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가로 쫓겨난 젖도둑---박진여
어머니는 저를 임신하고 나서 열 달 내내
토마토를 손에서 떼지 않고 드셨다고 했습니다.
토마토가 아직 익지 않은 계절에는
익지 않은 푸른 토마토를
광주리째 안고 종일 드셨다고 했 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저는 엄마 배 속에서부터
채소에 들어 있는
좋은 에너지를 많이 받은 듯합니다.
그 토마토가 가진
의미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태아의 욕구가
임신 중에 산모의 특정한 입맛으로
발현된다는 학설이 있기도 합니다만,
저는 어쩌면 과학적으로는 밝힐 수 없는
토마토의 미세 영양분이나 특별한 에너지에
영향을 많이 받고
태어났을지도 모른다 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부산에서 태어난
저는 어린 시절 지독한 울보였습니다.
자영업을 하셨던
부모님은 대부분의 시간을 밖에서 보냈습니다.
방에 홀로 남겨져 있던 제게
아직도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천장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무서운 눈을 가진 존재들이었습니다.
두려움에 떨면서 누군가가
저를 보호해주고 지켜주기를 바랐지만
저는 혼자였습니다.
한참이 지나
리딩 능력이 생기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때 본 무서운 눈들의 정체는,
제 큰아버지로 인해
죽임을 당했던 사람들의 영혼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는 형님이 한 분 계셨는데,
그분은 제가 태어나기 전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하셨습니다.
베트남에서 큰아버지는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
민가에 은신해 있던 적군에게 수류탄을 던졌고,
그 바람에 집 안에 있던
부녀자를 포함해 민간인들도 함께 죽었습니다
그때 억울하게 죽은
원령들이 어린 저에게 보였던 것입니다.
당시에 어린 저는 온몸을 비틀어대는 듯한
울음소리로 그 두려움과 공포를 표현했습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린아이가 이유도 없이 자지러지게 울어댈 때는
어른들이 느끼거나 보지 못하는
다른 차원의 존재들이 보여주는 무서운 모습이나
그들이 내뱉는 귀기에 반응하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부모님은 저를 예민하고
까다롭고 귀찮은 아이라고만 여길 뿐이었습니다.
저는 병치례도 잦아
항상 걱정하고 염려해야 하는 아이였습니다
돌잔치를 막 끝냈을 즈음
원인 모를 병으로
갑자기 피를 많이 쏟았습니다.
병원에서는 장에 복합적인 병이 생겨
내장 깊은 곳에서부터
출혈이 계속되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더 이상 치료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집에 돌아와 서서히 죽어가는
저를 보며 부모님의 가슴은 타 들어 갔습니다.
그러자 원인 모를 병으로 생사를 헤매는
증손녀를
측은하게 생각하신 증조할머니가
용하다는 무당에게 가서 점을 봤습니다.
무당은 제가 단명할 팔자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점괘를 내놓있습니다.
그래도
증조할머니는 살릴 방법이 없는지 물었고,
무당은 절에 쌀 한 가마니를
바치고 치성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정성이 지극하면 보름이 지날 즈음
제가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덧붙이면서요.
신기하게도 그렇게 치성을 드린지 보름째 되는 날,
물 한 모금도 넘기지
못하던 제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어머니는 딸 다섯 중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딸만 다섯을 낳은
외할머니는 마음에 상처를 많이 받으며 살았습니다.
친정어머니의 상처를 오랫동안 지켜보고 자란
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집착이 남달랐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결혼해서 첫 자식으로
아들을 얻자
어쩔 줄 모를 정도로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첫아들인 오빠를 낳았을 즈음에
할아버지가 암으로 많이 편찮았습니다.
어머니는
시부모를 모시고 병수발까지 하면서
오빠와 연년 생으로 저를 낳았고,
오래지 않아 다시 동생까지
임신하게 되어 난감한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연스럽게
부모님의 관심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연년생을 키우기에는 젖이 부족해서
오빠를 극진히 아꼈던 할머니는
저를 '젖도둑'이라고부르기까지 했습니다.
임신한 상태에서 시아버지 병수발을 하고
두 젖먹이까지 키우기가 힘에 벅찼던
어머니는 결국
저를 밀양에 있는 외가로 보냈습니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