되는 경우이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나는 어떻게 하는가?
지금까지 나의 행동이 복음적이었는가 아닌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말씀이다. 우선 나의 행동이 복음적이었는가를 반성할 수 있게 하려고 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뜻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겠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보통 나는 어떻게 하는가?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를 미워하고 다시는 보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그럴 수가 있느냐?" 하면서 화를 내기도 하고, 억울해하기도 한다. 인간이면 누구나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행동이고 마음이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일러주는 말씀은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는 것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칙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이요, "여러분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닮으십시오. 그리스도를 본받아 여러분은 사랑의 생활을 하십시오."(에페 5, 1-2)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사랑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선 형제가 죄를 지은 상태에서 "그대로 놔둔다."는 것은 그 형제가 상처를 입은 채로 그냥 놔둔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지으면 일반적으로 "나는 그 형제에게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에 형제가 먼저 나에게 와서 용서를 청해야지, 내가 먼저 그 형제를 용서해주거나 타일러 줄 필요가 없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 "나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으니까 상대방이 와서 용서를 청할 때까지 기다리면 되겠지." 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우리의 생각이다. 그러나 이것은 적어도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켜야할 그리스도인이라면 형제에 대한 사랑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형제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형제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든지 상처를 받고 있는 상태인데 "나 몰라라."하고 그냥 놔두는 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가실 줄 모릅니다."(코전 13,5. 6-8)
적어도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죄를 지은 형제를 용서해주고 또 죄를 지음으로 해서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를 다시 하느님께로 데려오기 위해서 그를 타일러 데려 오도록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앞 복음에서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 아흡 마리를 산에 둔 채 길 잃은 그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마태 18,12)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그를 타일러 데려 오도록 하는 것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행위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는"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을"(18,14) 원치 않으신다. 형제가 "죄를 지었다."는 것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오기 위해서 나는 가서 그를 타일러 데려와야 한다. 그것이 형제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어떤 형제가 아니면 이웃이 잘못했을 때 타이르는 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고 공동체가 더 나빠지지 않고 좋아지게 하는 방법이다.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항상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보다 나은 공동체, 일치하는 공동체가 되려면 잘못한 형제를 용서해주고 또 내가 죄를 지었으면 내가 용서받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만일 죄를 지은 형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타일러 데려오지 않으면 그를 더 큰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이다.
그를 소외시킴으로서 공동체는 분열되고 미움이 싹트고 형제적 사랑은 메말라갈 것이다. 그것은 가장 중요한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이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는 것도 형제에 대한 사랑의 행위이다. 즉 가능하다면 나에게 죄를 지은 것을 남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그에 대한 배려이고 존경의 표현이다.
우리는 보통 남이 나에게 사적으로 지은 죄를 그에게 가서 화해하거나 조용히 이야기해서 서로의 오해를 또는 미움을 풀도록 하지 않고 전혀 모르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서 상대방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드는 일도 있다.
본인에게 가서 이야기하고 풀도록 하고 남들에게는 절대로 다른 사람의 죄를 말하지도 말고 듣지도 말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친구들과 만났다하면 다른 사람을 흉보고 판단하는 일에 익숙해져있고 또 무척 재미있어한다. 참 고약한 취미를 갖고 있다.
"타이르다."라는 말은 상대방을 꾸짖으라는 말이 아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지 말라. 이웃의 잘못을 서슴지 말고 타일러 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벗는다."(레위 19,17)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사랑으로 말해야 하고 겸손하게 그리고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지 않고 좋은 말로 말해야 한다.
우리는 가끔 타이르러 갔다가 화해는커녕 더 악화되어 가지고 올 때가 있다. 대화하는 법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말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마음 속에 미워하는 마음, 분노하는 마음, 멸시하는 마음을 가지고 가기 때문이다.
말을 하러가기 전에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아예 타이르러 가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낫다. 마음이 진정이 되고 정말 용서해 주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될 때 사랑의 언어와 행동으로 타이르도록 하자.
