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려 지눌이 이 땅에 다시 온까닭은?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은 마음속으로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에
대한 의문을 가진다.
영혼의 세계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거나,
자신의 어떤 영적 완성을
위해 노력하고 수행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더 많은 궁금증과 의문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는
유일신을 믿는
대속과 부활의 종교이고,
불교는
자기 속의 부처를 찾는
윤회와 깨달음의 종교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라이프 리딩을 의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불교 신자인 경우가 많다.
그런 의문을 가진 많은
사람들의 라이프 리딩을 하다보면
그 중에는 전생에서
한 시대의 흐름에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상가, 정치가, 장군,
종교인을 만나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이 땅에 다시 오는가? 하는
의문에 대해서는
불교의 핵심 교리인
윤회의 법칙을 알면 그 의문이 쉽게 풀린다.
윤회의 법칙이란
더 큰 영적 완성을 위해
이 땅에 거듭 태어남을 말한다.
불교의 창시자인 부처님의 본생담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적어 놓은 책)에 의하면
부처님도 500생이 넘는
윤회 전생을 통하여 부처가 되었다고 한다.
어느 젊은 스님이 리딩을 청해왔다.
그 스님의 모습은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눈빛이 맑아 모시기가 편했다.
리딩 의뢰자의
영적 상태가 많이 정화되고 맑은 경우에는
그 사람의
영적 아카식 레코드(우주 도서관)에 접근하기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훨씬 수월하다.
스님이 궁금해 하는 것은
자신은
경전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남이 잘 이해하지 못하고 어려워하는 난해한 고전을
자신은 남 다른
독해력으로 잘 해석하고 풀이해 나가는데,
그럴 때마다 자신도 알 수 없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
전해져오는 신묘한 에너지의 감응에 대한 궁금증과
또 다른 부분은 자신이 차에 대해서
느끼는 각별한 관심에 대한 마음가짐에 대해서다.
리딩에서 밝혀진 내용은
젊은 스님은 지금으로부터 약 840년 전인
고려 중엽에 살았던
지눌 (1158-1210) 이라는
법명을 가진 스님이 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 스님에게는 특별한 기행이 있었는데
그 내용은 그 스님은
항상 소를 타고 다닌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생에서는
조선시대 후기에
초의(艸衣) 라는 법명을 가진
스님으로서의 삶도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현생에서
차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마음은
그때의 다도에 대한
잠재된 인식의 부분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지눌 스님과,
조선시대의 초의 스님과,
현재의 젊은 스님은
영적으로 같은 영체에서 비롯되었으며
시절의 인연에 따라 더 깊은
영적 완성을 위해 이 땅에 왔다고 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리딩을 하는 진여 선생은
불교에 관한 지식이 전무한 사람인테도
리딩에서는
지눌 스님의
'수심결' 의 '돈오점수' 에
대한 사상을 막힘이 없이 해설했다.
그러면서
지금의 젊은 스님의 전생의 모습은
소를 타고 다니는 지눌이라는 법명을 가진 스님이고,
그리고 또 다른 시절에서는 초의 스님,
현생에서
차에 대해 각별한 관심과
그에 대한 공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현재의 젊은 스님은
같은 영적 파동체로 연결된 하나의 영체라고 밝혔다.
리딩 작업이 끝나고 나서
인터넷으로
지눌 스님에 관한 자료를 탐색하던 중,
그분의 영정 사진을 대하게 되었는데
그 모습이 젊은 스님의 모습과
너무 닮아 있어 신기함을 떠나 놀라울 정도였다.
그리고 지눌 스님의 호가
---- '소를 기르는 이', 즉 '불성을 가꾸는 이' 라는
의미의 목우자였다는 것도 흥미로운 사실이었다.
윤회에 의한 연속적인 화신은
신체적으로 매우 흡사할 수 있다는 가설을
외국 학자들은
그들의 사례에 따른 연구와 이론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가설은 논쟁의 여지가 충분하지만
그들이 내세운
여러 사람들의 얼굴의 특징과 유사성을 종합해보면
어떤 경우에는
---"두개골의 형상, 얼굴의 인상, 표정의
미묘함이 너무나 흡사해서 전율할 정도로 닮아 있다." 고 한다.
영국의 신비주의자인
클래리스 토인(Clarice Toyne)은
(영원성의 후예들: Heirs to Eternity)이라는 책에서
연속적인 화신들이
신비하게 닮은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항상 전체적인 에너지의 충전이 존재한다.
이것이 내면의 존재이며,
이것은 새로운 모습 속에 들어가 그것을 유지시킨다.
자연적 진보의 사다리는 점진적이며 조금씩 변화한다.
모습이나 정신적 능력은 갑자기 급변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환생하는 영혼은 설사
인종이 바뀐다 해도 전생의 모습과 비슷한 특징을 갖는다."
1946년,
클래리스 토인과 조셉 마이어스가
환생주의적 유사함을 주장하기 전에
헤럴드 W.퍼시발은
그의 1,000 페이지에 걸친 형이상학적 논문
<사고와 운명>에서
한 영혼이 여러 번 환생하는 경우,
같은 나이에 찍은 사진들은 거의 모습이 비슷하며
유전적 특정도
----부모와 상관없이---- 같다고 말했다.
환생 연구가들은
피험자가
그가 전생의 자신이었다고 주장한 인물 사이에
신체적 유사성이 있는 경우가 있다고 말한다.
한 예로 브라질의 대농장주의 딸인
시나 올리비에로(Sinha Oliviero)가 그 전형적인 사레이다.
시나 그리고
시나의 환생이라고 주장한 마르타 로렌스,
이 둘을 다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용모와 필체가 비슷한 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시나는
1917년 10월, 28 세의 나이에 결핵으로 죽었다.
그녀는 임종 순간에
친구인 '이다 로렌스' 에게
네 딸로 태어나겠다고 약속하면서 죽었다.
그로부터
10개 월 후에 마르타 로렌스가 태어났으며,
두 살 반이 되자 그 아이는 시나의 삶에
대해서 유창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