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국의 산장 , 그리고 산장지기
한국에서 산장의 의미는 1970년대 산업화와 도시 확장 속에서 더욱 두드러졌습니다.
도시민의 여가, 공동체, 문화적 장으로서 산악 환경이 재해석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탄생한 국내 유명 산장은 대표적인 근현대 산악 문화유산입니다.
1970년 정부의 산장 건립 정책으로 전국 35개소에 조성된 이 공간은 단순한 숙박·
대피 시설을 넘어 한국 등산문화의 형성과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산장은 단순한 피난처에서 벗어나 휴식과 교육, 교류가 이루어지는
산악문화의 중심 공간으로 발전했습니다.
현재는 옛날 초창기 지어진 산장들은 노후화로 폐쇄 조치및 거의 철거된 상태며
그 자리에 새로이 신축, 개축을 하여 국립공원공단에서 직영 관리 하고 있습니다.
아직 소수의 몇몇 산장만이 기존 건물과 개인 운영으로 명맥을 유지 하고 있습니다.
( 아래 자료는 인터넷에 올려진 자료들을 편집 간추린 자료 입니다 )
국내 대표적인 유명 산장지기
이제는 다 돌아 가셨지요......

뒷줄 오른쪽 유용서.(도보산 도봉산장지기)
왼쪽이 유용서 동생 유창서 (설악산 권금성산장지기)
아랫줄 오른쪽 윤두선 (설악산 백담산장지기)
아랫줄 중간 함태식 (지리산 노고단산장지기. 피아골산장지기)
아랫줄 왼쪽 사진작가 김근원 ( 사진 작가 )
산장지기에게 '수염'이 필수조건은 아니지만 한국의 대표적인 산장지기들 중에는 털보가 많다.
내설악 백담산장 지기인 윤두선 씨가 그렇고, 외설악 권금성산장 지기인 유창서 씨, 도봉산장 유용서씨
그리고 지리산 노고단산장 지기인 함태식 씨가 산악인들 사이에 유명했다.
북한산 백운 산장 이명구 산장지기
백운산장은 우리나라 산장 제1호 임
백운대와 백운 산장

서울특별시와 고양시에 걸쳐 있는 백운대는 그 높이가 836m.이며 삼각산 세 봉우리 중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다. 큰 바위 하나로 이루어졌는데, 백운대 아래 기슭에 백운산장이 있다
1924년 이해문씨 1代. 1933년 이남수씨가 2代. 1992년 이영구씨가 3代 산장지기로
무려 백년동안을 유지 관리를 해 오시면서 100여명의 조난자를 구조 하셨다.
100년에 이르는 동안 많은 희비의 역사가 백운산장에서 수없이 일어났다.
백운대와 암벽등반의 요람인 인수봉, 리지등반의 명소인 만경대 사이의 팔부능선에 위치하고 있어
산악사고 발생시 1차적인 응급처치 장소이자 베이스캠프 역할을 했다. 지금껏 북한산에서 조난당한
100여 명의 목숨을 구조한 곳이 백운산장 이라 한다. 조난사고가 일어났을 때마다
이곳은 단순 숙박시설 이상의 역할을 해왔으며, 조난자 수습의 구호소나 지휘본부가 되었다.
백운산장 노후화로 철거에 따른 산악인들의 반대 캠페인
백운산장이 사라진다는 것은 건물만 사라지는 게 아니다.
우리의 산악문화와 추억들도 함께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산악인들은
" 백운산장은 산악인에게 이곳은 출발점이자 회귀점이며, 고향이자 노스탤지어가 깃든 공간”이며
“ 백운산장은 단순한 쉼터가 아니라 산악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이며 한국 조난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이런 " 역사적 가치를 지닌 백운산장을 산지정화라는 미명 아래
헐어버리는것은 귀중한 산악 문화유산을 없애버리는 불행 ” 이라고 강하게 반대 하였다.
이에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우리나라 최초의 산장으로서 갖는 역사적 가치 등의 이유로
존치를 요구하는 산악단체 의견을 적극 수용하여 1층은 전시관으로 2층은 특수산악구조대
공간으로 유지 존치 하기로 하였다

백 운 산 장
손기정 옹의 친필 백운산장 한자 현판
백운산장 출입문에는 ‘白雲山莊’이라고 쓰인 한자 현판이 있다. 이것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차지했던 마라톤 영웅 손기정 옹이 남긴 글씨다. 손기정 옹은 양정중학교 산악부원이기도 했다.