단 둘이 만나서 잘 안 될 때 왜 한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고 그래도 안 되면 교회에 알려야 하는가? 우리가 혼자 가서 안 될 때 상대방을 잘 아는 사람을 데리고 간다든지 아니면 중간에서 서로 오해를 풀게 해줄 사람과 함께 가게 되면 쉽게 용서해줄 수 있고 또 오해를 풀 때가 있다.
또 그렇게라도 안 되면 교회의 사제나 수도자 아니면 교회 법정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서든지 상대방의 죄를 풀어주기 위해 노력 하는가? 즉 최선을 다 하는가?이다.
왜냐하면 사랑의 의무를 지고 있는 우리가 형제의 죄를 풀어주지 않으면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잃어버린 양은 결국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매고 푸는 열쇠는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갖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매고 풀어야 할 사람은 형제가 아니라 내 몫이다. 아직도 내가 풀어야 할 사람이 있는가?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이 진리를 떠나 그릇된 길을 갈 때 누가 그를 바른 길로 돌아 서게 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아 서게 한 그 사람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것이고 또 많은 죄를 용서받게 해 줄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두십시오."(야고 5,19-20)
오늘은 나에게 죄를 지은 형제를 용서해주고 화해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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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을 것이다.” (18,15)
모든 개별 인간, 물론 인간들로 구성된 정당, 교회 그리고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들도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많은 실패도 하고 잘못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실패하고 잘못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잘못을 지적받기도 하고 지적하기도 하면서 살아가길 마련입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잘못을 저지르는 존재입니다.
아르헨티나는 1976년 3월부터 1979년 9월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추악한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시민 약 3만 명이 쿠데타 세력에게 목숨을 잃거나 납치되어 행방불명되었다고 합니다. 그때 아르헨티나 주교 80여 명이 모여, ‘침묵으로 상황을 주시한다’라는 결정으로 아르헨티나 주교단은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잘못된 결정과 오점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2000년 9월 아르헨티나 주교단은 베르고글리오 추기경(=현 프란치스코 교황님) 주도하에 군사정권 시절 교회 인사들의 죄를 고백하는 문헌 「내 죄」를 발표했으며, 그 주된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적 자유와 인권을 해친 사람들에게 너무나 너그러웠습니다. (중략) 책임 있는 사람들(=주교단)의 침묵을 용서해 주십시오. 당신의 많은 자녀들이 정치적 충돌, 자유의 말살, 고문과 감시, 정치적 박해와 사상적 강요에 참여한 것에 대해 용서를 청합니다.』 (* 시사 IN 361호에서 퍼옴) 결국 과거사에 대한 교회의 반성에서 가장 두드러진 과오는 바로 아르헨티나 주교단의 결정에서 드러난 것처럼 침묵입니다. 군사 정권하에 아르헨티나 주교단의 침묵은 결국 침묵하지 말아야 할 때 침묵했기에 반성한 것입니다. 자기 삶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약함을 처절하게 깨달으신 교황님께서 자신이 말해야 할 때 강론이나 다른 매체를 통해서 그리고 자신의 삶을 통해서 화해와 평화를 강조하신 것이라 저는 느낍니다.
