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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樂民(장달수)
강 인 철**
1. 머리말
2. 정부 핵심 구성원과 개신교: 개신교 독주체제의 점진적 형성
3. 정부 정책과 개신교: 특권적 종교로의 도약
4. 맺음말: 정치지형 변동의 종교적 결과
1. 머리말
이 글은 이승만 정부 전반기(前半期)의 종교적 성격과 국가-교회 관계를
다룬다. 시기적으로는 1948년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부터, 이른바 ‘사사오
입’ 개헌을 통해 이승만이 영구집권의 기반을 확고히 다지면서 ‘보수 양당
(兩黨)체제’가 정착되는 1954년 말까지가 집중적으로 분석될 것이다. 상대
적으로 안정된 보수 양당제 하에서 이승만의 일인독재와 독주(獨走)로 특
징지어졌던 1955~1960년의 집권 후반기에 비해, 이승만 정부 전반부는 정
치지형의 변동이 극심했던 특징을 보여주었다. 이승만 정부의 전반기는 이
대통령이 국회와 행정부 안팎에서 복잡한 정치적 동맹 형성과 배제 과정
을 거치면서 자신만의 확고한 권력기반을 다져갔던 시기이기도 했다.
필자는 1948~1954년의 기간이 정치지형에서뿐 아니라 종교지형에서도
급격한 변동이 이루어진 시기였으며, 정치지형과 종교지형이 서로 긴밀하
게 맞물린 변화가 진행되었다고 전제하고 있다. 여기서 정치지형과 종교지
형이 긴밀히 맞물려 있었다는 것은 당시 ‘종교정치’(religious politics)가 대단
히 활발했음을 또한 전제한다. 그렇다면 정치지형의 급변 과정은 당시의
* 이 논문은 한신대학교 학술연구비 지원에 의해 연구되었음.
** 한신대학교 교수105)
92 한국기독교와 역사제30호(2009년 3월 25일)
종교지형에 어떤 영향을 주었으며, 주요 종교들의 정치적‧사회적 위상은
각기 어떻게 달라졌는가? 종교의 ‘제도적 이익’(institutional interest)이라는 관
점에서 볼 때, 이득을 본 종교는 무엇이었고, 손해를 본 종교는 무엇이었
나? 특히 개신교의 경우는 어떠했는가?
“대한민국 초대 정부의 기독교적 성격” 정도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
해, 필자는 다음 두 가지 쟁점에 집중할 것이다. ① 이승만 정부 핵심 구
성원들의 종교적 구성과 기독교적 색채, ② 이승만 정부 정책의 (친)기독교
적 성격이 그것이다. 미군정(美軍政)의 유산을 대부분 상속했다는 점에서,
이승만 정부가 인적 구성으로 보나 정책으로 보나 처음부터 친(親)기독교
적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이승만의 독자적 권력기반 구축
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승만 초대 정부의 ‘기독교적’ 성격은 (정부 출범
직후보다는) 집권 전반기의 끝 무렵인 1953~1954년경에 더욱 선명하게 나타
난다는 점이 강조될 것이다. 이 시기에 와서야 비로소 ‘개신교 중심의 권
력구조’가 뚜렷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지난 10여 년 사이에 이승만 정부와 이 시기의 정치변동에 대한 연구들
이 급속히 증가되었다. 필자는 기존 연구들이 간과했거나 소홀하게 취급해
왔던 ‘종교’라는 변수를 집어넣어 미시적으로 정치변동 과정을 관찰하는
가운데 새로운 해석의 지평을 모색해보려 한다. 특히 정치지형의 역동적인
재편을 통해 이승만 정부가 ‘개신교 정권’의 성격을 강화해가는 과정을 분
석하기 위해, 대종교-개신교-천주교의 관계, 개신교 내 흥사단계와 동지회
계의 관계가 이승만 정부를 중심으로 어떻게 흥미롭게 전개되는가에 주목
할 것이다.
2. 정부 핵심 구성원과 개신교: 개신교 독주체제의 점진적 형성
이른바 ‘해방정국’에서 개신교 교회는 반탁(反託)-단정(單政) 노선을 충실
히 지지함으로써, 이승만의 권력 장악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 한 남한만의
대한민국 수립에 기여했다. 다른 종교들의 정치적 태도와 비교해보더라도,
해방정국에서 개신교의 일관된 ‘우편향(右偏向)’은 돋보였다. 교단 내 좌파
나 중도파의 세력이 강했던 불교와 천도교는 말할 것도 없고, 우파 성향
강인철 / 대한민국 초대 정부의 기독교적 성격 93
면에서 개신교와 가장 가까웠던 천주교조차 기관지인 「경향신문」을 통해
1947년 9월경까지 좌우합작 노선을 지지하다가 그 이후에야 비로소 단정
노선으로 선회했던 것이다.1) 좌파 세력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것은 물론이
고, 개신교는 해방정국의 우파 세력들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이승만 진
영을 압도적으로 응원했다. 당시 우파 세력 내에서 새로이 출범할 정부의
유력한 수장(首長) 후보군은 임시정부의 주역이었던 이승만ㆍ김구ㆍ김규식
의 ‘3영수(領袖)’, 그리고 1947년 7월 군정사령관인 하지 중장에 의해 군정
청 최고정무관으로 임명되어 미국에서 귀국하자마자 수장 후보로 부상했
던 서재필 등으로 압축되었다. 이 네 명은 모두 개신교 신자들에 의해 ‘기
독교인’으로 간주되었다. 네 지도자는 반탁-찬탁 갈등 국면, 좌우합작운동
국면, 단정-남북협상 노선 갈등 국면 등 해방정국의 여러 국면들에서 복잡
한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의미 있는 정치노선의 차이를 보였지만, 개신교
신자 대다수는 극우(極右) 노선으로 일관했던 이승만을 지지했다. 따라서
이승만 정부에 대한 개신교 교회의 일방적인 지지는 해방정국에서부터 이
미 예정되어 있었던 셈이다.
이 절에서는 이승만 정부 핵심 구성원을 내각과 여당을 중심으로 살펴
볼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종교적 친소(親疎)관계’, 즉 이승만이 독자적
인 권력기반을 구축해가는 과정에서 종교적 동맹 혹은 배제 전략을 어떻
게 구사했는지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여기서는 ‘정치지형 재편의 종교적
측면’을 보다 뚜렷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네 시기로 구분해
서 접근해 보려 한다: (1) 거국내각과 여당의 형성(1948.8∼1950.6), (2) 전시
체제를 위한 야당과의 일시적 제휴 및 배제(1950.7∼1951.5), (3) 야당과의
대립, 장면과의 갈등 심화와 배제(1951.6∼1952.4), (4) 족청(민족청년단)계와의
제휴와 이승만 일인지배체제의 확립(1952.5∼1953.12). 다소 자의적이지만,
이런 구분법이 정치지형 재편의 ‘종교적’ 측면을 부각시키는 데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한다.
1) 강인철, 한국 천주교의 역사사회학: 1930-1940년대의 한국 천주교회(한신
대학교 출판부, 2006), 6장, 특히 149-177 참조.
94 한국기독교와 역사제30호(2009년 3월 25일)
(1) 거국내각과 여당의 형성(1948.8∼1950.6)
제헌국회를 통해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승만은 1948년 8월 초에 조
각(組閣) 결과를 발표했다. 그 내용은【표 1】과 같다.
【 1】 , ,
부서 성명 종교 소속 단체, 정당 경력
국무총리 이범석 대종교 민족청년단(족청) 단장 광복군 사령관
내무부 윤치영 개신교 독촉국민회
국회의원, 이승만
비서
외무부 장택상 무소속 전 수도경찰청장
국방부 이범석 대종교 족청 단장
재무부 김도연 개신교 한민당
국회의원, 연희전
문 교수
법무부 이인 무소속 전 검찰부장
문교부 안호상 대종교 무소속, 족청계 전 서울대 교수
농림부 조봉암 무소속
국회의원, 사회주
의운동
상공부 임영신 개신교 여자국민당 당수
구미위원부, 중앙
여자대학 설립
사회부 전진한 불교 독촉국민회, 대한독립노총
국회의원, 노동운
동
보건부 구영숙 개신교 무소속 감리교 전도사
체신부 윤석구 개신교 무소속
국회의원, 건준활
동, 입법의원
교통부 민희식 무소속
전 운수부장, 총
독부 근무
무임소
이윤영 개신교 조선민주당 당수, 독촉국민회
국회의원, 조민당
부당수, 목사
이청천 독촉국민회
대동청년단장, 광
복군 총사령관
총무처 김병연 개신교 조선민주당
평남조선물산장
려회 이사
공보처 김동성 개신교 무소속 합동통신사 사장
법제처 유진오 무소속
고려대 교수, 법
전편찬위 위원
기획처 이순탁 무소속
연희전문 상과
교수
심계원 명제세 대종교 한독당
고시위원회 배은희 개신교 민족대표자대회 의장 목사
감찰위원회 정인보 대종교 무소속 국학대학 학장
강인철 / 대한민국 초대 정부의 기독교적 성격 95
* 출처: 명단․소속․경력은 천관우, 자료로 본 대한민국 건국사(지식산업사,
2007), 398-399를 참조했으며, 김수자, 이승만의 집권 초기 권력기반 연
구(경인문화사, 2005), 195로 일부 보충했음.
【표 1】에 제시된 21명은 김구나 김규식 계열의 남북협상파가 제외되
었지만, 비교적 다양한 우익 정치세력을 고르게 반영하고 있다. 이는 초대
내각을 일종의 ‘거국내각’으로 구성하라는 시대적 요구를 반영하고 있지
만, 이승만이 독자적인 정당 기반을 갖고 있지 못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기
도 하다. 집권 기간 동안 이승만은 “내각 구성에 있어서 한민당(민국당) 세
력의 배제, 조직력 있는 세력에 대한 경계의 ‘원칙’을 지켰다”고 평가된
다.2) “이승만이 5․10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고, 그리고 대통령으로
피선되는 과정에서 가장 큰 구실을 한 것이 한국민주당이었고, 또 국회 내
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은 역시 한국민주당”이었다.3) 당시 한민당은 국무
총리(김성수)와 각료 8석을 이승만에게 요구하였으나 실제로는 4명(김도연ㆍ
윤치영ㆍ장택상ㆍ이인)만이 입각했으며, 그마저도 김도연을 제외하고는 입각
직후 한민당을 탈당했다.4) 이승만은 초대 국무총리 선임에서도 유력한 후
보인 김성수ㆍ신익희ㆍ조소앙을 모두 배제하고 감리교 이윤영 목사를 지
명했으며, 국회에 의해 인준이 거부되자 이범석을 다시 국무총리로 지명했
다. 국무총리를 이범석으로 지명한 것 역시 한민당에 대한 견제가 가장 큰
목적이었던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5)
이승만 초대 내각에서 한민당 인사들이 소외되었다는 사실은 미군정에
서 고위직을 역임한 한민당계 인사들이 새 정부로부터 소외되었다는 것과
통한다. 미군정의 한국인 관료직은 사실상 한민당계 인사들에 의해 장악되
었지만,6) 특히 고위직으로 갈수록 미국 유학 출신의 개신교 신자들이 다
2) 김수자, 이승만의 집권 초기 권력기반 연구(경인문화사, 2005), 185.
3) 천관우, 자료로 본 대한민국 건국사(지식산업사, 2007), 389.
4) 김행선, 해방정국 청년운동사(선인, 2004), 370. 백영철 역시 “당시 정가에
서는 초대 총리에 한민당의 김성수가 임명될 것으로 기대하였고, 또 내각의
반 이상 정도는 당연히 한민당의 몫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고 서술하
고 있다[백영철, 제1공화국과 한국민주주의: 의회정치를 중심으로(나남출판,
1995), 138].
5) 천관우, 같은 책, 389-393; 김수자, 같의 책, 192.