산장 앞에는 ‘백운의 혼’ 추모비가 있다. 6·25 전쟁 중 후퇴하는 국군장병이 이곳에 숨어들었는데,
국군의 열세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패전의 자책감으로 산장에서 권총으로 자결했다.
당시 이영구씨의 부친 이남수씨는 그의 시신을 수습했으며, 이후 추모하는 ‘백운의 혼’ 추모비가 세워졌다.
이제는 추억속으로 사라진 풍경들.....
1층 홀과 2층 침상

폐쇄 되기 전 .....
눈이 펄렁 날리고 푹푹 빠지는 산길을 오른 아우들같은 자식 같은
산행객들에게 뜨끈한 국수를 말아주신 그 살가운 풍경은 인제 기억속으로 사라집니다

백운산장 우물
금자 할머니 신혼 당시 우물이 없어 산장 아래 계곡물을 길러 생활해야 했다.
어느 날 꿈에 할아버지가 나타나 현 우물 자리를 파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꿈속에서 할머니는 "그 곳은 부엌이고, 이곳은 높은 바위산인데 어떻게 우물이 생긴단 말입니까?"라고
반문했더니 "네 평생 먹고도 남을 물이 나올 곳이다."라고 말한 뒤 사라졌다는 것이다.
꿈대로 그 자리에는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물이 나오는 우물이 만들어졌다.
2018년 1월 이영구 씨 & 강금자 씨 부부.
2018. 9. 3일 이영구 산장지기님 별세

도 봉 산 장 유용서 산장지기
도봉산장은 도시와 자연, 과거와 현재를 잇는 문화유산이다
한국 산악문화가 걸어온 궤적을 품고 있으며, 공동체적 가치의 실체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기록이다.
도 봉 산
도봉산장은 1970년에 태어났다.
초기엔 상주 관리인이 없어 부랑아들의 아지트처럼 쓰이곤 했다.
1972년 설악산 권금성 산장지기인 유창서씨가
도봉산장이 관리가 되지 않은 것을 알고 형님인 유용서씨에게 도봉산장 관리를 권유했고
고등학생 시절부터 동생과 함께 산을 좋아했던 유영서 씨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처음엔 유씨 혼자 살았지만 이듬해 조 할머니와 당시 어렸던 아들 유근호씨도
산장으로 올라와 산장지기 일가를 이뤘다
도봉산장

산장과 산장 내부 풍경

1974년 서울시산악연맹이 이곳에 한국등산학교를 설립한 이후, 도봉산장은
도시 근교 산악문화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으며, 반세기 넘게 가족 단위의 민간 운영을 통해
교류·추모·교육·모임이 이어지는 생활문화의 장으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조순옥 할머니는 수도여자대학교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병원에 근무하던 중에
한국석탄공사에 다니는 유용서 씨를 만나 1963년에 결혼을 하였다.
산장지기 유용서 씨는 1993년 간암으로 작고했다.
자신의 시신을 서울대 의대에 해부용으로 기증을 하고 가셨다.
이후 지금까지 부인되신 조순옥 여사사 산장을 관리하여 왔다.
산장지기 유용서님과 조순옥 여사 신혼때 사진

도봉산장은 현재 국립공원공단과 소송중이다
북한산국립공원 내 다른 산장은 이미 다 산장지기가 철수 하였지만
도봉산장지기인 조순옥 할머니와 아드님 유호근 씨가 강력하게 항의를 하여
현재까지 남아 있게 된 것이다.

