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개혁에서 가장 깊이 메스를 들이대야 할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배 문제입니다. 오늘은 부득이 이 무거운 주제를 놓고 다시 한 번 생각할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근래 우리는 명X교회를 통하여 또다시 맥이 빠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도대체 한국교회는 개혁되기는 커녕 더욱 깊은 타락의 늪으로 빠져들기만하여 갈길은 멀고 날은 저물고 있습니다.
1. 예배란 무엇인가?
우선 예배를 정의하기 전에 번역상의 문제를 지적하겠습니다. 영어 성경을 기준으로 보면 다음 세가지 용어가 한글 성경에는 '예배'로 번역되어 있습니다(한글 성경에는 의도적인지 구분하지 않고 있습니다).
① worship
② minister
③ service
예배라는 용어는 사복음서에는 요한복음에만 써졌는데 여기서의 예배는 현대 예배당에서 이루어지는 예배의전과는 전혀 다르며 구약의 제사를 직접적으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Worship ;
요한복음 4장(야곱의 우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예수님이 직접 예배라는 용어를 언급합니다. 여기서의 예배는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구약적 제사를 말합니다. 구약의 제사 행위는 예배하려는 사람-제사장-특정장소(성막 또는 성서 또는 기타) - 하나님을 향해서 라는 요소가 있어야 예배가 성립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배라는 단어는 구약 제사를 뜻합니다. 특정 장소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글자 그대로 엎드려 절하는 형태입니다.
minister ;
구약 제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요소 가운데 하나는 제사의 의전을 담당할 특별한 봉사직의 수행인이 필요합니다. 구약 제사는 성막이나 성전등에서 제사장들이 이것을 전문적으로 담당했고 이들이 하는 행위를 minister라고 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간자 역할을 얘기합니다. 즉, 이 minister을 하나님께로 향하여 하는 성직자 고유의 행위입니다.
사복음서에서 이것을 사용한 구절이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태복음 20장 28절)
Even as the Son of man came not to be ministered unto, but to minister, and give his life a ransome for many.
이는 매우 의미 심장한 구절인데 예수님이 인간들에게 예배를 받는 대상이 되고자 하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목숨을 제사의 제물로 바친다는 매우 경악할 만한 문구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예수님을 예배(제사)의 대상으로 여기려 한다면 이는 정면으로 예수님의 의도를 거스른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은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입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더구나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히브리서 7장 27절)
여기서 보면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단번에 드린 대속의 가치가 완전히 minister를 종료시켜 버렸음을 우리에게 알립니다. 이제 구약적 의미의 minister는 예수께서 단번에 드림으로써 제사나 의례를 종료시켰음을 말씀해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그것이 종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minister의 의미를 무위로 돌려버린다면 그것이 곧 십자가의 의미를 욕되게 하는 매우 불충한 일입니다. 특히 목사들을 미니스터라고 하는데 혹여 목사님들 중에 이 미니스터를 하시는 분이 있다면 잘 생각하셔야 될 일입니다.
service ;
앞의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적 예배와 로마서 12장의 1절은 맛닿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야 맞았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라. 이것이 너희의 행할 도리에 맞는 봉사다(로마서 12장 1절)
이것을 두루뭉실하게 성경에서는 '도리에 맞는 봉사' 부분을 '영적 예배'라고 변개 번역을 하였습니다. 영어 원문에 보면reasonable service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같은 저의 주장이 맞는 것은 로마서 12장은 성도가 이웃들과의 관계, 지체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에 대해서 중점을 두고 서술이 연속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록자는 이웃들을 '섬김'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으며 우리가 참 제사(예배)를 하려면 이웃을 섬기는 것이 곧 도리에 맞는 것이다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혀 '영적예배'라고 번역되기에는 의도가 애매한 부분이 있습니다.
사람이 특정 장소에 찾아가서 제사장이 집전을 하고 희생제물을 불사르는 등의 제사의식 행위(제물 + 행위)에서 제물 대신 영으로, 요식행위 대신 진리로 예배해야 하는데 로마서 기록자에 따르면 참된 예배란 곧 이웃과 지체들을 마음 깊이 진실함으로 섬기는 자세가 곧 도리에 맞는 서비스(봉사)이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요한복음 4장 예배 선언의 핵심을 보면 여자가 어느 장소를 찾아가야 되는지에 대한 질문에 따라 예수님은 "진실함으로 이웃을 섬기는 예배자들을 하나님께서 찾아다니실 것이다"라는 놀라운 예배의 대전환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인간이 찾아가는 예배에서 하나님이 진실한 예배자들을 찾아다니는 예배방법으로 바뀜).