6) 심지연, 한국현대정당론: 한국민주당 연구(창작과 비평사, 1984), 34-37
96 한국기독교와 역사제30호(2009년 3월 25일)
수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서북(西北)지역 출신인 흥사단계 개신교 인사들
의 존재가 미군정 고위직에서 두드러졌다. 정일형ㆍ오정수ㆍ이용설ㆍ이대
위ㆍ최능진ㆍ노진설ㆍ윤하영ㆍ한승인ㆍ이묘묵ㆍ최희송ㆍ백낙준ㆍ오천석
등이 서북 출신이자 흥사단 회원으로서 미군정 고위직을 역임한 개신교
신자들이었고, 남한 출신인 조병옥도 흥사단의 핵심 인사였다.7) 이들 대부
분이 이승만으로부터 부름을 받지 못했다. 우리는 여기서 1947년 7월부터
약 1년 동안 계속된 ‘서재필 추대운동’을 정인과 목사와 최능진 등 흥사단
계 인사들이 주도했던 사실, 그리고 “남한 과도정부 내 고위층 관리들의 3
분지 2”가 서재필을 지지했다는 임창영 목사의 주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
다.8) 일찍부터 이승만의 동지회 계열과 경쟁해온 흥사단계의 미군정 고위
관료들 중 상당수가 이승만에 대항하여 서재필 추대운동에 앞장섰던 사실
은 왜 이들이 초대 정부 고위직에 등용될 수 없었던가를 상당 부분 설명
해 주기 때문이다. 또 같은 이유로 흥사단계 개신교 인사들은 일단 이승만
정부 하에서 ‘야당적’ 지위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것이다. 그러
나 실제 사정은 이보다 복잡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서재
필 추대운동 자체가 그 흐름에 합류한 흥사단계 인사들, 그리고 여전히 한
민당에 남아 이승만을 지지해온 흥사단계 인사(대표적으로 조병옥) 사이의
분열을 보여준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할 것이다. 초대 총무처장에 임명된
김병연도 흥사단 출신 인사지만, 그는 이윤영 목사처럼 월남한 조선민주당
의 몫으로 선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이승만 정부 출범 당시부터 흥사단계 개신교 인맥의 일부가 배
제되었지만,【표 1】에서 보는 것처럼 초대 각료 21명 중 9명이 개신교 신
자일 정도로 개신교의 비중은 매우 높았다. 대종교 신자가 4명이나 되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교세에 비해 초라하지만, 초대 내각에는 불교 신자
도 한 명 포함되었다. 1950년 2월에는 불교 승려인 백성욱이 내무부장관으
로 기용되기도 했다. 내각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천주교 신자인 장면
참조.
7) 강인철, 한국 기독교회와 국가·시민사회: 19451960(한국기독교역사연구
소, 1996), 180.
8) 안진, 미군정과 한국의 민주주의(한울, 2005), 307; 임창영, 유기홍(역), 위
대한 선각자 서재필 박사 전기(공병우글자판연구소, 1987), 268.
강인철 / 대한민국 초대 정부의 기독교적 성격 97
이 파리 유엔총회 한국대표단 단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장면은 유엔총회 직
후 초대 주미대사로 임명되었다. 6대 종교 중 유교와 천도교 신자가 빠져
있기는 하지만,9) 출범 당시의 이승만 정부에는 주요 종교의 인사들이 비
교적 고르게 참여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승만은 자신만의 개신교 인맥을 구축하고 있었고, 이 인맥에 속한 이
들을 정치권력의 핵심부에 포진시켰다. 초대 내각에 포함된 윤치영과 임영
신을 비롯하여, 이기붕ㆍ허정ㆍ장기영ㆍ김현철ㆍ이순용ㆍ장석윤ㆍ정한경ㆍ
임병직ㆍ윤병구 등은 동지회 혹은 임시정부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미군
정보기관 등을 매개로 미국에서부터 이승만과 맺어진 개신교 신자들이었
다. 이밖에도 함태영ㆍ신흥우10)ㆍ이갑성ㆍ구자옥ㆍ김활란ㆍ유억겸ㆍ최두
선ㆍ전필순ㆍ김영섭ㆍ신공숙ㆍ김인영ㆍ박연서 등도 동지회의 국내조직인
흥업구락부나 적극신앙단, 혹은 YMCA11) 등을 통해 이승만과 연결되었던
이들이었다.
오랜 외국생활로 국내 정치기반이 취약했던 이승만은 정부 수립부터 한
국전쟁 발발 전까지 OSS(전략사무국), CIC(방첩대), G-2(정보참모부) 등 미군
정보기관 출신의 개신교 인맥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장석윤
ㆍ이순용ㆍ장기영ㆍ정운수ㆍ임병직 등이 이런 인맥에 속했다. 이승만은
1942년 3월 약 20명의 대원 후보 명단을 OSS에 보냈는데, 장기영ㆍ정운수
ㆍ장석윤ㆍ이순용 등 자신의 측근들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다.12) 또 이
승만 자신이 해방 후 OSS 문관 대령의 신분으로 군복을 입고 미군 군용
9) 1950년 11월에는 천도교 신자인 공진항이 농림부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951년 5월까지 재직했다. 공진항은 1954년 말 천도교의 수장인 교령()으
로 추대되었다.
10) 이 가운데 신흥우는 흥업구락부의 핵심 인사였으면서도, 초기의 짧은 기간
을 제외하고는 이승만 정부와 내내 불화했다. 그는 이승만 정부 출범 직후
유엔총회 한국대표나 초대 주미대사 물망에 올랐지만, 1949년에 불과 3개월
동안만 초대 주일대사를 지낸 후에는 반()이승만 진영에 섰다. 그는 1952년
대통령선거 때 이승만에 대항하여 출마했으며, 1950년대 후반에는 야당인 민
주당에 참여했다[전택부, 인간 신흥우(대한기독교서회, 1971) 참조]. 이 역
시 신흥우가 서재필 추대운동에 호의적이었다는 임창영 목사의 주장(임창영,
위대한 선각자 서재필 박사 전기, 267)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11) 흥업구락부계 인사들은 일제강점기 YMCA 간부진의 절반가량을 차지하고
있었다[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의 역사(기독교문사, 1990), 326].
12) 오동렬, “이승만의 미국인 사설 ‘고문단’,” 사회평론 길(1995년 3월), 215.
98 한국기독교와 역사제30호(2009년 3월 25일)
기 편으로 귀국했다.13) 대통령이 된 후 이승만은 OSS 출신 개신교 인맥을
은밀한 공작정치에도 활용했다. “이승만에게는 법적 제도적 차원의 고문과
는 다른 반관반민(半官半民) 성격을 띤 정보․공작기관과 이를 지휘한 ‘고
문’들이 존재했다. 1948∼49년의 대한관찰부(大韓觀察府)와 1950년 4∼5월의
정치공작대가 바로 이러한 ‘그림자조직’이었으며, 이를 지휘한 장석윤과
정운수는 법적 근거도 없이 단지 이승만의 허가와 ‘고문’ 자격으로 이 음
모․공작기관을 운영했다.”14) 또 이승만 비서와 OSS 출신인 장기영은 파
리 유엔총회 한국대표를 거쳐 체신부장관(1949.6∼1952.1)으로, 같은 이력을
지닌 임병직은 외무부장관(1949.1∼1951.4)으로 기용되었다.15)
한편 “정부가 수립된 후 한민당이 과거 3년간 군정 하의 여당적 역할을
일척하고 시시비비주의로 임할 것을 공언하면서부터 야당적 성격을 띠게”
되었을 뿐 아니라, “국민회 지방조직 인물들이 대개는 한독 아니면 한민당
에 가맹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에,16) 이승만 지지 세력은 독자적인 여당 건
설에 나섰다. 이승만은 신익희와 이청천(지청천)을 영입하여 한민당을 견제
할 힘을 지닌 강력한 여당을 건설하고자 했다. 신익희와 이청천, 그리고
독촉국민회 내의 ‘목요회’를 이끌고 있던 배은희 목사가 협력하여 1948년
11월에 ‘대한국민당’을 창당했다. 그러나 1949년 2월 신익희와 이청천은
대한국민당과 한민당의 합당을 추진하여 ‘민주국민당’(민국당)을 창당했으
며, 신익희-이청천의 이탈로 대한국민당이 사실상 와해된 이후에는 (이승만
의 개신교 인맥에서 중추적 인물 중 하나였던) 윤치영을 중심으로 결성된 ‘일
민구락부’가 여당 역할을 맡게 되었다. 1949년 12월에는 윤치영의 주도 하
에 일민구락부와 다른 이승만 지지 정파들이 결합하여 ‘대한국민당’을 창
당했다. 대한국민당은 1950년 2월에 이르러 원내 최대의석을 확보하고 민
국당이 주도한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부결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취약한 결
속력으로 인해 이탈자가 속출하고 1950년의 5․30선거에서도 부진을 면치
못했다.17) 결국 한국전쟁이 발발할 때까지도 이승만은 강력한 여당을 건
13) 오동렬, “부활하는 냉전의 망령, 조선일보의 이승만 숭배: 남북협상론의 김
규식 박사 비서 송남헌 인터뷰,” 사회평론 길(1995년 3월), 209.
14) 정병준, “이승만의 정치고문들,” 역사비평43호(1998년 여름), 161.
15) 김수자, 이승만의 집권 초기 권력기반 연구, 211.
16) 자유신문1948년 10월 4일.
17) 김수자, 같은 책, 90-93, 125-172 참조.
강인철 / 대한민국 초대 정부의 기독교적 성격 99
설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2) 전시체제를 위한 야당과의 일시적 제휴 및 배제(1950.7∼1951.5)
전쟁을 맞아 이승만은 1950년 7월 개각을 단행하면서 일부 민국당 소속
인사들을 영입했다. 한민당을 고수했던 흥사단계의 핵심 인사인 조병옥을
내무부장관으로 임용한 것이 핵심이었다. 그러나 이런 거국적 성격의 전시
내각은 1년을 넘기지 못했다. 이 대통령은 1951년 5월에 조병옥ㆍ김준연
(법무부장관)ㆍ신성모(국방부장관)를 해임했고, 이후 경찰과 공무원 조직에서
민국당계 인사들의 대대적인 축출작업을 진행했다. 새로운 내무부장관으로
는 이순용, 법무부장관으로 조진만, 국방부장관으로 이기붕이 각각 임명되
었다.18) 이 사태에 항의하는 뜻으로 이시영 초대 부통령이 사임했고, 국회
에서 이루어진 제2대 부통령선거에서는 이승만이 내세운 이갑성이 민국당
의 김성수에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
이런 변화와 관련하여 두 가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조병옥의
해임은 한민당계를 포함하여 개신교의 흥사단 인맥과 이승만의 최종적인
결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당시 이승만은 “오랫동안 내무장관 조병옥은
한민당과 흥사단의 목적을 펴나가는 데 자신의 권력과 정부 돈을 써왔다”
면서 조병옥을 비난했다고 한다.19) 1951년 5월의 개각을 통해 빈자리를
이순용과 이기붕 등 동지회계 혹은 구미위원부 계통의 개신교 인맥이 채
웠다는 사실은 이런 변화를 더욱 명료히 보여주는 것이다. 둘째, 거의 비
슷한 시기에 대종교 지도자인 신성모와 이시영이 퇴진함으로써, 이승만 정
부 안에서 대종교의 위상이 크게 추락했다는 점이다. 안호상ㆍ명제세ㆍ정
인보 등이 이미 모두 물러난 상태여서, 1951년 5월에 이르러 대종교 신자
인 내각 구성원은 일시적으로나마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당시 상황을 대
종교 측은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미군정 하에서 민정장관의 印綬를 띠고 전국 행정을 總攬하던 民世 안재
홍 大兄과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초대 부통령에 추대된 倧門의 원로원장인
18) 같은 책, 208-214.
19) 같은 책, 214의 주 61.
100 한국기독교와 역사제30호(2009년 3월 25일)
省齋 이시영 道兄을 비롯하여 초대 내각에 국무총리 鐵騎 이범석 도형(겸 국
방부장관), 문교부장관 한뫼 안호상 도형, 감찰위원장 爲堂 정인보 대형, 심계
원장 一光 명제세 대형, 국방부장관 尙敎 신성모 선생(2대)과 尙敎 서상일 선
생 등 10여 敎友가 국회의원으로…각각 爲國爲敎에 盡力獻誠하니 실로 濟濟
名士가 篳出於倧門이라.…그러나…大敎는 정부 수립 후 2년간에 李 정권의
무모한 배척으로 말미암아 중흥의 銳氣가 위축되고 世情은 급변하여 인심은
乘離하는 동안에 설상가상으로 교계 원로들의 정계 하야와 赤徒에 의한 납북,
연로 歸天으로 포교의 기반을 확립하기도 전에 또다시 인물난 재정난에 봉착
하게 되었다.20)
(3) 야당과의 대립, 장면과의 갈등 심화와 배제(1951.6∼1952.4)
내각과 정부기구에서 민국당 세력을 축출함으로써 국회와 정부 간의 갈
등은 급격히 고조되었다. 이후 이승만은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한 개헌을 추진함과 동시에 새로운 여당을 건설하는 데 노력을 집중했다.
