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동란의 고아
원제 : The Steel Helmet
다른제목 : 철모
1951년 미국영화
제작, 감독, 각본 : 사무엘 풀러
출연 : 진 에반스, 로버트 허튼, 스티브 브로디
제임스 에드워즈, 리처드 루, 윌리암 춘
6월 25일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아픈 상처를 남긴 날입니다. 1950년 일요일인 그날 예상치 못한 북한의 남침이 벌어졌고, 3년여에 이르는 길고 지루한 전쟁이 이어졌습니다. 한국인, 북한군, 미군, 중공군 등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갈라진 38선은 남북간의 대치가 더 감정적으로 격화되게 되었고, 70년이 더 지났지만 여전히 종전이 아닌 휴전상태이고 대치와 남북간 교류단절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끝나지 않은 전쟁.
이런 것을 예고라도 하듯, 아직 전투가 한창이던 1951년 미국의 독립영화의 아버지 사무엘 풀러 감독은 2편의 한국전쟁 소재 영화를 연달아 발표했습니다. '한국동란의 고아'라는 제목으로 개봉된 '철모(The Steel Helmet)' 그리고 '총검장착' 입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만든 영화로 '한국동란의 고아'의 엔딩에서 '이 이야기의 끝은 없다'라는 자막이 나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한 느낌입니다.
6.25 전쟁은 미군을 비롯한 16개국 우방이 참전한 대리전쟁으로 우리나라에는 치욕스런 전쟁이 되었습니다. 이후 많은 관련영화들이 나왔는데 우리나라에서 만든 영화와 미국의 영화는 그 방향이나 온도가 확실히 달랐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등장한 6.25 영화는 주로 반공정신을 강조하고 용감히 싸우고 전사한 한국군의 숭고한 희생을 다루고 있습니다. 반면 미국에서 등장한 많지 않은 한국전쟁 소재 영화는 남의 나라에 와서 대리전쟁을 치루는 미군들의 애환과 인간적인 면모, 각 군인들의 심리와 상황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뭔 나라의 어떤 전쟁인지는 크게 중요하게 부각되지 않습니다. '폭찹힐' '원한의 도곡리철교' '싸우는 젊은이들' '워 헌트' '낙동강전투 최후의 고지전' '장진호 전투'등 많은 영화에서 한국전쟁은 있었지만 한국은 없었고, 한국군도 없었습니다.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미국영화들이 생각외로 거의 개봉을 안한 것도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투철한 반공정신을 고취시킬만한 작품이 거의 없었으니까. 그나마 록 허드슨 주연의 '전송가' 정도가 한국이 어느정도 보여진 영화지요.
미군과 한국소년
사무엘 풀러 감독은 '한국동란의 고아'와 '총검장착'에서 모두 미국 보병들에게 노고를 돌리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가장 고생하고 가장 많이 죽어가는 보명, 일명 '땅개' 지구 반바퀴를 돌아야 하는 춥고 낯선 외지 한국에서 2차대전의 상흔이 가신지 불과 몇년 밖에 안 지난 상황에서 참전하여 대리전쟁을 치루는 그들의 안스러운 상황이 매우 안타까웠는지. '한국동란의 고아'는 1951년 2월에 공개가 되었는데 전쟁이 발발한지 불과 8개월밖에 안지난 상황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광속제작과 개봉이 된 셈이죠. 전쟁이 벌어지고 6개월뒤 7일만에 대본완성, 불과 10일간의 후다닥한 촬영과 빠른 편집이 이어지고 8개월뒤에 공개된 것이지요. 최초의 한국전쟁 영화입니다. 규모가 있는 전쟁영화처럼 보이지만 UCLA 학생 25명을 엑스트라로 동원하고 그들은 미군과 북한군을 모두 연기하며 마치 수많은 군인들이 몰여오는 느낌처럼 만들어졌습니다. 저예산 독립영화의 아버지 사무엘 풀러 다운 연출이지요. 불과 10만달러 제작비로 만든 전쟁영화입니다.
