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기 위한 작업의 하나로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露日戰爭; Russo-Japanese War)을 도발하고 일본군이 한반도에 불법 상륙하여 침략 정책을 강화해 나가자 한국의 민중과 애국지사들은 1904년 7월, 8월부터 다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조국에서 몰아내기 위한 반일의병항쟁(反日義兵抗爭)을 시작하였다.
일제(日帝)는 1904년 2월에 2개 사단 규모로 한국에 설치했던 일본군내의 이른바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으로 대한제국 정부를 위협하여 각종 침략을 자행하다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1905년 9월 5일 포츠머드 조약을 체결한 후에는 러일전쟁에 투입되었던 만주의 일본군까지 한국주차군에 포함시켜 막강한 무력(武力)으로 위협해서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乙巳條約)을 강요하여 외교권을 비롯한 한국의 국권을 강탈하였다. 일제는 이미 1906년 2월 1일 조선통감부(朝鮮統監府)를 설치하여 한국을 반식민지(半植民地) 형태의 소위 '보호국(保護國)'으로 전락시켰으며, 계속하여 한국에 대한 완전식민지화 정책을 강행해 나갔다. 이에 응전하여 우리 민족의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은 큰 규모로 더욱 확대되어 나갔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완전식민지로 병탄하기 위하여 한국인들을 완전히 무장해제하는 작업의 하나로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해산하자, 해산 군인과 각계각층의 성원들이 전국적으로 봉기하였다. 반일의병항쟁은 전국에서 더욱 큰 규모로 확대되고, 한반도의 방방곡곡에서 대소 규모의 의병항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 시기의 의병부대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부대들 가운데 하나로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주목할 만한 의병부대로 왕산(旺山) 허위(許蔿)가 이끌었던 진동의진(鎭東義鎭)이 있다. 진동의진은 의병대장이 일찍 순국함으로써 존속기간이 비교적 짧았지만, 서울 부근인 경기도에서 편성되어 수도 서울에 설치된 통감부와 일제 침략자들을 끊임없이 위협하였다.
의병대장 왕산 허위는 1904년 여름의 최초의 의병 재봉기에 결정적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며, 그의 의병부대는 전국 창의진연합군(倡義陣聯合軍)과 통합사령부 편성에 주도적 역할의 하나를 하고, 두 차례에 걸친 서울 진공작전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왕산(旺山) 허위(許蔿)는 1855년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林隱里)에서 진사 허조(許祚)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인 김해(金海) 허씨(許氏) 가문은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는, 그 일대에서는 이름 높은 유학자 집안이었다. 이러한 집안 분위기에서 그는 어려서부터 계부(季父)인 허희(許禧)와 20세 위인 맏형 허훈(許薰)으로부터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특히 허훈은 할아버지인 허임(許恁)에게 글을 배운 뒤 허전(許傳)과 유주목(柳疇睦)의 문하에서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으며, 막내 아우인 왕산에게 많은 사상적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다.