반면에 야당인 민국당은 이전부터 추진해오던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고수
했다. 이런 팽팽한 대립 상황에서 OSS 출신 개신교 인맥이 전면에 등장했
다. 1951년 5월에 조병옥의 후임으로 내무부장관에 이순용이 임명되었고,
같은 해 11월에는 대한관찰부를 이끈 바 있던 장석윤이 내무부차관으로
임명되었다. 장석윤은 여당 실력자이자 동지회계 인맥의 핵심인물 중 한
명인 윤치영의 조카사위이기도 했다.21) 이승만은 1951년 11월 말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대한국
민회․대한청년단 등의 대중단체와 공무원, 경찰력을 동원하는 한편, 여당
결성을 추진했다. 대중단체와 정부조직을 동원한 주역은 이순용-장석윤의
내무부 라인이었고, 1951년 12월 23일과 30일에는 각각 ‘원외(院外)자유당’
과 ‘(원내)자유당’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1952년 1월 초에 정부 개헌안은
국회에서 부결되었고, 이승만은 야당의 반발에 밀려 이순용을 해임하고 후
임 내무부장관으로 장석윤을 임명했다. 이승만과 장석윤은 대통령직선제
개헌 지지 세력을 새로 형성하여 국회와 대결시키기 위해 지방선거를 추
진했고, 1952년 4월 하순에 처음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이승만 진영은 큰
20) 강천봉, 대종교 중광 60년사(대종교총본사, 1971), 734-736.
21) 정병준, “이승만의 정치고문들,” 164-165.
강인철 / 대한민국 초대 정부의 기독교적 성격 101
승리를 거두었다.22)
1952년 4월 이승만은 장면 국무총리를 해임했고, 그 자리에 자신의 심
복인 장택상을 임명했다. 장면 총리의 경질은 이승만 정부와 천주교의 결
별을 상징하는 일이었다. 장면은 파리 유엔총회 한국대표단 단장에 이어
초대 주미대사로 기용되었고, 1950년 11월에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 이승
만 정부의 수립 과정에서부터 1951년 여름까지 이승만과 천주교의 관계는
‘밀월’(蜜月)에 가까운 우호적 협력으로 특징지어졌다.23) 그러나 1951년 여
름부터 가시화된 민국당 중심의 ‘장면 대통령 추대운동’으로 인해 이런 관
계가 심각하게 균열되기 시작했다. 장면 대통령 추대운동은 1951년 7월경
부터 1952년 5월 말까지 약 10개월 동안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24) 당
시 민국당의 전략은 ‘이중적인’ 것이었는데, 한편으로는 이승만에게 상징
적인 대통령직을 양보하는 대신 자신들은 내각 총리직을 차지하여 실권을
잡는 방식으로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고, 다른 한편으로 내각제 개헌이 실
패하여 현행대로 국회 간선제로 대통령을 선출하게 될 경우에 대비하여
원내자유당 세력의 협력을 얻어 장면을 대통령으로 옹립하는 운동을 추진
한다는 것이다.25) 이로 인해 이승만은 처음으로 장면을 강력한 정치적 경
쟁자 중 하나로 간주하게 되었고, 곧이어 장면을 정치권력에서 배제했던
것이다. 심지어 1952년 5월 30일에는 장면 대통령 추대운동을 “남로당 잔
당의 소행”으로 조작한 이른바 ‘정부혁신위원회사건’을 발표하기도 했
다.26) 이후 장면은 ‘사실상의 야당 인사’로 변신했으며, 그에 따라 천주교
와 이승만 정부의 대립도 점차 고조되어갔다.
22) 김수자, 같은 책, 215-217 참조.
23) 강인철,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하에서의 교회와 국가,” 오경환 외, 교회와
국가(인천가톨릭대학교 출판부, 1997), 630-639 참조.
24) 같은 글, 640.
25) 이기택, 한국야당사(백산서당, 1987), 39-40 참조.
26) 편집부, “사료: 1950년대의 정치적 중요사건,” 진덕규 외, 1950년대의 인식
(한길사, 1981), 426-427.
102 한국기독교와 역사제30호(2009년 3월 25일)
(4) 족청계(族靑系)와의 제휴 그리고 결별, 이승만 일인지배체제의 확립
(1952.5∼1953.12)
1952년 5월부터 이승만은 이범석의 족청계를 끌어들여 대통령직선제 개
헌을 관철함으로써 장기집권을 위한 길을 열고자 했다. 이승만은 5월 25일
에 원외자유당 부당수인 이범석을 내무부장관으로 임명하여 장택상(국무총
리)-이범석 체제로 개헌공작을 진행했다. 내각에도 백두진(재무부장관), 진헌
식(내무부장관), 신중목(농림부장관), 이재형(상공부장관) 등 족청계 인사들이
대거 기용되었다. 이승만 측은 1952년 5월 14일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다
시 국회에 제출했고, 관제 데모 군중을 동원하여 국회의원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범석이 내무부장관으로 임명된 날인 5월 25일에는 부산을 포
함한 경남과 전라도 일원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다음날 군인들이 반대파
의원들을 강제 연행․구금하는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이 발생했으며, 이에
항의하여 29일에는 김성수 부통령이 사임했다. 같은 해 6월 20에는 이른바
‘발췌개헌안’이 국회에 제출되었고, 7월 4일에 경찰․군대․데모대가 국회
를 포위한 공포분위기 속에서 통과되었다.27) 당시 영남지구 계엄사령관으
로 임명되어 부산정치파동을 주동한 인물은 감리교 장로였던 원용덕이었
다.28) 또 발췌개헌안 통과 당시 ‘삼우장파’의 남송학 의원이 발행하는 출
입허가증 없이는 국회의원의 외출마저 금지되었는데,29) 남송학 의원은 약
열흘 전인 6월 25일에 결성된, 개신교 신자 국회의원 모임인 ‘국회의원 신
우회’의 재무 책임자였다.
개헌안 통과에 따라 직선제로 치러진 1952년 8월의 정부통령선거를 앞
두고 이범석은 부통령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내무부장관직을 사직했고, 후
임에 개신교 신자인 김태선이 임명되었다. 이범석은 자유당 후보로 선거전
에 나섰고 당연히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여당 후보
인 이범석 대신 자신의 개신교 인맥(동지회계)인 함태영 목사를 지원했다.
선거 당시 장택상 국무총리와 김태선 내무부장관이 이승만의 지시를 받아
27) 김수자, 같은 책, 221-225.
28) 강인철, 한국 기독교회와 국가·시민사회: 19451960, 181-182.
29) 김수자, 같은 책, 183.
강인철 / 대한민국 초대 정부의 기독교적 성격 103
함태영 당선을 위한 관권선거운동을 벌였다고 한다.30) 아마도 이승만은
강력한 세력을 가진 이범석이 4년 임기의 부통령이 되어 권좌에 도전하는
일을 경계했을 것이다.
1953년 6월부터 내각, 여당, (독촉국민회의 후신인) 대한국민회를 포함하
는, 전면적인 족청계 축출작업이 시작되었다. 먼저, 이승만은 1953년 6월
초에 이범석으로 하여금 반강제적으로 외유(外遊)를 떠나게 했고, 같은 해
9월까지 족청계 인물들을 내각에서 퇴출시켰다. 이승만은 이 과정을 이기
붕과 상의 하에 진행시켰고, 빈자리를 일제 관료 출신 및 원외자유당 출신
의원들로 채웠다. 1952년 9월 장택상 국무총리가 사임한 이후 백두진이 국
무총리 서리(署理)로 있다가 1953년 4월에 정식 국무총리로 인준되었으나,
그것은 두 차례에 걸친 개신교 인사(이윤영 목사, 이갑성) 지명에 실패한 후
의 일이었다. 두 번째로, 이승만은 족청계 축출을 위해 1953년 7월에 여당
인 자유당의 개편에 착수했고, 이범석의 역할을 이기붕으로 대체했다.31)
1953년 11월에 자유당은 완전히 재편되어 이갑성ㆍ배은희ㆍ이기붕으로 구
성된 ‘3인 집행위원회’로 당권이 집중되었는데,32) 자유당 3파의 지도자들
이기도 했던 이들은 모두 개신교 신자들이고 배은희는 장로교 목사였다.
셋째로, 1953년 12월에는 이승만의 유시에 따라 족청계 정화(淨化)를 목적
으로 대한국민회 전국대의원대회가 소집되었다. 이를 계기로 국민회 내에
서 족청계가 축출되었고, 대신 최고위원으로 배은희ㆍ이갑성ㆍ이기붕의 세
사람이 선출되었다.33) 이기붕이 정권의 제2인자로 부상한 가운데, 배은희
ㆍ이갑성 등 개신교 인맥이 명실상부한 권력의 핵심 실세가 된 것이다. 이
와 동시에 이범석 및 족청계의 숙청과 더불어 대종교 역시 정치적 보루를
모두 잃어버린 셈이 되었다.
이제 이승만에 대한 아무런 견제세력도 없는 상태에서, 1954년 9월 국
회의장인 이기붕의 주도로 “현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제한을 폐지”하는 개
헌안이 국회에 제출되었고, 개헌안은 같은 해 11월에 ‘사사오입개헌’이라
30) 같은 책, 224.
31) 같은 책, 184, 228-231. 이때 이기붕은 이승만의 족청계 거세 지시를 수행하
기 위해 극우세력과 함께, 이정재 등의 ‘정치깡패’들까지 동원했다고 한다(
동아일보1995년 4월 18일).
32) 양무목, 한국정당정치론(법문사, 1983), 58.
33) 김수자, 같은 책, 122.
104 한국기독교와 역사제30호(2009년 3월 25일)
는 시비를 낳으며 통과되었다. 이승만의 종신집권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
러나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이런 일련의 변화는 이승만 정부에서 ‘개신
교의 독주(獨走)체제’가 완성되었음을 뜻하기도 한다. 1952년 10월부터
1954년 4월까지 문교부장관을 역임한 김법린 이후로 불교 쪽에서도 장관
을 배출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34)
항상 그렇듯이, 동지를 만드는 과정은 적을 만드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승만이 권력기반을 구축하고 공고화하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개신교 인맥
에 더욱더 의존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다른 종교 출신 인사들이나 개신교
내 경쟁 분파와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측면이 있었다. 이승만이 직선제 개
헌에 몰두하던 1952년 6월 20일에 있었던 이른바 ‘국제구락부사건’은 좋은
사례이다. 이 사건은 이시영ㆍ김성수ㆍ장면ㆍ신흥우ㆍ조병옥ㆍ백남훈ㆍ서
상일ㆍ전진한ㆍ주요한ㆍ최희송 등 60여 명의 반(反)이승만 원로인사가 부
산 국제구락부에 모여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에 반대하면서 ‘반독재 호헌(護
憲)구국선언’을 시도하다 괴한들의 습격을 받아 중단된 일을 가리킨다.35)
대종교 원로인 이시영과 서상일, 유교 원로인 김창숙, 천주교의 원로인 장
면, 불교의 전진한, 개신교 흥사단계인 조병옥․주요한․최희송36)과 조병
옥의 ‘기독신우회’ 동지였던 백남훈37) 등이 이승만과 정면으로 충돌했던
것이다. 대종교의 이범석도 1952년 부통령선거 낙선 이후 자유당에서 이탈
했고, 역시 대종교 핵심 인사 중 하나로서 초대 문교부장관을 지냈고 이승
만 정부의 지배이데올로기인 ‘일민주의’ 이론가로도 활약한 안호상은 1954
년 5월 총선거 직후 행한 반정부적 발언으로 인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했다.38)
34) 불교신문2005년 8월 24일 참조.
35) 이기택, 같은 책, 41; 편집부, 같은 글, 427.
