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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통기타와 포크송과 싱얼롱 그리고 김민기.....
그리고 70학번인 나의 대학시절......
이렇게 흘러오고, 이렇게 흘러가고.....
시대와 사회가 그에게 많은 빚을 진 것 같다는 생각이 영영 떠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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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슬'처럼 떠난 김민기
박은주 기자
그림 실력도 화가 만큼 뛰어나
학교 그만두고 음악에 빠졌던 시절
김영세에 선물한 한 점 빼고 불태워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아침 이슬)
노래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 떠났다. 노래극으로, 소극장으로 50여 년간 한국 대중문화의 ‘청년 정신’을 지켜온 김민기 전 학전 대표가 21일 오후 8시 20분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김민기는 지난해 가을 위암 4기 진단을 받고, 최근까지 경기 고양시 일산 집에서 통원하며 항암 치료를 받아왔다. 암이 다른 장기로 전이돼 상태가 악화됐다고 한다.
1951년 전북 익산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김민기는 6·25 전쟁 말기 부친을 잃고 서울로 상경했다. 산파였던 어머니가 돈을 벌어 중학교 때는 미국으로 보이스카우트 캠프를 다녀온 적도 있다. 경기중·고 때부터 그림을 그리며 통기타를 쳤던 그는 서울대 회화과에 69학번으로 입학, 1970년 단과대 후배로 입학한 고교 동창 김영세(이노디자인 대표)를 다시 만나며 ‘가수’의 길에 들어섰다. 두 사람은 신입생 환영회에서 자정 넘게 노래를 불렀고, 친구들은 ‘도비두(도깨비 두 마리)’라는 이름도 지어줬다. 도비두는 명동 YWCA에 있던 포크송의 산실 ‘청개구리의 집’에서 노래하며 음악계 주목을 받았다. 김영세씨는 이렇게 기억했다. “민기는 천재였다. 밥 딜런의 노래를 부르는데 발음까지도 완벽했고, 악보를 그리며 노래를 즉석에서 만들어냈다.”
김민기는 아예 학교도 그만두고 음악에 빠졌다. “2, 3학년 때쯤 민기가 그림을 다 불태웠다고 했어요.” 그 때 그림 한 점을 김영세에게 선물했다. 너그럽게 노래 작업을 응원해 준 ‘친구 어머니’를 위한 작품 하나만 남기고 그림과 ‘절연’한 것이다.
김민기의 노래, 양희은이 국민 노래로 만들다
1971년 하반기 발표한 ‘아침 이슬’은 1971년 김민기 첫 앨범 ‘김민기’에 수록됐고, 이어 편곡해 양희은에게도 줬다. 곡은 기이하게 정치 바람을 탔다. 1971년에는 아름다운 노랫말로 ‘건전가요 서울시문화상’을 받았고, 1975년 ‘묘지’라는 가사가 들어갔다는 이유로 다른 곡과 함께 금지곡이 됐다. 역설적으로 1970년대 유신 반대 시위, 1987년 민주 항쟁, 2016년 광화문 시위까지 50여 년간 가장 많이 불린 운동권 노래가 됐다. 출발은 그런 게 아니었다. 김민기가 수유동 형 집(혹은 공동묘지)에서 술 취해 잠들었다 일어나 4·19 탑 공원 근처를 걷다 수풀에 맺힌 이슬을 보며 지은 노래라고 한다.
70년대 그의 노래는 계속 ‘정치적 불꽃’이 됐다. ‘늙은 군인의 노래’ ‘상록수’ 등 상당수가 금지됐다. 시위대가 애창하고 당국이 제재하는 상황의 반복이었다. 간결하면서도 서정적인 가사가 대중의 감성을 흔드는 데 더할 나위 없었다. 노래 ‘친구’는 고교 때 익사한 친구를 기리며 만들었지만, 시위 현장에서는 옥사한 운동권을 기리는 노래로 불렸다.
경기고 선배이면서 그의 40년 지기인 한 인사는 “김민기는 사실 시인이에요. 문장이 너무 좋잖아요. 김민기가 그러더라고. 자기는 운동권이었던 적이 없었다고.” 말이 길지 않은 김민기는 시위 현장에 나와 자기 노래를 부른 적도, 정치적 구호를 외친 적도 없다.