1894년에 갑오농민항쟁(甲午農民抗爭)이 일어나자, 그의 일가는 진보(眞寶)로 피난하였다. 상주, 선산 등지는 동학군 세력이 강성하던 지역이었으므로, 유학자 집안이었던 그의 일가는 화란(禍亂)을 피해 그곳으로 옮겨 갔던 것이다. 이후 그의 집안은 진보에 일시 정착, 그곳의 의병항쟁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왕산(旺山)의 의병항쟁은 1896년부터 시작된다. 전년 10월에 민씨 왕후가 일본 낭인들의 칼에 살해되고, 그 울분이 채 가시기도 전인 11월에는 단발령이 반포되어 민족적 자긍심이 큰 타격을 입게 되자, 전국 각처에서 의병항쟁이 연이어 일어났다. 이때 왕산도 각처 의병 봉기에 자극을 받고 서둘러 거의(擧義)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향인 구미 임은리에 있던 왕산은 이기찬(李起燦), 이은찬(李殷瓚), 조동호(趙東鎬), 이기하(李起夏) 등과 함께 1896년 3월 26일 김천읍에서 수백명의 장정을 모아 항일전(抗日戰)의 기치를 들었다. 그는 이기찬을 총대장에 추대하고 자신은 참모장이 되었으며 군문도총(軍門都摠)에는 조동호, 선봉장에 윤홍채(尹鴻采)를 각각 임명하였다. 그리고는 금산군(金山郡) 금릉(金陵)의 무기고를 점령하여 무장을 한 뒤, 김산과 성주 두곳에다 진을 치고 대구로 진격하기 위하여 각지에 격문을 발송, 의병을 소모(召募)하였다. 그러나 지례군수(知禮郡守)의 보고를 받고 출동한 공주와 대구의 진위대(鎭衛隊)에게 포위 공격을 당해 패전(敗戰)하고 이은찬, 조동호 등은 관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때 왕산은 패잔병 1백여명과 유생 80여명을 모아 김산 서북방에 위치한 직지사(直指寺)에서 병력을 재정비하고 충북 진천(鎭川)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즈음 측근인 전경운(田慶雲)으로부터 의병부대를 해산하라는 고종(高宗)의 밀지가 도착, 왕산은 의병부대를 해산하고 만다.
왕산은 첫 의병항쟁에 실패한 뒤 진보에 있던 맏형 허훈에게 가 학문에 진력하며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그는 신기선(申箕善)의 천거로 1899년 3월 중앙의 관계(官系)로 진출, 영희전봉사(永禧殿奉事), 소경원봉사(昭慶園奉事),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 주차일본공사수원(駐箚日本公使隨員),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평리원수반판사(平理院首班判事) 등을 거쳐 1904년 8월에는 평리원서리재판장(理平理署理裁判長)을 역임하였다. 이는 사법부의 최고 직책으로 정부 요직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그는 평리원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불의와 권세에 타협하지 않고 공정하고 신속하게 사무를 처리하여 그 칭송이 자자하였다.
이 기간에 왕산은 이름난 반일언론인이자 변혁 사상가인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과 교유하면서 그동안 전통 유학을 학문 기반으로 삼다가 신학문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왕산의 사상 전환의 단면은 1904년 8월 10일 의정부 참찬에 임명되면서 정부에 건의한 열가지 조목 가운데 학교 건립, 철도와 전기 증설, 노비 해방, 은행 설치 등을 주장한 대목에서도 보이고 있다.
일제는 1904년 2월에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고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러일전쟁을 도발하였다. 그리고 2월 23일에는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제로 조인하게 하여 한국 침략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그리하여 일제는 한반도의 군사적 요충지를 '합법적으로(?)' 확보하게 되었고, 나아가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러한 사태에 직면하자 왕산은 이상천(李相天), 박규병(朴圭秉) 등의 관료 동지들과 함께 전국에 배일통문(排日通文)을 돌려 일제의 침략상을 규탄하고 전국민의 분발을 촉구하였다. 일제의 침략 행위에 대해 정부 관료들 가운데 그 누구도 감히 항의하지 못하던 상황에서 왕산이 주동이 되어 '죽음을 무릅쓰고(!)' 항변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 즈음 일제의 이러한 침략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송병준(宋秉畯), 윤시병(尹始炳), 유학주(兪鶴柱) 등이 주동이 되어 부일배(附日輩) 단체인 일진회(一進會)를 조직하자, 왕산은 정우회(政友會)를 조직하여 일진회를 비판하는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와 동시에 전국민의 반일봉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다시 전국에 발송하였다. 그러나 왕산은 그간의 반일행적이 빌미가 되어 1905년 1월 일본 헌병대에 구금되었다. 며칠 뒤 의정부 참찬을 사임하고 석방된 그는 약 2개월간 집에서 시국을 개탄하고 지내던 중, 3월 2일 다시 비서원승에 임명되었으나 통감부에서는 그의 항일투쟁을 두려워하여 3월 11일에 최익현(崔益鉉), 김학진(金鶴鎭)과 함께 재구금하였다. 그는 일본인들로부터 항일투쟁을 중단하라는 협박을 받으면서도 "조선인으로서 우리 나라의 독립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본이 조선을 점령하려는 야욕을 버리고 군대를 자국으로 철수시킨다면 나도 일본을 적대시하지 않는다!"라고 항거하기도 했다. 통감부에서는 최익현과 김학진을 석방한 뒤에도 그를 4개월 동안이나 헌병대 사령부에 구금하였으나 왕산은 조금도 굴하지 않는 모습을 유지하였다. 이에 통감부에서는 하는 수 없이 7월 13일에 헌병들의 감호하에 강제 귀향 조치하였다.
