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명량 회오리바다"란 국산 영화가... 대 히트를 하여 관심사가 돼는데...
영화평론가들의 평은 그리 녹녹치 않아 보인다.
애국심에 기인한 역대 최고의 관람률이다.
스토리는 좀 지루하고...1시간여의 해상전투신만 그런대로 볼만하다.
특히, 역사고증의 꼬투리인데...
왜장은 별볼일 없는 장수로...이순신의 전과를 위해 과장됐다.
명량해전은...실상은 330척의 왜선중 133척만이 출전한 해전으로...여타 해전에 비해 그리 대단한게 아니다.
뭐 이런식의 나름 좀 안다는 분들의 역사고증 비판이 눈에 띄이는데...
내 보기엔...역시, 좀 안다는 자들의 뉵갑이라 하겠다.
대개의 임진왜란사 전문가들이란 이들은...
거의 전부가 우리 기록들 보단 왜놈들의 기록들을 뭔 대단하고 희귀하고 디테일한 비기사서인냥 인용한...
상당수가 도루구찌 모자 쓰고 다니길 즐기시는 늙다님들이 대부분이고...
조선왕조실록등 다수의 대표적 사서들이 왜놈들 손을 탄 사서란걸 전혀 감안하지 않는 신비한 분들이란게 우습다.
이순신과 그의 대표적 업적인 명량대첩에 관해서도...
원래,명량해전의 그 왜장은 일본에서 그리 처 주지도 않던 왜장였다...
13대 333척이란건 과장이고...전위대 133척만 출전한 결과니...한 10대 1 정도의 승리다.
조선 판옥선은 대형이고 왜놈들의 선박수는 조그만 호위선들도 포함됀 걸 수 있다.
정작, 이순신이 직접 쓴 난중일기와 조선사서들엔...왜선이 완파됀건 33척이라 명기됐으니...왜적을 전멸시킨듯 표현함은...
지나친 민족주의적 과장이다.
요래, 궁뎅이 옹심이에 잔뜩 무개를 잡고 눈을 내리 까시면서들 훈계를 하시는데...
이런 연유로 해서...
명량 화오리바다"의 제작진들도...역사고증을 마냥 무시할 수 없어...
특히,왜선은 33척만 완파당했단 기록들 때문에...그 해전사의 표현을 눈치보며 얼버무리는 바람에...
그 고증적 표현의 사실성여부로...극적 장엄함이 경감됐을 수 있다 보여 안타깝다.
여하튼지간...
이런 류의 아는척 쟁이들의 평가 말고는...불륜 좋아하는 막장드라마 메니아들의 일부 비평말고는...
대한민국 대부분의 국민들이...역대 길이 남을 감동스런 역작이라 평가했다니...
이순신장군을 존경하는 국민으로서 내 일 같이 기쁘기는 마찬가지라 하겠다.
그럼, 왜놈들이 잔뜩 왜곡해서 재 편집했을... 과학적인 팩트를 가장한 디테일한 임진왜란사 말고...
왜놈들 손을 탓을건 뻔하지만...기본적인 우리 기록들 먼저 보자.
이충무공의 자필 전서체 난중일기 자체도...너무 흘림체라 그 해석이 분분하고...
정작, 그 원본 전서체도...이순신장군이 직접 하신건진 몰라도,,,여기 저기 삭제와 수정이 가해진 흔적이 역력하다 하니...
왜놈들이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고자한 역사왜곡질의 필요성에선...
조선왕조실록에 이은 최고의 일본관련 기록인 난중일기에 왜놈들 손이 안 탓다고 보는것도 천진난만이라 보인다.
그래, 일단
기록 문건별로 따로 올리면 전체적 줄거리가 뒤죽박죽이라..이해가 난해해지니...
소설식으로 연결해서 정리해 보겠습니다.
임진왜란시기...
왜놈들은 10여만의 병력으로 조선을 쳤다 하는데...
여러 기록들을 종합해 왜놈들의 병력수를 산출해 보면...최소 삼십만에서 오십만에 육박한다 보인다.
실제로도...정유재란시기의 기록을 봐도... 오십만이 거론됀 문구들도 보인다.
밑의 기본적인 기록들의 대략을 보건데...
왜놈들은 정유재란 시기...조선에 1만여척의 크고 작은 배들을 보냈고...
조선 서해안을 치는 왜군전함은 최소 1천척이 배정됌을 알 수 있다.
한산도에서 원균이 거북선을 비롯한...조선 수군함정을 다 말아먹은 연후...
이순신은 조정의 사면을 받아 다시 수군통제사에 올라... 달랑 13척의 판옥선으로 왜군을 막겠다고 설친다.
조정과 주변 장수들 마저...
너무 차이나는 전력상...남은 수군병력을 지상군에 합류시킴이 이성적이라 간곡히 충고를 하나...
이순신은 수로가 뚫리면 조선 호남과 충청이...다시, 경기도가 무방비로 열리니 포기할 수 없다 강력하게 우기고 버틴다.
왜란 초기...
조선8도를 다 먹었다 하나...유독 호남,호서(충청)에서만 맥을 못추고 개망신을 당한 왜노들은...
원균이 한산도에서 조선 수군병력을 다 상실함을 깃점으로 호남,충청에서 대 학살극을 자행하며 보복전을 한다.
조선 난민들은 지리산 등의 깊은 산중으로 피난하며..왜놈들은 이 피난민들 색출과 약탈극으로 재미가 쏠쏠하던 시절...
본대가 철수했던 명나라군이 재 출전하고...그나마 유일하게 이순신의 수군이 버티고 있는 전라도 해남(무안)지역으로 ...
조선 난민들 수만명이 몰려 든다.
이순신은...
조선 난민들이 타고온 배들을 동원해...후방에 위장형식의 가짜 수군진영을 만들고...
13척의 판옥선을 전진배치해 위장전력을 적들에게 과시하면서...택도 않돼는 방어전을 준비한다.
왜노들은 임란초기의 개망신인 호남패배의 일등공신인 이순신과 그의 호남수군제거에 명운을 걸고...
수전에 능통하다는 왜장 마다시(馬多時) 장수를 수장으로...오백에서 육백척의 전선을 보냈다고 우리 사서에 명기 됐다..
일부 사서엔 330척이라 명기됐으나...왜 더 많이 표기됀 오육백척이란 설을 버려야 하는지 난 모르겠다.
일본 기록에서 인용했는진 몰라도...
당시 명량해전 왜군 최고장수가 "구루시마 미치야스"란 자이고...그가 마타시(馬多時)란 자이며...
안골포해전에서 전사한 구루시마 가 형이라는데...
과연, 서해장악의 가장 중요한 전투인 이순신 수군소탕 전투에...
오육백의 왜군 대함단을 이끌 주장으로 그런 평범한 장수를 임명 했겠냔 당연한 의심이 드니...
그 일본어를 한자로 음차한 이름인...마타시(馬多時)와...구루시마 미치야스는 전혀 다른 인물인데...
당시 명량에서 뒈진 수 많은 왜장 중 한 놈을...정작, 명량해전의 총 지휘장으로 왜곡한 왜놈들의 자존심 아니겠냐 의심이 든다.
당시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벽란정의 좁은 해로를 의지해 13척이란 절대 불리의 약소한 전력을 보호하며 위태위태 주둔했는데...
해남으로 피난한 조선 유민들 수 만명이 산중에 숨어 이를 위태위태하고 안탑갑게 바라보던 시기였고...
명량해전 하루 전날 야음을 틈타...
