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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형은 커브를 공격적으로 활용한 1990년대의 대표적인 커브볼러다. 그는 일반적인 커브 그립(오른쪽 아래)과 달리 2줄 그립(오른쪽 위)을 사용한다.
공이 뚝 떨어질 때 타자의 심장도 철렁 내려앉는다. 커브다. 커브의 달인들은 타자 머릿속을 흐르는 혈관도 동시에 구부러뜨린다. 그러나 어떤 분야에서건 달인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야구에서 변화구가 그렇다. 커브의 달인들은 한결같이 커브를 자신의 무기로 만들기 위해 남모를 노력을 했다.
올해로 프로 17년째를 맞는 김원형(35,SK)이 대표적이다. ‘어린왕자’ 김원형도 이제 30대 중반이 됐다. 그러나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커브는 잘 숙성된 17년산 포도주처럼 맛을 잃지 않았다.
꺾여야 커브다
커브의 기본적인 움직임은 수직 변화다. 현역 시절 커브를 잘 던졌던 SK 김상진 투수코치는 커브를 12시에서 6시로 시침이 떨어진다고 표현했다. 김원형은 어렸을 때부터 이 같은 ‘커브 시계’가 친근하게 다가왔다. 김원형은 “물론 그때는 힘과 회전이 안 걸린 ‘뽕커브’였다. 특별히 지도를 받지는 않았지만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팔 스윙이 남달랐다”고 기억했다.
김원형이 본격적으로 커브에 눈을 뜬 시기는 쌍방울 레이더스에 입단한 1991년. 이때 1990년 미국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한국에 온 마티 드메리트 코치(전 삼성)에게서 커브를 전수받았다. 김원형은 아마추어 시절 커브를 던질 때 손가락을 실밥 한쪽에만 걸쳤는데 프로에 와서는 실밥 두 줄을 모두 잡고 투구할 때 공이 타자 앞에서 빨리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실제로 김원형이 보여준 커브의 그립은 일반적인 직구와 비슷했다.
그 뒤 김원형은 ‘2줄 커브’를 자유자재로 활용해 역시 마티 코치에게 커브를 배운 김상엽(전 삼성)과 더불어 1990년대 최고의 커브볼 투수가 됐다. 김원형이 16년 동안 거둔 통산 117승도 커브의 힘이었다. SK 박철영 코치는 “(김)원형이는 커브를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원형이처럼 커브로 유리하게 볼카운트를 이끄는 투수는 많지 않다. 아마 투구수도 비교적 적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김원형은 이닝당 평균 15.36개를 던져 올시즌 이닝당 평균투구수 16.24개 보다 1개 정도가 적었다. 1998년에는 14.30개로 평균(16.20개)보다 2개 가까이 차이가 났다. 롯데 성준 코치가 김원형에게 “너는 커브 하나로 밥값을 벌었다”고 농담을 걸 만하다.
낙폭을 크게 하기 위해 김원형이 강조하는 것은 유연성과 손목 스냅이다. 김원형은 “가운데 손가락에 힘을 주고 실밥에 더 물린다는 기분으로 스냅을 걸어야 커브각이 생긴다”고 설명했다. 나이가 들면서 김원형의 커브는 예전과 약간 달라졌다. 김상진 투수코치는 “과거에 비해 팔이 내려오면서 종으로 떨어지는 각도가 옆으로 틀어졌다”고 이유를 말했다.
힘 있어야 커브다
커브는 직구와는 달리 약하게 던져야 하지 않을까라는 선입견이 있다. 그러나 직선운동이나 곡선운동이나 일정량의 힘은 필수적이다. 커브도 직구와 마찬가지로 종속이 중요하다.
보통 이상의 강한 회전과 스피드가 실리면 그때부터 커브는 파워라는 옷을 입는다. 커브의 하이라이트인 ‘파워 커브’다. 영남대 투수코치로 활동하고 있는 김상엽이 대표적인 파워 커브 투수였다. 1990년대 김상엽의 파워 커브는 커브가 얼마나 무서운 변화구인지를 보여줬다.