왕산은 고향으로 돌아온 뒤 지례(知禮) 두대동(頭垈洞)에서 일본 관헌의 감시하에 은거하던 중 1905년 11월 을사조약(乙巳條約)의 비통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때부터 왕산은 경상도, 전라도, 경기도 각지를 돌며 전국의 지사들과 앞으로의 대처방안을 모색하면서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을 준비하게 되었다. 이때 그가 만났던 인물들로는 면우(免宇) 곽종석(郭鍾錫), 이학균(李學均),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 등이 있다. 또한 그는 이즈음 영천의 의병대장 동암(東巖) 정환직(鄭煥直)에게 군자금 2만냥을 주선해 주기도 하였다.
뒤이어 1907년 7월에는 광무황제(光武皇帝)가 강제 퇴위되고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 늑결되어 차관정치(借款政治)가 시작되었으며 이어 8월에는 한국 군대가 해산되는 등 국권은 그야말로 일제(日帝)의 수중으로 완전히 들어가고 말았다. 이때 군대해산에 반발한 한국 군인들이 대일항전(對日抗戰)에 참여하게 되자 이를 계기로 반일의병항쟁(反日義兵抗爭)은 일시에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 무렵인 1907년 9월에 왕산은 연천, 적성, 파주, 이천 등 경기도 일대에서 의병을 모집하면서 강화분견대(江華分遣隊)의 해산 군인인 연기우(延起羽) 휘하의 병력을 포섭하여 전투력을 강화시켰다. 왕산의 부대는 철원리(鐵原里)를 점령하고 연천군(漣川郡)의 우편취급소를 습격했으며, 포천군(抱川郡) 외북면에서 일본군 1개 중대 병력과 교전하여 적병 70여명을 사살했다. 1907년 10월에는 병사 3백여명을 투입하여 안협읍(安峽邑)을 점령하고 일진회(一進會)에 가입한 부일배(附日輩)를 색출하여 총살하였다. 1907년 11월에는 포주군 고자촌(高子村)에서 일본군 1개 소대와 교전했으며, 철원읍을 재차 점령하고 일본인 순사와 부일배를 소탕하였다.
이때 각지에서 활동하던 여러 의병부대는 서로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항전에 보조를 같이하였다. 왕산은 마전(麻田), 적성 등지에 있으면서 지평, 가평 등지에서 유격전(遊擊戰)을 벌이고 있던 이인영(李麟榮)과 긴밀히 연락하였으며, 철원에서 활동하던 그의 부하인 김규식(金奎植)을 통하여 황해도 장단(長湍)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김수민(金秀敏)의 의병부대와도 긴밀한 연락을 주고 받았다.
그러던 중 허위(許蔿)와 이인영(李麟榮)의 부대를 주축으로 해서 전국 의병부대의 연합체인 13도 창의군(十三道倡義軍)이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이인영은 왕산과 상의한 뒤 1907년 11월 전국 각지의 의병대장들에게 의병부대를 통일해서 창의진연합군(倡義陣聯合軍)과 통합사령부를 구성한 다음 서울을 향해 경기지방으로 진격하자는 격문을 발송하였다. 왕산은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작전을 결행하기에 앞서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 선언문을 보내어 의병항쟁의 합법성을 내외에 공포하였다. 그는 의병항쟁이 광무황제의 칙령에 따른 한국의 독립전쟁임을 강조하고, 의병부대는 의당 국제법상 교전 단체이므로 전쟁에 관한 모든 법규가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일본군 헌병대의 기밀보고에 따르면 이인영의 명의로 된 이 선언문의 한 부는 영국 정부로 보내졌다고 한다. 또한 역시 이인영 명의로 된 '해외동포에게 보내는 격문(Manifesto to all Coreans in all Parts of the World)'이 각국 교포에게 보내져서 의병항쟁의 목적을 명백히 천명한 것이다.