그러나 아직 우리는 이것을 깨닫지 못하여 야곱의 우물가의 여인처럼 특정 예배당에 찾아가서 예수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예배라고 착각하고 계속 짝퉁 예배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아아.......성경은 왜 가르치고 읽는 것일까요?
이 단락을 간략 정리하자면(예배라고 번역된 구절들)
Service : 일상적 삶에서 복종적 경향으로 하나님의 율법이나 원하심에 따르는 것
Worship : 특정인 또는 하나님을 향한 숭배 또는 경배(주로 거의 개인적으로 행함)
Minister : 성막이나 성소등의 특정 장소에서 여호화 하나님께 하는 제사장의 봉사적 의례를 뜻합니다.
2.예배의 기원
인류 예배의 기원은 여러분이 모두 알다시피 아벨과 가인으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선 아벨의 예배는 예수님께서 의로운 희생자라고 지칭하고 있는대(마태복음 23장 35절)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아벨은 믿음으로 가인보다 뛰어난 예배를 드렸다고 부연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예배자를 통해 두가지 예배 방식과 만납니다. 하나는 믿음의 제사인 아벨이요 다른 하나는 물음표의 가인의 예배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것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달고 있지 않습니다. 왜 의로운 예배인지, 가인이 무엇을 잘못했는지에 대해 자세히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선 아벨은 양떼를 길러서 먹고 살았는데 무슨 이유인지 양의 첫 새끼를 가져와 예배(제사)를 하게됩니다. 그리고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예배합니다.
이 장면에서 주의깊게 볼 구절은 4정 7절에 힌트가 있습니다. 가인이 (제사할때)탐심으로 인해 부끄러워 하나님을 바로 볼 수 없다고 표현하고 이것을 하나님은 꾸짖고 있습니다.
3. 잘못된 짐승의 예배
짐승은 성경 이곳 저곳에서 출몰합니다. 창세기부터 짐승의 존재가 나오고, 계시록에는 이 짐승이 잡혀서 영원히 타는 불못에 던져집니다. 이 짐승은 단순한 가축이나 동물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특정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욕심(탐심)에 물든 존재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가인은 탐심에 물든 짐승의 예배를 했습니다. 짐승이란 이성이 없는 존재며 먹을것에 소원이 있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 즉 농산물로 예배를 하였습니다. 가인은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곡식들을 하나님 앞에 가져온 것이죠. 그가 땀흘려 씨를 뿌리고 가꾸고 수확한 곡식입니다. 얼마나 고생해서 농사를 지었을까요? 그리고 이것에 감사하며 내년에는 더 배불리 먹을 수 있는 풍요로운 농사를 꿈꾸며 하나님께 이것을 가져와 예배하였습니다.
사람의 죄는 '먹는' 문제 때문에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죄는 짐승중에 가장 간교한 '뱀'이 인간의 탐심을 자극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눈이 밝아질 것이라고 꼬드겼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것을 '먹었습니다.' 먹지 말라고 한것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결국 그것을 먹었습니다.
이 짐승적 속성에 대해서 아벨은 통탄하며, 인간이 그렇게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고백으로 양의 첫 새끼를 가져와 대신 죽게하고 비참한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 앞에 드러내 놓습니다. 하나님은 그 의로운 예배에 대해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이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의 부모 아담과 하와가 '먹는 탐욕'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숙명에는 둔감하고 오히려 자신의 배를 두둑히 채워줄 농산물을 하나님 앞에 가져와 예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분노했습니다.
4.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경고
가인의 예배가 무엇이 잘못인지 깨달아야 하지만 현대의 예배는 예수님의 의도와는 다르게 예수님이 하지 말라고 했던 바로 그것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예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짐승의 예배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며 예배당에서 오늘은 어떤 복을 받을 수 있을까를 (우상)하나님에게 구하고 있습니다.
짐승의 특징은 먹을것이 빼앗길 위협을 받으면 몹시 분노하여 이를 드러내고 싸웁니다. 보통때는 그것이 드러나지 않지만 먹을것 앞에서 짐승적 속성을 가진 사람은 금방 표변합니다. 자신의 이익이 위협을 받으면 어제는 이웃이였다가도 오늘은 원수가 됩니다. 어제는 형제지간 이었지만 오늘은 그 형제를 살인하는 살인자로 변합니다.