더욱 에제키엘 예언서에서, 파수꾼으로 내세워진 참된 예언자의 소명이란 하느님의 입에서 나가는 말을 들을 때마다, 하느님을 대신하여 악인들에게 경고하는 것이라고 단정 짓습니다. 만일 경고의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함으로써 발생한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예언자에게 묻겠다는 것입니다. 불의와 부정 및 부패를 보고도 경고의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침묵하지 말고, 말해야 할 때 말하는 몫이 바로 예언자적인 소명으로 불린 우리 그리스도인이며 그중에서도 책임 있는 자리에 계신 분들에겐 더욱더 큰 책임이 뒤따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타인의 잘못을 보고 침묵하기보다는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는 참된 지혜를 요구하십니다. ‘어리석은 자만이 노골적으로 비판한다’라는 격언처럼, 지혜로운 사람은 타인의 작은 실수는 그 사람 스스로 알고 느끼도록 조금은 미루어 두는,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함께 살아가는 상대방으로부터 자신의 부족함을 알면서도, 기다려주고 감싸주고 있다고 느낄 때,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 간에 신뢰와 서로를 향한 배려가 생겨나서 공동체 내에 활력이 넘치리라 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함께 살아가는 형제와 자매가 잘못했음에도 스스로 깨닫지 않을 경우, 더욱더 현명하고 지혜롭게 접근하고 처신해야 하리라 봅니다. 오늘 복음에 따르면, 형제적 충고를 해야 할 경우, 먼저 단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 주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단둘이 만나서 타일러 주라는 의도는 결국 형제적 충고의 목적이 바로 그 형제의 죄와 잘못의 지적이나 추궁에 있지 않고 그 형제 자체 곧 그 형제에 대한 사랑 어린 관심과 배려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 있잖아요.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둘째로 개인적인 따뜻한 형제적 충고를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그 형제를 충고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표현의 바탕은 바로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마태18,16)라는 형제적 권고의 말씀에 근거합니다. 그러기에 개인적인 감정이나 견해가 아닌, 더욱 더 확고하고 객관적인 증거나 사실을 바탕으로 형제적 권고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책임자로 있을 때 저는 이 방법을 즐겨 사용했는데, 효과가 없는 경우가 많더군요. 세 번째 권고는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8,17)라는 권고입니다. 이상한 일은 공동체는 잘못한 그 사람보다 때론 오히려 그 잘못을 해결하려고 하는 책임자를 더 부정하고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고 그랬더니 ‘당신은 힘이 있으니까요!’ 이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현실이랍니다. 마지막으로, “교회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18, 17) 이는 가장 극단적인 경우인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네 삶에서 그리고 공동체에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인들이나 세리들을 백안시하고 관계를 갖지 않은 것을 참조하면 되는데 이 표현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그런 사람들과는 절교하든지 아니면 교회에서 내쫓으라는 표현입니다. 물론 이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고 때로는 용서와 사랑에 반하는 행동으로 이해될 수 있겠지만 이 표현의 강조점은 절교나 파문이 아니라 잘못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공동체는 잘못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에 그 공동체가 참된 공동체인가 아닌가를 구별 짓는 가장 중요한 덕은 바로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자신에게 향한 형제들의 형제적 권고를 기꺼이 듣고 자발적으로 자기 잘못과 죄를 인정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있다고 봅니다. 우리 모두 누구나 잘못할 수 있고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형제의 잘못을 기꺼이 충고할 수 있는 성숙하고 따뜻한 사람과 그런 지적에 쿨하게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변화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들이냐에 따라 그 공동체 사랑의 관계와 영성의 깊이를 알 수 있으리라 봅니다.
함께 더불어 하느님께로 나아가면서 넘어지고 쓰러지고 엎어질 때마다 가까이 다가와서 사랑 어린 충고를 하는 데 인색하지 않도록 합시다. 혼자 하느님께 나아가려 하지 말고 함께 나아가기 위해서 형제에게 대한 사랑에서 기꺼이 충고하는 것을 게으르지 않도록 합시다. 이런 점에서 서로에게 늘 사랑의 빚을 지고 있음을 느끼면서 사랑하는 데 서로 주춤거리지 말고 사랑의 빚을 지우도록 합시다. 형제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사랑 어린 말 한마디가 형제가 잘못했을 때 일어설 수 있는 큰 지팡이 노릇이 될 것입니다.
형제 하나를 얻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또한 형제 하나를 잃는 일도 쉽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에서 나온 충고인가 아닌가에 달려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도 사랑의 의무이지만, 다른 사람의 지적을 잘 받아들이는 것도 사랑의 의무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모두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희가 함께 더불어 살아가면서 나약한 본성에서 저지른 잘못과 실수를 볼 때마다 때론 기다려주는 의미에서 침묵해야 하지만 형제가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알지 못할 때 기꺼이 사랑으로 충고하게 하여 주시고, 나 또한 누군가가 저에게 사랑 어린 충고를 해 줄 때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과 그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능력을 주길 바랍니다. 주님 당신과 형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여주시고 저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오늘 축일을 기억하는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순교 사제는 오늘 우리가 살아야 할 용서를 실제로 실천하시고 타인(=아무도 기억하지도 않고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이름 없는 사람, 곧 숫자로만 기억되어질 사형수)을 위해 순교하신 분이십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이 기대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가장 적나라하게 증거하신 분이 바로 콜베 신부님이십니다. 폴랜드의 아우슈비치를 방문했을 때. 저는 그분이 마지막 삶을 사셨던 방에 잠시 머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느꼈던 점은 콜베 신부의 “제가 이 사람을 대신해도 좋겠습니까?”라고 하셨던 말마디가 제 가슴에서 요동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 또한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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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떤 직무를 맡는 도중 극심한 육체적, 정신적 피로를 느끼고 직무에서 오는 열정과 성취감을 잃어버리는 증상, 곧 정신적 탈진을 소위 ‘번 아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번 아웃을 가장 많이 겪는 직업군 1순위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밖에 없는 서비스업 종사자일까요? 아니면 잠도 자지 않고 연구에 몰두하는 전문직에 있는 사람들일까요? 또 일의 강도가 심한 육체적 노동을 하는 사람일까요? 모두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전업주부라고 합니다.