'동포 여러분, 우리는 일치단결하여 조국에 몸을 바쳐 우리의 독립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또 야만스러운 일본인들의 잔혹한 만행과 불법적 행위를 전세계에 호소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교활하고 잔인하여 진보와 인간성의 적(敵)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모든 일본인과 그 주구들과 야만적은 군대를 격멸하는데 힘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한편, 이인영의 호소격문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많은 의병들이 경기도 양주로 집결, 병력이 48진에 약 1만여명에 달하게 되었다. 양주에 집결한 의병대장들은 12월에 회의를 열어 13도 창의대진소(十三道道倡大陳所)를 성립시키고,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한 뒤 다음과 같이 전체적인 편제를 갖추었다.
13도 창의군 총대장 이인영(李麟榮)
관동(關東) 창의대장 민긍호(閔肯鎬)
전라도 창의대장 문태수(文泰洙)
충청도 창의대장 이강년(李康秊)
교남(喬南) 창의대장 신돌석(申乭石)
진동(鎭東) 창의대장 허위(許蔿)
관북(關北) 창의대장 정봉준(鄭鳳俊)
관서(關西) 창의대장 방인관(方仁寬)
이처럼 13도 창의군이 편성되자 이인영과 왕산은 곧바로 서울 진공작전을 추진하게 되었다. 왕산은 각 부대별로 서울 동대문 밖에 집결하도록 조치한 뒤, 스스로 선발대 3백여명을 거느리고 1908년 1월 말에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군하였다. 그러나, 이때 후발 본대의 총대장인 이인영이 부친의 부고(訃告)를 받고 집상(執喪)을 위해 문경으로 급거 귀향하는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고 말았다. 전통 유생의 신분인 그로서는 부친의 집상문제를 결코 소흘히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에 이인영으로부터 전권을 물려받게 된 왕산은 총대장 대리 겸 군사장의 직책으로 13도 창의군의 총지휘를 맡았던 것이다.
그러나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작전 계획을 이미 잘 알고 있었던 일본군은 양주 의병부대의 진로를 차단하고 선제공격을 개시하였다. 이 전투에서 왕산의 선발대가 패배하여 퇴각함으로써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작전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동대문 근처에서 패전한 왕산은 다시 임진강, 한탄강 유역을 중심무대로 항일전(抗日戰)을 전개하였다. 그의 휘하에는 조인환(趙仁煥), 권준(權俊), 왕회종(王會鍾), 김수민(金秀敏), 박종한(朴宗漢), 이은찬(李殷瓚) 등 쟁쟁한 장수들이 있어 각각 부대를 나누어 이끌고 도처에서 유격전(遊擊戰)을 벌여 일본군을 격퇴시켰다. 의병들은 일본군의 진지를 기습하기도 하고, 각지의 친일매국분자들을 잡아 죽이는 등 맹렬한 항일투쟁(抗日鬪爭)을 벌였다. 또한 의병의 군량은 체계적으로 공급된 반면에 납세와 미곡의 반출은 왕산의 명령에 의하여 중단되었다. 그러므로 그가 활동하던 임진강, 한탄강 일대는 진동의진(鎭東義鎭)의 군정 아래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왕산은 의병부대의 군율을 정하여 민폐가 없도록 하였고, 군비조달시에는 군표를 발행하여 뒷날 보상해 줄 것을 약속하였다. 이 결과 각지의 주민들은 왕산의 의병부대에 적극적인 후원을 해 와 항일전(抗日戰)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처럼 왕산의 의병항쟁이 활발해지자 일제(日帝)는 장박(張搏)을 통하여 그의 항일투쟁을 종식시키려고 해산을 권고해 보았으나, 왕산은 즉각 이를 거절하였다. 또한 대동학회(大東學會) 회장 신기선(申箕善)이 왕산의 부하였던 이병채(李秉採)를 통하여 투항을 권고하였으나, 그는 이도 물리치고 최후까지 의병항쟁을 펼칠 것을 천명하였다.