< 드립커피 에피소드 >
원두커피는 도봉산 물과 잘 어울리는 로제 커피다.
원두를 가는 그라인더는 1985년에 구입한 독일제다.
무거운 손잡이가 있는 그라인더로 원두커피를 가는 동안 낡은 양은 주전자에서는
물이 끓고 있다 세 번의 드립 과정을 거쳐 커피를 내려 주신다.
우리나라에서 드립 커피가 알려진 것은 어쩌면
각 산의 산장에서 커피를 드립으로 내린 것이 한몫을 하였을것 같다.
도봉산장뿐 아니라 설악산, 지리산 등에서 산장지기를 하던 분들이 드립 커피를 즐겨마셨고
산장을 찾는 분들에게도 드립 커피를 대접했다는 그런 이야기다.
은발에 주름 가득한 할머니 바리스타,
수동으로 원두를 가는 그라인더와 낡은 양은주전자는 메트로 감성으로 젖어들게 한다.
지리산 노고단 산장지기. 피아골 산장지기 함태식
지리산 산지기 함태식선생
산중 반독재 사랑방 좌장, 지리산 호랑이 잠들다
2013. 4. 14
그가 지리산과 함께한 세월은 38년.....
노고단에서 16년을 보냈고 피아골에서 22년째 머물렀으니....
지리산 호랑이로 불리며
1971년부터 40년 간 지리산을 지켜왔던 원로 산악인 함태식 선생이 14일 새벽 별세했다.
향년 86세. 함태식 선생은 지난 2011년 지리산 피아골에서 내려온지 2년후 지병으로 돌아가셨다
1928년 전남 구례에서 태어난 함태식 선생은 한국 산악역사의 산 증인으로 꼽혀왔었다.
특히 지리산이 우리나라 1호 국립공원이 되는데 많은 기여를 했고, 1971년부터 산장지기를 자처해
지리산에 터를 잡고 산장을 관리하며 반평생을 살아와 지리산의 전설적인 역사로도 통한다.
등산 문화가 정착되지 않았던 시절, 지리산에 수많은 행락객들이 몰려들며 산림훼손과 무분별한
취사와 야영, 고성방가 등이 이어질 때 그는 산장지기로서 강하게 질서를 잡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국립공원 지리산의 초창기 등산 문화 정착에 노력을 기울였으며 산중에서 조난당한 등산객들의
구조 활동에도 애써 많은 사람들을 구해 내기도 했다.
그는 1989년까지 노고단 산장에 머물렀는데, 그가 산장지기로 있던 시절 지리산은
옛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힘들때면 찾아와 기운을 회복해 가던 안식처이자 사랑방 역할을 했다.
인권변호사 이돈명, 백낙청 교수, 김정남 전 청와대교육문화수석, 통일운동가 안재구 교수,
소설가 이호철, 송건호 전 한겨레 사장, 민족경제학자 박현채 교수 등 1970~80년대 쟁쟁한
반체제 인사들이 함태식 선생과 깊은 교분을 나누던 사람들이었다.
그는 "일제 시대였던 중학교 4학년 때 칠판에 애국가를 적어놓고 후배들에게 가르칠 만큼 강단 있게
살아왔던 것이, 반독재 투쟁을 하는 이들과 친해지게 된 바탕이 됐던 것 같다"고 말했다.
노고단 산장 옛모습과 현재 신축된 노고단산장

노고단산장의 겨울 풍경과 함태식 산장지기
함태식 선생은 1987년 신축된 지리산노고단 산장 관리를 국립공원관리공단이
맡기로 하면서 16년을 지켜온 노고단에서 밀려나 피아골산장으로 쫓기듯 내려왔다.
이후 20년 넘게 피아골을 지켜왔으나 2009년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함태식 선생에게 산장에서의 퇴거를 요청한 것이다.
피아골 산장 옛모습
선생의 1녀2남의 맏따님 함애리 수녀가 2008년,
피아골산장으로 팔순의 생신을 맞은 아버지를 찾아왔다
국립공원 1호 산장지기, ‘노고단 호랑이’로 불리는 함태식(85)씨가
2009년 지리산 천왕봉 정상에서 케이블카 설치에 반대하는 1인 시위를 벌였다.

2009년 피아골 산장을 떠나시는 모습
지리산 '원조 산장지기' 함태식씨(현재 85세)는 38년간의 산장생활을 마감하고 하산하게 된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연로한 함씨의 건강이 염려되고, 조난 등의 긴급상황에 대처하는 산장지기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근무처를 피아골산장에서 산아래 피아골탐방지원센타로 조정하게 된다.
공단은 함씨의 상징성과 산악인들의 의견을 존중해 원조 산장지기가 계속해서 지리산 언저리에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그에게는 살아 생전에 언제나 변함이 없는 두 가지 소망.
여생을 지리산에서 살고, 죽으면 지리산에 묻히는 것이다.
그곳에서 살다가 쓰러진 장소가 무덤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곳에 가면 / 함태식 저
그는 그 책에서 지리산과의 만남이 운명적이었음을 강조하는 한편으로
지리산에서 겪은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지리산의 산장. 대피소
세석산장. 장터목산장
연하천대피소. 벽소령대피소
지리산 치밭목의 전설이던 민병태님
불일평전의 변규화님 (2009년 사망)
노고단과 피아골의 함태식님 (2012년 사망)
뱀사골의 조영호님
연하천의 노시철님등 지리산의 전설들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치 밭 목 산 장 민병태 대장
'그리운 치밭목' 산장지기 민병태 대장
지리산 천왕봉(해발 1915m)에서 4㎞쯤 떨어진 치밭목 산장(해발 1425m).
전기가 들어오지 않고 전화도 없다. 휴대전화도 터지지 않는다.
1985년 입산하여 31년간 이곳을 지켜왔다.
2024년 6월 1일로 국립공원관리공단과의 산장 임대계약이 만료돼 산장지기를 그만둔
민병태(60·사진) 대장 얘기다.
치밭목대피소 옛모습과 현재 신축된 치밭목대피소