왜놈들은 달빛이 산능성로 인해 그림자를 드리운 어두운 곳을 택해 조선 수군에 접근했는데...
이를 이미 예상한 이순신이 배치한 첩보선의 보고로 전투준비를 갖추고...일제사격을 가해 적선을 저지해...
명량해전 전야의 전초전을 완승으로 시작한다.
모든 기록들엔...
벽란정의 전투와 명량해전이 뭉퉁그려 졌기에....
명량해전 초기에 일단 31척의 적선을 침몰시켰단 숫자는...어쩌면 이 벽란정의 명량해전 전야전투일 확률도 존재한다 보인다.
벽란정 협로의 전야전투가 치뤄진 후
이순신은 물살이 센 벽란정 해협에서 뒤로 물러나 진도(珍島)명량구에 새 진영을 갖춘다.
위의 예대로...만여명의 조선 피난민들이 타고온 선박을 조선수군으로 위장해 뒤로 배치한 연후...
달랑 13척의 심플한 수군병력을 그 앞에 전진배치해 왜군들과의 결전을 대비한다.
다음날 아침...드디어...
오육백척의 왜군 함대가 명량구(鳴梁口)를 육지라 착각할 정도로 뒤덮고 접근했다.
해협(海狹)이라 하지 않았다...구(口)라 했다.
대개의 고지도들을 보면...구(口)란 표기는...큰 강과 바다가 만나는 자리를 이른다.
역시 한반도가 아니라...중원의 해남성(하이난) 일대라 예상됀다.
왜군 선단은...
11척의 이순신 선단을 겹겹이 포위하며 옥죄어 든다.
2척의 배는 이미 어마어마하게 밀려드는 왜군들의 기세에 질려 뒤에 처져 있던 상태였고...
이를 진도와 해남의 산중에 숨에 않타깝게 지켜보던 조선 피난민들 사이에선...
이미 그 승패가 뻔 해 보이는 정황에... 통곡소리라 터지기 시작했단다.
이순신은 전혀 동요치 않고 적군이 겹겹이 포위한 가운데서 움직이지 않았고...
뒤에 처저있는 2척의 판옥선 장수들에게...목이 달아나고 싶냐 협박햇고...특히,거제 현령(巨濟縣令) 안위(安衛)에겐...
저 놈 목을 잘라오라 호통을 치자...뒤에 처져있던 두 판옥선이 앞으로 나오는데...
본의아니게(?)...
당시 아침의 조수가 빠져 나가는 시간대라서...조수가 항구로 부터 외해로 급속이 빠져나가면서...
엎친데 덮친 격이라고...바람까지 뒷바람이 부는 바람에...
안위의 판옥선이 본의 아니게...혈혈단신 급속도로 왜군 대 함단으로 돌진하는 격이 돼어...
남들이 보기엔...엄청나게 무모하고 용감한 오육백대 일의 전투가 벌어지면서...
적선들이 일제히 거제 현령(巨濟縣令) 안위(安衛)의 함선을 에워싸고 안위의 조선수군은 본의아니게(?) ...
죽기살기의 용감무쌍한 전초전 선봉장이 돼 버렸다.
이 기회를 틈타...
이순신의 나머지 12척의 함대도...항구에서 급속히 빠지는 썰물속도를 이용해..초 고속으로 적들의 함단으로 돌진하며...
조선 판옥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악하기 그지없는 덩치만 큰 왜장선들과 작은 호위선들을 박치기로 드리받아 깨 부수고...
당시까지 압도적이던 선상 화포술로 적선들을 박살내며 혈전에 돌입했다.
그게 전야전였던 벽란정의 왜선 침몰숫자인지 명량전의 왜선 침몰숫잔지는 몰라도...
분명 기록엔 아침에 시작됀 명량전투에서...먼저...31척의 왜선을 수장시켯다 기록됐다.
당시 왜노들의 함선들엔 대포가 없었던게 아닌데...
이는 금나라시기 부터 본격적으로 출발해 몽골제국을 이어 명나라와 고려로 전파됀 당대 조선과 명나라의 화포보다도...
사거리가 엄청 긴...이 전쟁의 배후세력인 네덜란드와 폴투갈 군사고문단이 지원한 홍이포가 왜군들에게 지원됐지만...
왜군들의 조악한 선박의 갑판바닦에 이를 고정하고 홍이포를 쐈다간...조선 판옥선에 맞추기도 전에...
왜놈들 배가 먼저 그 홍이포의 반동으로 파괴됄 판이였기에...그 반동을 줄이고저 돛에 매달아 사용하던 웃끼는 형국였기에...
판옥선의 전후좌우에 수십개 배치됀 조선 수군의 빗발치는 화포공격에 왜노들이 압도당할 수 밖엔 없었기에...
왜군들은 죽기 살기로 조선 판옥선에 다가가 선상 백병전을 시도하려 새까맣게 포위를 좁히며 근접전을 감행했고...
조선 수군은 화포뿐이 아닌..다연장포 격인 비격진천뢰와...수류탄 식의 화약투척무기로 적선을 끄슬리는 아비규환이 벌어졌다.
산속에서 이를 조마조마하게 관전하던 몇만의 조선 피난민들은..안타까워 통곡했고...
전투는 아침에 시작해 정오를 한 참 지나...오 육백척의 왜선들은 13척의 조선 판옥선에...
교대로 치고 빠지며 죽어라 근접전을 감행하고... 왜놈들의 기록화를 보건데...조선 수군은 결사적으로 왜군들의 선상진입을 백병전으로도 막으며 혈전을 치뤘고...,해가 저물력까지 치열하게 지속됐다.
사생결단의 길고 긴 치열한 전투가 치뤄진 해 저물력에 보니...
오 육백척의 왜선들은 전부 괴멸돼고...조선 수군의 판옥선 13척만 달랑 남아 있는데...
인명손실은 단 2명에...조선 판옥선은 망루 하나도 상하지 않은 퍼팩트한 상태의..세계 전쟁사에 유래가 없는 믿지못할 광경에...
이를 가슴졸이며 통곡하며 산속에 숨어 관전하던 조선 피난민들은... 펄쩍 펄쩍 뛰며 감격에찬 환호성을 터트렸다.
이미 우리의 선조들은...월드컵 한일전의 역전승에 100배는 더할 기적적이고 감격스런 한일전의 승리를 400년 전에 맞보셨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반듯이 짚고 가야할 대목이 역사왜곡 정황이다.
대부분의 기록에...왜군 선박은 오 육백척이라 했다.
밑의 왜노들에게 포로가 됀 조선포로의 증언에 의하면,..해남(무안)의 항구에 정박한 왜노들의 배가 수천척이라 했다.
울산,동래,안골포,가덕도 ...부산등지의 항구에 있었을 왜노들의 선박숫자까지 합치면...
왜노들이 남해안에 배치한 선박수는 거의 1만척에 육박한단 정황이다.
그 중 20분지 1의 숫자 밖엔 않돼는 오 육백척은...
당연 회심의 명운을 건 호남진출전이자 이순신 제거전에 동원됀 최소한의 숫자가 당연할 거고...
명량해전에서... 단 33척 밖엔 완파됀게 없었다면...
왜 왜군들이 몇 천척의 배로 재 보복공격을 두려워할 이유가 있었겠냔 의심부터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다.
아침새젹이 시작됀 전투에서...먼저 31척의 왜선이 침몰했는데...
정작..정오 지나고 해 저물녁까지 지속됀 치열한 근접전에서...단 2대의 왜선밖엔 침몰하지 않았단 계산은...