36) 최희송의 흥사단 활동은, 흥사단70년사편찬위원회, 흥사단운동 70년사(흥
사단출판부, 1986), 133 참조.
37) 민경배, 교회와 민족(대한기독교출판사, 1981), 377 참조.
38) 후지이 다케시, “서평: ‘지도자의 역사’를 넘어서기 위한 첫 걸음,” 역사비
평(2005년 여름), 400.
강인철 / 대한민국 초대 정부의 기독교적 성격 105
3. 정부 정책과 개신교: 특권적 종교로의 도약
족청계 숙청 이후 사실상 사라졌지만, ‘일민주의(一民主義)’는 이승만 정
부 초반기의 지배이데올로기이자 국시(國是)였다.39) 흥미로운 점은, 그러면
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이 대통령이 1949년 4월 20일 중앙방송을
통해 “일민주의 정신과 민족운동”에 관한 담화를 발표하면서 일민주의 4
대 강령 중 첫 번째 강령을 ‘기독교 정신’에 기초하여 설명하고 있는 사실
이다.
(1)은 문벌을 劈破해서 班常의 구별을 없이하므로 등급이나 계급은 물론하
고 동등의 복리와 동등의 권리를 누리게 하자는 것이니…미국 사람들이 유럽
君主政體 압박 하에서 따로 떨어져서 민주주의를 표방할 적에 하나님이 모
든 사람은 다 동등으로 창조했다는 그 사상을 토대로 삼아 민주정체를 건
설한 근본적 정강이므로 이 근본적 주의를 우리가 흡수해야만 과연 우리 민
주주의의 만년 기초가 확고히 잡힐 것입니다.(강조는 인용자)40)
앞에서 보았듯이, 최초의 여당인 대한국민당 창당을 주도하고 이승만
정부의 핵심 실세 중 하나가 되었던 배은희 목사는 한 주간지에 기고한
“나를 왜 일민주의자라 하나”라는 글에서 더욱 포괄적으로 일민주의의 기
독교적 기초를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먼저 일민주의의 동기를 말하여 보자. 去今 54년 전 즉 이 박사님의 나이
22세 때에…때마침 기독교를 믿으시고 하나님이 天下人間을 한 血脈으로
즉 동등으로 지으셨다는 聖書를 보시고 大覺하시어서 세계가 일민이며 민
족마다가 일민인데 왜 이러한 차별이 있겠는가, 나는 이 모든 제도를 혁
명하여야 하겠다는 민족적 혁명의 大志를 품고 해외의 40년 생활을 겪으시
고 대통령이 되신 후에 일민주의를 國是로 제창한 것이다.(강조는 인용자)41)
39) 서중석, “이승만 정권 초기 일민주의와 파시즘,” 역사문제연구소(편), 1950
년대 남북한의 선택과 굴절(역사비평사, 1998); 서중석, 이승만의 정치이데
올로기(역사비평사, 2005).
40) 경향신문1949년 4월 22일.
41) 배은희, “나를 왜 일민주의자라 하나,” 주간서울1949년 12월 5일.
106 한국기독교와 역사제30호(2009년 3월 25일)
이승만은 대통령이 되기 훨씬 이전부터 기독교를 나라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는 확신을 거듭 표명해왔다. 이런 신념은 개신교로 개종 직후부터 나
타나기 시작했다. 그는 1945년 11월 열린 ‘임시정부영수환영대회’에서도
“이제 우리는 신국가(新國家) 건설을 할 터인데, ‘기초 없는 집을 세우지
말자’ 곧 만세반석 되시는 그리스도 위에 이 나라를 세우자!”고 외쳤다.42)
이승만은 그 얼마 후인 1946년 3월 1일에 민주의원 주최로 열린 ‘제27회
독립선언기념식’에서 의장 자격으로 행한 개회사를 “한민족(韓民族)이 하나
님의 인도 하에 영원히 자유독립(自由獨立)의 위대한 민족(民族)으로써 정의
와 평화와 협조의 복을 누리도록 노력합시다”라는 말로 마무리했다.43) 이
승만은 (5․10선거로 초대 국회의원이 선출된 가운데) 1948년 5월 27일 소집된
‘국회의원 예비회의’에서 임시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이 회의를 통해 다
음과 같은 국회의원 ‘선서문’을 통과시켰다.
본 의원은 한국재건과 자주독립을 완수하기 위하여 헌법을 제정하고 국민
정부를 수립하며 남북통일의 대업을 완성하여 국가 만년의 기초를 확립하고
국리민복(國利民福)을 도모하여 국제친선과 세계평화에 최대의 충성과 노력을
다할 것을 이에 하나님과 순국선열과 3천만 동포 앞에 삼가 선서함.(강조
는 인용자)44)
이 선서문은 5월 31일의 국회개원식에서 거의 수정 없이 낭독되었다.
당시 많은 국회의원들은 ‘하나님’의 의미를 제각기 달리 해석했을 가능성
이 있지만, 선서 전의 다음과 같은 사전행사로 인해 ‘기독교의 하나님’으
로 의미가 좁혀지고 말았다. 5월 31일 오전에는 국회개원식에 앞서 의장단
선출이 진행되었는데, 임시의장으로 추대된 이승만은 간략한 인사말과 함
께 국회의원 전원을 자리에서 일어서게 하고 이윤영 목사로 하여금 기도
를 바치도록 했다.
10시 25분에 임시의장 이 박사가 등단하여 ‘대한민국 독립민주국회 제1차
42) 김유연, “임시정부 영수들의 주신 말씀,” 활천229호(중간호)(1946년 1월), 4.
43) 동아일보1946년 3월 2일.
44) 조선일보1948년 5월 28일; 동아일보1948년 5월 28일.
강인철 / 대한민국 초대 정부의 기독교적 성격 107
의회를 열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바이다. 먼저 서울시 종로갑구 국회
의원 李允榮 씨 나와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기 바란다.’고 이 씨를 지명하여
총 기립 하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게 하자 이윤영은 요지 다음과 같은 앞날
의 독립과 행복을 비는 기도를 올리었다.
“인간의 역사를 승리의 길로 이끄시는 하나님이 민족을 보호하여 주시고
이 땅을 돌보아 주시와 감격의 이 날을 맞이하게 하여 주시니 감사하나이다.
우리 민족은 오랜 시일에 걸쳐 괴로움에 잠겨 있었습니다. 정의로 이끄시는
하나님은 이제 세계만방에 양심을 부르짖으시고 우리의 영원을 부르시와 이
날이 오게 한 것은 하나님의 天示로 알고 감사하나이다. 원컨대 우리의 민족
과 함께 앞으로 길이 독립을 주시고 평화를 세계에 펴게 하시와 하나님의 뜻
을 받드러 성스럽게 글자 그대로 나라에 봉임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중책
을 느끼고 무력함을 느끼오니 더욱 보호하여 주시와 이제 국회가 성립되며
세계가 주시하며 기다리는 우리 독립문제가 완수되어 자손만대에 빛나는 역
사를 전하는 자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45)
이어진 순서에서 이승만이 초대 국회의장으로, 신익희와 김동원이 부의
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날 오후에는 국회개회식이 열렸는데, 국회의장 이승
만의 개회식사는 “우리가 오늘 우리 민국 제1차 국회를 열기 위하여 모인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이 있게 된 데 대하여 첫째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둘
째 애국선열들의 희생적 혈전한 공적과 셋째로는 우리 우방들 특히 미국
과 국연의 공의 상 원조를 깊이 감사치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는 말로
시작하여, “지금은 대한민국의 안위와 3천만 민중의 화복이 전혀 우리 각
개인의 손에 달렸으니…최후 1인 최후 1각까지 분투하여 나갈 것을 우리
가 하나님과 3천만 동포 앞에서 일심맹서합시다”라는 말로 끝났다. 이어진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의 축사 역시 “여러분의 모든 중한 의무이행에
있어 하나님의 편달과 축복이 있기를 빕니다”는 말로 마무리되었다.46) 대
한민국 국회가 목사의 기도로 시작된 것도 이례적인 일이지만, 국회가 처
음 열리는 날에 이승만 의장에 의해 4번, 이윤영 목사에 의해 4번, 국회의
원 전원에 의해 1번, 하지 중장에 의해 1번 등 모두 10번이나 ‘하나님’이
공식 언급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일 수밖에 없다.
1948년 7월 24일에 중앙청 앞 광장에서 열린 정부통령 취임식에서 이승
45) 서울신문1948년 6월 1일; 조선일보1948년 6월 1일.
46) 서울신문1948년 6월 1일; 동아일보1948년 6월 1일; 경향신문1948년 6
월 1일.
108 한국기독교와 역사제30호(2009년 3월 25일)
만이 낭독한 취임사의 서두는 다음과 같았다.
여러 번 죽었던 이 몸이 하나님의 은혜와 동포의 애호로 지금까지 살아
있다가 오늘에 이와 같이 영광스러운 추대를 받는 나로는 일변 감격한 마음
과 일변 감당키 어려운 책임을 지고 두려운 생각을 금하기 어렵습니다.…오
늘 대통령 선서하는 이 자리에 하나님과 동포 앞에서 나의 직책을 다하기
로 한층 더 결심하며 맹세합니다.(강조는 인용자)47)
이승만 정부의 출범 당시부터 기독교적 색깔은 너무도 뚜렷했던 것이
다. 기독교를 국가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는 이승만의 신념은 다양하게 정
책으로 표출되었다. 교회 역시 국가 안에 기독교적 가치를 주입하려는 노
력을 계속했으며, 많은 경우 이런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1952년 8월의 정
부통령선거를 앞두고 한국기독교교회연합회(KNCC)가 조직한 ‘기독교선거
대책위원회’는 이승만을 대통령에 추대하는 이유로, 기독교계의 요청을 수
용하여 국기경례를 주목례(注目禮)로 대신하도록 고쳤고, 국군에 군목제도
를 설치했으며, 국가의식을 기독교식으로 지령하는 등 “기독교를 옹호하는
대통령”이라는 점을 들었다. 그리고 당시 「기독공보」는 “이승만 후보에 대
하여”라는 사설을 통해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매일 아
침 5시에 예배드리고 감옥전도제, 종군목사제, 국기주목례를 제정하여 전
도의 길을 열어준 신앙인”이요, “과거 4년간 호교(護敎)의 도움을 입음이
컸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48)
이를 종합하면, ① 국기에 대한 경례 방식을 종전의 배례(拜禮) 혹은 최
경례(最敬禮) 방식에서 주목례의 방식으로 바꾼 점, ② 군종제도를 도입한
점, ③ 국가의례를 기독교식으로 제정한 점, ④ 형목제도를 도입한 점이
된다. 이 가운데 형목제도는 미군정 시기에 도입된 것으로 이승만 정부가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이렇게 따지면, 미군정 하에서 공휴일로 지내던 성
탄절을 새 정부에서도 그대로 공휴일로 인정한 사실 역시 당연히 포함되
어야 할 것이다.49) 성탄절의 공휴일 인정은 국가력(國家曆) 안에 기독교적
47) 서울신문1948년 7월 25일; 동아일보1948년 7월 25일; 경향신문1948년
7월 25일; 조선일보1948년 7월 25일.
48) 김흥수, “해방 후 한국전쟁과 이승만 치하의 한국교회,” 기독교사상(2006
년 2월), 209에서 재인용.
49) 자유신문1945년 10월 19일; 동아일보1949년 5월 27일 참조.
강인철 / 대한민국 초대 정부의 기독교적 성격 109
색채를 주입할 뿐 아니라, 매년 연말(年末)마다 국민 전체의 일상적인 생활
리듬에도 영향을 주는 일이기에 매우 중요하다. 당시 대한민국에서 종교적
성격을 띤 공휴일은 개천절과 성탄절 두 가지였으며, 국가력 안에서 ‘공휴
일(公休日)’에 불과한 성탄절에 비해 ‘국경일(國慶日)’인 개천절의 위상이 더
욱 높았다. 그러나 성탄절 행사가 갈수록 화려해진 데 반해, 개천절은 이
승만 대통령에 의해 사실상 푸대접을 받는 처지였다. 정부수립 이후 개천
절 행사 장소는 서울운동장(1945∼1947년)에서 강화도 전등사 앞마당으로
밀려났으며, 이승만은 강화도에서 거행되는 개천절 행사에 한 번도 참여하
지 않았다. 개천절이 국가경축일로 지정된 이틀 후 맞는 개천절에 발표한
대통령 경축사에서, 이승만은 단군은 신이 아닌 인간이며, 따라서 단군신
앙은 ‘미신’(迷信)에 불과하며, ‘단기연호’(檀紀年號)도 점차 폐지하고 ‘기미
독립운동 연호’로 대체해야 한다고 역설했다.50) 이승만으로선 기독교인다
운 언행이었겠지만, 아마도 대종교를 비롯한 많은 단군 숭배 종교인들은
대통령의 ‘경축사’를 심각한 모욕으로 느꼈을 것이다.