2차대전 노르망디 상륙작전 참전용사인 베테랑 군인 잭 병장(진 에반스)은 부대원들이 몰살당한 와중에 극적으로 살아남았고, 지나가던 한국 고아 소년에 의해서 묶인 손이 풀릴 수 있었습니다. 잭은 그 꼬마를 불발탄을 의미하는 숏라운드(short round) 라고 부릅니다. 중공군들에게 부모를 모두 잃은 꼬마는 잭과 함께 가기를 원하고 잭은 그 소년과 함께 동행하고 그러던 중 흑인 위생병 톰슨을 만나서 셋이 함께 동행합니다.
백인병사, 한국소년, 흑인위생병
기묘한 3인의 동행
대머리인 것을 고민하는 사병
이들 3인은 드리스콜 이라는 장교가 이끄는 한 부대를 만나게 되고 경험이 적은 사병들 위주로 구성된 그 부대이기 때문에 드리스콜은 베테랑인 잭에게 장안사 절을 안내해달라는 부탁을 하게 되고 잭의 안내로 그들은 장안사에 도착합니다. 장안사에는 북한 공산당 소좌가 혼자 숨어 있었고, 이 사실을 모르던 부대는 대원을 희생시키기도 하지만 결국 잭은 그를 체포합니다. 포로가 된 소좌는 흑인인 톰슨과 일본계 미국인 타나카 등을 백인의 차별을 부각시키며 회유하려고 하지만 실패합니다. 밖에는 수많은 적군들이 밀려오고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집니다.
다른 한국전쟁 소재 영화들처럼 이 작품도 미군 한명 한명에 대한 특징과 사연들을 비중있게 다룹니다. 죽은 신부가 선물한 미니오르간을 갖고 다니는 병사, 대머리라서 고민하는 병사, 양심적 병역거부자였다가 참전하게 된 병사, 일본계 미국교포 2세로 참전하게 된 병사, 흑인 위생병 등, 주인공 잭은 유능한 베테랑 군인으로 6개월 단기 코스로 장교가 되어 지휘관이 된 드리스콜과 많이 마찰을 겪는 내용이 나옵니다. 철저히 계급과 명령에 의해서 움직이는 군대의 특징상 나이나 경험보다 계급이 우선시 될 수 밖에 없고, 산전수전 다 겪은 잭은 자신보다 풋내기지만 계급은 높은 드리스콜이 못마땅하지요. 그리고 포로가 된 북한 장교는 오래도록 차별을 받아온 미국사회의 흑인인 위생병을 회유하고, 백인들의 동양인 차별을 이야기하며 일본계 병사를 회유하면서 백인들의 타인종 차별에 대한 내용을 부각시킵니다. 사무엘 풀러 감독은 이렇게 당시 미국내에서 사회적 약자나 차별받는 계층을 대상으로 그런 그들이 미국의 군인이 되어 기꺼이 희생을 마다 않는 부분을 부각시키며 이런 평범한 보병들에 대한 숭고함을 표하고 있습니다.
올드 랭 사인 버전 애국가를 부르는 장면
6.25 전쟁이 서울수복과 평양점령으로 승승장구하며 북진하고 있을때 중공군의 개입이 어느 정도 예상되었음에도 중국을 너무 얕보다가 기습을 당한 경우인데, 중국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에게 완전히 밀린 약소국처럼 느껴질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병력과 비교할 수준이 아니지요. 그러나 인구가 많은 나라답게 '인해전술'이라는 정말 유일무이한 전법을 들고 나올 줄은 생각을 못했겠죠. 이 영화는 중공군의 개입이 이루어진 시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1950년 10월 이후에 쓰여진 각본이라는 걸 알 수 있고, 빨라야 1950년 11월, 12월에야 촬영했을텐데, 편집, 후반작업까지 다 마치고 51년 2월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저예산 독립영화 감독인 사무엘 풀러의 역량이 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급조하여 제작된 영화임에도 상당한 완성도와 깊이가 있고, 전투장면도 제법 탄탄합니다. 단 한국에 대한 고증이나 그런것을 할 시간이 없었고, 유니버셜 스튜디오와 LA의 공원에서 촬영이 이루어졌습니다.
