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정어 (正語)
말한다고 하는 것은,
언혼(言魂)으로 되어, 상대에게 전하는 것이다.
표현된 우리의 말은,
상대의 귀를 통해서 부조화든가, 조화든가,
어느 쪽인가의 현상을 생기게 하는 것이다.
지나친 아첨이나, 난폭한 언동은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준다.
그 원인은, 결과로 되어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말은, 너무 적어도, 너무 많아도,
자신의 의지를 바르게 남에게 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자신의 마음에 충분히 물어서,
자기 자신이 상대방의 마음이 되어,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강한 말은,
상대방의 마음에 부조화를 부르는 것이다.
종종 운전수 등이 서로 거세게 비난하고 있을 때가 있다.
가령 상대가 거세게 비난하여도,
내가 올바르다고 제삼자의 입장에서 생각하여 결론이 나와도,
반발을 해서는 안 된다.
반발의 마음은 자기 보존이며, 자기중심의 사고방식이다.
이럴 때야 말로, 올바르게 서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싸우는 것은, 부조화한 원인을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가 노하여도, 선악을 잘 판단하고, 마음을 동요시켜서는 안 된다.
올바르게 납득하여 마음을 조화하는 것이다.
성난 마음은 성난 사람의 마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 말한다 >고 하는 것은,
자신과 상대의 의지가 교류하는 것이다.
상냥한 말로부터 받는 감정과,
심한 어조로 들었을 때의 감정은 아주 다른 것이다.
결국 주고받는 느낌이 좋은 방법 속에 조화는 생겨나는 것이다.
어떠한 비방도, 비난도, 노여움도, 마음을 움직이게 하지 말고,
듣고 흘려버리면,
그 언혼(言魂)은, 부조화한 언동자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왜 그렇게 듣게 되었는가 하는 것도,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들을 원인이 없을 때는
< 가련한 사람이다. >
하고 상대를 배려하면 좋다.
그리고
< 어떻게든 신이여, 저 사람의 마음에 평안을 내려 주세요.>
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 마음은 바로 보살심의 표현인 것이다.
(추가 설명 ;
잘못 말하여 생기는 괴로움은
올바르게 말하면 생기지 않는다.
바로 고집멸도라는 가르침의 이유이다.
고집멸도...괴로움을 없애는 길은 팔정도이다라는 가르침..
부처님깨서 평생을 가르치신 팔정도의 이유...
45년간의 가르침은
팔정도 생활을 해야하는 이유,,
팔정도 생활을 할 때의 기준..
팔정도 생활을 하는 목표,,,등등이다.
이유와 기준과 목표의 종점은 마음의 평안이다.
마음의 평안은 바로 행복이다.
가령,
돈이 아무리 많아도 마음이 평안하지 않으면 불행하다.
돈이 없어도 마음이 평안하지 않으면 불행하다.
부처님은 중생의 행복을 위하여 설법하신 것이다.)
(3) 정사 ( 正思)
생각한다는 것은, 사고하는 것이다.
보다, 듣다, 말하다 라고 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우선 올바른 중도의 신리를 기본으로 해서,
사고해야 한다.
자기본위의 사고방식은,
몸을 망치는 결과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신리(神理)인 대조화의 법칙에 반(反) 하기 때문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행위로 연결된다. 마음의 동작이다.
그러므로 부조화한 사고(思考)는,
상념의 필름에 저항을 만들고 만다.
그 저항은, 자신의 의식이랑, 뇌세포까지도 미치게 하고 마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매일의 생활 속에서,
자신만 좋게 하려는 마음을 작동시키거나,
안락하고자 생각하여 남의 일은 고려하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진실이 없는 사고방식은
모두 자기 보존의 아욕으로 연결되어 가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기주장은, 자기에게 돌아간다.
경쟁상대를 떨어뜨리려고 하는 생각은,
저 산의 메아리를 닮아서,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바보>라고 말하면,
메아리도 또한 <바보>라고 자신의 목소리가 돌아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처럼 부조화한 마음을 가지면,
검은 상념의 저항을 스스로 강하게 해서,
자기 자신의 괴로움을 많게 하여가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상대방을 불행으로 밀어 넣으려고 생각하는 마음은,
자신이 들어갈 구덩이를 파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 책사, 제 꾀에 넘어간다.>
의 류(類)이며,
' 남을 저주하면 무덤이 둘 '
이다.
또 무분별하게 정욕에 대해서 연상하는 것은,
마음속에서는 행위로 연결되는 것이다.
바르게 자신의 마음에 충실한 생각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항상 타인의 행복을 생각하는 마음은,
행위로 연결되어 가면, 자기 자신에게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나쁜 생각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처럼,
좋은 원인도 순환하여 온다.
많은 사람들에 대한 구원의 마음이
이윽고 행위로 연결되어 가면,
항상 선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생활은,
자기 자신을 보다 차원 높은 모습으로 닦아 간다.
올바른 신리에 맞는 생각이,
행위로 연결되어 가는 생활,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가정 내에서도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다툼을 자주 듣는데,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심한 것을 말하면,
며느리는 거듭되는 질책에,
마음으로부터 보기 싫은 시어머니다. 빨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도록 되어 간다.
그렇게 되면 마음의 검은 상념은 현상화되어,
가령 입으로는 좋게 말하여도 시어머니 마음에 와 닿지는 않는다.
그것은 마음으로부터 생각한 행위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 원인은 서로에게 자기의 자식이 아니다.
자신의 부모가 아니다.
라고 하는 자기 보존의 생각이 그러한 결과를 야기하는 것이다.
서로에게 신리에 맞는 바른 생각을
바르게 서로 이야기하는 것에 의해,
성의를 다하는 것이다. 해결은 거기에 있다.
결코 남에게 대해서 원망을 하거나, 질투하거나,
시샘하거나 하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 가련한 사람이다,
아무쪼록 신이여, 구원해 주세요.
저 사람에게 평안을 내려 주세요.>
하고 기도해주는 마음이 필요하다.
마음에서 나오는 올바르게 생각하는 것은,
더욱 자신에게 평안을 낳고,
신불의 사랑으로 충만한 빛을 받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
이것이 신리이다.
(4) 정 업 ( 正 業 )
이 현상계에 었어서의 수행은,
물질(物質), 경제(經濟)의 장(場)이다.
과거의 수행자들은,
현대처럼 물질 경제 문명의 진보가 빠른 환경이 아니었으니까
생활 조건도 느긋하였다.
그러나 권력자에게 보다 많은 희생을 지불하거나,
전쟁과 같은 부조화에, 마음의 평안은 항상 얻을 수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평안을 구하려는 사람들도 많았던 것이다.
상황은 다르지만, 현대에도 자기의 마음을 잃고 있는 사람들은 많다.
생활의 지혜로서 만들어 낸 물질문명에 떠밀려 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생활의 기반을 포기할 수 없다.
물질 경제의 기반을 잃는 것은 안 된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