미군정 시기부터 시작되었지만 이승만 정부에 의해 허용되어 계속된 또
다른 친(親) 개신교적 정책은 ‘국영방송’을 통한 선교활동이었다. KBS의
전신인 서울중앙방송국(HLKA)을 통한 선교방송이 그것이었다. 이것이 정
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1945년 11월 말에 열린 조
선기독교남부대회의 결의사항에 “중앙방송국에 교섭하야 일요강좌를 한
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51) 그 직후부터 시작되었던 것으
로 추측된다. 중앙방송을 통한 선교방송은 1954년 12월 기독교방송(CBS)이
개국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선교방송은 처음에는 개신교에게만 주어진 특
권이었으나, 얼마 후 다른 종교들에게도 허용된 것으로 보인다.52) 그러나
월 2∼3회 선교방송의 기회를 가졌던 다른 종교들에 비해 매주 방송에 참
여한 개신교는 더욱 자주 방송선교의 기회를 누렸고, 프로그램 또한 더욱
다채로웠던 것으로 보인다. 개신교는 설교 방송만이 아니라, 성가(聖歌) 프
로그램과 성극(聖劇) 프로그램도 방송을 통해 내보낼 특권을 누렸으며, 나
50) 서울신문1949년 10월 5일.
51) 기독교공보1946년 1월 17일.
52) 엄요섭, 교회와 사회(종로서적출판주식회사, 1986), 320; 강천봉, 앞의 책,
612; 경향잡지(1947년 3월), 44; 가톨릭청년(1955년 11월), 75 참조.
110 한국기독교와 역사제30호(2009년 3월 25일)
아가 대북 심리전 방송에도 참여했던 것이다.53)
이승만 정부는 나아가 교회가 한국 최초의 민영방송국을 설립하고 이후
운영자금을 조달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교회는 1949년 당시 군산교회
장로였던 체신부장관(윤석구),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의 도움을 얻어 비교적
손쉽게 전파사용 허가와 사설방송국 설립 허가를 얻어냈다.54) 그러나 전
쟁 발발로 방송국 설립은 지연되어 1954년 4월 체신부의 설립 인가를 다
시 받고 그 해 12월 15일에 호출부호 HLKY로 저녁 6시부터 10시 30분까
지 4시간 30분씩 방송을 개시했다. 이후 방송시간은 오전까지 확대되었
다.55) 개국 이후 운영자금은 미국과 캐나다 교회의 지원에 의존했지만, 이
승만 정부의 승인을 얻은 광고방송을 통해서도 조달했다고 한다.56) 클래
식음악 방송과 연속극이 대단한 인기를 누림으로써 기독교방송은 1950년
대 후반에 “가장 청취율이 높은 방송”으로 올라섰다.57) 기독교방송이 교회
의 사회적 공신력을 높이고 교세를 신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음은 물론이
다.58)
한편 개신교와 천주교만의 참여로 전쟁 중인 1951년 초부터 시행에 들
어간 군종제도 그리고 오로지 개신교에만 허용된 형목제도는 타종교의 참
여가 봉쇄되었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기독교국가’에서나 가능할 특혜였
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성원이 공무원의 신분으로 핵심적 국가기구 안으
로 직접 들어감을 뜻하므로, 교회의 대표자들에 의해 국가기구 안으로 기
독교적 가치들이 끊임없이 주입됨과 동시에, 이 제도들은 교회조직과 국가
조직의 부분적 중첩에 의해 양자 간의 긴밀한 교류와 협력 관계를 보증하
53) 엄요섭, 같은 책, 319-320; 전택부, 한국에큐메니칼운동사(한국기독교교회
협의회, 1979), 347 참조.
54) 기독교방송, 기독교방송 자료[기독교방송, 1985.4(미간행 자료)], 3032;
엄요섭, 같은 책, 320-321; 자유신문1950년 5월 28일 등 참조.
55) 기독교방송, 같은 책, 32.
56) 기독교방송, 같은 책, 48; 엄요섭, 같은 책, 323.
57) 기독교방송, 같은 책, 323; 강인철, “한국전쟁과 사회의식 및 문화의 변화”,
윤해동 외 (편), 근대를 다시 읽는다(1): 한국 근대 인식의 새로운 패러다임
을 위하여(역사비평사, 2006), 408; 권순일, 한국방송의 어제와 오늘(나남,
1991), 26.
58) 1958년에 실시된 기독교방송 자체 조사에 따르면, 기독교방송 청취자의
40% 이상이 무종교인이었고, 청취자의 60% 이상이 무종교인 혹은 타종교인
이었다[김재복, “매쓰메디아와 전도의 효과,” 기독교사상(1959년 1월), 42].
강인철 / 대한민국 초대 정부의 기독교적 성격 111
는 것이기도 하다. 또 군대와 형무소가 지닌 특수성으로 인해 기대 이상의
선교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물론이고, 3년간의 전쟁기간에는 군종제도가
포로수용소 선교, 군병원 선교까지 포함하고 있었다.59) 미리 예측할 수는
없었겠지만, 군종제도를 통한 군부-교회 간 교류는 1961년부터 무려 30여
년이나 계속될 군부엘리트 통치체제에 대해 안전한 보험을 들어놓는 셈이
기도 했다.
‘국가의례의 기독교화(Christianization)’는 국회의원 취임선서, 국회개원식,
대통령 취임사 등에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48년 10월부터
1949년 7월까지 국가적인 장례식이 세 차례 있었다. 정부 수립 후 처음 맞
이한 국가적인 장례식은 1948년 10월 16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내판역
(內板驛) 열차사건 미군인 희생자 국민조위회(國民弔慰會)’였는데, 이 행사는
개신교 지도자들에 의해 개신교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외무부와 공보처 고
문이었던 윤병구 목사의 장례식 역시 1949년 6월 24일 새문안교회에서 개
신교 방식으로 치러졌다. 국무회의를 통해 대통령령으로 ‘국민장’으로 선
포된 최초의 장례였던 김구의 장례식은 1949년 7월 5일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되었다. 중앙부처 장관급 인사들이 장의위원회의 주축을 이뤘던 앞의
두 장례식과는 달리 김구의 장례식은 애초 ‘동지장(同志葬)’을 추진했던 재
야원로들이 주축이었고,60) 따라서 장의절차도 (개신교 방식이 아니라) 당시
의 일반적인 관례에 따라 진행되었다. 세 장례식의 ‘장의절차’를 소개하면
【표 2】와 같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에도 “국군장병의 ‘위령제’를 ‘추도식’으로 개칭할
것”(1952년 4월의 장로교 37회 총회), “‘충영탑’이란 명칭을 ‘기념탑’으로 변경
할 것”(1953년 4월의 장로교 38회 총회), “3․1절 기념행사의 ‘33인 합동추념
식’에서 33인 중 기독교인이 다수이므로 ‘분향(焚香)’을 실시하지 말
것”(1955년 4월의 장로교 40회 총회) 등으로 국가의례와 관련된 교회의 요구
사항이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61) 한편 국기경례 문제는 1949년 초부터 발
59) 서울신문1949년 8월 7일, 1949년 8월 12일; 김양선, 한국기독교 해방 10
년사(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종교교육부, 1956), 109 등 참조.
60) 조선중앙일보1949년 6월 28일, 1949년 6월 29일, 1949년 6월 30일; 서울
신문1949년 6월 29일.
61) 해당 총회회의록 참조.
112 한국기독교와 역사제30호(2009년 3월 25일)
【표 2】내판역 미군 희생자, 윤병구, 김구의 장의절차
미군 희생자 장례식
-1948.10.16
-중앙청 광장
① 조악(弔樂), ② 애국가와 미국국가 봉창, ③ 성경낭독
(최거덕 목사), ④ 개식사(이훈구 의원), ⑤ 조악(구세군
악대), ⑥ 조사(대통령, 국회의장, 교통부장관, 서울시장),
⑦ 조가(弔歌)(서울합창대), ⑧ 조악, ⑨ 기도와 축복(양
주삼 목사)
윤병구 장례식
-1949.6.24
-새문안교회
① 조악, ② 개식사(외무부장관), ③ 찬송가(이화합창대),
④ 기도, ⑤ 성경낭독, ⑥ 설교, ⑦ 약력보고(공보처장),
⑧ 조사(대통령), ⑨ 찬송가, ⑩ 조악
김구 장례식
-1949.7.5
-서울운동장
① 조포(弔砲), ② 국기경례, ③ 애국가 봉창, ④ 주악
(합동군악대), ⑤ 개식사(오세창 대리 조소앙), ⑥ 약력
보고(유림), ⑦ 조가(학생연합합창단), ⑧ 분향(조완구),
⑨ 헌화(김규식), ⑩ 명복을 비는 배례, ⑪ 조사(국무총
리, 대통령 대리 공보처장, 부통령 대리 비서실장, 김규
식, 엄항섭, 유엔한위 대표, 외국사절단 대표, 중국영사),
⑫ 분향(아들 부부), ⑬ 묵상, ⑭ 조악(서울교향학단), ⑮
조총(弔銃)
* 출처: 「서울신문」1948년 10월 17일, 1949년 6월 22일; 「경향신문」1949년 7월
5일.
생하여 약 1년 후에 교회가 원하는 방식으로 해결되었다. 국기에 대한 배
례 강요는 정부 수립 직후부터 행해졌던 것으로 보이며, 다만 1949년 봄부
터 이 문제가 뜨거운 쟁점으로 공론화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문교부와 안
호상 장관은 국기배례를 거부한 개신교인 학생들에 대한 학교 당국의 퇴
학 처분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던 반면, 개신교 측은 기존의 배례 방식이
‘국기의 우상화’를 조장한다면서 국기경례 방식의 변경을 요구하고 나섰
다. 1949년 4월 19∼23일 열린 장로교 제35회 총회, 1949년 5월 6일 장로
교와 감리교 대표 8명이 국무총리 등 각 부처 장관을 만나 퇴학 처분의
부당성을 강조하면서 학생들에 대한 선처를 호소했던 일, 1949년 5월 17일
열린 한국기독교연합회 집행위원회, 1950년 4월 19일 열린 감리교 총리원
의 ‘이사-감리사 연석회의’ 등이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교계 움직임이었
다.62) 전쟁 직전인 1950년 4월 25일에 정부는 국기경례 문제에 대한 교회
62) 자유신문1949년 5월 8일; 연합신문1949년 5월 13일; 자유신문1949년 8
월 23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제35회 회의록,
52, 73-77; 동광신문1949년 5월 22일; 대한감리회보1950년 5월10일, 115
강인철 / 대한민국 초대 정부의 기독교적 성격 113
의 요구를 전격적으로 수용했다. 대종교 핵심 인물이 장관으로 있던 문교
부에 대한 교회의 승리였으며, 공교롭게도 문교부장관은 이 결정이 내려진
지 열흘 후인 1950년 5월 4일 백낙준 목사로 교체되었다. 당시 「대한감리
회보」에 인용된 「동아일보」의 기사는 다음과 같았다.