앞뒤가 전혀 맞질 않는다...
전력의 1할도 않돼는..33척이란 경미한 손실에... 왜 왜노들이 패주했단 건지도 설명이 도저히 안됀다.
간단하지만 기록을 다시 자세히 보자...
아침에 시작됀 초전에...안위의 배가 본의아니게 초고속으로 왜군 함단에 돌진하면서...
12척의 나머지 이순신 판옥선이 같이 돌격해..먼저 31척의 왜선을 수장시켰다 했다.
이후 왜선들은 이순신 함단을 겹겹이 포위하며 교대로 근접접을 시도하고...이순신 함대는 사방으로 방포하며 왜선들을 되멸시키고...
왜선들이 뒤로 밀리자 추적하며 맘껏 왜선들을 유린했다 나온다.
이전투가 해 저물녁에 끝나고...적선들은 괴멸돼고...이순신의 조선 수군 판옥선 13척만 달랑 명량바다에 떠 있었단다.
틀림없이 기록들에 나온다...
왜노들는 단 몇십척의 선박만 철수했다 기록했다.
이를 종합하면...
오 육백척...최소 330척의 크고작은 왜노들 선박은...
아침에 시작됀 전투에서 순식간에 31척이 수장돼고 왜군장수 하나가 뒤져서 목이 잘려 조선 판옥선에 매달린 상태로,,,
주춤하면서...조선 수군을 겹겹이 포위하고 교대로 근접전을 감행하길 해질녘까지...계산하면...12시간여를 조선 수군과 아비규환의 전투를 하곤...패퇴하면서...수십척만 살아 돌아갔다 했다.
그럼, 개박살난 왜노들의 전함 숫자는... 크고 작은것 도합..사백여척에서 오백여척이란 계산이 객관적인 것이다.
그러기에 최소 수천척이 남아 있던 경상도 지역의 왜군 함단이...이후 절대 서해로 범접치 못했던 연유가 됀다.
수천척 중...갸오 33척 잃고 쫄았을 왜군들이라면...임진란 일으키지도 못했을 것이다.
주요 조선사서들은 ..최소한 왜놈들에게 불리하고 망신스런 대목들은 일제시대에 교열을 봤던 것이다.
이순신장군이 직접 쓰셨단 흘림체의 난중일기도...왜놈들 망신살 뻗치는 대목은 삭제하고 수정했을 건 뻔하고...
특히 뒈진 왜노들의 마릿수에선 철저한 왜곡이 가해졌다 봐야 상식적이라 하겠다.
정리하자면...
일제가 인력과 시간 없어... 완벽히 왜곡 못한 조선의 기록들을 재조합하면...
명량해전 전야에 이미 왜군들은 벽란정 야습에서 이순신에 먼저 깨졌고...
날이 새고...아침에 대대적으로 치뤄진 명량해전에선...
이미 초전부터 적장 뇌도수(耒島守)가 이끈 백여척의 한선중 30여척이 박살나고... 뇌도수(耒島守)목이 잘려 장대에 매달리고...
다시, 지리한 결전중에 왜노들 함대의 수장인 마타시(馬多時)늠이... 물속에 빠진걸...
항복한 왜인이 고자질해 갈고리로 건져 생포해...왜놈들 함단이 다 지켜보는 가운데서...목을 치고 토막을 내서 다시 장대에 걸면서...
주장을 잃은 왜군들이 패퇴하기 시작하는걸 추격하며 개박살 냈단 정황이다.
아주 선량하신 이순신 장군이시지만...
적군에 대해선 반듯이 적장을 잡으면 간을 취하셨단 증언을 듣건데...간을 취했다 함은 적장의 간을 씹었단 얘기니...
이 치열했던 명량해전에서는..
그 때 까지 왜놈들이 호남과 영남에서 자행한..잔악무도한 겁탈과 학살극들을 감안하건데...
반듯이 그 행사가 없었을리 만무하다 보이니...
다시 종합하면...
이순신과 13척의 조선수군단은...
오 육백척의 왜군 대 함단을 맞이해...명량해전 전야전인 벽란정 해협 ...야습에서 왜군들을 먼저 깨고...
후퇴해 명량구(명량항구)해협에 조선 피난민들의 선박들을 배후에 멀리 군함같이 위장해서 배열한 상태로..
달랑 13척이 오 육백척의 왜군 선단에 수십겹으로 포위됀 상태에서 사생결단의 대 전투를 벌였고...
초전에 이미 31척의 적선을 부수고...
적장 뇌도수(耒島守)의 머리를 잘라 장대에 매달면서 기세를 올렸고...
치열한 전투와중에..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 왜적의 수장 마타시(馬多時)를 항왜출신 조선군이 발견해 보고하곤...
이를 긴 장대의 갈고리창으로 건져 올리는데...
이를 자세히 본 항왜(항복한 왜놈)출신 조선군이...흥분해서 펄펄뒤면서...
마...마...마타시(馬多時)..가 맞쓰무니다!!!....라 소리치고...
이순신은 왜노 함단의 수장을 ..왜적들이 포위한 바다 한가운데서 목을 잘라 장대에 걸고...
왜노들이 저지른 잔학한 만행의 보복적 행사로 마타시를 토막내고...기록엔 않 나오지만 당연스럽게 그 간을 씹었고...
기가 질린 왜노들이 퇴각하기 시작하면서...추격전이 시작됐고...
오 육백척의 왜선들은 거의 전부가 괴멸돼어...살아 도망간 왜노들은 단 수십척 밖엔 없었단 정황이 됀다.
330척 중 133척이 출전했고...33척 완파란 소린...일제시기 일제의 앞발을 탄 왜곡이라 의심되고...
자신들이 치욕스런 패배를 좀 순화시키고자 일제가 감행한 역사왜곡이며...
그 목이잘린 왜놈 수장이란 뇌도수(耒島守)는...초전에 뒈진 왜놈이니...왜놈수장 마타시(馬多時)완 다른 놈이고...
왜노들이 말하는 별볼일 없는 해적출신 "구루시마 미치야스"란 놈도 아닌 정황이다.
세 놈의 왜군 장수 모두 다 뒈진 정황이라 하겠다.
이를 왜노들은 젤 허접한 한 놈만이 그들이라 우겨 자존심을 덜 회손하려는 것이고...
그 왜놈 수장의 당시 명나라식 한자 음차표기는...
내 예상엔..."공가와마다시지(共加臥馬多時之)"란 자의 약식명칭인 "마타시(馬多時)"란...강력한 다이묘였는데...
왜놈들이 자존심 상해...신원미상이라 능청을 떠는거라 의심됀다.
이런 고로...
영화 명량 회오리바다는...오 육백척의 왜노들 함단이 명량에서 달랑 13척의 조선군에 전멸해... 단 수십척만 도망친...
세계 해전사에 전무후무한 기적적인 승리였다고...맘 놓고 오바했어도 무방했다.
고개 쫌... 아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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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생략...
9월 1일 행장 등의 적이 구례로 해서 순천으로 향하여 왜교(倭橋)에 결진하여 성을 쌓고 막을 치고, 본부의 사람들에게 패(牌)를 주어 속여서 꼬여 소집하고, 군대를 나누어 본성과 광양성(光陽城)을 지키고, 사방으로 군대를 흩어 외촌에 주둔하며, 항복하여 붙은 사람과 같이 집결하여 한 마을을 만들고, 벼와 곡식을 수확하여 식량을 준비했다. 패를 받은 사람은 각각 쌀 3말씩을 납부했다. 수가는 섬진강(蟾津江)으로 해서 한산도(閑山島)에 유둔했다. 적의 괴수들은 먼저 천여 척의 배를 서해로 보냈다. 이때에 통제사 이순신은 잔병(殘兵)을 거느리고 진도(珍島)의 명량구(
鳴梁口)에다 유진하고 사태의 추이를 기다렸다.
