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한때 너무도 좋은 관계의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영적 대화의 한계를 느끼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작은 반갑고 즐겁지만, 끝은 씁쓸한 느낌입니다.
제가 그렇게 느낀다면 상대방도 그러하겠지요.
하지만 다 믿음을 가졌으니, 주님께서 우리들의 갈 길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어제는 6명에게 복생캠프를 권유했는데 다 손사래를 쳐서 이른바 ‘거절의 날’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때에 합당한 영혼들은 다 나아올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인도해 주실 것을 믿으며 실망한 마음을 주님께 내어드립니다.
오늘 새벽에 복생에 참여할 영혼들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부르며 크고 놀라운 은혜 받기를 기도하니 마음에 기쁨이 회복됩니다.
감사합니다.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흐릿한 제 영혼에 말씀의 초점이 맞추어져 진리를 선명하게 보게 하옵소서.
성령님이 아니시면 단 한 단어도 볼 수 없사오니,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23.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선포할지어다
24. 그의 영광을 모든 민족 중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중에 선포할지어다
25.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극진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26. 만국의 모든 신은 헛것이나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도다
27.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즐거움이 그의 처소에 있도다
28. 여러 나라의 종족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29.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제물을 들고 그 앞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30.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
31.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모든 나라 중에서는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 할지로다
32.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이 외치며 밭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33. 그리 할 때에 숲 속의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주께서 땅을 심판하러 오실 것임이로다
34.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35.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여 만국 가운데에서 건져내시고 모으사 우리로 주의 거룩한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광을 드높이게 하소서 할지어다
36.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하매 모든 백성이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양하였더라
(본문 주해)
23~33절 : 시편 96편 전체와 병행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와 통치와 심판을 노래하고 있다.
만국의 신은 헛것이지만 여호와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다스리며 결국 심판의 주가 되신다. 그러므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만국을 통치하고 계심을 찬양하는 것이다.
23~27절-- 24절의 ‘기이한 행적’은 출애굽과 관련되어 행하신 하나님의 기적들을 말한다.
그 하나님이 바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이며 구원의 하나님이신 것이다. 이에 비해 만국의 모든 신은 헛것이며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위대하신 왕이시다.
26절의 ‘하늘을 지으셨다’는 표현은 창조의 하나님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성도는 구원의 하나님, 창조의 하나님을 날마다 새 노래로 찬양해야 한다.
28~33절-- 만국의 족속들에게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리라고 초청한다.
만국의 족속들은 1차적으로 온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 그들에게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리고 감사의 예물을 가지고 예배하라는 말씀이다.
29절의 ‘아름답고 거룩한 것’은 직역하면 거룩한 옷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전 봉사자들이 입었던 예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세에 대한 말씀이다.
바로 영과 진리로 드려지는 예배가 되어야 함을 나타낸 것이다.
34~36절 : 시편 106편의 1절과 47~48절과 병행한다.
34절,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면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는 시편의 감사시에 반복되어 나오는 송축이다.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 곧 구원의 역사에 대한 송축이다.
36절에서 모든 백성이 레위인 찬양대의 찬양에 화답하여 ‘아멘’으로 응답한다.
(나의 묵상)
다윗이 언약궤를 안치하여 놓고 찬양을 하였다는 것을 지금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자가 볼 때에 다윗의 공로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로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앞에서 일어난 베레스 웃사 사건이 언약궤를 겸손히 제사장들로 메고 가게 하였다. 즉 여호와께서 레위인들을 도우심으로 언약궤를 옮길 수 있었다.
이러한 다윗의 언약궤 안치가 이루어진 것은 오직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긍휼이 무궁하심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보니 다윗의 언약궤 안치도 오직 하나님의 언약을 따른 은혜로 된 것이지 다윗의 공로가 아님을 안 것이다.
역대기 기자는 언약궤 안치를 기뻐하며 찬송하는 것을 통해 바벨론 포로에서 이렇게 돌아오게 된 것 역시 결코 자신들의 의로움이 아니라,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하심과 그 창조와 통치와 심판과 인자하심의 영원함을 찬양하는 것이다.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신 이유는 내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성령이 내 안에 오심으로 내가 하나님의 성전 곧 처소가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 계획도 하나님이 하신 것이며,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며 그 사실을 믿는 믿음을 주신 것도 성령을 통해 이루어 주신 것이니, 과연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신 주님의 인자하심과 긍휼의 무궁하심으로 주신 선물인 것이다.
복음생명 캠프를 통해 알게 된 십자가 복음의 은혜 가운데 ‘자기주장의지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 결과로 고백하는 것이 ‘모든 것, 주님께서 하셨습니다!’이다.
처음 이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회개했었다.
좋은 결과의 영광을 입으로 주님께로 돌렸지만, 속으로는 ‘그래도 2%는 내가.....’ 했던 자였기 때문이다. 캠프를 통해 이 고백에 대해 진심으로 동의하게 되었고, 이 고백을 진심으로 할 수 있음에 감사가 넘쳤다.
그런데 세월이 흐를수록 이 고백이 점점 깊어진다고 할까?
처음 고백이 거짓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때도 진심이었다.
그런데 창세전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 그 약속을 친히 이루시는 주님을 더 잘 알게 되니 ‘주님께서 하셨습니다!’ 라고 똑같은 고백을 하는데도, 그 무게가 다름을 느끼는 것이다.
가볍게 방방 뛰는 기쁨이 아니라,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와 기쁨을 가지고 그 고백을 하게 된 것이다.
이 고백이 얼마나 더 깊어질지 나는 알 수 없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34절)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이런 말씀은 그냥 후렴구처럼 넘길 수밖에 없다.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모르면 그냥 후렴구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는 것처럼.
이러한 진리를 깊이 깨닫게 하는 것이 ‘복음생명캠프’인데 사람들은 전이해의 신앙에 만족하여 더 이상 자라기를 원하지 않거나 안주하여 진리의 시간으로 나아오지 않는다.
너무 안타깝다.
방금도 한 명에게 권면했으나 역시 거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먼저 받은 이 은혜가 얼마나 귀하고 큰 기쁨인가를 알고 있으니 날마다 전하고 또 전한다.
(묵상 기도)
주님,
다윗의 언약궤 안치도,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옴도,
제가 복음의 나팔수가 된 것도
모든 것이 주님의 행하심입니다.
그 배경에는 끝없이 배반하는 저의 가증스러움과 끝없이 덮으시고 품어주시는 주님의 인자하심이 있습니다.
역대기 기자처럼 이것을 돌아보며
오늘도 주의 인자하심과 긍휼의 무궁하심을 찬양합니다.
성령님, 감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