지난 25일(1950년 4월 25일―인용자) 개회한 국무회의에서는 종전에 실시
하고 있던 국기에 대한 예식을 변경하기로 결정하였다. 즉 우리가 국기에 대
하여 존경하며 애국심을 가지는 것은 국기가 민족을 대표하는 상징인 까닭인
데 종래 우리가 허리를 꾸부리고 배례하는 것은 일제식이고 우상숭배의
형식에 가까우므로 금번에 이를 변경하여 다만 국기에 대하여 주목하면서
부동자세로 ‘차렷’한 후에 오른편 손을 왼편 가슴 심장 위에 대기로 하였
다. 그런데 군인 및 경찰관만은 종전 예식대로(거수경례 방식―인용자) 실시
하게 되었다 한다. 또한 각종 의식 때에 묵도는 일체 폐지하기로 되었다 한
다.(강조는 인용자)63)
이른바 ‘주일성수(主日聖守)’를 관철하는 데서도 교회는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일요일에 이루어지는 학교행사나 국가가 주관하는 각종 시험이나
행사, 예비군 소집 등의 쟁점은 박정희 시대는 물론이고 현재까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쟁점으로 남아 있다. 이승만 정부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
나 교회의 주일성수 의지가 관철된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그 하나는 잘
알려진 초대 국회의원 선거일 문제였다. 1948년 3월 9일 장로회 총회를 비
롯한 13개 개신교 단체들이 공동으로 항의성명을 발표하는 등 교회는 대
대적인 주일선거 반대운동을 전개했다.64) 결국 선거일은 교회의 요구대로
일요일을 피해 5월 10일로 결정되었다. 다른 한 가지 사건은 잘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서, 1949년에 이승만 정부가 일요일과 겹친 ‘제헌절 1주년 기
념식’을 하루 연기하여 월요일에 거행하기로 결정한 일이었다. 당시 정부
의 이런 일방적인 결정에 대해 장홍염ㆍ최운교 의원을 비롯해 국회의원
다수가 강하게 반발했다.65) 이런 반발에도 불구하고 제헌절 1주년 기념식
등 참조.
63) 대한감리회보1950년 5월 10일, 7.
64) 이영헌, “나와 기독공보 시절(3),”한국기독공보1971년 7월 31일, 3; 조
선일보1948년 3월 9일; 경향신문1948년 3월 9일.
65) 제4회 국회속기록제12호(대한민국국회, 1949년 7월 16일), 196-199.
114 한국기독교와 역사제30호(2009년 3월 25일)
은 월요일인 7월 18일 오전 중앙청 광장에서 거행되었다.66)
첩(妾)을 둔 자가 공무원이 될 수 없도록 한 조치, ‘미신타파운동’이나
‘사이비종교’ 추방 움직임도 교회의 요구가 수용된 사례들이다. 1949년 7
월 국회에서 ‘국가공무원법안’의 공무원 자격 제한조건에 “축첩(蓄妾)한
자”를 포함시키려던 개신교인 국회의원들의 시도는 결국 실패했지만, 같은
해 12월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측의 요구를
전격적으로 수용했다.67) 한편 1947년 4월에 열린 장로교 33회 총회는 공
창(公娼) 폐지, 양주와 음주 제한, 흡연 제한, 아편 재배와 취급 제한 등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미신을 타파할 것”을 요구한 바 있다.68) 정부수립 직
후부터 사회부, 문교부, 경찰, 서울시 등 지방정부 등이 나서 ‘미신타파’,
‘사이비종교 단속’ 작업이 파상적으로 계속되었다.69) 특히 1948년 12월 사
회부장관에 오른 이윤영 목사는 1950년 3월까지 재임하는 동안 ‘미신타파
주간’을 정하는가 하면 ‘신생활운동’을 전개하고, 무당조합을 해산하고 ‘무
당계몽대회’를 개최하는 등 이런 움직임에 가장 열심이었다. 당시 정부는
‘사이비종교’, ‘사교(邪敎)’, ‘유사종교’, ‘미신’ 등의 용어를 거침없이 사용했
다. 이런 사회적 낙인찍기(social labeling)와 그에 따른 통제․배제는 그 자체
가 교회의 요구를 국가가 수용한 것일 뿐 아니라, 그런 낙인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전무(全無)한 ‘조직화된 종교’, ‘권력화된 종교’에 절대적으로 유
리한 것이기도 했다.
이승만은 종종 교회에 직접적인 도움을 제공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교
회 인사에게 훈장이나 감사장 등을 수여하는 것과 같은 ‘정신적-상징적인’
도움,70) 그리고 좀더 ‘실질적-물질적인’ 도움도 포함된다. 이승만의 물질적
인 도움은 1950년대 후반에 집중되었는데, 예컨대 YMCA, YWCA, 배재대
학, 감리교단 등이 주된 수혜자였다. 사실 이런 물질적 도움을 제대로 밝
66) 경향신문1949년 7월 19일.
67) 경향신문1949년 7월 22일; 자유신문1949년 12월 10일, 1949년 12월 11
일.
68)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33회 회의록, 9.
69) 서울신문1948년 7월 7일, 1949년 10월 31일; 대구시보1949년 3월 6일;
동광신문1949년 9월 15일; 동아일보1949년 10월 11일; 한성일보1949년
10월 11일, 1949년 12월 29일; 조선일보1950년 1월 26일; 국도신문1950년
2월 9일 등 참조.
70) 경향신문1950년 3월 16일; 김양선, 같은 책, 122-128 등 참조.
강인철 / 대한민국 초대 정부의 기독교적 성격 115
히려면, 미국으로부터 달러화로 들어온 선교자금과 관련된 외환정책 그리
고 귀속재산 혹은 적산(敵産)의 처리ㆍ배분 과정에서 교회가 받은 혜택 등
이 보다 상세히 밝혀져야 하고, 이는 1950년대의 한국교회 연구에서 여전
히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해방 직후 영락교회를 비롯한 많은 교회
들이 천리교(天理敎) 부지와 시설을 인수 받아 설립된 것은 잘 알려진 사
실이고, 이밖에도 다른 유사한 사례들이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1947년 4
월의 장로교 총회도 “기독교사업을 위하여 적산 중에서 불하할 것”을 정
부와 교섭할 결의사항으로 채택하는 등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71) 교회 인맥을 이용해 적산이나 무역에 접근하여 했던 이들도 꽤
있었을 것이다.72)
마지막으로, 그동안 거의 주목되지 못했던 쟁점으로서, 이승만이 반민족
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앞장서 무력화시켰던 것이 교회의 생존과
위상에 생각보다 큰 도움을 준 것처럼 보인다는 점을 강조해야 할 것 같
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국교회는 해방 직후 ‘친일 잔재 청산’ 문제로
큰 홍역을 치렀다. 그러나 이런 내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친일파로 지목된
이들은 별다른 처벌이나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반민특위가 가동된
이후 예상보다 훨씬 많은 교회 인사들이 줄줄이 ‘반민(反民) 피의자’로 체
포되거나 입건되었다. 최근의 연구들에 의해 밝혀진 ‘반민 피의자’ 657명
의 명단과 경력을 활용하여 종교 소속이 확인되는 이들을 정리해보면,【표
3】과 같다.
【표 3】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얼핏 보더라도 반민 피의자 중 개신교
계 인사들이 다른 종교에 비해 월등하게 많았다. 한편 반민특위 조사위원
이나 검찰부, 재판부에도 다수의 개신교 인사들이 포함되었다.73) 교회 인
사들끼리 조사위원ㆍ검사ㆍ판사 대(對) 피의자로 대면하는 일도 당혹스럽
71)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33회 회의록, 9.
72) 앞으로 더 많은 증거들이 수집되어야겠지만, 예컨대 대광중학교를 내세워
동대문피복공장을 헐값에 불하받아 근로자들의 반발에 직면하고 미국 선교사
를 통해 유류()수입을 기도했던 김성호의 사례 등이 당시 언론에 보도된
바 있다. 조선일보1948년 9월 1일; 국제신문1948년 10월 2일 참조.
73) 김상돈이영준윤재욱송필만송진백이문원장기영김준연김효석
이종순서용길오택관이춘호김정호이기룡김우종정준함태영
등이 그들이다. 이강수, 반민특위 연구(나남출판, 2003), 105-108, 123-124,
128, 129-131, 138-140, 147-148, 150, 152 등 참조.
116 한국기독교와 역사제30호(2009년 3월 25일)
지만, 이런 상황 자체가 교회의 공신력과 신망에 치명적 상처를 입힐 수도
【표 3】반민 피의자의 종교별 구성
개신교
강낙원, 강진하(목사), 고희(황?)경, 김길창(목사), 김동만(목사),
김영환(목사), 김온준(목사), 김용제, 김인선(목사), 김필순(목사),
김창준, 박희도(전도사), 송상석(목사), 신봉조, 신용욱, 심형구,
안인식(목사), 양주삼(목사), 오긍선, 오현주, 이강혁, 이동욱(목
사), 이여식(목사), 이정립(목사), 이종영, 이중화, 이취성, 이현
경, 임병석(목사), 장권, 전인선(목사), 전필순(목사), 정병조, 정
인과(목사), 정춘수(목사), 주요한, 차광석(목사), 한석원(목사)
불교
권상로(승려), 변설호(승려), 양정묵(승려), 한능해(승려), 허기엽
(승려)
천도교 이종린, 정광조, 최린
유교 주병환, 한창동
신도 이산연, 최지환
기타(미상) 김준희, 이성근
* 출처: 이강수, 반민특위 연구(나남출판, 2003), 340-421의 “부록: 반민 피의
자 명단”; 허종,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친일파 청산 그 좌절의 역사
(선인, 2003), 380-431의 “별표: 반민특위 취급자의 친일 경력과 처리 내
용”.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1949년 4월 15일 반민특위는 조사활동에만 전념
하고 ‘특경대’를 해산하라고 요구하는 담화문을 발표하면서, 반민 피의자
중 유독 양주삼 목사를 거명하여 반민특위가 공연히 “국제문제”를 일으키
고 있다고 맹렬히 공격했다.74) 이 담화는 반민특위의 해체로 이어지는 도
화선이 되었다.
4. 맺음말: 정치지형 변동의 종교적 결과
대략 1948∼1954년의 이승만 정부 전반기 동안 교회는 ‘이승만에 대한
74) 서울신문1949년 4월 1일. 그리고 이로 인해 개신교 지도자 중 한 사람으
로 반민특위 부위원장이었던 김상돈 의원은 기자회견에서 기자들로부터 “양
주삼 목사를 체포하여 국제문제가 되었다”는 추궁을 당해야 했다(평화일보
1949년 4월 24일).
강인철 / 대한민국 초대 정부의 기독교적 성격 117
일편단심’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정부 수립과 공고화에 매진했고, 그럴수
록 이승만 정부의 기독교색 색채는 짙어졌다. 급격한 정치지형 변동을 거
치면서 정치영역 내에서 ‘개신교의 독주체제’가 형성되었다. 이승만 정부
의 후반부는 이런 상황이 더 심화되는 과정이었다. 이승만 정부와 천주교
의 관계는 갈수록 악화되었으며, 장면이 민주당에 가담하여 ‘신파(新派)’의
수장이 된 이후 천주교가 운영하는 대구매일신문사와 경향신문사가 정부
로부터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또 노기남 대주교를 ‘정치주교’로 공격하면
서 주교를 교체해달라고 교황청에 청원함으로써, 이승만은 장면을 후원하
는 노 주교를 압박했다. 불교에 대해서는 1954년부터 이른바 ‘정화유시(淨
化諭示)’를 여러 차례 발표하면서 경찰 등 공권력을 동원하여 격심한 내분
을 조장했고, 1956년부터는 자유당을 동원하여 김창숙이 이끄는 유교를 분
규의 수렁으로 몰아넣었다. 일제강점기에 제정된 ‘사찰령’은 이승만 정부
에서도 유지되었으며, 미군정기에 (‘향교재산관리규칙’을 대신하여) 제정된
‘향교재산관리에 관한 건’도 이승만 정부에서 지속되었다.75)
결국 정치지형 변동의 종교적 결과는 “기독교 중심 사회로의 급속한 전
환”일 수밖에 없었다. 정치지형 변동과 맞물린 종교지형의 변동은 평면적
으로도, 또한 입체적으로도 진행되었다. 우선, 종교지형의 ‘평면적’ 변화는
“개신교의 급팽창” 내지 “종교시장 내 개신교의 점유율 확대”로 나타났다.