이하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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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생략...
24일무안현(務安縣)의 한 해곡(海曲)에 당도하니, 땅 이름은 낙두(落頭)라 하였다. 적의 배 수천 척이 항구에 가득 차서 붉은 기ㆍ흰 기가 햇볕 아래 비치고, 반수 이상이 우리나라 남녀로 서로 뒤섞여 있고, 양옆에는 어지러이 쌓인 시체가 산과 같고, 울음 소리가 하늘에 사무쳐 바다 조수도 역시 흐느꼈다. 무슨 마음으로 낳았으며, 무슨 죄로 죽는 것인가? 나는 평생에 뭇 사람 중에서 가장 나약하고 겁이 많은데도, 이때만은 매양 살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배가 이미 중류로 떠나가자, 왜적 하나가 통역을 대동하고 와서 묻기를,
“수로(
水路)의 대장이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태안(泰安) 안행량(安行梁)에 있는데, 옛 이름은 난행량(難行梁)이다. 하도(下道)의 조선(漕船)이 해마다 표류되고 난파되기 때문에 그 이름을 좋게 지어서 제압한 것인데, 대개 수로의 천험(天險)이 된다. 그러므로 명 나라 장수인 소(召)ㆍ고(顧) 두 유격(遊擊)이 과선(戈船) 만여 척을 거느리고 양(梁)의 위 아래를 가로 끊어, 유선(遊船)이 이미 군산포(群山浦)에 와 있고, 통제사(이순신을 가리킴)는 중과부적으로 물러나 명 나라 군사와 합세하고 있다.”
하자, 적의 무리는 서로 돌아보며 기가 꺾였다.
이하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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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생략...
안위(安衛)는 일개 현령(縣令)으로 이순신(李舜臣)의 분부를 받아 큰 전함(戰艦) 한 척을 가지고 조수(潮水)를 이용하여 바람이 부는 방향을 따라 명량(
鳴梁)의 어귀에서 적진(賊陣)에 충돌한 다음 더욱 강력하게 혈전(血戰)을 벌이어 끝내 적선(賊船) 5백여 척을 벽파정(碧波亭) 밑에서 격파하여 물리쳤으니, 적들로 하여금 감히 다시 전라 우도(全羅右道)를 엿보아서 곧장 충청도(忠淸道)로 진격하지 못하게 한 것은 안위의 힘이었다. 당시에 안위의 승첩(勝捷)이 아니었다면 적들이 한산(閑山)에서 승리한 기세를 타고 장차 충청도를 곧장 범하여 바다를 따라서 올라오더라도 이를 물리쳐 금할 사람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변란이 일어난 이후 10년 동안에 걸쳐 영천과 명량의 전투를 가장 장쾌(壯快)하다고 칭하는데, 그러나 안위의 일은 권응수의 일에 비하면 또 어찌 만 배만 더 장쾌할 뿐이겠는가.
이하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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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생략...
이때 공은 몹시 어지러워진 상황에서 기용되어 재차 번진(藩鎭)에 임명되었는데, 양남(兩南)의 제군(諸郡)이 모두 적의 소굴이 되어, 행장(行長)은 육로에서, 의지(義智)는 수로에서 서로 계책을 통하고 예기(銳氣)를 기르면서 우리의 틈을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공은 다만 창잔(瘡殘)의 남은 군졸로 13척의 전선을 거느리고 의지할 곳이 없어 벽파정(碧波亭) 앞바다에 머뭇거리고 있었으므로, 보는 이들이 위태롭게 여기었다. 공이 하루는 갑자기 군중(軍中)에 명령을 내려 이르기를,
“오늘 밤에 적이 반드시 우리를 습격할 것이니, 여러 장수들은 각각 군대를 정돈하고 경계를 엄중히 해야 한다.”
하였다. 그런데 이날 밤에 적이 과연 군대를 비밀리에 출동하여 쳐들어왔다. 그러자 공이 스스로 일어나 큰 소리로 호통을 쳐서 제군(諸軍)들로 하여금 동요하지 말고 각각 닻을 내리고 기다리게 하여 더욱 강력히 싸움을 독책하니, 적이 포위망을 풀고 가므로 공은 회군(回軍)하여 우수영(右水營)의 명량(
鳴梁) 앞바다로 와서 있었다.
그 다음날 아침에 바라보니, 적선 5, 6백 척이 바다를 온통 뒤덮어 올라오고 있었다. 이에 앞서 배를 타고 피란 나온 호남의 사서인(士庶人)들이 모두 진영 아래 모여서 공을 의지하여 생명줄로 삼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공이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상황으로 인하여 먼저 피란선(避亂船)들로 하여금 차례로 물러가 배열하여 진을 치게 해서 이들을 의병(疑兵)으로 삼고, 스스로 전함을 거느리고 맨 앞에 나가 있었다. 이때 적들은 공이 전함을 정돈하여 나온 것을 보고 각각 노를 재촉하여 곧바로 진격해 오는데, 정기(旌旗)와 누로(樓櫓)가 바다 가운데 그득하였다. 이때 아침 조수가 막 밀려나가서 항구의 여울물이 매우 급하였는데, 거제 현령(巨濟縣令) 안위(安衛)가 조수를 따라 내려가다가 빠른 바람세를 타고 배가 쏜살같이 달려 곧장 적진 앞에 돌진하니, 적이 사면에서 안위를 포위하므로 안위는 죽음을 무릅쓰고 돌전(突戰)하였고, 공은 제군을 독책하여 그를 후원하게 해서 먼저 적선 31척을 격파하니 적이 약간 퇴각하였다. 그러자 공이 노를 치면서 군사들에게 맹세하고 승승장구하여 진격하니, 적들이 죽기로써 소리만 외칠 뿐 감히 대적하지 못하고 군대를 죄다 거느리고 도망치므로, 공 또한 보화도(寶花島)로 옮겨서 진을 쳤다.
중간생략...
나의 선인(先人)께서 공의 딸을 외부(外婦)로 삼으셨으므로, 나는 그나마 공의 집사ㆍ하인 및 공을 섬긴 사람들을 만나서 공의 용모와 기호와 모습이 어떠한 사람이었나를 물어 알 수 있었다. 공은 큰 체구에 용맹이 뛰어나고 붉은 수염 에 담기(膽氣)가 있는 사람이었다. 평상시에도 본디 비분강개하여 적을 죽이면 반드시 간(肝)을 취하였다.
예교(曳橋)에서 싸움이 급해졌을 때는 공이 뱃머리에 나가 싸움을 독려했는데, 장사들이 나가지 못하도록 극력 간하였으나, 듣지 않고 말하기를,
“적만 죽이면 나는 죽어도 유감이 없겠다. 적이 물러가면 내가 죽어도 너희들은 편안할 것이다.”
하였으니, 이 말이 사실이라면, 공은 진실로 사훼(蛇虺)가 세상을 독란(毒亂)시킨 것에 분개함과 동시에 고래 같은 고기는 작은 도랑에 오래 있을 수 없음을 또한 알았던 것이 아니겠는가. 아, 슬프다.
이하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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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사(統制使) 이공(李公)의 노량비명(露梁碑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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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생략...
라고 하였다.