이상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전업주부는 자기가 일의 강도와 시간을 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번 아웃은 일의 강도와 시간에 비례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노동량에 따른 보상 정도에 따라 번 아웃이 온다는 것입니다. 주부는 노동량 대비 보상이 가장 적은 집단이었습니다.
보상은 단순히 급여의 많고 적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누군가로부터 인정받을 때, 일에서의 느끼는 보람을 느낄 때 보상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 삶에서 누군가에게 충분히 힘이 되어 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과 행동을 통해 얼마든지 힘이 되어 주고, 이에 따라 자기 역시 다른 이에게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외로운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그만큼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외로운 사람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어떠했을까요? 나와 맞지 않는다고 사랑을 거둬들이고, 나에게 상처를 준다고 해서 단절을 해버리고, 나보다 뛰어나다면 어떻게든 깎아내리려고 힘을 쓰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구원되기를 원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떠올려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못한 형제자매를 고쳐 주려고 서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올바르고 지혜롭게 그를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자보다 둘이나 세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음을 합해서 기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잘못했다고 거부하는 사랑이 아니라, 언제나 함께하는 사랑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못한 사람도 구원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외로운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쉽지 않은 우리의 결정이고, 또 잘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완벽한 사랑을 기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잘 아시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려는 우리의 노력에 큰 박수로 응원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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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머릿수가 아니라 마음이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은 향기입니다. 아무리 숨겨도 멀리까지 퍼져갑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황홀하게 합니다”(이규경). 황홀한 사랑에로 열려있기를 바랍니다.
성무일도 기도에 보면, “겹겹이 둘러싸인 어두움 속에 내 마음 거짓으로 가득하오나 하느님 전능으로 다스리시면 내 마음 백옥같이 희어지리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알면 빛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때로는 어둠 속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누군가 그것을 일깨워줘야 합니다. 그래야 그가 바른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른 충고를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칭찬은 달지만, 충고는 한없이 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변의 머릿수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쓰지만 약이 되는 바른 충고를 해 줄 수 있고 또 충고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소중합니다. 더더욱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으니 한마음, 한 뜻을 이룰 수 있는 형제가 있다면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형제가 되어 주십시오.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선호하지 말고 “주님의 이름으로” 모두를 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믿는 이들에게 “충고는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뜻”(성녀 안젤라 메리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충고를 한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따라서 남을 충고하기 전에 자기 자신에게 충고해서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또한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그것에 대해서도 세심하게 생각해 보십시오”(프란치스코 교황). 공자께서도 “충언은 사람을 바로 서게 한다.”하였습니다. 먼저, 주님께서 내 마음을 다스리고 백옥같이 희게 만드시길 기도하면 주님은 그 마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오늘은 나에게 주어진 쓴소리를 하느님의 소리로 듣기를 희망합니다.
