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불(神佛)은,
인류가 이 현상계에 육체를 갖고 혼의 수행이 가능한 환경의 일체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태양의 열 빛의 에너지에 의해,
식물, 동물, 광물 상호의 관계가 생기고 있다.
이 모습이야말로,
사랑이 아니고, 자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신불은, 육체적 선조 대대로,
자손 보존의 본능을 내려주어,
우리의 육체주를, 양친으로부터 공짜로 받은 것이다.
양친의 자비이며,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원래는, 신불의 자비와 사랑에 의해,
혼이 탈 배가 제공되었다, 고 하는 것이다.
그 배의 운전자인 우리 자신의 의식,
즉 혼의 부주의로, 부조화한 현상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해서,
자신의 마음도 행위도 바르게 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에 의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큰 잘못이다.
대자연의 은혜에 감사하고, 생활함과 동시에,
마음으로부터 사람들에 대한 보은의 행위를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사회의 조화가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우리는, 병, 가난, 가정의 부조화등의 고민에 대해서,
그 원인을 추구하는 것 없이, 결과만을 보고,
자기의 형편, 자기의 행복, 자기의 이익만을
기원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신불을 비롯해서, 우리의 수호, 지도령이랑, 혼의 형제들도,
아전인수(我田引水)의 기원(祈願)에 대해서는,
협력하지 않는 것도 알아야 한다.
신불의 세계는, 중도의 정법에 의해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
우리가 거울을 볼 때, 우리의 모습은 실물과 같이 비친다.
실물이 아름다우면, 비치는 그림도 또한 아름답다.
우리의 마음의 거울도, 완전히 똑같아서,
실재계의 천사들에게 비치는 것이다.
마음속은, 빛의 천사를 속이는 것은 절대로 통하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이 나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진실은 진실 이외에 없다고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반드시 우리에게 관계가 깊은 실재계의 사람들에 의해,
항상 협력을 받고 있다고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스스로 구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고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구하기 위해서는, 바른 상념과 행위가 일치한,
목적을 위한 노력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스스로 구하고 기도하는 것에 의해,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그때의 마음의 상태가 중요한 것이다.
가정평화, 풍어, 교통안전, 오곡 풍요, 안산(安産)이라고 하는
여러 가지의 기원(祈願)이 있다.
사람들을 위해서도, 마음을 올바르게 기도하는 것은,
수호령이랑 혼의 형제들에 의해,
신불에게 보고되어, 자비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주어진 자비에 대해서는,
당연히 감사의 마음을 갖고 보시하는 것이 바른 길이다.
특히 풍어기원이랑 오곡 풍요를 비는 경우 등은,
생물의 생명을 취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수확물을 헛되게 하거나, 소홀히 하거나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피, 몸, 뼈로 되는 것이니까.
그 몸의 공양이라고 하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생물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식사를 할 수 있는 것도,
많은 생명이 몸을 공양하고 있기 때문이므로,
신불에게 감사함과 동시에,
만물에게 감사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신불의 대자비에 대해서,
마음으로부터의 감사를 잊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기원(祈願)은 자기 보존의 일방통행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얻어진 자비에 대해서의,
감사의 확인으로서의 베풂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보은의 행위는,
사람들의 마음을 조화하고, 이웃사랑을 낳아간다.
자연히 행한다.
또한 그것에의 보답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올바른 공양의 의미가 없어지고 말기 때문이다.
또 불교는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몇 개인가의 종파로 분열하여 다른 종파를 사종(邪宗)으로 단정하여,
마음에 투쟁과 파괴의 씨를 뿌리고 있는 부자연한 사상도 있다.
불교에도 그리스트교에도, 투쟁과 파괴의 가르침은 없다.
만약 투쟁과 파괴의 길을 정당화하여 가르치고 있는 지도자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아류(我流)이고, 자기의 편의대로 지도하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시대에 따른 신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신리는 신구(新舊)에 관계없이,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불변이다.
그것을 모르고, 인간이 제멋대로 사리사욕의 사상을 만들고 있으나,
그것은 불손한 행위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불교의 철학화도,
이러한 사람들의 독선적인 산물로서 만들어져 버린 것이다.
화석화한 종교를, 자기류로 해석하여, 마치 정법처럼 수정해서,
신리를 깨닫지 못한 지도자에 의해 제목 투쟁을 배우고,
사람들을 격투의 세계로 밀어 넣고 있는 예가 있다.
어떤 신자는 또 어려운 철학적 용어를 사용해서 자기 만심(自己慢心)하고,
용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마치 불교철학을 공부한 불제자처럼,
고압적으로 행동하고 굴복시켜 자기를 따르게 하는 행위를 한다.
이러한 무리의 마음은,
자비도 잊어버린 아수라계, 지옥으로 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부조화한 행위를 강하게, 신불의 이름을 빌려서
인간의 마음을 미치게 해버리는 지도자의 마음은,
평안을 잃고, 지옥의 삶으로 내몰릴 것이다.
그 죄를, 반성하지 않는 한,
실재계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고, 지옥계에서 혹독한 반성을,
스스로의 불성으로 강제시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신불은 교단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며, 돈벌이에 이용되어서도 안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이용하여,
사람의 마음도 알지 못하는 무리가 자신의 형편 주의로 판단하고,
조직을 위해서 사람들을 이용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 죄는, 살아가면서 갚아야 하는 것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다.
죄를 받는다. 공덕이 없어진다,
고 배우고 있는 신자를, 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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