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으로 이뤄진 시적 세계
산문으로 이뤄진 시적 세계, 안규철 『사물의 뒷모습』, 현대문학,
by꿈꾸는 곰돌이Jan 14. 2025
안규철, 『사물의 뒷모습』, 현대문학, 2021
평론가 신형철에 따르면, 산문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시가 된 산문과 그냥 산문, 감히 장담컨대, 이 세상 산문의 9할 9푼 이상은 그냥 산문에 제한되나, 아주 극소수의 산문만이 시의 꿈을 품었다. 시가 된 산문, 혹은 산문으로 써진 시가 된 저작들을 잠시 나열해보자. 롤랑 바르트의 『 사랑의 단상』, 존 버거의 『A가 X에게』, 발터 벤야민의 『일반통행로』, 아도르노의 『미니마 모랄리아』 , 김훈의 『풍경과 상처』 그리고 안규철의 이 책을 들 수 있다. 안규철 작가는 예술가요, 이 시대에 자취를 갖춘 몇 안 되는 진정한 문장가이자,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온 세상이 사물의 쓸모를 논할 때, 시인만이 사물의 철학을 논한다. 권혁웅, 함돈균 등 수많은 시인과 평론가들이 사물을 논한 책을 썼지만, 지금까지 읽어본 사물에 관한 책 중에 가장 애정하는 책이다. 차분한 시적 산문, 사물을 다루지만 사물화되지 않은 맑은 사유, 그리고 단아한 손 그림이 어울려진 이 책은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작가는 천사가 지나가는 시간에 사물의 뒷모습을 본다고 말한다. 예술가의 창의력과 한예종에서 오랫동안 강의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정갈하게 사물의 뒷모습을 산문으로 옮긴다. 만약 시를 하이데거가 말대로, 존재의 시원을 담은 언어로 이해한다면 이 책에 실린 모든 사물이 시로 다가온다. 67편의 에세이와 아주 단순한 그림은 사물을 통해 시의 세계로 인도해준다. 그중에서 사유의 단아함이 담긴 문장들을 살펴보자.
멀리 가기 위해서 식물은 모래알처럼 작고 하찮은 광물의 모습을 취한다. 어디선가 다른 햇살과 바람 속에서 다시 꽃피우기를 기약하며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지금 여기가 아닌 어떤 곳, 그러니까 유토피아를 향해, 수천, 수만 분의 일의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실어 보내는 저 무모한 낙관주의자들을 보라. 굽힐 줄 모르는 저 희망의 화신들 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운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라.
-‘나무에게 배워야 할 것’ 중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유명한 구절-한 알의 모래에서 우주를 보라-처럼 식물을 통해 우리 사회의 낙관주의자를 포착하고, 반성을 사유한다.
뒷마당의 키 작은 꽃나무들은 겨울 내내 무엇을 하는가. 봄부터 가을까지 푸른 잎과 붉은 꽃으로 한껏 제 모습을 뽐내던 영산홍과 철쭉이 몇 달째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서 정지 화면으로 창밖에 멈춰 서 있다. 아침에 박새 몇 마리가 다녀가면 해가 떠서 질 때까지 천천히 제 주위를 맴도는 그림자밖에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풍경 속에서 그것들은 바짝 마른 잔가지들을 사방으로 뻗친 채 잠을 자는지 꿈을 꾸는지 미동도 하지 않는다. 꽃나무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온갖 풀벌레와 잡초들도 같은 모습으로이 혹독한 시간을견뎌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들을 가여위할 수 있을까. 그 작은 것들이 하나같이 무자비한 자연에 맞서 바위처림 묵묵히 때를 기다리고 있는 걸 생각하면, 우리는 얼마나 노심초사하고 안달복달하는가. 매 순간의 공허를 뭔가로 채워 넣기 위해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우리의 조바심이 저들에게는 얼마나 가소롭게 비칠까. 혼자 있어서 외롭다느니 우울하다느니 삶이 의미가 있느니 없느니 하는 푸념조차 부끄러워하는 법을 배우는 한 해가 되기를. 그렇게 내 속에 숨어 있는 식물의 시간을 깨우는 새해가 되기를 겨울나무들 앞에서 소망해본다.
-‘식물의 시간’ 증
그 옛날 선현들처럼, 자연에서 세상의 진리를 배우고 삶과 연결한다. 시인이란 존재의 시원을 읽는 자로 이해한다면, 안규철은 진정한 시인이다.
예술은 오히려 말을 아끼는 법을, 차라리 침묵하는 법을 배워야 할지 모른다. 말과 말 사이의 여백, 침묵은 아직 훼손되지 않은 유일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소음에 대하여’ 중
작가의 사유 기본은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살기라 하고 싶다. 사물화가 사물에 영향을 미칠 때, 천사의 마력을 지닌 작가는 사물화되지 않은 사물의 뒤편을 바라보고, 거기서 교훈을 얻는다. 그렇게 길지도 않고, 글의 밀도가 높지도 않지만 차분하게 매일 한두 편씩 읽기 좋은 책이다. 그렇다보면 작가의 세례를 받아 자연스럽게 시적 세계로 스며들지 않을까. 사유를 깊게 하고 싶은 사람들, 문장력을 늘리고 싶은 사람들, 그리고 시를 쓰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출처
https://brunch.co.kr/@minq17/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