해방 직후 한국사회에서는 불교, 천도교, 유교, 대종교, 개신교를 가리켜
‘5대 종교’라고 했고, 여기에 천주교를 포함시켜 ‘6대 종교’라고 부르기도
했다. 정부 수립 이후 1950년대 중반까지 종교지형의 급격한 변동을 이끈
주역은 개신교, 천도교, 대종교, 유교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대종
교와 천도교는 급속한 교세 축소를 경험했다. 유교의 경우에도 도시화와
전쟁으로 인한 전면적인 인구이동, 농지개혁 등이 이 종교의 사회적 기반
이었던 동족부락(同族部落)과 대가족제도의 빠른 해체를 초래함으로써 교세
의 급속한 약화를 겪어야 했다. 반면에 개신교는 1945년 당시 10∼15만 명
정도에 불과하던 남한지역 신자 수가 1950년경에는 50만 명을 넘어섰고,
1955년에는 100만 명을 돌파함으로써 불교에 이어 제2의 교세를 가진 종
교로 급성장했다.76)
75) 강돈구, “광복 후 한국의 사회변동과 종교,” 한국종교제22집(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1997), 211-212.
118 한국기독교와 역사제30호(2009년 3월 25일)
【표 4】이승만 정부 시기 종교지형의 위계적 재편
종교
특권적
종교
개신교
형목제도, 군종제도, 성탄절,
방송선교. 국가 고위직에
지속적 참여
천주교
군종제도, 성탄절, 방송선교.
고위직에 참여했으나 1952
년 이후 배제됨
준(準)특권적
종교
대종교
개천절, 방송선교. 고위직에
참여했으나 1951∼1953년에
걸쳐 배제됨
비(非)특권적
종교
불교
국가의 법적 통제와 내분
조장
유교
국가의 법적 통제와 내분
조장
천도교
국가의 중도좌파 인사(청우
당 계열) 숙청
기타 종교
비(非)종교
사이비종교 대다수 신종교들 국가에 의한 통제
미신 무속, 민간신앙
국가에 의한 통제(미신타파
운동 등)
종교지형 변동은 ‘입체적’으로도 진행되었는데, 이는 “개신교를 정점으
로 한 종교지형의 위계적 재편”으로 나타났다(【표 4】참조). 일단 ‘종교’로
인정을 받고, 나아가 법인(法人)으로까지 등록할 경우 면세 혜택을 누릴 수
있고, 이런 ‘종교’들은 한국전쟁 중에 진행된 농지개혁에서도 별다른 불이
익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종교’ 중 가장 많은 정치권력 접근 기회와
특권을 누리는 자리에는 당연히 개신교가 위치할 것이다. 반대로, 사이비
종교, 미신 등의 낙인 대상인 ‘비(非)종교들’이 종교적 위계의 밑바닥에 위
치하게 될 것이다. 그 바로 위에는 현재는 ‘종교’ 대접을 받고 있을지라도,
언제든 사이비종교‧유사종교의 낙인이 찍혀 ‘비종교’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릴 수많은 종교들이 위치하게 될 것이다.
이승만 정부 하에서 교회와 신자들은 권력자와의 과도한 일체화로 나아
갔다. 교회는 온갖 영예를 누렸고, 신자들에게도 교회의 일원이라는 사실
76) 강인철, 한국 기독교회와 국가·시민사회: 19451960, 248-250; 강인철, 전
쟁과 종교(한신대학교 출판부, 2003), 6장 참조.
강인철 / 대한민국 초대 정부의 기독교적 성격 119
은 자부심의 원천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토록 강성하던 정권이 하루아침
에 붕괴위기에 직면하자 신자들은 한편으론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이렇게
애써 자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아랫놈들이 나쁘지, 그 어른이야
어디 그럴 리 있나? 아랫놈들이 다 숨겨서 모르셨거든.”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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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장하구, “혁명과 교회의 반성,” 사상계(1960년 6월), 220.
투고ㆍ접수일 : 2009.1.10 심사완료일 : 2009.1.25 게재 확정일 : 2009.1.29
120 한국기독교와 역사제30호(2009년 3월 25일)
국문초록
이 글은 ‘종교정치’가 대단히 활발했던 이승만 정부 전반기의 종교적 성격과 국
가-교회 관계를 분석하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필자는 이 글에서 (1) 이승만 정
부 핵심 구성원들의 종교적 구성과 개신교적 색채, (2) 이승만 정부 정책의 친개신
교적 성격이라는 두 가지 쟁점에 집중했다.
먼저, 이승만 정부가 정치지형의 역동적인 재편을 통해 ‘개신교 정권’의 성격을
강화해가는 과정이 이승만이 구사한 종교적 동맹 혹은 배제 전략을 통해 분석되었
다. 필자는 (1) 거국내각과 여당의 형성(1948.8∼1950.6), (2) 전시체제를 위한 야당
과의 일시적 제휴 및 배제(1950.7∼1951.5), (3) 야당과의 대립, 장면과의 갈등 심화
와 배제(1951.6∼1952.4), (4) 족청계와의 제휴와 배제, 이승만 일인지배체제의 확립
(1952.5∼1953.12)라는 네 개의 시기로 구분하여, ‘정치지형 재편의 종교적 측면’을
추적했다. 이 시기에 이승만 정부를 중심으로 대종교-개신교-천주교의 관계, 개신교
내 흥사단계와 동지회계의 관계가 빠르게 변화되어갔다. 요컨대, 이승만 정부 전반
기에 걸쳐 정권 핵심부로부터 대종교, 천주교, 불교계 인사들 그리고 흥사단계 개
신교 인사들이 차례로 축출됨으로써, ‘개신교(특히 동지회계) 중심의 권력구조’가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결국 이승만의 독자적 권력기반 구축이라는 관
점에서 볼 때, 이승만 정부의 ‘개신교적’ 성격은 정부 출범 직후보다는 집권 전반
기의 끝 무렵인 1953∼1954년경에 더욱 선명하게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승만 정부가 내세운 다양한 정책들의 친개신교적 성격이 분석되었
다. 무엇보다, 이승만 정부 전반기의 지배이데올로기였던 ‘일민주의’가 기독교적 성
격을 갖고 있었다. 또 이승만은 대통령이 되기 이전과 이후에 기독교를 나라의 기
초로 삼아야 한다는 확신을 거듭 표명해왔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정기에 도입된
형목제도, 성탄절 공휴일제도, 국영방송을 통한 선교 활동을 유지함으로써 개신교
에 큰 혜택을 제공했다. 국회의원 취임선서, 국회개원식, 대통령 취임식, 국가적인
장례식 등의 주요한 국가의례들이 기독교식으로 제정되거나 거행되었다. 이밖에도,
개신교 교회의 요청에 의해 국기에 대한 경례 방식을 주목례로 바꾼 점, 군종제도
를 도입한 점, 교회가 한국 최초의 민영방송국을 설립하고 이후 운영자금을 조달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점, 이른바 ‘주일성수’를 가능하게 해준 점, 첩을 둔 자가
공무원이 될 수 없도록 한 조치, 미신타파운동이나 사이비종교 추방운동 등도 이
승만 정부가 교회에 제공한 특권들에 포함된다. 교회 인사에게 훈장이나 감사장
등을 수여하는 것과 같은 상징적인 도움, 그리고 재정지원이나 면세 혜택 혹은 적
산불하와 같은 물질적인 도움도 물론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반민특위
피의자 중 개신교계 인사들이 다른 종교에 비해 월등하게 많았다는 점에서, 이승
강인철 / 대한민국 초대 정부의 기독교적 성격 121
만에 의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무력화 조치는 교회가 공신력에 치명적 상처
를 입을 수 있는 상황을 모면하도록 도와주었다.
급격한 정치지형 변동을 거치면서 정치영역 내에서 ‘개신교의 독주체제’가 형성
되었다. 다시 말해, 정치지형 변동의 종교적 결과는 “기독교 중심 사회로의 급속한
전환”으로 나타났다. 정치지형 변동과 맞물린 종교지형의 변동은 평면적으로도, 또
한 입체적으로도 진행되었다. 종교지형의 ‘평면적’ 변화는 “개신교의 급팽창” 내지
“종교시장 내 개신교의 점유율 확대”로, 종교지형의 ‘입체적’ 변화는 “개신교를 정
점으로 한 종교지형의 위계적 재편”으로 나타났다.
주제어: 대한민국 초대 정부, 이승만 정부, 종교정치, 종교정책, 교회-국가 관계,
흥사단과 동지회, 국가의례, 일민주의, 반민특위
Abstract
Syngman Rhee’s Government as a Pro-Protestant Regime
Kang, In-Cheol
This article deals with the church-state relationships in the period of 1948∼1954,
the first half of Syngman Rhee’s presidency. Religious politics was highly activated in
this period. More concretely, in this paper I concentrated on two issues: (1) religious
composition of key members in the Rhee government and ruling party, (2)
pro-Protestantism of the Rhee government policies.
During the period of 1948∼1954, president Rhee skillfully used the strategies of
religious alliance and opposition. His first cabinet was composed of members from
various religions, but non-Protestant politicians belonging to Daejonggyo(대종교),
Catholicism, Buddhism were gradually excluded from the cabinet and ruling party.
Among the Protestant politicians, those who participated in the Young Korean
Academy(Heungsadan) were also the target to be excluded. The Young Korean
Academy was founded and led by Ahn Chang-Ho, who has long been the Syngman
Rhee’s chief antagonist among the Korean Protestant activist groups. Instead, those who
participated in Dongjihwe(동지회) founded and led by Syngman Rhee had became the
key members in Rhee’s government and ruling party. By the year of 1953 or 1954,
122 한국기독교와 역사제30호(2009년 3월 25일)
religious characteristics of Rhee’s government as a Protestant regime were even more
apparent than the beginning of the his government.
Pro-Protestantism of Rhee’s government was also displayed and strengthened by the
various government policies which unfairly favored the Protestant Churches. Surely,
these policies were the benefits in return for the strong support for president Rhee and
his government in the part of Korean Protestant Churches. Above all, dominant
ideology initiated by Syngman Rhee during the first half of his presidency, Ilminjui(일
민주의), was colored by Christian ethics. Moreover Syngman Rhee himself has often
said the need and hope to found new nation on the Christian ground. Besides,
pro-Protestant policies of Rhee’s government includes the introduction of prison and
military chaplainship, of Christmas as a national holiday, changing the way of salute to
the national flag, evangelization through the national broadcasting system, etc. President
Rhee’s unwillingness to punish the pro-Japanese collaborators would have been a great
relief for the Protestant Churches, for there were much more pro-Japanese suspects in
the Protestant Churches than in any other religions.
Key-words: pro-Protestantism of the Syngman Rhee’s government, religious politics,
church-state relationships, religious policy, Young Korean Academy(Heungsadan),
Dongjihwe(동지회)
“”
78)
박 명 수*
본 논문의 개요
강인철 교수의 본 논문은 대한민국 초대 정부인 이승만 정부와 기독교
의 관계를 연구한 것이다. 강인철 교수는 이 논문에서 이승만 정부가 당시
의 종교에 어떤 영향을 주었으며, 그래서 각 종교들의 위치가 어떻게 바꾸
어졌는가? 그래서 그 바뀌어진 위치를 근거로 얼마나 이익을 보았고, 또한
손해를 보았는가를 묻고 있다. 강인철 교수는 이 질문에 대하여 이승만 정
부의 기독교 선호와 기독교의 이승만 일편단심 사랑 때문에 한국의 여러
종교 가운데서 기독교는 특별한 대우를 받았고, 그 결과 많은 혜택을 누려
특권적인 종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승만 정부와 기독교: 또 다른 시각
강인철 교수는 이 논문의 서론에서 “미시적으로 정치변동 과정을 관찰
하는 가운데”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겠다고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
러나 논평자는 이 논문을 읽는 가운데 거시적인 관찰의 필요를 가졌다. 논
평자는 강인철 교수와는 다른 질문을 제기하고 싶다. 그것은 해방 이후 한
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이슈는 무엇이었으며, 그 이슈에 대해서 각 종교는
어떻게 대응했으며, 그래서 그 결과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서 각 종교들이
갖는 위치는 어떻게 달라졌는가 하는 것이다. 논평자의 주장은 해방 이후
한국 기독교는 국제사회와 한국사회에서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고 있었으며, 그 결과 해방 이후 대한민국 건국에 가장 많이 기
여했으며, 결국에 가서 한국사회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종교가
되었다는 것이다.