총알을 맞은 철모를 클로즈업하여 타이틀 자막이 등장하고 그게 끝나자 철모가 움직이며 주인공 잭의 모습이 드러나는 오프닝 장면부터가 범상치 않을 정도로 사무엘 풀러는 연출에 감각이 있는 인물입니다. 극중 인상적인 장면은 병사가 올드 랭 사인을 연주하는데 한국 꼬마가 그 음악에 맞추어 과거 버전 애국가를 부르는 장면입니다. 미국병사들이 올드 랭 사인을 어떻게 아느냐고 묻자 꼬마는 그 노래를 대한민국 국가로 알고 있어서 올드 어쩌구.. 라는 제목에 어리둥절 하는 모습입니다.
한국인 고아 소년으로 등장한 아역 배우는 윌리암 춘 이라는 미국태생 소년인데 영화속에서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는 설정은 좀 현실감이 없습니다. 당시 전쟁고아 한국소년중 영어를 그렇게 유창하게 할 수 있는 소년이 당연히 없었을텐데. 오히려 '같이 갑시다'라는 한국 문장을 어색하게 발음합니다. 단 올드 랭 사인에 맞춘 애국가를 부를때는 비교적 그럴싸한 발음입니다.
북한 소좌를 사로잡은 미군들
'우리는 같은 눈을 가졌어, 그리고 백인들은
우리 같은 눈을 싫어해'
일본계 미국인을 같은 동양인이라는 점을 이용해
회유하는 북한 장교
부처님이 보호하사
한국절에 있는 인자한 부처님 불상과는
너무나 다른 낯설 불상의 모습
'철모'라는 제목이 영화의 내용에 가장 합당한데 한국전쟁 영화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한국동란의 고아'라는 제목으로 개봉을 했습니다. 1954년에 국내에 개봉했으니 휴전협정 이후에 개봉된 작품이고, 역사적으로 이 영화는 세계 최초의 한국전쟁 소재의 극영화가 되었습니다. 사무엘 풀러는 불과 몇달뒤에 또 한 편의 한국전쟁 소재 영화인 '총검장착'을 발표하여 휴전협정 이전에 이미 두 편의 한국전쟁 소재 영화를 완성하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우리나라와 연관이 많은 감독이 되었지만 우리나라 극장에서 개봉한 사무엘 풀러 영화는 몇 편 안됩니다. 그 중 한편이 바로 이 영화였던 것입니다.
ps1 : 주인공 잭은 시가광으로 등장하는데 사무엘 풀러 감독이 실제 시가를 늘 입에 달고 사는 인물로 유명합니다.
ps2 : 잭을 연기한 진 에반스는 이어지는 영화 '총검장착'에서도 주연으로 등장합니다. 잭 캐릭터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ps3 : 1944년에 만들어진, 즉 태평양 전쟁 종료 전에 만들어진 '동경상공 30초' 라는 영화에서는 미국이 진주만 공습의 보복으로 동경공습을 했고, 이후 중국인들의 도움으로 탈출하는 내용인데 불과 몇년 지나지 않아서 중공군을 적으로 전쟁을 치루고 일본을 병참기지로 활용하게 되니 참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라는 말이 실감나는 비정한 역사입니다.
ps4 : 한국인 고아소년을 숏 라운드(Short Round) 라고 부르는데 그 이름은 '인디아나 존스'에서 베트남 소년의 이름으로 사용됩니다. 이런 걸 보면 스티븐 스필버그는 은근 재활용의 귀재지요. '레이더스'에서 굉장히 기발하게 느껴지던 장면들이 1959년 고전 '지저탐험'이나 고전 복싱영화 '육체와 영혼'에서 따온 것들이기도 하니.
ps5 : 잭이 하는 대사가 인상적인데 그가 존경하던 어느 장교의 대사를 인용하며 말합니다. '지금 이곳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 이미 죽은 사람들과 앞으로 죽을 사람들' 이 대사 하나가 전쟁에 대한 그야말로 가장 적나라하고 현실적인 진단이지요. 영웅놀이가 아닌 전쟁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것인지를 잘 표현한 대사입니다.
[출처] 한국동란의 고아/철모(The Steel Helmet, 51년) 세계 최초 한국전쟁 영화|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