깊은 산길을 가고 있는 사람에게 제일 무서운 것은 마주 오는 사람이랍니다. 그리고 산길을 가고 있는 사람에게 가장 반가운 것 역시 사람이랍니다. 사람이 제일 좋기도 하면서 제일 힘든 존재이기도 합니다. 좋을 때는 더없이 편하지만 틀어지면 그것만큼 불편한 것이 없습니다. 가장 친했던 사람이 가장 어렵고 힘든 사람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자기의 기대가 충족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내 기대와 상대의 바람, 그리고 허물조차 공유할 수 있는 마음이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혹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위해 기도하는 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진심을 주고받기까지 더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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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대와 나 그리고 그분>
마태오 18,15-20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어라. 함께 기도하면 아버지께서 들어주신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대와 나 그리고 그분>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
그대
나를 보듯
나
그대를 봅니다
나
그대를 보듯
그대
나를 봅니다
그대와 나
그분을 보지 못해도
그분
그대와 나를 보십니다
그분
그대와 나를 보시듯
그대와 나
그분을 봅니다
그대와 나
둘처럼 보일지라도
그대와 나 그리고 그분
늘 셋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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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 교회 공동체의 영원한 스승>
-그리스도 주 예수님-
“찬양하라, 주님을 섬기는 자들아,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찬미하라, 주의 이름”(시편 113,1-2)
오늘 화답송 시편이 좋습니다. 하느님 찬양으로 하루를 시작함이 축복입니다. 오늘 역시 옛 어른의 말씀부터 소개합니다.
“배움이란 눈으로 읽어 머리에 채우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전해 받아 삶에 새기는 것이다.”<다산>
“스승의 가르침에 제자는 공손한 태도와 겸허한 마음으로 극진하게 배워야 한다. 선한 것을 보면 따르고 의로운 일을 들으면 실행해야 한다.”<관자>
우리의 평생 삶에 보고 배울 스승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우리에게는 영원한 평생 스승이자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계십니다. 저역시 날마다 평생 스승이자 주님이신 예수님으로부터 겸손히 배우는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늘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이자 스승이신 주님이신 예수님은 그날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에게 가르침과 깨우침을 주십니다. 평생교육에 매일미사보다 더 좋고 유익한 수행은 없다는 것이 우리 가톨릭신자들의 자랑입니다.
또 우리가 배울 분들은 무궁무진 합니다. 영원한 스승이자 주님을 따르고 배웠던 교회 역사상 모든 성인들 역시 우리의 스승이 됩니다. 평생 영원한 스승이신 주님을 따르는데 이정표가 되고 삶의 좌표가 되는 성인들입니다. 또 깨어 눈만 열리면 삶의 스승은 곳곳에서 만납니다. 저에게는 요즘 저녁부터 밤새 피었다 다음날 오전 해뜰 때 까지 만개한 들꽃 달맞이꽃들도 삶의 스승이 됩니다.
“밤새 깨어 님 기다리던 달맞이꽃 청초한 사랑! 축복인사 받으시고 오늘도 힘내시고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이른 새벽 수도원 산책하며 기도중 찍은 활짝 핀 달맞이꽃 사진과 함께 지인에게 보낸 메시지의 내용입니다. 밤에도 깨어 살라는 가르침을 주는 달맞이꽃들입니다. 아주 오래전 써놨던 시 두편도 떠오릅니다.
“당신께 맺혀있는 이슬방울되어
영롱하게 깨어 살다가
흔적없이 사라지는 인생이고 싶다”<2000.8.6.>
“풀잎들 밤새 별꿈 꾸며
뒤척이며 잠못 이루더니
아침 풀잎마다 맺힌 영롱한 별무리 이슬방울들”<2000.10.1.>
24년전 여기 수도원 산책중 깨달음과 더불어 선물처럼 주어진 시입니다. 평범한 일상의 자연도 저에게는 참 좋은 삶의 스승이 됩니다. 오늘은 1941년 8월14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순교한, 만47세로 삶을 마감한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기념일입니다. 생전에 “성모승천대축일이 죽고 싶다.”라고 말했던 그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죄수번호 16670 숫자가 적힌 죄수복을 입은 그의 순교 직전의 일화는 늘 들어도 감동입니다. 한명의 죄수가 탈출함으로 이에 대한 벌로 차출되어 죽게 되자 폴란드 출신의 병사 ‘프란치셰코 가조우니체크’는 “내 아내, 내 아이들, 그들은 어떻게 될까?” 울부짖을 때 콜베 사제가 나선 것입니다.