그를 지켜봤던 삼성의 양일환 코치는 김상엽의 커브에 대해 “상하가 완벽하게 맞아 떨어졌다”는 표현을 썼다. 양코치는 “종으로 떨어지는 커브는 (김)상엽이가 최고였다. 힘으로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었는데 악력이 매우 좋았다”고 떠올렸다.
영남대 권영호 감독은 “당시 마티 코치는 국내에 커브를 제대로 던질 선수가 없어 체인지업 교육에 치중했다. 그러나 (김)상엽이는 통뼈에다 손목힘이 뛰어나 커브각이 빠르게 형성됐다”고 설명했다.
일반적으로 커브의 구속은 시속 105~120km. 그러나 김상엽의 파워 커브는 시속 130km를 넘었다. 타자들에게는 악몽이었다. 김상엽은 “1989년 삼성에 입단했는데 그해 플레이오프 엔트리에서 제외돼 아쉬웠다. 그때부터 이를 악물고 집중적으로 커브를 연마했다. 겨울부터 봄까지 열심히 했더니 자신감이 생겼다”고 밝혔다.
마티 코치의 조언도 큰 힘이 됐다. “마티는 커브를 살살 던져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을 떨어뜨리는 데에 신경을 쓴 나머지 약하게 투구하면 안 되고 강하게 스냅을 걸어 직구를 던지는 폼과 같이 던져야 커브가 힘을 얻는다는 점을 알게 됐다. 커브는 손을 빨리 몸쪽으로 끌어오는 것이 관건이다.” 김상엽의 말은 김원형도 똑같이 이야기한 파워 커브의 공통분모다.
잘 써야 커브다
커브는 만만한 공이 아니다. 연습 때 한두 번 커브가 들어간 것과 실전용은 차이가 크다. 김상엽은 파워 커브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투수와 포수 중간에 망을 올려놓고 이를 넘기는 훈련을 8개월간 집중적으로 했다. 낙폭을 위해서였다.
1970,80년대 최고의 커브볼 투수인 한화 최동원 코치는 공기의 저항, 공을 놓는 포인트, 힘의 조절을 커브의 3박자로 들었다. 이채로운 것은 공기의 저항을 언급한 부분이다. 최코치는 “투수들은 날씨도 고려해야 한다. 맞바람이냐 뒷바람이냐에 따라 커브의 위력이 달라진다”고 설명했다.
포수 출신 박철영 코치도 같은 생각이다. 박코치는 “커브는 직구와는 반대로 바람이 투수 쪽으로 불때 공이 강한 저항을 받아 더 위력적으로 변한다”고 말했다.
볼카운트에 따른 커브의 활용도도 다르다. 일반적으로 스트라이크를 잡기 위해 던지는 커브는 구속이 느리지만 ‘승부구 커브’는 의도적으로 스피드를 높인다. 김상진 코치는 승부구를 뿌릴 때 속도를 내기 위해 손등을 투수 얼굴 쪽으로 살짝 보이게 뒤집어서 던졌다.
김원형은 “커브로 볼카운트를 조절할 때는 힘을 빼고 타자가 안 칠 거라는 확신을 갖고 던지지만 결정구일 때는 의식적으로 힘을 더해야 한다”고 차이를 두었다. 김상엽 코치는 주로 2-1이나 2-0 등 유리한 볼카운트에서 파워 커브를 던졌다. 0-2나 1-2같은 불리한 볼카운트에서는 커브를 자제했다. 쉽지 않은 제구력 때문이었다.
김코치는 “파워 커브에 자신 있는 나조차도 커브 제구가 70%선이었다. 불리한 볼카운트에서 커브를 섣불리 던지면 마운드 운용이 어려워 질 수 있다”고 조언했다.
커브에는 시선도 영향을 미친다. 김원형은 한창 힘이 좋을 때는 오른손 타자를 기준으로 왼쪽어깨 상단을 보고 공을 던졌다. 김코치는 오른손 타자가 배트를 잡은 왼쪽 팔꿈치 쪽이나 포수 마스크 상단을 겨냥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끊임없는 반복훈련이다. 커브는 팔 스윙이나 회전이 약하면 타자는 하나 둘 셋 박자를 맞춰 장타를 날린다.
