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역에서 내려 출구로 나가면(출구는 한곳 뿐임)
바로 약간 오른편 앞 버스정류장에서
마을버스 2번,6번(700원)을 타고 동구능앞에 내려서(약 20분 소요)
길 건너면 입구가 된다.
입구주변엔
팥칼국수,한우곰탕,중국집,옛날 보신탕 집등
음식점 간판이 보인다.
경로 입장료 무료(일반 천원,월요일은 휴장).
들어서자 바로 높은 참나무와 소나무가 우거진 길로 연결되어
드 넓은 경내를 모두 나무그늘 아래서 걸을 수 있다.
시원하고 나무들이 내뿜는 무슨 좋은 성분이 섞여서
상쾌하고 공기도 좋다.
길도 다져진 흙길이어서 걷기에 좋다.
비오는 날 이었는데 빗방울이 넓은 참나무 잎에
떨어 지는 소리가 들린다...
참나무중 잎이 제일 작다는 졸참나무의 도토리로 만든
도토리묵이 맛은 제일 좋다는 설명 명찰이 나무에 걸려 있다.
태조 이성계의 능인 건원능포함 9개의 크고 푸른 능들이
이곳 저곳에 잘 조성되어 있다.
홍살문에서 부터 능앞에 있는 丁字閣(음식차려 놓고 제사지내는 곳)
으로 가는 돌로된 길은 약 5cm정도
높이 차이가 있는 길이 같이 나란히 붙어 있다.
오른편 낮은 길로 제사지내러온 왕이 걸어가고
왼편 높은 길은 죽은 이의 혼이 다니는 길이란다(정자각을 향하여 가는 방향에서).
정자각으로 올라가는 층계도 왕이 오르는 층계(오른발을 먼저 올린다함)
혼이 오르는 층계가 따로 있다.
건원능앞 비석 비문에
이성계의 조상이 신라시대때 벼슬도하고
고려때 중국에 갔다가 다시 돌아온 조상도 있다는
비문 해석이 있는데,
이성계가 중국이 보낸 한족 사꾸라 라는 학설을
소개한 진원친구가 한번 와서 자세히 읽어 보면
참고가 되리라 생각된다.
배낭에서 사과한개를 꺼내 먹는다.
천하의 이성계도 이 달콤한 사과 한입을 못먹는다...
높은 나무로 우거진 경내 이동 길은 아주 좋다는 느낌이
계속된다.
이렇게 오기에도 편하고 가깝고 무료인 좋은 곳이
도심 가까이에 있다니...걷기 위해서라도 자주 와야지...
<계속>
서봉
첫댓글 서봉 선생...동구릉 견문록 잘 읽었습니다...그래요 서울 근방에 이런 능시설로 보기 좋은 곳이 드물지요...그래요 이성계가 신라와 고려 시대에 벼술을 하였던 귀족집안은 분명할 것입니다...계속 좋은 기행견문록 써 주시길 바랍니다...좋은 하루 되시길....풍산
다져진 흙길은 참으로 걷기에 좋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많은데 사실 제일 걷기 싫은 길은 시멘트길인 것 같습니다...
햇볕에 몸이 다 노출되는 그런 곳이 아니고 높은 나무그늘 속에서 걷게 되니 좋습니다...혹시나 밀화부리 소리가 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던데요...
이성계 얘기 꺼내면 흥분합니다. 이조는 중국(한겨례가 만든 청나라 제외)에 처녀와 물자를 조공하던 속국입니다. 왕이 되려면 사전결재를 받아야 하는, 우리역사를 강탈한 중공의 역사조작은 이조가 앞잡이가 됐습니다. 삼국사기를 조작하고, 철처히 백성을 세뇌시켰습니다. 이성계가 중국교포라는 사실들은 중국땅에서 발견된 고사서를 통해 알려지기 시작됐으며 우리 당국에서도 알고있지만 직접대응을 자제하고 있습니다. 외교통상부 홈피에 들어가 보면 동북공정을 놓고 중국에 맞대응 못하는 속사정이 엿보입니다. 역사왜곡의 앞잡이 이조를 규탄하는 까닭은 그 때문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에도 철저하게 우리역사를 왜곡했습니다. 그 역사를 지금도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으니 비통한 일입니다. 세종의 한글창제도 사실과 다릅니다. 이미 우리 한겨례 고조선이 만든 가림토라는 글자를 바탕으로 실용화한 것에 불과한 것이지요. 이조는 백성을 궁핍에 빠뜨려 통치하는 수단을 썼습니다. 그래서 수없이 많은 반란과 모반이 있었고 결국 일제에 팔아넘긴 것이지요. 그 잔재가 지금도 우리나라를 지배한다는 것이지요, 나라 팔아 땅 챙긴 매국노들의 땅찾기소송이 승소하는 까닭을 아시나요. 제발 가림토, 동북공정, 역사 왜곡 등등 검색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전주이씨의 내력을 보면 조상이 중국에서 왔다고 되어있구요, 이조 왕실에서는 고종 때까지 중국인 조상을 모시는 제사를 비밀리에 지내왔습니다. 이성계가 화교라는 증거입니다. 참고가 될까하여 이 카페에 고구려사 왜곡에 대한 우리 외교통상부의 공식 입장을 따로 올립니다.
성웅 이순신은 어떤가요, 난중일기를 바탕으로 소설을 쓴 김훈의 "칼의 노래" 를 보면 이충무공은 왜와 싸우는 전시에도 조정의 반대파에 의해 모함을 받고 불려와 문초끝에 곤장을 맞고 다시 임지로 떠납니다. 이 충무공의 인사발령은 여러번 이행되지 않았고, 발령이 6개월 ~ 1년 만에 전달되기도 합니다. 그는 해전 경험이 없었지만 육군에서 해군 초급지휘관으로 바뀐뒤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왜를 막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므로 철수를 서두르는 왜와 노량대전에서 맞서 싸우다 전사합니다, 아니 전사한 것이 아니고 전쟁이 끝난 뒤 조정의 반대파에 의한 형벌과 문초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
이조 인물 중 추앙받는 인물로 거북선을 만든 이순신을 꼽습니다. 그러나 실제 이 거북선을 만든 이는 나대용 입니다. 충무공의 휘하에 최신병기와 병선을 발명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건 행운이었고 충무공은 최고사령관이기에 만든이로 알려진 것입니다.
충무공 이순신, 그는 적국이었던 일본에서도 신성시 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탁월한 전략 전술로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전공을 많이 남긴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의 나라사랑과 충정은 귀감이 되고도 남습니다만, 역사의 진실은 보태지도 말고 빼지도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