그러자 조정이 급하게 여기어 공을 찾아서 재차 전직(前職)을 임명하였다. 이에 공은 단기(單騎)로 군졸들을 불러모아서 명량(
鳴梁)으로 나가 진을 쳤는데, 갑자기 밤중의 습격을 받아서 소수의 군졸로 필사전을 벌인 결과, 새로 모은 13척의 전함으로 바다를 가득 메운 수많은 적을 상대하여 30척의 적선을 파패시키고 용맹을 다하여 전진하니, 적들이 마침내 퇴각하여 도망쳤다.
이하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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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생략...
중간생략...
“일본의 수군 10여만 명이 또 서해(西海)로부터 오고 있으니, 모르겠습니다마는 대왕(大王)의 종사(宗社)가 앞으로는 어디로 가야 하겠습니까?”
하였다. 적들이 처음에 수군과 육군이 합세하여 곧장 요동(遼東)으로 진격해서 상국(上國)을 엿보려고 꾀했었는데, 순신이 싸울 적마다 모조리 승리하여 동해를 차단하고 있으면서 그들을 멋대로 날뛰지 못하게 하고 있기 때문에 행장이 비록 평양을 탈취하기는 했으나 형세가 고단하여 감히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였고, 우리는 북으로는 압록강을 한계로 삼고 남으로는 호남ㆍ영남까지 보호하여 능히 명 나라의 군대를 맞아서 끝내 광복(匡復)을 이룩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모두 순신의 공력이었다.
중간생략..
이때 호남에 피난하는 사민(士民)을 실은 수백여 척의 배가 여러 섬에 흩어져 정박해 있었으므로, 순신이 그들과 약속을 하여 그들로 하여금 군진(軍陣)의 뒤에 열지어 서서 성세(聲勢)를 이루게 하고 전함 10여 척만을 앞가리개로 삼고서 진도(珍島)의 벽파정(碧波亭) 아래서 적을 맞아 싸웠다.
원균이 패한 이후로 이미 한산도의 요새지를 잃은 터라, 순신이 중과부적으로 넓은 바다에서 교전하기가 어려우므로, 물러나 벽파정 아래 좁은 목을 지키면서 형세를 이용하여 의병(疑兵)을 설치하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적선 3백여 척이 명량(
鳴梁)을 경유하여 곧장 아군의 진영으로 진격해온다는 첩보가 있자, 순신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나가 방어하였는데, 적들이 아군을 수십 겹이나 포위하고 군대를 나누어 교대로 싸우는 가운데 적병은 많고 아군은 적어, 여러 장수들이 사기를 잃고 모두 퇴각하여 달아나려고 하였다. 이때 순신이 바다 한복판에 배를 머물러두고 꼼짝하지 않자, 적들이 그것이 대장선(大將船)임을 알고는 마침내 수백 척의 배를 가지고 차츰 죄어 들어왔다. 형세가 더욱 긴박해지매, 그리하여 순신이 대장기로써 지휘하여 나가 싸울 것을 독려하였는데, 이때 거제 현령(巨濟縣令) 안위(安衛)가 싸움을 버티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후퇴하려고 하므로, 순신이 뱃머리에 서서 크게 고함을 질러 안위의 머리를 잘라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안위가 적진에 돌입하여 적과 교전하다가 배가 곧 함몰되려 하므로, 순신이 또 배를 돌려 그를 구해주니, 안위 또한 사력을 다해 싸웠고, 포시(炮矢)를 사방에서 발사하여 적병이 즐비하게 쓰러져 마침내 적을 크게 패배시켰다. 이때 적의 맹장 마다시(馬多時)를 사로잡아 참수하였고, 적선 30여 척을 부수었으며, 죽은 적병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고, 나머지 백성들은 포위를 풀고 도주함으로써 우리 군성(軍聲)이 다시 크게 떨쳤다.
처음에 적이 원균을 격파하고 나서는 장차 대군을 이끌고 곧장 서해로 쳐들어가서 장수를 뽑고 군대를 모집하여 결전을 한번 벌이려고 했었다. 그런데 순신은 막 패전한 뒤에 일어나서 병세(兵勢)가 아주 단약한데다 갑자기 거대한 적을 만났으므로, 인심이 대단히 불안하게 여기었다. 마침내 순신이 바다로 들어가 적을 맞으니, 적들이 아군을 사방에서 포위하여 포성(炮聲)이 바다를 진동하고 검광(劍光)이 햇볕을 요동시키는 듯하였으므로, 이때 남쪽에 피난온 사민(士民)들로 산에 숨어서 싸움을 구경하던 수만 명이 서로 아군을 바라보고 통곡을 하였었다. 적들은 교대로 나가고 물러가고 하면서 온종일 혈전을 벌였으나, 순신은 적은 군대로 많은 적병을 상대하여 끝내 큰 승첩을 거두었다. 날이 저물고 전쟁이 끝난 뒤 적병들이 모조리 섬멸되고 아군의 배만 우뚝 서있어 망루(望樓)도 파손되지 않았음을 보고는, 이날 관전했던 사람들이 몹시 감탄하여 진동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승첩의 보고가 올라가자, 상이 크게 기뻐하며 순신을 숭품(崇品)에 올리려고 하니, 말하는 이가 순신의 작질(爵秩)이 이미 높다고 함으로써 제장(諸將) 이하에게만 포상하였다. 천조(天朝)의 경리(經理) 양호(楊鎬)는 이때 경성에 있었는데, 그 역시 기뻐하여 말하기를,
“근래에는 이런 승첩이 없었다.”
하고, 홍단(紅段)과 백금(白金)을 보내서 위로하고 상 주었다.
이하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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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에서 패전하였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조정과 민간에서 크게 놀래었다. 임금이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문의하였으나 두려워하고 정신없어 대답할 바를 몰랐다. 경림군(慶林君) 김명원과 병조 판서 이항복이, “지금의 계책으로는 오직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를 시켜야만 됩니다.” 하였다.임금은 그 말에 따라서 이순신의 벼슬을 도로 제수하여 삼도 수군 통제사에 임명하였다. 이때 순신은 진주를 지나서 서쪽으로 구례를 향하다가 적선이 이미 나루 어귀에 정박하여 있는 것을 보고 곡성을 지나서 서해로 향하여 갔다. 그때 배설이 열 두 척 병선으로 물러나 진도 벽파정(碧波亭)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순신이 그 곳으로 달려갔다.
《일월록》○ 8월에 적선이 악양(岳陽)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영남 앞바다 5, 6십 리에 배가 꽉 차서 바라보니 바다가 없는 듯하였다. 9월에 수가(秀家)가 섬진강(蟾津江)을 경유하여 한산에 들어와서 먼저 천여 척 배로 서해로 향하였다.
《일월록》○ 9월에 적의 괴수 뇌도수(耒島守)가 병선 수백 척을 거느리고 먼저 진도에 도착하였는데, 이순신은 명량(
鳴梁)에 머물며 진을 치고 피난선 백여척을 모아서 가짜로 성세를 이루었다. 적이 이르니 순신은 거짓으로 싸우지 않는 것처럼 하였다. 적은 우리 군사의 형세가 약한 것을 보고 다투어 와서 덮쳐 둘러싸고 바싹 가까이 와서 싸웠다. 갑자기 장군의 배에서 태평소를 불고 깃발이 일제히 일어나며, 바람을 따라 불을 놓으니 불이 적의 여러 배에 옮겨 붙었다. 순신은 드디어 이긴 기세를 타고 공격하니 죽는 자가 삼대 쓰러지듯 하였다.먼저 뇌도수의 머리를 베어서 돛대 위에 걸어 놓으니 장졸들은 용기를 뽐내고 의기가 백배나 되어 달아나는 자를 쫓아서 수백여 명을 베어 죽였는데,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셀 수없이 많았다. 적군은 겨우 십여 척으로 도망갔고 우리 배는 모두 탈이 없었다. 그 뒤에 적이 싸움을 말할 때마다 반드시 명량(울돌목) 전투를 말하였다.