*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78)
124 한국기독교와 역사제30호(2009년 3월 25일)
해방 이후 한국사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무엇이었을까? 대부분의 사
람들은 해방 이후 한반도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일제청산과 민족통일이라
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보다도 더 시급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이 땅에
건설할 나라를 어떤 나라로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이다. 사실 대다수의 한국
인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
이 경험한 것은 조선왕조와 일제 식민지 경험뿐이었다. 그러므로 해방이후
한국사회가 느낀 감정은 해방의 희열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불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의 가능성이 앞에 놓
여있었다. 그것은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였다. 자신의 힘으로 해방을 맞
이한 것이 아닌 한반도에는 자신들이 경험하지 못한 두 가지 선택 앞에
놓여있게 되었다. 사실 이런 현실 앞에서 두 가지 선택 이외에 다른 것을
선택해 보겠다고 하는 것은 매우 비현실적이다. 왜냐하면 당시 우리는 공
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이외에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특
별히 당시 세계는 냉전체제에 진입하고 있었고, 한반도에서 그 전선이 형
성되고 있었다.
결국 한반도는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가운데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한반도의 장래를 위해서 좋은 것인
가 하는 점이다. 무엇이 한민족의 미래를 위한 바른 선택인가? 당시 한국
땅에는 두 가지 세력이 존재했다. 하나는 민족주의자와 기독교인들을 중심
으로 한 우익이요, 다른 하나는 공산주의자들의 좌익이다. 사실 당시에는
두 선택 가운데 무엇이 한반도의 미래를 위해서 좋은지 알 수 없었다. 하
지만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서 보면 누가 바른 선택을 했는지가 분명해진
다. 공산주의를 택한 북쪽은 지구상에서 가장 혹독한 독재와 빈곤을 경험
하고 있고, 자유민주주의를 택한 남한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민주화와 경제성장, 그리고 자유를 경험하고 있다.
이승만과 기독교는 이렇게 남한이 자유민주주의를 택할 수 있도록 결정
적으로 기여했다. 여기에 이승만 정부와 기독교의 근본적인 유대관계가 존
재하는 것이다. 이승만과 기독교는 공산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공감대
가 있었다. 기독교는 공산주의가 무신론을 주장하며, 종교를 무자비하게
박해하는 것을 볼셰비키 혁명을 통해서 똑똑히 보았다. 이들에게 있어서
해방 이후 한반도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공산주의를 막고 자유민주
박명수 / “대한민국 초대 정부의 기독교적 성격” 논찬 125
주의를 지키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이런 시대의 과제를 잘 인식하고 있었
고, 기독교는 이것을 위해서 싸웠다. 이런 점에서 이승만과 기독교는 해방
이후 자유 남한 건설의 주역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는 그냥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자유민주
주의를 경험한 사람이 역사의 주체로 참여할 때 가능한 일이다. 사실 해방
직후 자유민주주의를 경험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기독교인들이다. 기독교인들은 미국 유학을 통해서, 선교사와의 만남
을 통해서, 미션스쿨의 교육을 통해서 자유민주주의를 배웠고, 경험했다.
이 점에서 기독교지도자들은 일제의 관료들과는 다르다. 그들은 근대문물
(과학기술)은 배웠을지라도, 근대문화(민주주의)는 몰랐다. 이점에서 해방 이
후 기독교인들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해방 이후 정부의 고위관료들 가운데, 그리고 정치
가들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우리는 이승만 정부가 부정선거를 했고, 그것을 통해서 독재정부
를 만들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그를 비판해야 한
다. 하지만 우리는 이승만 박사가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에 근거한 대한민국
을 만들었고, 그 자유민주주의 원칙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대의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았다. 당시 대한민국은 민
주주의를 처음 실시하는 사회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승만은 선거에
불리해도 선거를 통해서(비록 그것이 부정선거라도) 승리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승만이 자유민주주의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원래부터 자유민주
주의에 대한 신념이 있었고, 그를 지원하는 단체가 미국과 기독교였기 때
문이다. 비록 이승만 박사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자유민주주의 원칙을 철
저하게 지키지는 못했지만 그가 만들어 놓은 헌법 때문에 오늘의 대한민
국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해방 이후 한국 기독교가 한국사회의 주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전
쟁에서 가장 열심히 참여했고,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역사를 볼 때, 전쟁은 사회를 재편하는 기능을 한다. 한국전쟁은 신생 대
한민국의 가장 중요한 이슈가 공산주의를 막는 것이며, 여기에서 한국 기
독교는 한국의 종교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기독교는 가장 많
은 피해를 받았으며, 또한 이념적으로 공산주의를 막는데 결정적으로 기여
126 한국기독교와 역사제30호(2009년 3월 25일)
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전쟁 시에 군목을 파견하고, 전쟁 후에
는 반공강연을 통하여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데 기여했다. 이런 기독교
가 한국사회에서 주류 종교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강인철 교수는 해방 이후 한국 기독교가 한국사회의 주류가 되
는데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를 지적하지 않았다. 그것은 전후 한국사회
를 복구하는데 개신교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다. 전후 한국
의 경제상황은 비참하였다. 이때 한국사회를 지탱했던 것은 정부를 통하여
들어온 미국 원조와 교회를 통하여 들어온 미국 구제품이었다. 한국전쟁을
전후로 수많은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왔으며, 그들은 구호활동과 교
육, 의료, 문화 등 각종 재건 사업을 하였다. 한국 개신교가 해방 이후 한
국사회의 주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전후 복구사업의 주역이었
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한국의 생존 여부는 국제관계에 달려 있었다. 경제적으로 우
리나라는 미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해 있었다. 국가예산의 7할이 미국 원조
였다. 군사적으로 우리나라는 미군의 보호아래 있었다. 한미 군사동맹이야
말로 대한민국의 울타리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국제관계는
자동적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미국을 비롯한 자유세계와 관계
를 유지할 수 있는 다양한 채널이 있어야 한다. 바로 그런 역할을 한 것이
개신교이다. 강인철 교수가 지적하는 대로 1948년 9월 유엔총회에 파송된
대표단은 가톨릭 신자인 장면을 제외하고는 모두 개신교인이었다.
우리는 이상에서 개신교가 해방 이후 한국사회의 주류가 된 것은 단지
이승만 정부와의 유착관계 때문이 아니라 새로 형성되는 대한민국의 이념
을 가장 잘 이해하고, 그것을 가장 잘 수호할 역량이 있는 종교이기 때문
이라는 것을 밝혔다. 개신교는 한국의 종교 가운데 자유민주주의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고, 이것을 수호하기 위하여 가장 열심히 공산주의와 싸
웠고, 전후 복구 작업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국제관계를 통하여 대한
민국을 자유세계의 일원으로 공고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개신교가 한국의
중심종교로서 그 역할을 분명하게 한 것이다.
개신교는 이승만 체재아래서 특권종교였는가?1)
강인철 교수는 이승만 정부와 한국 개신교의 끈끈한 관계를 통하여 개
박명수 / “대한민국 초대 정부의 기독교적 성격” 논찬 127
신교는 이승만 정부로부터 굉장한 특권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 증거로서
그는 기독교를 건국의 이념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아울러서 기독교
에 여러 가지 혜택을 주었다는 것이다.
먼저 강교수가 주장한, 이승만은 기독교 정신을 국가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고 한 것을 살펴보자. 우리가 이것을 살펴보려면 먼저 그가 기독교를
국가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고 했을 때, 과연 그것이 기독교를 특권종교로
삼으려고 했느냐를 물어야 한다. 우리가 이승만이 기독교가 국가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기독교가 민주주의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서구문명의 산물이고, 그 배후에는 기독교가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가 국가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본래적인 정신이 기독교에서 나왔다는 것을 의미
하는 것이다.
우리가 강인철 교수가 인용한 내용을 살펴보면, 그가 기독교 단체가 아
닌 일반 공식석상에서 기독교를 지칭하여 말하지는 않았다. 이승만은 “하
나님”이라는 말을 사용했을 뿐이다. 물론 이승만이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언급한 것이 기독교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이라는 말은
한국사람 일반이 사용하는 일반적인 신의 명칭이기도 한 것이다. 신자는
이 명칭을 들을 때, 기독교의 하나님을 생각하고, 비신자들은 또한 자신들
이 생각하던 신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가리켜 기독교에 특혜
를 준 것처럼 말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본다. 우리는 애국가에 “하느님이
보우하사”라는 가사를 모든 국민이 다 같이 사용하고 있다.
지금까지 학자들은 이승만이 친 기독교적인 정책을 썼다는 증거로 그의
친 기독교적인 발언들을 예로 들고 있다. 그는 목사를 만날 때, 그리고 선
교사와 세계교회 대표들을 만날 때, 그는 종종 자신의 신앙적인 체험을 간
증하고, 친기독교적인 발언을 하였다. 하지만 그가 대통령으로 공식적으로
활동할 때 이런 행동을 얼마나 자주 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우리는 개
인 신앙인으로서의 이승만의 발언과 공인 대통령으로서의 이승만의 발언
을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기독교적인 발언이 구체적인 공적인 영역
에서 얼마나 친기독교적인 특혜로 이어졌는지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1) 이 부분에 대하여는 허명섭, “해방이후 한국교회의 재형성”(서울신학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3), 210-256과 255-267을 참조하기 바란다.
128 한국기독교와 역사제30호(2009년 3월 25일)
강인철 교수는 이승만 정부가 기독교에 준 특혜를 1) 국기에 대한 배례
를 주목례로 바꾼 것, 2) 군종제도를 도입한 것, 3) 국가 의례를 기독교식
으로 제정한 것, 4) 형목제도를 도입한 것 등을 예로 들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기독교에만 준 특혜인지는 좀더 따져 보아야 한다.
첫 번째, 국기에 대한 배례를 살펴보자. 개신교에서 해방은 민족의 해방
이자, 신앙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개신교는 신사참배를 반대했다.
그런데 해방 이후 국기에 대한 배례는 신사참배와 형식이 유사한 것이다.
그래서 개신교는 이것을 반대했고, 이승만 정부는 이것을 수용한 것이다.
그래서 국기에 대한 주목례로 바뀌었다.
개신교는 새로이 성립되는 대한민국은 국가가 특정종교를 강요하지 않
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국기배례를 강요하는 것은 적어도 기독교인들
에게는 이런 원칙을 어기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이것은 정교분리의 원칙
에 어긋나는 것이다.
두 번째, 군종제도 도입이다. 군종제도가 개신교를 통하여 도입된 것은
사실이다. 개신교는 처음에 경비를 담당한다는 조건으로, 그리고 민간인
신분으로 군목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개신교에만 주어진 배타적
인 특혜가 아니었다. 불교에도 똑같은 기회가 부여되었지만 불교에는 여기
에 합당한 인사가 없었다.
아울러서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군목을 파견하는 일은 특혜라
는 범주라는 카테고리에서 볼 것이 아니라 애국의 범주에서 보아야 할 것
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종교는 나라의 어려움을 맞
이하여 전쟁에 적극 참여하여 국가를 위해서 싸웠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임진왜란 때 군승제도가 아니었는가? 개신교는 대한민국에서 그런 역할을
감당했고, 그 결과 한국의 주류종교가 된 것이다.
세 번째, 국민의례이다. 필자는 이승만 대통령이 제헌국회에서 기도를
한 것은 약간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이 제도적으로 그 후
에도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필자는 알지 못한다. 강인철 교수가 국민의례를
기독교식으로 바꾸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 제시한【표 3】은 국가가 특정
한 종교의식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고인의 종교와 관습을 존중하여 결정
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미국인의 장례식은 미국식으로, 기독교인(윤병구
목사)의 경우는 기독교식으로, 일반인(김구)의 경우는 일반적인 관례를 따
박명수 / “대한민국 초대 정부의 기독교적 성격” 논찬 129
라서 진행되었다.
네 번째, 형목제도의 도입이다.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
다. 그러나 종교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죄인을 교화시키는 것이라면 감옥
에서 종교활동을 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것을 개신교가 담당한 것은 매우 훌륭한 일이다. 만일 문제가 있다면 이런
형무소 전도를 개신교에만 제공했다면 특혜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문제는
더욱 연구해 볼 일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대로 이승만 정부가 기독교에 준 특혜라고 지칭하는
것은 크게 특혜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한국 개신교는 서구 유
럽이나 근대 이전의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정도의 정교유착은
하지 않았고, 그런 정도의 혜택을 받은 적도 없다. 한국 개신교는 복음주
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으며, 복음주의는 기독교신앙은 국가의 강제적인
힘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신앙적인 결단에 의해서 이
루어진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