1908년 4월 21일에 왕산(旺山) 허위(許蔿)는 이인영(李麟榮), 운강(雲崗) 이강년(李康秊),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 박정빈(朴正斌) 등의 의병대장과 연명으로 전국민이 의병항쟁에 진력해 줄 것을 호소하는 통문을 전국에 발송하였다. 그는 머지 않아 대규모 결전의 시기가 도래할 것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이어 5월에는 박노천(朴魯天), 이기학(李基學) 등을 서울에 잠입시켜 조선통감부(朝鮮統監府) 측에 광무황제의 복위, 대한제국의 외교권 외복, 통감부 철거, 한국 주둔 일본군 철수, 이권침탈 중지 등을 골자로 하는 30여 가지의 요구조건을 제시하고, 그러한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항전을 계속할 것임을 천명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왕산은 이와 같은 원대한 포부를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1908년 6월 11일 영평군(永平郡) 서면(西面) 유동(柳洞)에서 그의 은신처를 탐지한 일본 헌병들에게 체포되어 영어(囹圄)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서울로 압송된 왕산은 일본 헌병대 사령관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 소장(少將)의 심문을 받게 되었다. 왕산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동양평화를 위해서라면 한국의 국권 회복이 필수적이라면서 아카시 소장에게 일제의 한국 침략을 당당히 성토하였다.
"일본은 말로는 한국에 대한 보호를 주장하지만 실상은 한국을 멸망시킬 흑심을 가졌다. 우리는 결코 이를 좌시할 수 없어 미력하나마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아카시 소장은 왕산에게 "당신이 일본에 반항했던 행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반성하면서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의 신민(臣民)이 되고자 한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도 있다."고 회유했으나 왕산은 고개를 저으며 "나는 차마 일본인과 함께 이 땅에 살 수가 없어 의병을 일으켜 항전하였다. 차라리 대한(大韓)의 개나 소가 될지언정 일본의 백성이 되지는 않겠다." 하고 거부하였다. 아카시 소장은 심문과정에서 왕산의 인품과 식견에 승복하여 마음속으로 내내 그를 존경했으며, 왕산을 참으로 국사(國士)라고 감탄을 감추지 못하였다.
재판과정에서 당시의 조선인 검사들이 왕산에게 의병항쟁을 벌인 연유를 묻자 왕산은 다음과 같이 응답하였다.
"너희들이 비록 한국(韓國)에서 났으나 한결같이 교활한 왜적(倭賊)의 주구(走狗)이니 이런 말을 할 것이다. 나는 대한국(大韓國)의 당당한 의병대장이다. 너희들과 변론하고자 싶지 않으니 다시는 묻지 말라."
또한 일본인 재판관이 "의병을 일으키게 한 것은 누구이며 대장은 누구인가?" 하고 묻자 왕산은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의병의 봉기를 주도한 것은 이등박문(伊藤博文)이며 대장(大將)은 바로 나다."
"어째서 이토 통감 각하를 들먹이느냐?"
"이등(伊藤)이 우리 나라를 뒤집어 놓지 않았으면 의병(義兵)은 반드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의병의 봉기를 주도한 자가 이등(伊藤)가 아니고 누구이겠느냐?"
그 후 왕산은 7월 7일 평리원(平理院)에 이송되어 9월 18일 사형선고를 받고 10월 21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뒷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허얼빈 역에서 총살한 의사(義士) 안중근(安重根)은 법정에서 왕산(旺山) 허위(許蔿)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겨 후세에 감명을 주고 있다.
"왕산(旺山) 선생과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의 기상이 동포 2천만민에게 있었더라면 오늘의 국욕(國辱)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 나라의 고관(高官)은 자기 생각만 있고 나라의 중요함을 모르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선생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므로 고관 가운데 충신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