최동원 코치는 “커브는 다양하게 던질 수는 있지만 매우 예민한 구종이다. 투구방법은 팔 각도에 따라 여러 가지이지만 그때마다 고정된 자기만의 릴리스 포인트를 유지해야 실투를 피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커브는 잘 쓰면 ‘마구’가 되지만 ‘마구’는 아무 때나 나오는 것이 아니다.
커브 어떻게 공략할 것인가
커브는 던지기도 어렵지만 치기도 어렵다. 삼성 양일환 코치는 “제대로 뿌린 커브는 타자 앞에서 ‘휙’하는 매서운 소리를 내며 떨어져 공포감을 주기도 한다”고 했다. 문제는 그때마다 타자들의 입에서 ‘헉’ 소리가 나온다는 점.
심판에게 눈도장만 받고 더그아웃으로 그냥 돌아서려고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는 것은 아니다. 커브 달인들의 말을 뒤집어 공략한다면 커브 곡선을 홈런 포물선으로 바꿀 수 있다.
말려들지 말고 노려라
김상엽 코치는 “파워 커브를 볼카운트 2-0이나 2-1에서 던지면 타자들의 방망이가 따라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특히 김 코치의 파워 커브는 전성기에 시속 140km대의 직구와 10km밖에 차이가 없어 투스트라이크에 몰린 타자가 삼진을 의식해 스트라이크 비슷하면 배트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기다리면 볼인 공에 타자들은 속절없이 속았다.
커브는 유인구로 쓰임새가 많다. 따라서 완벽한 커브 제구가 어렵다는 점을 타자가 알면 볼카운트에 따른 수읽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현역시절 김코치의 파워 커브를 가장 잘 공략한 선수도 노림수가 뛰어난 타자들이었다.
김코치는 “강정길(전 빙그레)이나 김인호(현대 코치)가 유달리 내 파워 커브를 잘 쳤다. 장거리 타자들보다는 짧게 끊어치는 타자들이 커브 공략에 유리하다”고 말했다.
점배팅에 베팅하라
일반적으로 투수들은 슬라이더와 커브를 모두 잘 던지지는 못한다. 투수코치들은 “한 개의 변화구를 제대로 익히는 것이 이것저것 어설프게 섞어 던지는 것보다 낫다”고 말한다. 공격도 마찬가지다. 커브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하나의 점을 놓고 타격하는 점배팅이 요구된다. 완성된 커브의 낙하 유형은 투수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슬라이더로 유명했던 김시진 현대 감독은 현역 때 옆으로 휘어 들어가는 커브를 던졌는데 보통의 커브 낙하지점과는 달랐다. 그러나 변형된 커브의 궤적도 결국 한 점의 타격 포인트에 대응된다.
박철영 SK 코치는 “슬라이더는 선(line)배팅이지만 커브는 점(point) 배팅이다. 커브를 치려면 배트가 밑에서 위로 약간 올라가면서 부채꼴 모양으로 돌아가다 공이 떨어지는 지점 딱 한 곳에서 타격 힘을 집중해야 한다”고 공략법을 설명했다.
하체 약하면 당한다
타자들에게 커브가 어려운 이유는 노려쳐야 하고 배팅 포인트가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김상진 코치가 타자들이 커브가 온다고 알고 있어도 치기 쉽지 않다고 말하는 이유다. 동네 피칭 머신에서 나오는 공을 아마추어들이 매번 중심에 맞추지 못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프로 타자들이 커브와 자주 맞서는 것도 아니다. 김상엽 코치는 “선발투수가 9회까지 완투할 때 130여 개의 공 가운데 커브와 슬라이더는 많아야 30~40개다”라고 했다. 확률적으로 변화구보다는 직구가 더 많다.
그래서 타자들은 보통 직구에 타이밍을 잡는다. 삼성 류중일 코치는 “타이밍을 일단 직구로 잡고 있다가 커브가 올 때를 대비해야지 그 반대는 힘들다”고 했다.
한대화 삼성 코치는 “커브가 떨어진다고 하체 중심이 앞으로 가선 안 된다. 그러나 뒤에 놓고 쳐도 그 자세가 커브를 받아칠 만큼 오래 유지되기 쉽지 않기 때문에 커브가 어려운 것”이라 설명했다. 하체가 강해야 그만큼 더 오래 버틸 수 있다. |