그같은 특성을 우리는 가인을 통하여 DNA로 전달받은 것입니다. 이 질긴 짐승의 속성이 인간의 DNA속 깊은 곳에 감추어져 면면히 이어내려오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자신의 안전, 먹을것을 위하여 하나님께 비는 행위는 곧 짐승의 예배입니다. 그리고 이 구절 뒤에 예수님께서는 확실히 못박아 다음 구절을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이방인들이 하는 짓이다. 가장 우선적으로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정의를 찾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염려와 괴로움은 벗어버리고 하나님 나라를 먼저 찾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여러분이여 오늘날 우리들은 이 구절의 가르침과 정확히 반대로 하고 있지는 않고 있는지요. 하나님 나라는 뒷전으로 미뤄두고 짝퉁교회에 앉아 짐승의 예배에 전념하고 있는것은 아닙니까? 얼마나 경악할 노릇인가요?
교회가 무엇인지
예배가 무엇인지
지금 하나님나라를 가장 우선적으로 찾고 있는지
이웃을 섬김으로써 진실한 예배에 노력하고 있는지
혹시 자신이 짐승의 예배에 빠져들지 않았는지
또는 형제나 이웃이 짐승의 예배의 결과로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고 있지 않은지 주위를 돌아보야아 하겠습니다.
첫댓글 로마가 국교화하면서 진리를 완전히 가로막고 섰습니다. 암흑기를 거쳐서 개혁이 되었다곤 하지만 주류기독교는 여전히 로마카톨릭과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신부 - 목사
미사 - 개신교식 종교행사
강론 - 설교
학습자 - 평신도
결국 그게 그건가?
@iDeaRush 종교지도자가 신도들을 지배하는 중세암흑기의 종교권력이 지금도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는게 한심한 일이지요
기독교는 세상의 모든 잡종교와 동일한 형태를 유지하면서 진리를 향한 발걸음은 중단되어 있습니다. 더이상 가망이 없어보입니다.
짐승을 확장적으로 해석한 부분은 흥미롭군요. 다만 아벨이 양을 길러서 고기를 먹고 살았다고 하면 오류일 듯 합니다. 노아의 홍수 이후라면 모를까 그 전에는 육식이 허락되지 않았으니까요. 아벨은 식용이 아닌 다른 용도로 양을 키운것이죠. 결국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기 위한 용도가 더 컷을 것입니다. 아벨의 이런 제사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혔던 것을 들음에서 출발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했을 것입니다. 카인은 그것을 무시하고 자신의 천연적인 노력의 산물로 피가없는 제사를 드렸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께서 직접 제시한 구원의 길과 무관한 카인의 제물은 받으실수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네, 아벨이 양을 먹고 살았다고 쓰지는 않았네요
대속제물은 분명한 예수님의 예표이고, 피흘림이 없이는 죄를 사함이 없는것은 제사의 기본 속성이죠.
신약적으로
자신이 이웃을 향해 삶의 산제사 한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고 간결한 예배의 정의지요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이 원하는 바는 엎드려 절하는 분위기를 가진 특정장소에서 성전예배형태를 선호한다는 점입니다. 종교지도자는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바로 이런 시스템이라야 목사 자신의 위치도 유지되고 돈이 들어오기 때문이죠.
그러기에 유대교의 향수를 되새기며
신종 율법을 양산해 믿는이들을
꽁꽁 묶어놓으려는 것일까요
@iDeaRush 변종유대교입니다.
시간뺏고 돈 바치고 이웃봉사 못하고 관념의 포로가 되어 진리에 눈이 멀어버리니 이보다 더 비참할 수가 있겠습니까?
다른 유해업소는 이정도까지는 해롭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진리에 무지한 다수의 신자와 진리를 가로막고 선 종교지도자와의 매우 적당한 관계속에서 이상한 종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양자간에 암묵적 합의에 의해 공생 아니 공멸관계가 되는 것이로군요
하나님나라 입구를 막아 자기도 안들어가고 남도 못들어가게하고
@iDeaRush 결국 외롭고 선량한 사람들 다수가 기독교 신자가 되면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버려, 진정한 진리의 생수를 맛보지 못하면서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갈등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원인이 잘못주입된 “예배”라는 용어의 관념입니다
목사나 종교지도자들은 자신의 직분 이전에 그리스도인의 양심으로 깊게 성찰하여 이문제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합니다.
http://bible.com/142/act.2.44-47.RNKSV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요한복음 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우와, 신도가 되고 난 후 들은 중 최고의 설교네요
감사합니다.
500원 내십시오. .....잇힝!
함께 동감을 하는 마음에 감사드립니다.^^
스크랩해갑니다~저희 모임에서 나눔하였던 예배의 개념과 일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