그의 감성은 늘 소외받는 곳으로 향했다. 인천 피혁 공장 노동자의 결혼식 축가로 만든 ‘상록수’, 노동자의 비참한 삶을 그린 노래극 ‘공장의 불빛’ 같은 것들이다. 대중이 ‘아침 이슬’과 ‘상록수’를 더 많이 부를수록 그는 ‘가수’에서 멀어졌다. “가수를 하기엔 목소리가 너무 낮다”고 했지만, 그 탓은 결코 아니었다. 상업적 성공과는 거리를 뒀고, 탄압받은 과거를 ‘권력’으로 환금하지 않았다. 대신 문화적 ‘인프라’를 깔아왔다. 이런 일을 두고 무대에 나서는 ‘앞것’이 아니라 ‘뒷것’이라고 했다.
1991년 대학로에 문을 연 소극장 ‘학전’은 김민기의 ‘뒷것’ 정신이 구현된 공간이다. 고(故) 김광석을 필두로 들국화, 안치환, 장필순, 이소라, 윤도현, 나윤선 같은 음악가들이 배출됐다. 1994년 독일 원작(Line 1)을 번안해 올린 록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사회적 고민을 가미한 작품으로 2023년까지 8천회 이상 공연돼 70만명이 넘게 봤다. 설경구·김윤석·황정민·장현성·조승우는 이 소극장이 배출한 스타, ‘학전 독수리 5형제’로 불린다. 뮤지컬 ‘의형제’(2000), ‘개똥이’(2006)는 물론 어린이극 ‘우리는 친구다’ ‘고추장 떡볶이’까지 지평을 넓히려 애썼다.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그 흔한 ‘정부 지원’을 받지 않고, 지난 3월 15일 개관 33년 만에 문을 닫았다.
친구 김영세가 말했다. “그를 운동권, 저항 가수로 가두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는 나서지 않는 ‘천재 아티스트’였다.”
문득 김민기 노래 중 ‘봉우리’가 생각났다. “우리 땀 흘리며 가는/ 여기 숲속의 좁게 난 길/ 높은 곳에 봉우리는 없는지도 몰라/ 그래 친구여 바로 여긴지도 몰라/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유족은 배우자 이미영씨와 2남. 빈소는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 2, 3호실. 발인은 24일 오전 8시, 장지 천안공원묘원.
김민기 떠나기 전 마지막 말 "그저 고맙다"
윤수정 기자
생전의 김민기는 스스로를 입버릇처럼 ‘뒷것’이라 불렀다. 공연하는 이들이 우선이니 ‘날 자꾸 앞으로 불러내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22일 오후 12시 30분부터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진 고(故) 김민기의 빈소에는 그를 ‘앞것’으로 기억하는 많은 이의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가수 이은미, 권진원, 박기영(그룹 동물원), 박학기, 장기하, 알리,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배우 문성근, 강신일, 박원상, 이병준, 장현성, 배성우 등이 빈소를 찾았다.
유족은 ‘일체의 조의금과 조화를 정중히 사양한다’고 알렸다. 고인의 조카인 김성민 학전 총무팀장은 “선생님이 직접 조의금을 받지 말라 한 건 아니지만, 늘 입버릇처럼 주변인들에게 ‘밥 먹었니?’ ‘밥 노나(나눠) 먹어라’ 하신 걸 떠올린 결정”이라고 했다. 그는 또한 “선생님이 20일 오전 응급실에 실려가 21일 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가족들을 잘 만나고 가셨다”며 “‘그저 고맙다. 할 만큼 다 했지’라고 하시며 가족 걱정하는 말을 많이 남기셨다”고 전했다. 또 “평소 모범생처럼 항암치료에 임하셨고, 지난해부터 자신이 남긴 작품들을 정리한 ‘대본집’을 만들고 싶어했다”며 “선생님이 (학전 폐관 전후로) ‘신진 뮤지션이 놀 수 있는 장을 마련했으면 좋겠는데’란 혼잣말도 자주 하셨다”고도 했다.