《일월록》 《조야기문》에는 적장이 마다시(馬多時)라고 기록되었다.○ 처음에 순신이 조정의 명을 받고 단기로 달려서 회령포(會寧浦)에 도착하니 그때는 바로 새로 패전한 뒤인지라 전선과 기계가 전혀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도중에 경상 수사 배설을 만났는데 배설이 거느린 전선은 다만 8척 뿐이었고 또 녹도(鹿島)에서 전함 한 척을 얻었다. 배설이, “지금은 일이 급하니 배를 버리고 뭍에 올라서 호남 군진에 의탁하여 싸움에 조력하여 공을 세우는 것이 낫다.” 하였으나, 순신이 듣지 않았는데, 배설은 과연 배를 버리고 가버렸다. 순신이 전라 우수사 김억추(金億秋)를 불러서 전함을 수습하게 하고 약속하기를, “우리들이 함께 왕명을 받았으니 의리상 마땅히 생사를 같이 해야 될 것이다.나라 일이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 한 번 죽는 것을 아까워 하겠는가, 다만 충의에 죽는다면 죽어도 영광일 것이다.” 하였다. 이때 경상도와 전라도가 모두 적의 소굴이 되어서 행장은 육로에 있었고 의지는 수로에 있었다. 수군이 탕진(蕩盡)된 뒤에 순신은 일어나서 홀로 병들고 쇠잔한 남은 군사로 열 세 척의 전선을 거느리고 벽파정 앞바다에서 머뭇거리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다. 어느 날 갑자기 군중에 영을 내려, “오늘 밤에 적들이 반드시 우리를 습격할 것이니 각기 군사를 정돈하고 엄중히 대비하라.” 하였는데, 그날 밤에 적들이 과연 군사를 몰래 거느리고 오니 순신은 모든 군사들에게 움직이지 말도록 하였다.이때 달은 서산에 걸려 산그림자가 바다에 비쳐 절반이 약간 그늘져 있었는데 적선이 그늘져 컴컴한 속으로 와서 우리 배에 접근하려 하였다. 이때 증군에서 화포를 쏘면서 함성을 지르자 모든 배들이 따라 응하니 적군은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알고 일제히 조총을 쏘니 소리가 바다에 진동하였다. 순신은 싸움을 더욱 힘차게 독려하니 적군이 드디어 감히 침범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 순신이 군사를 돌려서 우수영 명량 앞바다에 있는데 날이 밝아오자 적선 5, 6백 척이 바다를 가리우고 왔다. 적의 장수 마다시(馬多時)는 본래 수전을 잘한다는 소문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다 걱정하고 두려워하였다. 그때 호남 백성들이 배를 타고 피난가던 자가 모두 진 아래 모여서 순신을 의지하여 생명을 보전하고 있었다. 순신은 먼저 피난선에 명령하여 차례로 물러나서 차례로 늘어서 진을 쳐서 가짜 군사를 만들어 바다 가운데를 들락날락하게 하고, 자신은 전함을 거느리고 적군 앞을 가로막고 진하니 깃발을 단 층각배가 바다 위에 가득히 찼으므로 우리 군사가 보고 얼굴빛이 변하였다.그때 아침 조수가 막 밀려 나가는 중이라 항구에는 물결이 사나웠다. 거제 현령 안위(安衛)가 조수를 타고 내려갔는데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배가 화살처럼 나아갔다. 바로 적진 앞에서 충돌하니 적은 사면으로 에워쌌으나 안위는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하여 싸웠다.
○ 순신은 모든 군사를 독려하여 안위의 뒤를 잇대어서 먼저 적선 삼십 일 척을 격파하니 적이 조금 퇴각하였다. 순신은 돛대를 치며 군사를 맹세하고 이긴 기세를 타고 전진하였다. 적은 죽도록 대들었으나 감히 대적하지 못하고 군사를 다 몰아서 도망쳤다.순신은 영화도(瑩花島)에 진을 옮겼다. 그때 한산도 여러 장수가 각각 도망쳐 숨어서 본도 피난민들과 함께 여러 섬에 도망가 있었다. 순신은 날마다 장교들을 보내어 여러 섬에 알리고, 흩어졌던 군사를 불러 모아서 전함을 만들고 기계를 준비하여 소금을 구워 팔아서 두 달 동안에 수만여 섬의 곡식을 얻었으며 장수와 군사들이 구름처럼 모여드니 군사의 형세가 다시 떨쳐졌다. 무술년 2월 17일에 고금도(古今島)로 나아가서 진을 쳤다.
○ 그때 배설은 교만하고 패려하여 버릇을 고치지 않았으며 제 마음대로 군사를 버리고 도망하여 성주 본 집으로 돌아갔다. 순신이 사유를 갖추어 장계를 올렸더니 뒤에 잡혀서 죽임을 당하였다.
《일월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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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생략...
“우리들은 함께 임금의 명을 받았으니, 의리상 사생을 함께 하여야 할 것이다. 나라 일이 이에 이르렀으니 한번 죽기를 어찌 아낄 것이냐? 오직 충의에 죽는다면 죽어도 영광이 될 것이다.”
하니, 모든 장수가 감복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때에 이순신이 나라가 어지러운 때에 일어나서 두 번째 변방을 지키라는 명을 받았는데, 영남과 호남의 모든 군영이 다 왜적의 보금자리가 되어 행장은 육로에서, 의지(義智)는 수로(水路)에 있으면서 계획을 세우고 정예한 군졸을 비축하여 우리의 흠이 생기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순신이 혼자서 쇠잔한 군사로 13척의 전선(戰船)을 거느리고 벽파정(碧波亭) 앞 바다에 주둔하고 있으니, 보는 사람이 위태롭게 여기되 밤낮으로 엄히 경계하여 갑옷을 벗은 적이 없었다. 어느 날 밤에 달빛이 낮과 같은데 이순신이 갑옷 입은 채로 북을 베고 누웠다가 문득 일어나 앉아서 옆에 있는 사람을 불러 소주를 가져오라 하여 한 잔을 마시고 모든 장수를 앞에 불러놓고 말하기를,
“오늘밤 달빛이 매우 밝다. 왜적의 꾀가 간사스러움이 많아서 달이 없을 때라면 본래 우리를 습격하겠지만 달이 밝아도 또한 와서 습격할 듯하니, 경비를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호각을 불어 모든 배에 닻을 올리게 하고 또 모든 배에 전령하여 척후를 세우고 변을 기다리게 하였다. 얼마 후에 초탐선(哨探船)이 왜적이 온다고 급히 보고하니 이순신이 호령하여 움직이지 말고 조용히 기다리게 하였다. 이때에 달이 서산에 걸려 산그림자가 바다에 기울어 반쪽은 어두컴컴한데, 무수한 적석이 컴컴한 곳을 따라와서 우리 배에 접근하려 하였다. 이에 중군(中軍)이 화포를 놓고 고함을 지르자 모든 배가 호응하니 적이 방비가 있음을 알고 일시에 조총을 쏘아대어 소리가 바다를 진동하였다. 이순신이 더욱 급하게 싸움을 독려하니 적이 드디어 감히 범하지 못하고 물러 달아나니 여러 장수가 모두 탄복하여 귀신같이 여겼고 이순신 또한 우수영(右水營) 명량(
鳴梁) 바다 가운데로 회군하였다.