“나는 가톨릭 사제이다. 나는 그사람을 위해 죽고 싶다. 나는 늙었다; 그는 부인과 아이들이 있다.”
젊은 병사를 대신하여 성인은 순교했고, 기사 회생한 가조우니체크는 1995년 3월 13일 사망합니다. 그러니까 콜베 성인이 순교후 53년 동안 살다가 95세 천수를 누리고 산 것입니다. 그는 살아서 1982년 10월10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한 성인의 시성식에 참석하였고,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해집니다.
“나는 폐에 숨이 붙어있는 한, 막시밀리안 콜베의 영웅적 사랑의 행위에 대해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여기고 살아 왔고 또 그렇게 살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제1독서 에제키엘서 9장과 10장은 참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9장이 우상숭배자들의 비참한 죽음을 소개하는 반면 10장은 주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는 장면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가 환시를 통해 본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회개하지 않고 죄중에 살아갈 때 주님의 영광도 떠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주님이 떠난, 희망도 빛도 평화도 사라진 그 자리는 그대로 지옥일 것입니다.
새삼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신 기도와 회개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함께 가는 끊임없는 회개입니다. 기도와 회개는 끝이 없습니다. 살아 있는 그날까지, 죽는 그날까지 계속되어야 할 기도와 회개의 삶입니다. 혼자서의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공동체의 기도입니다.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지 요즘 시찰을 앞둔 설문지만 봐도 담박 들어납니다. “1.공동체 생활, 2.공동체의 리더쉽, 3.공동체의 일, 4.공동체의 미래”에 따른 모든 항목들마다 공동체가 반드시 붙습니다. 새삼 우리의 삶은 ‘더불어의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교회 공동체와 함께 할 때 제일 안전하고 튼튼하며 또 멀리 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고마운 가르침을 주십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함께 마음을 모아 기도하면 아버지께서 들어주신다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공동체일 때 앞서 복음에서처럼 죄를 지은 형제의 교정도 훨씬 수월해 질 것입니다. 형제가 죄를 지었을 경우 공동체의 배려가 참 섬세합니다. 끝까지 화해와 치유를 위해 온갖 최선의 노력을 다 할 수 있음도 공동기도의 위력임을 봅니다. 아주 예전 ‘교정이 없는 공동체는 약한 공동체’라는 장상의 말도 있지 못합니다. 기도하는 땅의 공동체는 하늘에 그대로 연결되었음을 봅니다. ‘너희’가 가리키는 바 교회 공동체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눈들면 기도하라 하늘이요 땅과 하늘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하늘과 땅은 교회 공동체의 기도를 통해 하나로 연결되었음을 봅니다. 땅의 교회 공동체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여 있을 것이고, 땅의 교회 공동체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 하니 한마음으로 땅에서 바치는 교회 공동체의 기도가 공동체의 화해와 일치, 그리고 하늘과 땅의 소통에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사실 이런 공동 전례기도은총없이 교회공동체의 일치는 불가능합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살아가는 우리 교회 공동체요 우리 각자의 인생입니다.
“해 뜨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시편 113,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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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육신의 병보다 영혼의 병을>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어제 복음은 백 마리 양 가운데 길 잃은 한 마리 양의 비유인데 주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는 말씀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우리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짓거든 단둘이 만나서 그를 타이름으로써 그를 죄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주라고 하시고, 그래도 안 되면 둘이 타이르고 최종적으로는 교회에 알려서 고쳐주라 하십니다.
어제 아흔아홉 마리를 놔두고서라도 한 마리를 찾으라고 하심과 같이 한 사람을 구하는 데 온 공동체가 책임을 지라는 것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한 사람이 잘못하면 저의 누나들 모두를 혼내셨답니다. 특히 동생이 잘못했을 때 애꿎게 언니들이 같이 혼났는데 그것은 언니가 되어 가지고 동생의 잘못을 막지 않은 것 때문이었답니다.
이것은 저의 아버지만 그러신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옛날 어른들은 거의 모두 이렇게 자녀를 교육했지요.
