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 전부터 가보고 싶던 섬이었다. 화면으로만 얼마나 보아 왔던가. 이번 기회에 섬도 둘러보고, 파도와 바닷새를 벗삼아 기분좋게 달리고 싶었다.
새벽 5시, 덕수궁 앞에서 90여 명(포항 50명)을 태운 대형 셔틀버스 2대가 묵호항으로 출발하였다. 모두들 다부진 인상에 깡마른 몸매 하며 운동화차림이라 한눈에 마라톤 매니아임을 알 수 있다. 간간이 안개가 낮게 드리운 영동고속도로를 3시간 남짓 바람같이 달려 강릉 남쪽으로 조금을 가니 묵호항이었다. 하루에 한 번 묵호와 울릉도간(161km)에 시속 70km의 쾌속 여객선이 운항하고 있었다.
울릉도 관광에 드는 기본 경비는 다음과 같았다.
묵호항 10시 출발 울릉도 12:30분 도착 45000원
울릉도 15시 출발 묵호항 15:30분 도착 45000원
서울 묵호간 셔틀버스비 17000원
숙박비 리조트 2인 1실 180000원(취사시설 없음)
된장찌개 6000원
맥주 1병 4000원
소주 1병 3000원
약 450만년 전에 화산이 폭발하여 생성된 오각형 모양의 울릉도, 만여 명의 주민들이 경관이 수려한 신비의 섬에서 청정 해산물을 채취하고 산나물, 약초를 재배해서 살아가고 있다.
도동항에 도착하자마자 구수한 된장찌개백반을 맛있게 먹어치우고 나서 곧 소형버스로 관광길에 올랐다. 파란 더덕밭이 어찌나 많은지 온섬이 상큼한 더덕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울릉도는 외곽도로가 완전히 개통되면 약 44km이다. 관광버스가 달리는 도로가 바로 마라톤 코스이다. 고개가 어찌나 높은지 모두들 비명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지른다. 저기가 반환점이라는 운전기사의 말에
“어휴! 내일 죽었구나”
하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화산 분화구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나리 분지에는 더덕과 약초가 드넓은 분지에 파랗게 깔려 있었다. 지상에 파라다이스가 있다면 바로 여기가 아닐까 싶다. 이곳 특산주 씨앗주와 마가목주가 어찌나 맛있었는지 모두들 감탄한다.
날씨는 잔뜩 찌푸려 있었고, 습도가 높고 구름의 모양이 선명하고 와일드하여 내일밤부터 태풍이 온다는 일기예보가 그럴듯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울릉도는 원래 우산국이라는 독립국이었는데, 신라 지증왕 때 이사부 장군이 정벌하여 신라에 귀속시킨 이래, 현재 경상북도 울릉군의 주도로, 주변에 관음도, 독도 등 많은 암초를 거느리고 있다.
울릉도에는 “3고(高), 3무(無), 5다(多)”라는 말이 있다.
3고...... 산(성인봉 해발 984m), 물가, 파도
3무...... 뱀, 도둑, 거지
5다...... 향나무, 미인, 물, 돌, 바람
특히, 육지에서 배로 모든 물자를 실어오기 때문에 물류 비용이 많이 들어 물가가 비싸다고 한다. 한 예로, 휘발류 1리터가 1728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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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내일의 일전을 염두에 두고 체력을 아끼는 듯했다. 나는 이것저것 주는 대로 다 받아먹다보니 배가 너무 부르다. 그래도 술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조태백인데 그냥 지나칠 수야 없지 않은가. 저녁 늦게 오징어물회랑 해삼물회를 안주삼아 쐬주 1병을 거뜬히 비우고 전복죽으로 마감을 하니 배가 복어배같이 빵빵하네.
간밤에 코고는 소리도 못 듣고 잠을 잘 잤다. 빗소리가 크게 들리고 테이프한 왼쪽 무릎에 간간이 통증이 느껴진다. 비가 많이 오려나 보다. 이건 노인 특유의 진단이다.
5시에 뷔페식 식사를 하고 집결지인 초등학교로 갔다. 비에 젖은 마라톤 현수막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동호회 텐트 하나 없고 KT&G(담배인삼공사) 현수막 하나만 외롭게 걸려 있다. 우리나라 제일 오지의 마라톤 출발지여서 그런지 너무나 썰렁하다. 제법 굵은 빗줄기가 우산을 거세게 두드린다. 쏟아지는 빗소리가 학교 교실 안에서도 웅장한 오케스트라 연주를 듣는 듯하다.
7시 출발이라 모두들 부지런히 준비한다. 비가 많이 오는지라 어제 관광한 것을 위안으로 삼고 방에서 그냥 죽치고 있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대충 둘러보니 100명도 안돼 보인다. 그런데 출발 시간이 다 되어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간밤에 쏟아진 폭우로 낙석이 심하여 매우 위험해서 도저히 대회 진행이 불가능하단다. 경찰서장과 군수님 등 관계 요인들이 총출동하여 대회 중지를 강력히 요구하고 나섰다. 10여 분간의 우여곡절끝에 코스를 안전한 곳으로 변경하여 5km, 10km, 하프만 뛰기로 했다. 부랴부랴 급수대를 옮기다 보니 시간이 걸려 7:30분에 출발했다. 100회 마라톤 동호회 회원들은 거의 기권했다. 그들에겐 하프가 별 의미가 없기 때문에.