날이 밝아서 바라보니 적선 5~6백 척이 바다를 덮어 올라왔다. 그 장수 마다시(馬多時)는 원래 수전(水戰)을 잘한다고 일컫는 자로서 바야흐로 서해(西海)를 침범하고자 하여 그 세력이 지극히 크니,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이순신은 적은 수효가 많고 우리는 적어서 힘으로 싸워 이기기는 어려우므로 꾀로써 격파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일찍이 배를 타고 피난하던 호남 지방 사람들이 모두 순신에게 의지하여 목숨을 보전하고 있었는데 이순신은 피란온 배로 하여금 차례차례로 물러가서 늘어세워 포진하게 하여 의병(疑兵)을 만들어 바다 가운데를 왔다 갔다 하게 하고, 이순신은 스스로 전함을 거느리고 앞장서서 바로 나오니, 적은 이순신이 배를 정비하여 나오는 것을 보고, 각자 노를 저으며 북을 울리고 소라를 불면서 용기를 내어 곧장 나오는데 깃발과 망대(望臺)가 바다 가운데 가득하니, 우리 군사가 보고 실색하였다.
이때에 아침 조수가 바야흐로 물러갈 때여서 항구에 물살이 거세었다. 거제 현령(巨濟縣令) 안위(安衛)가 조수를 따라 내려가는데 바람이 빨라 배가 쏜살같이 달려 곧바로 적의 앞을 충돌하니, 적이 사면으로 에워싸므로 안위가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하였으나 빠져나올 수 없었다. 이순신이 모든 배를 독려하여 잇달아 진격하여 먼저 적선 31척을 격파하니 적이 조금 퇴각하였다. 이순신이 돛대를 치면서 여러 사람에게 맹세하고 이긴 기세를 타서 진격하니 적이 감히 당해내지 못하고 군사를 이끌고 도망하므로 이순신 또한 진을 보화도(寶花島)로 옮겼다.
이하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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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0일 (계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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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반사 이시발이 서계로 진 유격과 소서행장의 접촉에 대하여 아뢰다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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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생략...
‘왜적이 당초 나올 때에는 도합 35만 명이었다. 35만 명을 여덟 갈래로 나누어 가지고 들어와서 각각 한 도씩을 점령하였다. 지금 남아 있는 숫자도 25만 명인데 좌·우도에 25진영을 설치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중간생략...
이상은 홍 통사(洪通事)와의 문답입니다.【홍 통사는 절강 사람으로서 만력(萬曆) 을해년에 포로가 되었다.】
각 진영의 왜장 성명을 알리기 위해 모두 그 나라의 향담(鄕談)에 따라 글자를 맞추어 적겠습니다.
죽도(竹島)에는 강강노가미(江江老加未),
감동포(甘同浦)에는 야랑가와(也郞加臥),
가덕(加德)에는 지범지(之凡之),
안골포(安骨浦)에는 달삼부로(達三部老),(月三郞),
웅포(熊浦)에는 행장(行長),
제포(薺浦)에는 평의지(平義智),
거제(巨濟)에는 아원로가미(阿元老可未),
또 거제에는 표간곤로가미(豹干昆老加未),
영등포(永登浦)에는 사야모은로다유우(沙也毛隱老多有雨),
기장(機張)에는 가인로가미(可仁老加未),
동래(東萊)에는 공가와마다시지(共加臥馬多時之),
임랑포(林郞浦)에는 다가화시구로(多加和時舊老),
서생포(西生浦)에는 청정(淸正),
부산(釜山)에는 아긴노산소우(阿緊奴山小于),
울산(蔚山)에는 모리유긴로가미(毛里有緊老加未)입니다.
이하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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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잼있는 소설을 읽은 것처럼 그렇습니다.
넘 길어 담에 또 들려야 것씀돠
근디 팩트니 뭐니 그 영어가 섞여서 좀 그렇습니다.
우리말이 좋은디 ...
팩트으니 이런 콩글리쉬는...
그 도루구찌 학자님들과 ...비판가 젊은이들 특유의 말투를 숭내낸 비꼬는 형식이라 보십시요...
저도 콩글리쉬 싫어합니다.
많이도 알고 있군요!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자세한 설명에 감사 드립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지리적이점을 이용했지요,,좁은해협이 밀물과 썰물이 교대로 교차한 지역에서 밀물때 방어했지요,,쇠줄을 바다에 깔아 밀물에 밀려오는 적선을 중간에 차단하고,,,, 쇠줄앞에 밀려온 왜선을 박살내고...밀물이 썰물이 되는시각이 한 2시간정도,,밀물이 썰물로 전환 싯점에 쇠줄을 걷으니,,,앞에있는 왜선은 썰물에 뒤로 밀리고,,뒤에있는 왜선은 쇠줄을 걷으니 앞으로 밀리고,,왜선들은 앞에서 뒤로 쏠리고 뒤에서 앞으로 쏠리고 자기들끼리 치고박고 뒤엉킬때,,그 쪽에다가 포탄을 퍼부으니,,포탄한발이 왜선한척씩 엎어버리니,,명량물결이 밀물과 썰물이 만나서 회오리 치듯이 뱅뱅도니,,,,조선수군포탄에 죽거나 회오리 바닷속으로 휘감겨
가라안고..............
글쎄요...?...난중일기엔 어떻게 묘사됐는진 몰라도...제가 본 위의 자료들만 봐도...
아침 썰물때 전투가 시작돼어...안위의 배가 썰물의 속도에 뒷바람까지 받아 쾌속으로 질주하여 적진으로 돌격했다 나오니...반대 같습니다.
또한 위 기록들을 보면 명량구(鳴梁口)라 하여...바다와 강이 만나는 항구지역을 의미하는 지역입니다.
고로, 이순신의 선단은...육지와 인접한 강 어귀와 바다가 만나는 지점이거나...항구지역에 포진했고...
왜노들의 선단은 외해(外海)에서 강 하구나 항구로 처 들어던 형국이요...
또한,수백척의 왜 선단들이...수십겹으로 이순신의 함대를 포위하고 저녘때까지 교대로 근접전을 시도했다니...
왜선들이 조류로 뒤엉킬 상황도 아니였다 보이고...일자로 서로 마주보면 치룬 전투는 아닐까 합니다.
쇠줄로 뭐시기한단 얘기는 한산대첩으로 알고 있고요...
아침썰물땐 이순신의 함대가 반대방향의 왜 선단으로 돌격해 30여척을 박살냈고...
서서히 밀물로 바뀔때쯤 왜선들이 패주하는 바람에...왜선들은 속도를 내지 못하고
계속 이순신함대에 당한꼴이라 봅니다.
기록들을 보건데...바다에서 강 하구나 항구로 접근하는 왜선들을...
육지나 강 하구방향의 이순신 함대가 박살낸 정황일지 싶습니다.
역시, 그 장소는 한반도가 아닌... 중원 남부 홍콩이나 해남(하이난)정도로 보이고요...
왜놈들도 죽기 살기의 혈전였고...전투가 아침부터 저녘까지 지속됐는데...
결국 다 깨고 몇십척만 도주했다니...우리가 아는 종래의 그 기록들은...
왜놈들이 왜곡해 지들 덜 쪽팔리게 둔갑한 소설을 역사로 믿는 실수일까 합니다.