예를 들어 동생이 누군가에게 맞고 있는데 그것을 본 형이 그런 동생을 놔두고 저 혼자 돌아왔다면 그 얘기를 들은 어느 부모가 그런 놈을 가만 놔두겠습니까? 제가 아버지라도 그런 놈은 무지막지하게 혼쭐낼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교육을 제대로 받은 보통의 사람이라면 이렇게 위기에 처할 때 모르는 체할 형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위기에 처할 때 만약 모르는 체한다면 그것은 무관심하기에 어떻게 되든 관심 없거나 미움, 질투, 시기 등으로 형제가 잘못되기를 바라거나 아무튼 사랑하지 않기에 모르는 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영적으로 문제가 있을 경우입니다. 육체적이나 경제적으로 형제가 잘못되었을 경우 그러니까 형제가 병들거나 부도가 나서 쫄딱 망하게 되었을 경우는 그것을 딱하게 여기고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하는데 죄를 지을 경우, 특히 나에게 죄를 지을 경우, 이 경우에는 이상하게도 연민을 가지기보다는 분노하고 미워합니다.
사실 육신이 병든 것보다 영혼이 병든 것이 더 불쌍한 것인데도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죄를 지은 것, 특히 나에게 죄를 지은 것을 영혼의 병이라고 생각지 않기에 불쌍히 여기지 않는 것일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영혼의 병인 죄를 육신의 병보다 더 안타깝게 생각하고, 더 고쳐주려고 해야 하고 어떻게든 그러니까 혼자 안 되면 둘이서, 둘이서도 안 되면 공동체적으로 고쳐주려고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거듭 말합니다. 죄도 병입니다.
아니 죄가 더 안타까운 병이고, 죄야말로 신자인 우리가 더 고쳐줘야 할 병입니다.
나한테 죄지은 것이 영혼의 병 때문이라고 이해한다면,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렇게 인식의 전환이 이뤄진다면 그의 죄 때문에 같이 미워하고 분노하기보다 안타까워할 것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박해하고 중상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따라서 자기 원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당하는 해(害)로 말미암아 괴로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가슴 태우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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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8)
<자기 희생의 삶!>
오늘 복음(마태18,15-20)은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어라.'는 말씀과 '함께 기도하면 아버지께서 들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고', '함께 청원기도를 드리는 모습'은 '모두의 구원'이라는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교회 공동체가 해야 할 일', '교회 공동체의 일원을 이루고 있는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은 '또 하나의 그리스도
(Alter Christus)'라고 불리는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제자인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님은 폴란드 태생이고, 콘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 사제로서, 성모신심 단체인 '성모 기사회'를 설립하셨고, 제2차 세계대전 때 순교하셨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신부님께서는 악명 높았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히게 되셨는데, 거기에서 예수님처럼 너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수용소에서는 한 명이 탈출하면, 열 명을 지목하여 처형한다는 규칙이 있었는데, 실제로 탈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지목된 열 명 가운데 한 사람이 가족이 있다며 울부짖자, 그를 대신하여 벌을 받겠다고 자청하셨고, 그래서 굶겨죽이는 벌인 아사형을 받고 순교하셨습니다.
'Omnibus Omnia(옴니부스 옴니아), 이 라틴말은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언어'로써,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을 주라.'는 뜻입니다.
'자기 희생의 삶!'
'너를 위해 죽는 삶!'
이것이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삶'이었고, 그분의 뒤를 따라간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님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또한 우리의 삶, 나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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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 18, 19)
가난 속에
참된 행복이
있고
가난 속에
참된
기쁨이 있다.
가난 안에서
이루어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이루어주시는
하느님께
이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밖에 없는
우리들
가난이다.
가난이
회개의
삶이다.
가난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게된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받쳐주는
영적인
가난이다.
가난이
하늘이다.
가난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
가난하지
않고서는
열릴 수 없다.
가난하지
않고서는
십자가를
질 수 없다.
사랑한다는 것은
가난한 영혼이
된다는 것이다.
가난이
복음이다.
가난한
마음안에
탄생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우리모두는
하느님 안에서
가난한
인격들이다.
성녀 클라라는
하느님의
가난으로
십자가를
기쁘게
받아들이셨다.
온갖 기쁨은
가난으로부터
이루어지고
주어지는
선물이며
은총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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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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