빈소를 찾은 이들은 “여러 달 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충격이 크다”며 애도했다. 박학기는 “며칠 전까지도 형님이 회장인 김광석추모사업회 관련 재단 설립에 대해 전화로 의논을 드렸다”며 “요 몇 년 동안은 형님께 ‘어떻게 할까요?’ 물으면 관심 없는 척하시면서도 내가 물은 걸 컴퓨터로 몰래 검색해 보곤 하셨다. 이제 보고드릴 형님이 안 계시다는 게 실감이 안 난다”며 눈물을 훔쳤다. 박기영은 “우리에겐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권진원은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라며 오열했다. 그가 단골이었던 학림다방의 이충렬 사장은 “한 달 전 경기도 일산 자택에서 만났을 땐 암 환자인데도 머리가 거의 빠지지 않았고, 가족들과 휠체어를 타고 산책도 했다. 그래서 더 믿기질 않는다”고 했다.
김민기의 발인은 24일 오전 8시, 장지는 천안공원묘원. 유족 측은 “장례 절차는 비공개지만, 오전 8시쯤 장지로 향하는 도중 옛 학전 자리에 새로 개관한 ‘아르코꿈밭극장’ 마당에 들러 학전과 인연을 맺은 이들과 작별 인사를 나눌 예정”이라고 했다. 이 극장 마당에는 고인이 생전 각별히 여겼던 공연 ‘지하철 1호선’과 가수 고(故) 김광석의 기념비가 있다.
'나의 영웅, 감사했습니다'.. 故김민기 추모 물결 계속
OSEN
김민기는 1971년 '김민기 1집'으로 데뷔, '아침이슬', '상록수' 등을 작곡하며 1970~80년대 저항가요의 상징으로 불렸다.
고인은 싱어송라이터이자 뮤지컬 연출가로 대학로 소극장의 상징 '학전'을 30여년간 운영하며 설경구, 김윤석, 장현성, 조승우, 이정은 등 후배 예술인을 배출해왔다.
특히 학전 소극장에선 다양한 뮤지션들이 공연하며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TV를 장악한 댄스 뮤직과 함께 1990년대 청춘 문화의 또 하나의 축이 됐다. 고 김광석의 경우 이곳에서 무려 1000회의 공연을 했으며 윤도현은 무명 시절 오프닝 무대를 도맡아 오기도 했다.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후배 양성에 힘써온 故 김민기의 비보가 전해지자, 후배 뮤지션들의 추모가 이어졌다.
가수 박학기는 고인의 소식에 “형님~!! 감사했습니다... 아름다운 곳에서 평안하세요”라는 추모 메시지를 남겼다. 고 김민기와 생전에 찍은 사진까지 공개하며 돈독하고 아름다운 우정을 자랑하기도 했다.
윤도현 역시 "저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이자, 존경하는 음악가 김민기. 학전도 선생님도 대학로도 많이 그리울 것 같습니다"라며 고인을 추억했다.
이적은 "형님, 하늘나라에서 맥주 한잔 하시며 평안하시리라 믿습니다. 나의 영웅이여, 감사했습니다. 사랑합니다"라며 애도를 표했고, 가수 알리는 "선배님 예술 인생의 발자취를 알게 되고 느끼고, 노래로 조금이나마 체감할 수 있어 영광이였습니다"라며 추모했다.
배우들의 추모도 이어졌다. 고현정은 SNS에 고인의 사진과 함께 "김민기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고 방금 알았다. 아 너무 슬프고 먹먹하다. 마음이 마구 꿀렁거린다. 울렁거린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글을 올려 추모했다.
고인의 대표 연출작인 '지하철 1호선'에 출연해 인연을 맺은 배우 황정민, 장현성은 빈소에 방문했다. 이밖에도 가수 윤상, 이은미, 장기하, 알리, 배우 류승범, 김희원, 김대명 등도 빈소를 방문해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한편 빈소는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학전 측은 "조의금과 조화는 고인의 뜻에 따라 정중히 사양한다"며 비공개 장례식을 치른다고 전했다.
▷ 조선일보 기사 발췌
# 눈물로 떠나 보내는......
☞ https://youtu.be/X3nCYQMm55w?si=zc3rXOm3gvJMS5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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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곁눈으로 배웠던 기타실력으로 참 많이도 불렀었다. 아련한 첫사랑처럼 50여년이 지났는데도 가사가 생각나는 김민기의 곡들....그의 사람됨이 그리워 한동안 다시 불러보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