33척은 초전에 날라간 왜선숫자고...왜적들 배 오백여척이..아침부터 저녘까지 치뤄진 대 혈전 끝에...
다 개박살난 세계 해전사에 전무후무한 해전이 명량해전이란 반증입니다.
@궐한 쇠줄로 머시기 한 것은 명량대첩이 맞습니다 ... 한산도는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섬인지라 쇠줄을 걸만한 지형이 아닙니다.
@궐한 명량의 다른 말은 울돌목입니다... 어찌나 물살이 거센지... 바다가 울음소리를 낸다는 뜻입니다... 궐한님은 '입 구'자에 주목하시는 것 같은데... 이미 울돌목에 그 뜻이 숨어 있습니다...'목'은 특정한 특징을 가진 지형에 붙이는 보통명사입니다... 군대를 다녀온 분들은 '목진지'라는 단어를 기억하실 겁니다... 각설하고 울돌목은 전남 해남군과 진도군 사이의 해협이 맞습니다... 하이난성 운운하는 것은 동북공정론자들의 억지입니다.
@金子 예전 영화들엔 한산대첩으로도 나왔습니다....그나 저나 쇠줄 얘기 좀 역사기록에서 찾아 올리셨으면 합니다.
다 출처불명의 소설들 같은 얘기들이니...전 확인됀 역사기록만으로 가겠습니다.
@金子 명량(鳴梁)이란 단어 자체에 운다는 뜻이 있는데..궂이 물돌목이라 부연설명해야할 이유도 없습니다.
제가 찾아본 기록엔 울돌목이란 말이 거의 없고여....그냥 명량(鳴梁)하면 진동하는 소리가 울리는 일정구역이란 의미가 됩니다.
@궐한 원래 해남 진도 사람들은 그곳을 울돌목이라 불렀습니다... 순 우리말이죠... 그런데 님처럼 ... 먹물께나 든 양반들이 한자로 고쳐쓴 것이... 명량입니다.
그런데 일제 35년동안 일본놈들이 이순신 난중일기 보고 조작 할 가능성 있을까요 난중 일기 발견 되고 보아서면 오히려 없어 버리는 것이 일본놈 한테 더 유리 하지 않을까요 난 오히려 이순신이 명랑 대첩에서 상세한 전공 길고 하지 않았고 오히려 축소 전공 보고 했다 그렇게 보는데요 그 당시에 선조가 이순신 대하는 태도 라던지 그거 보고 이순신도 축소 전공 보고 가능성 더 높다고 보는데요
저도 그러리라고 봄니다..선조가 유명대신이나 장군들에대한 시기는 이루 말할수없었지요..노량전투에서 이순신장군님은 자결 결심으로 전투에 임하였다고 봄니다
난중일기는 비망록입니다... 기록으로는 남기되 공개하면 곤란한 군사기밀이 가득한 사서죠... 그런 책을 소설로 읽으면 장군께 누가 되는 매국행위입니다.
장기나 바둑을 둘 때... 하수들은 '수'를 보지만 고수들은 '판'을 봅니다.
@金子 매...매국...? ...억울하옵니더...!!!
기밀 문서니 공개하지도 연구하지도 말고 숨겨두자.,,.?...누구 좋으라고여..?
그 기밀 누설돼면 왜군들이 그 길로 또 처 들어온답니까...?
참 영혼도 순백이십니다.
@궐한 그런 식으로 글을 읽으니 사서가 소설이 되는 겁니다... 난중일기는 16세기 책입니다... 당시엔 극비문서로 분류했어야 할 사항이...오늘날에는 상식이 된 거죠.
@궐한 난중일기를 대충이라도 읽었다면... 이순신이 유독 포에 관심이 많았음을 눈치챘을 것입니다... 하지만 난중일기에는... 훈련상황은 상당부분 자세히 기술되었으나... 전승을 거두는데 함포의 역할은 별로 기술하지 않았죠... 이게 바로 극비사항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나를 순백이라고 칭찬하신데 대한 보답으로 순흑이라 평하겠습니다..
어제 신문에 어떤 학자라는 놈이... 난중일기를 평하려면 왕조실록과 비교하라고 하던데... 그놈의 생각은 틀렸습니다... 삼도수군통제사는 오늘의 해군참모총장입니다... 왕조실록이 오히려 난중일기를 참고했다고 봐야죠... 왕조실록은... 승정원일기, 비변사일지를 기본 사초로 편찬되었는데... 기초가 되는 난중일기를 왕조실록에 견준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역사는 비교하여 공통점을 찾아내야 정사로 인정돼지...하나의 기록만을 성경같이 편취함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역사서가 아닌...그냥 종교서적이 됍니다.
이순신 장군이... 마치 금자님 사유물인냥 금줄을 치십니다.
@궐한 임진,정유 양란에서... 남해안의 전황은 이순신의 기록이 더 정확할 수 있습니다... 그는 모든 정보가 모이는 삼도수군통제사였으니까요... 그 부분에서 실록과 이순신의 기록이 차이를 보인다면 어느 것이 왜곡되었다고 보십니까?
@金子 이순신 장군의 기록이 왜놈들 손을 안탓다 자신하십니까...?
천진난만하십니다.
@궐한 난중일기가 왜놈들의 손을 탔다구요?...그러니까 함부로 다루지 말라는 겁니다... 한번 휘어진 활을 또다시 비틀면,.. 활은 오조준도 불가능한... 이상한 물건이 되고 맙니다....... 너무 어렵나요?... 미안합니다. 제 글 재주가 이정도 밖에 안되서...
@金子 난중일기는 이미 조선사편수위원회에 의해 일제때 재 발행돼기도 했습니다.
난중일기 원본들도...삭재돼거나 수정한 부분들이 엄청 많다고 합니다.
뭔 훠어진활 또 훤단 애매모호한 비유신지여...?
님의 글이 어렵냐고여...?
비유하자면...한국말로 하면 됄걸...월남말로 하며 논점을 애매모호하게 만드시는 재주는 인정합니다.
이제야 말하는데 님의 글이 얼마나 허접한 줄 아십니까... 본문 중에... 330척의 왜선 중 전투에 참여한 적선은 130여척... 님은 그걸 문제 삼았습니다만... 뭐가 문제인가요?... 330척의 배 중에 해군은 130여척이고... 나머지 200여척 중 상당수는 육군을 실은 수송선이었고... 보급품을 실은 화물선이었습니다... 당연히 호위를 맡았던 해군이 괴멸하면... 육군을 실은 배는 도망을 쳐야지... 수송선이 전함과 싸웁니까?... 역사는 소설로 읽되 논픽션으로 읽어야 하는 겁니다.
330척이다..그 중 133척이다..란 설보다도...5-600척이다란 기록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33척의 왜선만이 명량에서 파괴됀거로 얘기하지만...기록들을 다 보면...아침에 치뤄진 초전에 이미31척이 박살났단 건데...저녘때까지 치뤄진 혈전에선 갸오 2척만 왜놈선박이 파괴됐단게 모순이니...
대부분의 기록들대로,..5-600척의 왜선중...저녘까지 치뤄진 혈전에서 단 몇십척만 살아 도망친거란 기록이 더 신빙성이 있단 글이였습니다.
이게 이순신장군의 업적을 왜곡폄하하는 글로 보이시는지여...?
논픽션이니 뭐니 배배꽈서 선문답하지 마시고..역사기록에 충실하셨으면 합니다.
자기가 좀 아는게 나오면 무개를 잡는 학자류들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