어제부터 아침까지 많이 먹은 탓에 몸이 굉장히 무겁다. 주최측에서 준비한 비닐 비옷을 입고 출발했지만 얼마 안가서 벗어버렸다. 한국 제일의 청정 무공해 지역이라 온몸에 뿌려지는 비가 사이다맛같이 상쾌하게 느껴진다. 더덕 향기와 갯내음이 ??인 공기도 그렇게 신선할 수가 없다. 무겁던 발걸음도 5km 정도 달렸을즈음부터 서서히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크고작은 고개가 부담스럽기만 하다. 고개가 많은 섬이라 하여 울릉도라고 불렸지.
10km 반환점을 지나고부터는 사람이 거의 없다. 내 앞에 한 사람, 뒤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이름 모를 새소리와 숲속으로 내리는 빗소리, 길바닥을 힘차게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묘하게 어우러져 굉장히 장엄하면서도 정말 듣기가 좋다. 길바닥은 자갈이 드러난 시멘트길이라 무릎이 약한 나에게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갈수록 경사가 급해지고 꼬불거리고.... 하프 반환점이 거의 다 되어서는 급경사가 장난이 아니다. 꼭 아파트 계단을 오르는 느낌이다. 내가 뛰어본 코스 중 힘들기는 단연 으뜸이라. 걷다뛰다를 반복하고 있는데 저 앞에서 동생 둘이 반환점을 돌아 내려오고 있었다.
“형님, 파이팅!”
“반환점이 300m 남았는데, 아무도 없소. 그냥 같이 내려갑시다.”
“모처럼 3형제 같이 뜁시다.”
두 동생들의 제의가 마음에 와 닿지만 그럴 수야 없지 않은가.
“먼저 가라이. 곧 뒤따라가마.”
고개마루에 있는 반환점에서 앳된 군인들이 주는 차가운 꿀차와 해맑은 미소가 너무나 맛있고 고마웠다. 이곳에는 진행도, 식수와 먹을거리 공급도, 코스 안내도 모두 군인들이 하고 있었다. 레이스에 참가한 군인들도 많았다. 북한 미사일 발사 때문에 많이 못 왔다고 한다.
15km 정도에서 장조카를 만났다. 반환점을 얼마 앞두고 그냥 돌아간단다. 두 삼촌은 조금 전에 앞서갔단다. 60대 중반 삼촌이 40대 초반 조카를 냅다 앞지르다니 뭔가 한참 잘못된 것 아닌가.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다. 격무에 시달리다보니 연습 부족이라 아무리 젊어도 어쩔 수가 없겠지.
몸도 슬슬 풀리고 빗줄기에서 신선한 산소를 계속 공급받고, 무릎은 아무렇지도 않고, ... “런닝하이”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맛에 마라톤을 하는 거 아닌가. 아무도 없고, 기분은 째지게 좋고, 고함도 질러보고, 유행가도 목청껏 뽑아보고, 학창시절에 흥얼대던 팝송도 부르고, ....
고개 위에서 저 아래를 내려다봐도 동생들이 보이지 않는다. 속도를 많이 냈는데도. 그놈들도 몸들이 풀렸나보다. 저 앞에 피니시풍경이 보인다. 문기숙 코치가 마중을 나왔다. 반갑고 힘도 남아돌고, 전력질주하여 골인하였다. 내 형님은 열심히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고 5km에 참가한 누님과 여동생은 환한 미소로 맞아준다. 그러나 2:40분이라니. 동생들은 5분 전에 들어왔고, 여성부 1등한 문기숙 코치는 2:10분이란다. 이런 저조한 기록이 모두 가파른 고개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거리 표시도 없고 진행 요원도 없고, 칩도 없고, 이것저것 다 생략이 된 초미니 대회였다. 하지만 신선하고 청정한 무공해 코스에서 비에 젖고 땀에 젖고, 은은한 더덕 향기 속에서 나홀로 고독을 벗삼아 뛴 울릉도 마라톤, 나에게는 상큼하고 향긋한 더덕 같은 최고의 레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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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계의 여성 일인자 문코치의 마중을 받으니 참으로 즐겁네~~~~^^^^
첫댓글 왕회장님, 잘 다녀오셨습니다. 주최측의 미숙한 운영이 있었다 해도 어떻습니까. 울릉도를 경험하고 많은 추억거리를 만들고 오셨으니 또 다른 즐거움을 만끽한 여행이 아니었나 생각이 듭니다.
왕회장님,멀고어려운길에도불구하고 수고많았읍니다.축하합니다. 다음에보면 간단히 쏘주한잔 (하늘과노을과함께)...
캬아...울릉도의 역사와 자연 그리고 마라톤을 알콩달콩 알려주신 왕회장님. 이 글을 읽으니 비릿한 바다내음이 솔솔 불어오고, 가슴이 울렁거립니다. 바다에 가고시포~ ^ ^*
좋은 추억을 만들어 오셨군요. 생생한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왕회장님 수고하셨읍니다. 역시 달림은 즐기면서 하는것이 좋은것 같네요. 어려운 악조건하에서도 완주하신 것 축하드립니다.
왕회장님! 울릉도까지 점령하셨네요. 다음 코스는 어디가 될지 궁금합니다. 왕회장님 홧팅!!!
울릉도에 갔다온 듯한 분위기에 사진까지 척 붙어있어서 더욱 재밌게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