'그리운 치밭목' 산장지기 민병태 대장
지리산에서 가장 오랜 기간 산장지기를 한 그는 ‘지리산 터줏대감’이다.
지금의 치밭목 산장을 일으켜 세운 장본인이기도 하다.
“넉넉하고 평온한 어머니 품 같아서”
지리산을 좋아한 그는 1985년 4월 산에 올랐다.
당시 치밭목 대피소는 철근콘크리트 뼈대만 남았을 뿐 폐허나 다름없었다.
71년 건립됐으나 72년부터 산장지기를 두지 않아 나무침상과 출입문, 창문틀 등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추위를 피하려던 등산객들이 목재를 하나 둘 빼내 불을 피운 때문이다.
그는 산악회 회원들과 청소하고, 페인트 칠을 하고 목재를 사들여 창문· 출입문 등을 달았다.
목재 등은 동료 회원들이 일일이 힘든 등산로로 져다 날랐다.
비용은 회원 호주머니를 털어 마련했다.
제법 그럴듯한 모습을 되찾은 85년 11월 산장 개장식을 했다.
그 길로 산을 좋아하던 아내와 함께 그는 산장에 눌러앉았다.
산에 오르기 전 회사원·교사·직업군인 등을 한 그였다.
치밭목 산장과 내부 침상

조난객을 구조하고 등산객에게 음식을 팔거나 숙소를 제공하는 게 그의 일이었다.
지금까지 구조한 조난객만 100명은 된다.
구조된 등산객이 다시 찾아와 고맙다고 인사할 때는 뿌듯했다.
주변 나무 등을 해치는 등산객은 가차없이 꾸짖어 ‘성질 더러운’ 산장지기로 소문났다.
“남들은 신선 같은 생활을 한다고 했지만 고된 산 생활이었다”며 그는 웃었다.
라면 등을 팔아서는 생계가 막막해 아내는 결국 2년 만에 하산했다.
아내는 진주에서 직장 일과 장사 등을 하며 아이들을 돌봤다.
1년에 서너 번 하산해 가족을 만났을 뿐 그는 가족의 생계를 내팽개쳤다.
“산장이 평생 터전이 될 줄 몰랐다”는 그는 “나 혼자는 재미있게 살았을지 모르지만
아내와 두 딸은 나 때문에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었다. 미안한 마음 그지없다”고 털어놓았다.
이 산장이 특히 인기 있는 것은 저 멀리 웅석봉과 달뜨기 능선이 보일 정도로
호젓하고 운치가 있기 때문이다.
작은 산장인 만큼 밤이면 차 한 잔 주고받는 사이 대화와 정이 이어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치밭목산장 민병태 대장

아래 스케치는 1984년 지리산 종주시 스케치 한것임
위 내용은 근대사에 있어서 한국의 산장 유래와 변천을 살펴보면서
더불어 한 궤적을 남기신 당시의 산장지기님들의 애쓰신 모습과 행적을
인터넷 상에서 자료를 모아 간추려 보았습니다.
그분들의 행적에 겹쳐지는 시절과 흔적이 이제는 그리움입니다.
추억속으로 사라진 한국의 산장지기 ( 1 )
( 백운.도봉.노고단.피아골.치밭목 산장 ) 에 이어서
추억속으로 사라진 한국의 산장지기 ( 2 )
( 권금성.희운각.백담.살둔.노인봉.비로산장 )
는 추후 포스팅 예정 입니다.
70, 80 년대의 열악했던 산악 풍토였지만
이제는 추억속에 그리움과 향수가 묻어납니다.
2026. 7. 8 까망가방하양필통입니다
( 본문과 관련없는 댓글은 별도로 보관하며 답방은 가지 않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